A musical genius who hates music RAW novel - Chapter 40
039화
필립이 아침에 가지고 온 옷은 말 그대로 딱 맞았다. 기성복을 입을 때와는 다르게 너무나도 편한 느낌이었다.
이런 정장을 입었던 것이 언제였던가. 정현은 마지막으로 정장을 입었던 고등학교 1학년 때의 콩쿠르를 떠올렸다.
그 당시에 정장을 입는 것은 씁쓸한 느낌, 입안에 모래가 들어온 것처럼 불편한 느낌이었는데 이 옷은 너무나도 편안했다.
고전적인 3피스 정장과 어두운 갈색의 구두까지 모두 신고 나서야, 케이스에 한 벌의 옷이 더 있는 것을 알았다.
“뭐야, 이건.”
짙은 푸른 빛의 군복같이 생긴 옷이 그 안에 있었다.
정현은 다른 사람의 옷을 잘 못 가져다 놓았다고 생각하고, 거실에서 기다리고 있는 필립에게 가져다주었다.
“이 옷은 제 것이 아닌 것 같은데요.”
“제복을 처음 보시나 보군요. 왕실 행사에 참석하는 분들이 입는 옷입니다. 조만간 입으실 일이 있을 거로 생각하여 미리 만들어 두었습니다.”
그는 메이드를 불러 옷 케이스를 건네주며 방에 가져다 두라 말했다.
“알버트 경이 성에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이제 그쪽으로 가시지요.”
누군가가 열어 준 저택의 문밖으로 나오자, 수많은 사람이 앞에 서 있었다.
필립이 차에 다가가 문을 열어 주어 올라타자, 저택의 현관 앞에 서 있던 사람들이 모두 허리를 숙인다.
18세기도 아니고 21세기에 맞이하는 거지 같은 광경이었다.
“이런 데에서는 못살 것 같네요. 저는.”
정현이 고개를 숙인 사람들을 향해 진저리치며 말하자, 필립은 처음으로 소리를 내 웃었다.
“그러면 곤란한데 말이죠.”
살짝 의문이 담긴 눈초리로 쳐다보자 필립은 말을 이었다.
“저 저택은 이미 이정현 님의 것이거든요.”
런던은 집값이 살인적인 곳 중에 하나다. 시내의 20평 아파트 한 채의 가격이 40억이 넘어가는 미친 물가의 도시. 방 하나를 빌려 쓰는 셰어하우스의 한 달 월세가 200만 원이 넘어가는 곳.
그런데 런던에 있는 저택을, 그것도 그냥 봐서는 그 크기도 알 수 없는 저택을 주었다는 것이다.
이곳이 한국과 다르게 아파트의 가격이 주택보다 훨씬 싸다는 걸 생각해 보면, 저택은 얼마나 비쌀지 상상도 할 수 없었다.
“나는 받겠다고 한 적 없습니다.”
“그냥 가끔 오셔서 머무르셔도 됩니다. 부담가질 필요가 없어요.”
필립은 부담가질 필요가 없다고 말했지만, 당연히 부담되었다.
시내에 있는 주택의 가격이 1천억에 가깝다는 이야기를 들었던 적이 있었다. 누가 천억짜리 집에서 편하게 살 수 있겠느냐며 웃었던 기억도 났다.
물론 이 저택의 경우에는 시내 중심가에서 상당히 떨어져 있긴 했지만, 그 가격이 결코 쌀 거라는 생각은 전혀 들지 않았다.
정신을 차리지 못했지만 차는 정현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움직였고, 다음 행선지였던 버킹엄궁으로 향했다.
더는 깊은 생각을 하고 싶지가 않았다. 그런 곳에서 살 수 있는 사람들은 대체 어떤 삶을 살아가는지 궁금했었지만, 그 사람들이 되고 싶다는 마음은 아니었다. 그냥 자신과는 다른 삶을 살아가는 사람을 향한 궁금증 정도였을 뿐.
런던의 한가운데 위치한 국회 의사당 웨스트민스터와 시계탑 빅벤을 지난 다음, 기나긴 정원을 뒤에 두고 다다른 곳은 여왕이 머무는 건물.
바로 버킹엄 궁전이었다.
“관광객이 TV에서 보던 것보다 많네요.”
“아마 뉴스에서 선위 소식을 알렸기 때문일 겁니다. 많은 국민 여러분들이 여왕 폐하의 건강을 염려하여 이곳까지 찾아 주시고 계십니다.”
주위를 둘러보니 수많은 사람이 담으로 만들어진 쇠창살의 바깥에서 눈을 감은 채 기도를 드리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정현은 ‘왕이라는 위치에 있는 사람이 이 정도의 인기를 가질 수 있는 걸까?’ 하는 생각을 해 보았지만, 한국의 사극에서 보이는 왕이라는 사람은 두 가지.
무력하거나 폭군이거나였기 때문에, 자신의 안에서는 이렇게 인기가 많은 왕은 어떤 사람일지 상상조차 하기 어려웠다.
“이쪽입니다.”
필립이 앞서 걸으며 정현을 안내했고 얼마 지나지 않아 알현하기 전에 머무르는 내실에 다다를 수 있었다.
“어서 오십시오.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알버트가 미리 자리하며 맞아주었다. 그는 검붉은 제복을 입고 있었는데 그 왼쪽 가슴에는 수많은 훈장이 자리하고 있었다.
그제야 정현은 자신에게 주어진 제복을 언제 입는 것인지 알 수 있었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알버트 경.”
정현은 얼이 빠진 얼굴로 그를 마주 보았다.
“폐하께서 이정현 님을 뵙고 싶어 하셔서 이런 자리를 마련했습니다. 미리 말하지 못해 미안합니다.”
그는 여왕이 자신을 만나는 것을 원하고 있다고 말했다.
정현은 이곳 버킹엄궁에서 사는 사람이 자신을 만나고 싶어 할 것이라는 생각은 해 본 적이 없어서 조금 당황했다.
“저를 만나고 싶어 하신다고요?”
알버트는 고개를 가볍게 끄덕이곤 웃으며 답했다.
“10년 전부터 말이죠.”
이윽고 그는 금박으로 수놓아진 화려한 내실의 문을 열고 복도로 안내했다. 복도를 따라 걸려 있는 수많은 사진과 그림들.
마치 이곳이 누군가가 사는 공간이 아니라 오랫동안 전시되고 있는 박물관처럼 느껴졌다.
“이 안쪽에 계십니다.”
알버트가 멈추며 가리킨 곳은 두 개의 문이 굳게 닫혀 있었고, 근위병들이 문의 양옆을 지키고 있는 곳이었다.
그는 가볍게 노크를 했다. 그리고 문을 열지 않은 채 기다리자 옆에 서 있던 근위병이 갑자기 소리를 쳤다.
“북쪽 에든버러의 왕자이자 랭커스터의 공작이신 알버트 공작이 드십니다!”
그래, 정현도 들어 본 적이 있었다. 길고 긴 이름. 그의 이름은 그저 알버트로 끝나는 이름이 아니었다.
문이 안쪽으로 열리고 일행은 들어갈 수 있게 되었다.
방 안에 도착하기 전에 생각했던 여왕은 병이 깊어 침대에서 누워 있는 모습을 생각했지만, 그녀는 자리에 누워 있지 않고 정장을 입은 채 테이블에 앉아 있었다.
단정하게 빗어 올린 하얀 머리칼과 하얀색 블라우스, 하늘색의 정장을 입고 테이블의 상석에 앉아 차를 마시고 있었다.
여왕은 정현이 들어오자 마시던 찻잔을 내려놓으며 말했다.
“반가워요. 이 먼 곳까지 와줘서 고마워요.”
그녀의 목소리에는 아직 힘이 가득 담겨 있었다.
“아닙니다. 폐하.”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뉴스에서 보았을 때만 하더라도 건강의 문제가 있어 왕세손에게 왕위를 물려준다는 것만 알 수 있었다. 그런데 자신의 눈앞에 그 선언을 한 사람이 앉아 있었다.
“다들 자리에 앉아요.”
“감사합니다. 폐하.”
알버트는 그녀의 말을 듣고 그녀의 옆에 앉았고 정현은 그의 맞은편에 앉을 수 있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누군가가 찻잔을 가져다주며 차를 따라주었다.
“한번은 알버트 경이 그대를 눈여겨보고 있다는 이야기를 한 적이 있었죠.”
10년 전의 이야기다. 자신에게 작위와 시민권을 주겠다는 제안을 했던 그때의 이야기.
“나는 그 당시 그 일에 적극적이지 않았어요. 왕실에서 운영하는 왕립 음악 대학에서도 충분히 그대와 같은 사람이 나올 수 있을 것이라 믿었죠. 나는 내가 왕으로 있는 연합 왕국이라는 나라의 잠재력을 믿었으니까요.”
“원하시는 대로 될 겁니다. 폐하.”
알버트는 그녀의 말에 동의했고 정현은 아무런 말도 할 수가 없었다.
“그럴 수가 없다는 것을 시간이 지나고 나서야 알게 되었어요. 지금은 너무 늦었죠. 적어도 내가 살아있는 동안에는 이루어지지 않을 거예요.”
자리에 앉은 그 누구도 그 말에 답을 하지 못했다. 잠시 후 여왕은 찻잔을 잡아 입으로 가져가며 음미했다.
“왕이라는 것은 상징이에요. 입헌 군주 제도에서 권력 같은 것은 이미 왕에게서 떠났지만, 50개가 넘는 나라를 하나로 묶어 줄 수 있는 상징.”
그런 50개국을 대표하는 상징이 자신에게 부탁하려 하고 있었다.
“나는 그 상징의 첫 번째와 마지막이 될 곡을 의뢰하고 싶어요.”
의뢰는 정현의 생각과는 달리 앨버트의 것이 아니었다. 여왕의 의뢰였다. 게다가 한 곡이 아니라 두 곡.
“저기, 그 말씀은 대관식에 연주할 곡도 원하신다는 말씀입니까, 폐하?”
정현은 그녀에게 되물었다.
“맞아요. 곧 왕위에 오를 손자의 처음과 내가 아버지께 돌아갈 때 수많은 국민들에게 들려 줄 마지막 곡을 의뢰하고 싶어요.”
여왕의 말은 파격적일 수밖에 없었다. 수백 년 동안 전통적으로 쓰였던 음악들이 아닌 자신의 대에서 새로운 음악을 사용하고 싶다는 전통을 돌파하는 파격.
그녀는 지나간 시대를 닫는 것과 새로운 시대를 여는 일을 정현에게 맡기려 하고 있었다.
“제가 할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이정현 님은 할 수 있을 겁니다. 그만한 교향곡을 만들어 낸 능력을 갖춘 분이시니까요. 그 곡들은 왕립 음악 대학에서 교본의 후보로 올랐었습니다.”
알버트는 정현을 향해 말했다.
“교본이요?”
“네, 교본. 살아 있는 사람이 만들어낸 교향곡이니까요. 후대에 이어질 만한 분석을 하기 쉽고, 작곡자가 의도한 바를 과거 거장들의 곡들에 비해 파악하기 쉬운 면도 있기 때문이죠.”
그의 말이 끝나자마자 여왕은 입을 열었다.
“시간을 많이 주지 못해서 미안합니다. 하지만 나는 내가 살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것을 느낄 수가 있어요.”
그녀의 한마디가 모두를 침묵시켰다. 한 나라가 갖는 권력의 정점이라는 왕이, 자신의 입으로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고 하는 것을 직접 듣는 일은 그만큼 무거웠다.
“노력해 보겠습니다.”
“필요한 것이 있으시다면 무엇이든 말씀해 주십시오. 제가 할 수 있다면 무엇이든 가져다드리겠습니다.”
대화의 마무리는 알버트가 지었다. 정현이 자리에서 일어나는 순간까지 여왕은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인사를 하고 자리를 벗어나는 그 순간까지도.
“부담되실 것이라는 건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 일은 이정현 님이 아니고서는 그 누구도 해낼 수 없는 일입니다.”
정현은 한 가지 궁금한 점이 생겨 그에게 물었다.
“그런데 영국에 머물렀던 지난 8년 동안 한 번도 방문하거나 물어보지 않으시더니, 왜 이제 와서 이런 부탁을 하는지 말씀해 주실 수 있겠습니까?”
그는 단 한 번도 프레스턴에 정현을 찾아온 적이 없었다.
“그때는 다시는 음악을 하지 않고 야인으로 지낼 것이라 하지 않으셨습니까? 그 의사를 존중해 드린 것입니다. 하지만 얼마 전에 복귀하셨다는 뉴스를 보고 찾아갈 생각을 하게 되었지요.”
아, 그 가짜 기사.
정현은 깨달을 수 있었다. 이 엉덩이가 무거운 왕가의 움직임을 만들어 낸 것이 그 가짜 기사였다는 것을.
하지만 이 자리에서 복귀한 적이 없다며 부정할 수는 없었다. 에릭의 음악과 한국에 팔아 버린 열두 곡의 곡까지, 음악을 그만두었다고 말한 것 치곤 너무 많은 활동을 해버렸기 때문이다.
“그렇군요. 그게 궁금했었습니다.”
“답이 되셨다면, 의뢰를 받아들이시겠습니까?”
알버트가 정중한 말투로 물었다.
“의뢰를 받지 않을 생각이었다면 전화도 하지 않았을 겁니다.”
정현은 알버트를 바라보며 말했다. 여왕의 의뢰를 받아들이겠노라고.
음악이 싫은 음악천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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