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 musical genius who hates music RAW novel - Chapter 44
043화
“만나다니, 왕세손님을 말씀하시는 건가요?”
“네 맞아요. 왕세손님. 왕위를 물려받을 사람. 이름도 모르고 본 적도 없어서요.”
그냥 왕세손이라고만 들었지 이름을 들어 본 적은 없었던 것 같다. 게다가 얼굴도 본 적이 없었다.
그래서 음악과의 괴리감이 느껴졌던 기분이다. 전설적인 왕과 아직 왕이 되지 못한 사람의 차이는 분명하니까.
메건은 가지고 있던 휴대폰으로 이름을 검색해 주었다. 아마 그녀도 이름을 외우고 있지 못했던 건 아닐까. 얼마 지나지 않아 이름과 사진을 찾을 수 있었다.
“윌리엄 아서 필립 루이네요.”
네 명의 이름이 붙어 있는 것 같은 이름이 한 명의 이름이었다. 여기에 성이 붙어 있지 않으니 성이 붙으면 더 길어질 것이다.
“이름이 엄청나게 기네요.”
“제 이름도 메건보다는 길어요.”
이름을 길게 짓는 것이 영국 귀족 집안의 풍습인가. 어찌 되었건 이름과 얼굴을 알게 되었다.
차마 메건의 이름은 물어보질 못했다. 분명 외우지도 못할 정도로 긴 이름을 갖고 있을 것 같았으니까.
왜 저렇게 길게 이름을 짓는가는 사실 관심사가 아니다. 이름이 길면 불편하기만 할 것 같다.
지금 중요한 것은 새롭게 알게 된 왕세손의 이름과 얼굴이었다. 길게 부르면 귀찮으니 윌리엄으로 하자. 물론 왕위를 잇게 되면 다른 이름으로 불릴 가능성이 크지만, 그건 내 알바가 아니니까 생각하지 말기로 하고.
윌리엄은 머리숱이 적은 남자다. 푸른 눈을 가졌고 키가 큰 편이다. 이것만으로는 부족한데.
생김새가 그냥 푸근한 동네 아저씨 같다. 왕의 위엄이라고는 전혀 찾아볼 수 없는.
이 이미지를 조금 전의 그 대관식 음악에 대입하자, 왠지 분위기가 가벼워졌다.
“이러면 곤란한데….”
“무슨 일이세요?”
“이미지가 왕보다는 너무 동네 아저씨 같아서요.”
나도 모르게 진심을 내뱉고 말았다.
“풋.”
메건이 급하게 입을 티슈로 닦는다. 본인도 인정할 수밖에 없겠지. 여태까지 왕자를 외모로는 평가한 적이 없겠지만, 결국 위엄 같은 것은 외모에서 나오는 것이기 때문에.
아무튼 이러면 곤란했다. 차라리 얼굴을 모르고 있었을 때가 조금 더 낫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만나 볼 수는 없겠죠?”
“그냥 만나는 건 그리 어렵지 않을 거예요. 지금 일을 그만두고 쉬면서 대관식을 기다리시는 거로 알고 있거든요.”
“일을 그만뒀다고요?”
“네. 원래 헬기 조종사세요. 육군 대위로 예편하셨고.”
정말 의외였다. 왕족이면 그냥 편하게 놀고먹는 줄 알았는데 말이지.
“왕자도 일을 하나 보네요.”
“여왕 폐하 말고는 모두 따로 직업을 갖고 계세요. 여왕님도 왕위에 오르기 전, 2차 대전 당시에는 군인이셨고요.”
편한 일만 하려 하고 자식들을 군대도 안 보내려 하는 한국의 정치인들과는 다르다는 건가.
“일단 오늘은 지금 떠올랐던 것을 음악으로 만들고, 알버트 경에게 부탁해서 왕세손을 만나 볼 수 있나 알아봐야겠네요.”
“지금 바로 작업하실 건가요?”
아직 장비들을 1층으로 옮기질 못했다. 장비들부터 옮겨야 한다.
“이 옆에 볼룸으로 장비들을 먼저 옮기고 나서 시작하도록 하죠.”
장비를 옮기는 일은 그리 오래 걸리지는 않았다. 혼자서 했다면 당연히 오래 걸렸겠지만, 이 집안에서 일하는 스무 명에 가까운 인원들이 모두 나서서 30분도 되질 않아서 옮길 수 있었다.
컴퓨터 앞에 앉아서 작업을 시작하기 전에 눈을 감고 이미지를 먼저 떠올려야 한다. 내가 작업하는 것은 하나하나 생각해서 만드는 것이 아니라, 보이는 것들이 음악으로 들리게 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실제로 눈앞에 보이건 아니면 상상으로 보게 되건.
“아서 왕, 아서 왕….”
아저씨 같은 왕세손이 아닌 처음에 생각났던 아서왕의 이미지로 대관식을 상상해 본다.
적들을 물리친 왕자가 수많은 기사를 이끌며, 백마를 타고 성으로 들어온다.
하늘에 흩날리는 꽃잎.
뿜어지는 위엄.
나팔수들이 서로 연주를 시작하며 새로운 왕이 될 자의 도성을 알리고, 백성들은 거리를 나와 그를 바라본다.
허리에 찬 엑스칼리버가 그가 적들을 모두 섬멸했음을 알려 주고, 그의 양옆에 도열한 백성들 사이사이에 보이는 어린아이들의 눈망울에서 보이는 동경.
끓어오르는 동경으로 그의 위대함을 탐하는 눈빛들.
폭풍처럼 몰아치는 큰북 소리가 트럼펫의 바닥에 깔리며 울린다.
그 눈빛들을 받아내는 왕이 될 자와 그의 뒤를 따르는 기사들. 여유 있는 눈빛으로 손을 흔들며 백성에게 화답한다.
화답과 함께 시작되는 본격적인 음악.
심벌즈가 울리며 시작을 알린다.
차앙!
현악과 관악이 조화되면서 울려 퍼지는 위풍당당함.
백성들이 던져 놓은 꽃잎을 사뿐히 밟으며 성으로 향하는 왕의 발걸음에서도 당당함이 느껴진다.
끝없이 길게 이어진 길을 타고 가다, 말에서 내려온 뒤 기사들이 따르지 않는 계단을 홀로 걸어 올라간다.
하이라이트를 여기에서 잡아야겠다고 생각하자 바로 꼭대기를 향해 악기들이 달려간다.
큰북과 심벌즈가 중간중간 소리를 내며 이곳이 하이라이트임을 알린다.
땅까지 울리는 음악소리에 환호하는 백성들.
계단의 끝에 다다르자 수많은 귀족이 왕좌의 앞에 서서, 대관식에 사용될 로브와 왕관을 들고 기다린다.
왕좌의 앞에서 기다리고 있던 사람들이 그가 왕좌에 앉기 전에 로브를 입히고, 그의 손에 지휘봉을 쥐여준다.
세상을 울리던 웅장한 음악이 멈춘다.
성직자들이 왕을 축복하는 말들을 입에 담고, 왕좌에 앉는다.
금색 쿠션 위에 얹어져 이동하는 왕관을 천천히 나르는 성직자들.
마침내 왕좌의 앞에 도착한 왕관을 양옆에 서 있던 두 명이 무릎을 꿇으며 들어 올려, 그들의 손으로 왕의 머리에 씌워 준다.
그리고 성직자들에 의해 왕이 되었음을 선언하며, 사람들의 박수가 해일처럼 밀려든다.
왕관을 쓰고 지휘봉을 든 왕은 성의 발코니로 다가가 그 앞에 몰려든 수많은 백성을 바라보며, 자신이 이 땅의 왕이 되었음을 선언한다.
“여기에서 나, 아서 펜드래곤이 연합 왕국의 왕이 되었음을 선언한다!”
다시 큰 북소리와 함께 트럼펫이 울려 퍼지며 들려 오는 백성들의 함성.
함성보다 크지는 않지만 웅장하게 울려 퍼지는 악기의 소리.
다시 성에서 내려와 왕관을 쓰고 백성들 앞을 당당하게 지나는 행진이 눈앞에 보이는 것처럼 연주되고 있었다.
눈을 뜨고 마우스를 손에 잡으며 프로그램을 실행시켰다.
“좋아, 트럼펫과 트롬본으로 나팔수가 왕이 돌아왔다고 백성들에게 알리는 것부터 시작하자.”
“지금 바로 시작하시는 건가요?”
깜짝 놀라 옆을 돌아보았더니 메건이 있었다. 매번 쥐도 새도 모르게 다가오는 것 같다. 놀랐지만 놀라지 않은 척 담담하게 대답을 해 주었다.
“이미지는 아까 영화를 보면서 이미 완성되었어요. 그가 왕이 되는 것과는 조금 다른 분위기겠지만, 그래도 전설적인 왕의 이미지를 알게 되었으니까 그걸 먼저 음악으로 만들어 보려고요.”
작업을 시작한다. 시작하는 부분에서 트럼펫으로 나팔수를 표현해 간다.
중간중간에 나오는 심벌즈의 소리가 마음에 들지 않네. 관현악기들의 가상 악기들은 괜찮은 것들을 구매했었는데 심벌즈가 이렇게 쓰일 줄 몰라서 구매를 안 해 놓았었던 게 좀 후회스럽다.
음악은 거의 완성되었지만, 심벌즈와 큰북의 소리가 부족해서인지 머릿속에서 음악이 멈추질 않고 있다. 오랜만이다, 이 느낌.
“아… 막히네.”
머리를 긁으며 혼잣말을 하자 옆에서 말소리가 들렸다.
“무슨 문제라도 있으신가요?”
고개를 돌려보니 메건이다. 시간이 꽤 지난 것 같은데 아직 옆에 있었나 보다.
“컴퓨터로 연주되는 가상 악기의 소리가 내가 생각하던 것과 너무 큰 차이가 있어요.”
“그러면 작업은 끝난 건가요?”
“네, 작업은 끝났어요. 그런데 소리가 조금 아쉽네요.”
머릿속에서 음악이 울리는 것이 멈추지 않는 것이 아쉽다. 이럴 줄 알았으면 안 쓰더라도 가상 악기를 종류별로 사 두는 건데.
작업하는 것을 처음부터 끝까지 지켜본 건가 싶었더니 한쪽 구석에 카메라가 설치되어 있었다.
“촬영한 거예요?”
당황하는 메건.
“앗? 네? 네! 작업 중에 물어보니 괜찮다고 하셔서.”
작업하고 있을 때 말을 걸었었나. 전혀 몰랐는데. 뭐 크게 상관은 없을 것 같아서 그냥 넘어가기로 했다.
“어쨌거나 완성하려면 세션이 필요하겠네요. 메건, 일단 악보를 만들어 주시겠어요?”
“알겠습니다. 악보는 어떻게 만들면 될까요?”
어떻게? 그게 무슨 말이지? 이해할 수 없는 말을 하고 있다.
“어떻게 하는 게 무슨 뜻이에요?”
“오케스트라 형식으로 만들까요? 아니면 다른 특별한 형식이 필요하신가요?”
“오케스트라에 행진에 쓰이는 큰북과 작은북이 추가되어 있어요. 들어 보시고 모든 악기에 대한 악보를 만들어 주시면 돼요.”
악기의 개수는 모르겠다. 들리는 대로 다 만들어서 몇 개의 악보가 만들어질지는 알 수가 없다.
그나저나 아침 먹고 영화를 본 뒤에 시작했던 것 같은데, 시간이 벌써 밤 10시가 넘었다. 오늘은 낮잠 시간도 놓쳐 버렸네. 그렇게 생각하니까 더 피곤한 것 같기도 하고.
“일단 밥 먹고 하죠. 생각보다 시간이 더 많이 걸렸네.”
바닥에 놓인 감자 칩과 초콜릿 봉투가 보인다. 아마 나도 모르게 주워 먹었던 모양이다. 작업이 끝나기 전까지는 정신을 차리기가 어려우니까.
작업이 끝났다는 생각이 들자 깨닫지 못했던 허기가 몰려들었다.
자리에서 일어나 볼룸의 문을 열고 나가서 부엌을 향하자 메건이 말을 걸었다.
“저기….”
“네?”
“아까 점심이랑 저녁 둘 다 드셨어요. 여기에서.”
밥을 먹었다고? 기억이 나질 않는데? 게다가 온종일 아무것도 먹지 않은 것처럼 배가 고프다.
“먹었다고요?”
“네. 다 드셨어요. 저기 카메라에도 찍혀 있을 거예요.”
옆에 삼각대 위에 다소곳하게 놓인 카메라가 보였다. 하지만 카메라에 찍혀 있는 것을 확인하고 싶은 마음은 들지 않았다. 너무나도 단호하게 말하니 믿을 수밖에.
“그래도 배가 고프니까, 뭐라도 먹어야 할 것 같아요. 야식이라도.”
메건이 무어라 말하는 것 같았지만 들리지 않았다.
정말 배가 등에 닿아 있는 것은 아닐까 의심이 될 정도로 배가 고팠다. 태어나서 이런 적은 처음인 것 같은데.
이 자리에서 쓰러지기 전에 일단 뭐라도 먹어야 할 것 같지만, 다들 퇴근했을 시간이라 음식을 만들어 줄 사람이 없었다.
냉장고를 열어 보니 딸기가 얹어진 생크림 케이크가 보였다. 재료들을 조리할 시간이 없으니 급한 대로 이거라도 먹어야겠다.
케이크를 칼로 잘라 접시에 옮겨 담고 먹기를 한번, 두 번. 몇 번이나 옮겨 담아 먹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어느새 커다랗던 케이크를 모두 먹어 버렸다.
그제야 조금 허기가 가신다.
“휴우. 이제 좀 살겠네.”
만족스러운 야식이었다. 왜 냉장고에 케이크가 있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배가 가득 차니 만족스러운 느낌이었다.
내일 악보 작업이 완료되면 세션을 불러 녹음을 해야겠다고 생각하며 부엌에서 나오는 순간, 갑자기 바닥의 대리석 타일이 가까워지며 세상이 까맣게 바뀌었다.
음악이 싫은 음악천재
x