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 musical genius who hates music RAW novel - Chapter 41
040화
사실 의뢰를 받아들인 이유는 별거 없었다. 할 수 있을 것 같아서.
크게 어려운 것 없다고 생각했다. 딱히 마감 시한 같은 것이 정해진 것도 아니고 말이지.
다만 한 가지 문제가 있었는데, 나는 악보 쓰는 법을 배운 적이 없어서 정석적인 악보를 쓸 수가 없다는 점이었다.
그 말은 DAW에서 음악을 만드는 것까지는 좋은데, 그걸 악보 보기 기능으로 프린트를 해서 다른 사람에게 연주하라고 하면 그 누구도 연주할 수가 없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연주용처럼 악기별로 정리되어 나오는 것이 아니라 모든 악기가 하나의 악보에 나와서 악기별로 구분해 알아볼 수가 없기 때문이었다.
조금 더 배우고 트랙별로 악보를 뽑으면 가능하긴 하겠지만, 하나의 악기를 두 개 세 개의 트랙으로 표현하다 보니 생각보다 그 일이 복잡해졌다.
저택의 2층 구석에 있는 방에 자리를 잡고 며칠 동안 만들어 보았지만, 이 작업은 처음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쉽지 않았다.
정확한 이미지를 잡는 것이 어려웠다. 죽음의 이미지는 추상적이니까.
똑똑똑.
“들어오세요.”
침대에 널브러져 얼굴을 처박은 채 대답했다.
“알버트 경이 오셨습니다. 어디로 안내하면 될까요?”
나는 고개를 들고 알버트가 왔다고 알려 준 아서를 바라보며 말했다.
“응접실, 응접실에서 본다고 해 주세요.”
필요하다고 했던 물건들은 모두 알버트가 구매해 주었다. 컴퓨터, 신시사이저, 모니터 스피커까지 전부. 심지어 가상 악기까지 모두 구매해 주었다.
하지만 한 가지 더 필요한 것은, 나를 대신해 악보로 정리해 줄 사람이었다. 이 사람을 구하는 일은 생각보다 시간이 오래 걸렸다. 아무래도 의뢰에 달린 무게가 너무 무거워서 보안 때문이 아니었나 싶다.
침대 밑에 벗어 둔 신발을 서둘러 신었다. 머릿속에 울리는 소리는 어차피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이것들은 항상 그래왔으니까.
내가 쏟아낼 때까지 언제까지라도 내 머릿속에 있을 것이다. 지금까지 변하지 않았다.
그러니 지금은 사람을 만나는 게 우선이었다. 알버트가 데려온 사람이 내가 필요로 하는 사람인지 파악하는 일이 더 급했다.
서둘러 문을 열고 복도를 달려 계단을 타고 내려간다. 1층에 있는 응접실까지는 멀지 않지만, 오늘따라 멀게 느껴지는 기분이다.
이 일을 빨리 끝내야 이 감옥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주방과 식당을 지나 응접실의 문을 열고 의자에 앉아 있는 알버트, 그리고 처음 보는 것 같은데 조금 익숙한 것 같기도 한 여자의 얼굴을 마주하며 말했다.
“안녕하세요. 오랜만이시네요, 알버트 경.”
하얀 머리에 멋있는 주름을 가진 얼굴이 움직이며 답한다.
“안녕하십니까. 이정현 님. 거의 일주일만이로군요.”
나에게 의뢰를 했던 알버트는 단 한 번도 재촉을 하는 일이 없었다. 당장 오늘내일하는 것도 아니고 선위를 한다고 선언을 해서 다음 주에 바로 왕위를 물려주는 것이 아니니까.
게다가 다행히도 일반적으로 음악을 만든다는 작업은 굉장히 오랜 시간이 걸린다고 알려져 있다는 것.
지난번 버킹엄궁에 방문한 이래로 일주일. 알버트가 구해 온 장비들의 세팅과 장송곡이라고 생각했던 음악들 몇 개를 만들어 보았지만, 모두 내 마음에는 들지 않았다.
내가 만든 음악을 제대로 들어 보았던 것은 예술의 전당에서 했던 공연이 마지막이었지만, 그래도 음악이 내가 생각했던 대로인지 아닌지 정도는 느낄 수 있었다.
알버트와 인사를 나누며 서로 웃고 있다가 그가 데려온 사람을 보았다.
단발로 자른 금발 머리에 하얀색 머리띠. 파란 눈과 높은 콧날. 그리고 하얀색 블라우스에 넥타이처럼 두른 체크무늬 스카프에 버건디 색의 체크무늬 미니스커트를 입은 사람이었다.
어디선가 본 것 같은데. 어디였더라?
“이분은?”
“아, 제 손녀입니다. 적당한 사람을 찾다가 마침 손녀가 왕립 음악 대학에 다닌다는 것이 떠올랐거든요.”
공작인 알버트의 손녀였다. 내 수족처럼 부릴 사람이 필요했던 건데, 수족으로 부려먹다가는 내 수족이 잘려 나갈 것 같았다. 어쩐지 예전에 알버트에게 느껴졌던 이미지와 비슷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에게서 보았던 굉장히 잘생기고 우아한 이미지가 고스란히 손녀에게서 보였다.
빠르게 거절하고 다른 사람을 찾아보는 것이 나을까 고민하는데 알버트의 손녀가 인사를 했다.
“메건입니다.”
성도 말해 주지 않는다. 알버트의 손녀라는 것을 밝혔기 때문일까? 같은 성을 쓰니까 괜히 말해 줄 필요가 없다는 것이겠지.
사실 알버트의 성이 에든버러인지 랭커스터인지는 모른다. 둘 중의 하나라는 것만 알고 있을 뿐. 작위가 있는 사람은 보통 이름에 ‘경’이라는 글자만 붙여 부르기 때문이다.
“이정현입니다. 리든 정현이든 편한 대로 불러 주세요.”
나름 예의를 갖춘다고 갖춰 말하기는 했는데 그다지 와닿지는 않는다는 표정이었다. 편한 대로 불러 달라고 했건만 그 어떤 대답도 하지 않고 고개를 창가로 돌렸다.
저 아가씨는 왜 저렇게 심통이 난 걸까? 나를 오늘 처음 본 것뿐인데, 자신의 이름을 말한 것 말고는 한마디도 하지 않는다.
아직 이름을 외우지 못한 메이드 한 명이 비스킷과 차가 담긴 쟁반을 들고 다가와 테이블에 하나씩 올려놓았다.
그리고 잠깐 발생했던 침묵을 알버트가 깨뜨려 주었다.
“사실 작업하시는 일의 진행 상황을 말씀해 주지 않으셔서 어느 정도 작업이 되었는지 잘 알지 못합니다만, 이 아이가 도움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손녀분께 모든 정보를 말해도 되는 겁니까?”
차를 마시며 알버트에게 묻자 그는 고개를 가볍게 가로저었다.
“메건.”
응? 갑자기 조용히 있던 그녀가 입을 열었다.
“뭐라고요?”
“메건이라고요. 이 아이나 손녀가 아니라. 나한테도 이름이 있는데 왜 이름은 불러 주지 않는 거예요.”
아, 심통이 난 게 아니라 소심한 거였는지도 모르겠다. 볼이 빵빵하게 부풀리며 자신의 이름을 말해 달라고 하는 걸 보면 말이지.
“미안합니다, 메건 양.”
“그냥 메건이라고 해 주세요. 레이디나 미스 그런 거 없이.”
“오늘따라 왜 그러니, 메건.”
알버트가 당황해하는 모습을 보는 것은 처음이지만, 이것으로 그가 손녀에게 약하다는 것은 알 수 있었다.
아무래도 손녀는 고집이 있는 편인 모양이었다.
“그러도록 하죠, 메건.”
“고마워요.”
그제야 그녀의 부풀어 올랐던 볼이 가라앉았다.
“알버트 경이 궁금해하시니 올라가서 한번 들어 보셔도 괜찮습니다. 작업실을 제 침실에 마련해 놓아서 조금 어수선하긴 합니다만….”
어차피 청소는 메이드들이 해 주지만, 컴퓨터 앞에 앉아 뭐라도 하고 있을 때는, 이상하게 아무도 들어오질 않는다.
그래서 작업하는 도중에는 항상 중간에 먹은 초콜릿이나 과자, 음료수병들이 널려 있었다. 들어와서 그때그때 청소 좀 해 주면 좋을 텐데 말이지.
“오! 벌써 들어 볼 수 있는 정도까지 진행이 된 건가요?”
알버트가 함박웃음을 지으며 말을 하고 메건의 큰 눈이 더 크게 뜨였다.
“2층에 있는 방에서 작업 중이었습니다. 함께 가시죠.”
자리에서 일어나려고 했는데 갑자기 메건이 입을 열었다.
“저, 저기!”
나는 그녀의 얼굴을 바라보며 대답했다.
“무슨 일이시죠?”
“작업을 하신 지 고작 일주일이라고 하지 않으셨나요?”
음? 기간이 문제였나? 기간이 왜 문제가 되는 걸까?
“네, 일주일입니다. 정확하게는 6일째네요. 지난주에 이 집에 왔고, 제가 온 다음 날 알버트 경이 보내주신 장비가 배달되었거든요.”
“어떻게 일주일 만에 음악을 만들어내실 수 있는 거죠? 미리 작업해 두신 걸 편곡하신 건가요?”
아니, 원래 쓰던 것들이 죄다 다른 곳에 있는데 미리 작업했던 게 있을 리가 없잖아. 방금 장비들을 알버트가 보내줬다는 걸 못 들은 걸까?
“아뇨, 제가 원래 사용하던 장비들은 모두 프레스턴에 있어서 만들어 두었던 것들을 가져올 수는 없었습니다.”
정직하게 말해 주자 메건이 고장이 났다. 내 주변에 있는 사람들은 간혹 저렇게 고장이 나서 멈추는 일이 있었으니까, 그리 큰일은 아닐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기대되는군요. 벌써 기대를 해도 되는 겁니까, 제가?”
알버트가 사람 좋아 보이는 웃음소리를 내며 말을 한다.
“하하. 그건 잘 모르겠네요. 그건 듣는 사람이 판단해야 할 문제 아니겠습니까?”
알버트와 자리에서 일어나는 순간까지도 메건은 움직이질 않아서, 메이드를 불러 2층으로 데려오도록 했다.
커다란 나무 덩어리로 만들어진 난간을 잡고 계단을 오르며 알버트에게 말했다.
“사실, 지금 만드는 곡들은 원하시는 곳에 사용하지는 못할 겁니다.”
그 말을 들은 알버트의 얼굴이 굳어간다.
“그건 무슨 말씀입니까?”
“제가 원하는 수준에 올라가질 못했거든요. 하지만 이걸 들려 드리는 것은, 제가 놀고 있던 것은 아니라는 걸 보여 드리고 싶어서입니다.”
이렇게 비싼 집에서 지내게 해 주고 비싼 장비들까지 사 줬는데, 일주일 동안 놀았다고 말하기가 부끄러웠다는 말을 돌려서 했다.
“아~ 그렇군요. 지금 만들어 두신 것들보다 더 나아질 수 있다는 말이겠지요?”
역시 알버트는 돌려서 이야기해도 잘 알아듣는 사람이었다. 이것이 연륜이라는 거겠지.
“지금과는 전혀 다른 곡이 될 수도 있고, 만들어 놓은 것을 더 발전시킬 수도 있습니다. 아직은 알 수 없지요.”
밑밥을 잘 깔아야 한다. 방에 있는 컴퓨터로 만들어 둔 몇 개의 곡들이 알버트의 마음에 들지 않을 수도 있으니까.
“알겠습니다. 걱정할 필요는 전혀 없겠군요. 허허허.”
2층에 올라와 복도를 따라 쭉 들어간 곳에 있는 가장 큰 침실의 문을 열었다.
“이쪽입니다.”
다행히도 센스 있는 메이드들이 알버트와 이야기하는 동안 청소를 해 두었던 것이 느껴졌다. 바닥에 놓여 있던 초콜릿 봉지들과 탄산음료의 캔들이 모두 치워진 상태였으니까.
커다란 방 안, 벽 쪽에 놓인 침대의 왼쪽에 있는 아치형 창문으로부터 눈 부신 햇살이 내려오는 오후. 열어 둔 창문 때문인지 약간의 먼지들도 보였다.
나는 잠자기 모드로 들어가 있던 컴퓨터를 켜고 모니터 스피커의 볼륨을 키우며,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화면을 설명했다.
“제가 작업하는 방식은 전통적인 방식과는 다르게 가상 악기라는 것들을 배치해서 작업합니다. 뭐 이미 저에 대해 알고 계시겠지만 말이죠.”
아무리 그래도 왕의 측근인데 나에 대한 정보는 많이 알고 있을 것 같았다.
“네, 들었던 바 있습니다. 사실, 이와 관련하여 아무것도 배운 적이 없으시다는 것도 알고 있습니다.”
열려 있는 방문으로 뒤늦게 메이드들이 메건을 데려오는 모습이 보였다.
“여기에 보이는 하나의 줄마다 하나의 악기를 표현하는 겁니다. 그게 모여서 음악이 되는 방식입니다.”
“그렇군요. 제가 음악을 만드는 일은 잘 알지 못합니다. 그저 가끔 연주회를 듣는 정도지요.”
비어있던 의자에 메건이 앉았다.
“이제 몸은 좀 괜찮으십니까?”
“아, 네. 기운이 좀 빠져서… 죄송합니다.”
나와 몇 살 차이도 나지 않는 것 같은데 벌써 기운이 없다니. 공작님 댁에서 태어나도 크게 좋은 점이 없는 모양이다. 한국이었으면 보약이라도 먹고 금방 튼튼해졌을 텐데 말이지.
나는 마우스에 손을 가져다 대며 말했다.
“지금부터 들으실 곡은 슬픔을 테마로 한 세 곡과 위엄을 테마로 한 세 곡입니다.”
“여, 여섯 곡이라고요?”
“일주일이라고 했잖아요!”
깜짝이야, 왜 화를 내. 난 시키는 대로 잘 만들고 있었단 말이야. 그래도 화가 난 것에 대해 이유가 있을 수도 있으니, 정중하게 물어보자.
“맞습니다만, 그게 무슨 문제라도 있나요…?”
음악이 싫은 음악천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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