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 musical genius who hates music RAW novel - Chapter 47
046화
“카펫 바꿔야겠네.”
바닥에 깔린 핏물이 번진 카펫을 바라보며 처음 들었던 생각은 그거였다. 예전과 크게 바뀐 것이 없다고 생각했으니.
이틀이 지났을 때. 내 생각이 틀렸음을 깨달았다.
“뭐야, 이거….”
몸에 어딘지 모르게 위화감이 든다. 지난 한 달 동안 들리지 않던 음악소리가 다시 들리는 건 그렇다 쳐도, 그 소리가 너무 선명하게 들린다.
예전이 오래되어 늘어난 테이프 같은 음질이라면, 지금은 리마스터된 CD의 음질이랄까.
어쩌면 예전에도 이랬는데 한동안 들리지 않아서 잊고 있었던 걸지도 모른다.
아니면 대관식에 쓰였던 곡을 만들 때 내가 무리를 했던 거라면, 잠시 망가져서 들리지 않다가 회복을 했는지도.
“무슨 일이 있으십니까?”
내가 쓰러졌던 날 이후로 컴퓨터 앞에 앉아 있을 때마다, 항상 옆에서 대기하는 아서가 다가와 걱정을 하는 눈초리로 물었다.
“아뇨. 알버트 경이 의뢰한 두 번째 곡을 방금 완성했거든요. 메건을 좀 불러 주시겠어요?”
지난 한 달 동안 포기하려 했던, 두 번째 의뢰를 이틀 만에 끝냈다.
그 후로 3일이 더 지나 메건이 악보를 다 만들었을 때, 나는 다시 한번 버킹엄궁에 와 있었다. 알버트와 함께.
“지금 바로 들어 볼 수 있는 겁니까?”
“아직은 악보만 나온 단계입니다, 폐하. 이것을 연습하고 연주하는 데에는 어느 정도 시간이 필요합니다.”
고맙게도 알버트가 윌리엄 5세에게 대신 대답해 주었다. 윌리엄 5세는 잠시 고민을 하는 듯하더니 말을 이었다.
“제가 내일부터 커먼웰스의 해외 순방을 하러 가야 합니다. 한 달 뒤에 돌아올 텐데, 혹시 그때 들려 주실 수 있겠습니까?”
“물론입니다, 폐하.”
좋아. 의뢰가 완료되는 순간이다. 이제 집에 돌아갈 수 있겠지.
버킹엄궁에서 나오자마자 나는 알버트에게 말을 했다. 이제 의뢰가 끝났으니 의뢰 대금을 지불하라고.
“이미 지급된 것이 아니었습니까?”
“이미 주셨다고요? 저는 받은 게 없는데….”
나는 받은 게 없는데, 누구에게 뭘 주셨나.
“왕실 소유의 저택을 드리지 않았습니까. 아마 지금은 서류상으로도 이정현 님의 것이 되었을 텐데요.”
필립이 말했던 저택이 내 것이라는 말, 그게 진짜였구나. 노래 두 곡에 그런 저택이라니. 완전히 남는 장사네.
이번에 만든 곡은 모두 왕실이 아니면 누가 연주할 사람도 없는 곳들.
그렇다 보니 당연히 스트리밍 수익도 기대하기가 어려웠는데, 이렇게 비싼 집을 주다니 좋은 거래라고 생각했다.
“그 집이 이제 제 것이라는 말이죠?”
팔아 버리자. 내게 필요한 건 현물이 아니라 현금이니까.
***
팔 수가 없었다. 팔지도 못할 걸 왜 주는 거야, 대체.
부동산에서도 거래 중개를 거절했고, 직거래로 내놓아도 그 누구도 연락하지 않았다. 누군가가 의도적으로 거래를 할 수 없게 만들어 둔 것이 아닐까 싶을 정도로.
런던 안에 있는 그림처럼 아름다운 저택. 비록 런던 중심부에서는 조금 떨어져 있었지만, 오히려 그게 더 좋았다. 중심부는 복잡하고 시끄러우니까.
그래서 더 잘 팔릴 것으로 생각했는데, 그 생각이 틀렸었나 보다.
팔 수가 없다면 그냥 짐일 뿐이잖아. 프레스턴에 돌아가면 이 집을 관리할 사람이 없어지니까.
이 정도면 나에게 버린 거나 다름없다. 이걸 도로 가져가고 돈으로 달라고 해야겠다는 생각에 알버트에게 전화를 걸었다.
[이정현 님. 무슨 일이십니까?]“이 저택에 대체 뭘 해 놓으셨길래 팔 수가 없는 겁니까, 알버트 경?”
[아, 그 저택은 왕실 재산으로 관리가 되던 곳이라 거래할 수 없는 부동산입니다.]그런 건 진작 말해 줬어야지. 괜히 부동산 왔다 갔다 하느라 시간만 다 뺏겼잖아.
속에서 부글부글 끓어올랐지만 차마 큰 소리는 낼 수 없었다.
“그냥 돈으로 주시면 안 될까요? 이런 집, 저는 필요가 없거든요.”
알버트는 이 말을 듣고 잠시 생각을 하는 건지 시간이 조금 지난 뒤에 말을 했다.
[제가 내일 찾아뵙겠습니다.]다음 날 오후. 알버트가 리처드와 함께 찾아왔다.
“이 저택을 돈으로 바꿔 드리는 것은 안 될 것 같습니다. 왕실에서 지급한 것이라 제게는 그것을 변경할 권한이 없거든요.”
“네? 저는 프레스턴으로 돌아가야 하는데, 그러면 의미가 없잖아요. 그렇게 되면 이 집은 짐이 된다고요.”
알버트의 말에 나는 살짝 어이가 없었다. 애초에 의뢰 비용을 계약서 같은 거로 명시해 두질 않았던 내 잘못도 있지만, 그래도 21세기에 현물 지급은 좀.
“왕립 음악 대학에 교수로 오시는 건 어떻겠습니까? 그러면 이곳에서 사시면서 출퇴근도 용이할 텐데.”
“저 고등학교 졸업도 못 했습니다, 리처드 경. 그리고 제가 남을 가르칠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질 않네요.”
나 중졸이다. 고등학교 자퇴한 몸이라고. 그런 내가 어떻게 대학교의 교수 같은 귀찮은 일을 할 수 있단 말이야.
알버트와 리처드는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폐하께서 귀국하시면 다시 한번 이야기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한참 동안 이야기를 해도 결론이 나질 않았다.
이들은 어떻게 해서든 나를 런던에 머물게 하고 싶어 했고, 나는 하기 싫어서 거절하기 바빴으니까.
결국, 양쪽 모두 아무것도 얻은 것 없이 협상은 결렬되고, 8월에 해외 순방을 마치고 귀국할 왕을 기다려야만 하는 상황이 오고야 말았다.
“이건 뭐 그냥 예쁜 쓰레기네.”
부동산이 말 그대로 부동산이 되었다. 움직일 수가 없네. 내 명의로 되어 있으면 뭐 하니, 팔 수가 없는데.
나도 그냥 휴가나 가 버릴까 싶어서 크리스에게 전화를 걸어 보았다.
뚜루루루-
[네, 크리스틴 뮤직입니다.]“내가 전화 코드 빼놓으라고 했지. 왜 안 빼놨어.”
[앗! 리? 어떻게 전화 코드를 빼놔. 그래도 사무실에 걸려오는 전화면, 일 때문에 걸려오는 전화도 많을 텐데….]얘도 참 이럴 때 보면 쓸데없이 성실하다. 이렇게까지 성실하게 할 필요는 없을 텐데 싶다.
“에릭은 뭐 해, 나 휴가 가려고 하는데 같이 갈래?”
[에릭은 공연하러 미국 갔지. 휴가? 어디로?]어디로 갈까? 브라이튼? 아니야, 영국의 여름은 은근히 춥다. 나도 미국은 한 번도 안 가 봤는데 미국이나 갈까?
“우리도 미국 갈래?”
***
꽤 충동적으로 저질렀다.
그렇게 해서 도착하게 된 로스앤젤레스 국제공항.
끝까지 동부의 마이애미냐 서부의 캘리포니아냐 고민을 했는데, 결국 서부가 더 낫지 않을까 하는 마음에 캘리포니아를 택했다.
“으아, 엄청 뜨겁네! 여긴.”
20도가 되질 않는 영국의 여름 날씨와는 정말 하늘과 땅 차이다. 그래도 한국처럼 푹푹 찌는 건 아니라서 다행. 그늘은 그늘의 역할을 하고 있었다.
런던 히스로 공항 면세점에서 휴가 분위기를 내느라 급하게 샀던 선글라스가 없었다면, 아마 눈도 엄청 아플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래서 미국 영화를 보면 죄다 선글라스를 쓰는 거구나.
“여기 오니까 진짜 여름 같다는 생각이 들어!”
항상 긴소매만 입던 크리스가 반소매 티셔츠를 입은 모습을 처음 보았다. 하늘색 반소매 티셔츠에 넓은 챙 모자를 쓰고 무릎까지 오는 반바지를 입고 있었다.
“사부! 여기예요 여기!”
멀리서 선글라스를 쓴 에릭이 양옆에 매니저를 두고 손을 흔들고 있었다.
“야, 너 어떻게 여기까지 왔어. 스케줄 있다면서.”
“스케줄이 있어도 사부님이 오는데 제가 와야죠.”
참 한결같은 녀석이다. 뭐, 덕분에 호텔까지는 편하게 가겠네.
옷 같은 건 현지에서 사야겠다는 생각이었기 때문에 짐 같은 건 하나도 들고 오질 않아서, 돌아다니는 데 불편함은 없었지만.
20분 거리였다. 공항에서 차를 타고 20분 거리에 산타모니카 해변이 보이는 호텔이 있었다.
호텔에 체크인하고 엘리베이터를 향해 걷다가 에릭에게 물었다.
“너 솔직히 말해, 놀러 왔지?”
해변에서 공항까지 이렇게 가까운데 굳이 데리러 올 필요가 없지 않았을까?
“저도 휴가를 좀 가질 때가 됐다고요. 이 먼 곳에서 혼자 있기가 얼마나 외로운지 아세요?”
“너 얼마 전에 파티하는 사진, 잡지에 났던데?”
“쉿! 쉿! 크리스 제발.”
왜 나를 이렇게 무서워하는 건지 잘 모르겠다. 내가 파티를 하지 말라고 한 것도 아닌데. 그사이에 엘리베이터는 내가 머무는 층에 도착했다.
“어차피 네 인생이니까 하고 싶은 건 다 해도 되는데, 마약만 하지 마라. 내가 너 처음에 노래 부르고 싶다고 했을 때 말했었잖아. 뭐든 경험해 보라고.”
“사부님도 파티 같이 가실래요?”
대답 대신에 내 방문을 열고 들어가 침대에 누웠다. 해안가가 보이는 큰 창문이 있어 방 안이 탁 트여 보였다. 이래서 오션뷰, 오션뷰 하는 거구나.
“리가 그런 데 가겠니. 너 혼자 갔다 와.”
“파티 같은 건 됐고, 너는 여기에 왜 있냐. 옆방이잖아.”
옆방에 있어야 할 크리스가 내 방에 있었다.
“들어와서 바로 눕는 거야? 여기 미국이잖아. 여름의 해안가!”
“나가자는 거구나. 말 돌려서 하지 마, 알아듣기 힘드니까.”
침대에서 몸을 일으켜 창가에 서서 바닷가를 바라보았다. 에메랄드빛으로 물든 바다, 그 안에서 서핑을 즐기는 사람들과 수영을 하는 사람들.
파라솔들이 꽂혀 있는 모래사장이 금빛으로 물들어 있었다. 그 모습을 바라보니 바닷물에 들어가고 싶어졌다.
“수영복이나 사러 갈까?”
한여름의 해안가이기 때문일까, 상가에는 엄청나게 많은 사람이 있었다. 그중에 유명 의류 브랜드 매장에 들어가서 수영복을 골랐다.
수영복 같은 분위기가 나질 않는 반바지에 가까운 거로. 붉은색 바탕에 검은색과 하얀색의 꽃 그림이 그려져 ‘나 지금 휴가 왔어요~’라고 알려 주는 것만 같은 수영복이었다.
그리고 갈아입을 옷도 몇 벌. 저기 이 수영복과 어울릴 것 같은 녹색에 흰 꽃 그림이 그려진 셔츠가 보였다. 위아래 옷이 어울리게 입어야지.
“다 골랐어?”
“응, 응! 수영복처럼 몸에 달라붙은 건 좀 부끄러워서 그냥 옷들만 골랐어.”
바닷가에 보이던 사람들이 모두 수영복을 입고 있지는 않았다. 그냥 티셔츠를 입고 돌아다니는 사람들도 있었고, 수영복을 입을 수 없는 몸매를 가진 사람이 더 많기도 했다.
그래도 크리스 정도면 수영복을 입을 만한 몸매는 될 텐데 얘도 참 부끄러움이 많다니까. 에릭은 요즘 파티도 다니고 완전 물 만난 고기 같던데.
“편한 대로 해. 수영복 입고 싶으면 입는 거고, 입기 싫으면 안 입는 거지. 누가 꼭 입으라고 하는 것도 아니잖아.”
크리스가 오랜만에 활짝 웃으며 대답한다.
“응! 어떤 옷 샀어? 보여 줘.”
나는 내가 골라 담은 옷들을 보여 주었다. 급속히 굳어가는 크리스의 얼굴.
“아저씨 같아….”
“아니, 이게 왜? 휴양지에 왔으면 휴양지에 맞는 옷을 입어야지!”
‘나 놀러 왔어요’라고 기분을 내줘야 하는 거 아니냐. 놀러 왔는데 너무 깔끔하게 입는 건 죄악이라고.
호텔로 돌아와 이른 저녁을 먹으러 나갈까 고민하고 있었는데, 에릭이 커다란 봉투를 들고 왔다.
“미국에 오셨으면 이건 꼭 먹어 봐야 해요.”
봉투 안에서 꺼내놓은 건 햄버거와 감자튀김.
“햄버거를 그렇게 호들갑 떨면서 갖고 올 건 아니라고 생각하는데….”
“무슨 말씀을. 이건 차원이 다르다고요. 먹어 보면 사부님도 반할 거예요. 크리스 불러올게요.”
포장이 되어 있는 커다란 햄버거 봉투를 열자 두툼한 패티 위에 치즈가 녹아 있었다. 특유의 기름진 냄새가 올라와서 참을 수가 없었다.
“헙.”
굉장한 맛이다. 엄청난 기름기가 느껴지지만, 이 맛에 햄버거를 먹는구나 싶은 그런 맛. 아까 에릭이 말한 대로 지금까지 먹어 왔던 햄버거와는 차원이 달랐다. 베이컨이 적절하게 끼어 있어 짭짤한 맛도 주었다.
“와 이거 맛있네. 미국까지 와서 햄버거를 왜 먹어야 하나 했는데….”
그때 방문이 열리면서 에릭과 크리스가 들어왔다.
“앗! 먼저 먹고 있으면 어떻게 해!”
“내 말이 맞죠? 참을 수가 없는 맛이라니까요.”
크리스는 같이 먹어야 한다며 칭얼댔고, 에릭은 자신의 선택에 만족스러운 듯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이거 진짜 맛있네. 후아, 배부르다.”
둘이 포장지를 뜯기도 전에 다 먹어 버렸다. 중간에 멈출 수가 없는 맛이었다. 사이즈가 좀 컸기 때문일까. 다른 건 건드리지도 않았는데 배가 불렀다.
“나 밖에 구경 좀 하고 올게. 먹고 있어.”
배를 꺼뜨리려 산책을 나왔다. 밤바다를 보고 싶은 마음도 있었다.
바닷가에 가기 위해 상가를 지나가는데, 아까 먹었던 햄버거집이 보였다. 그 옆에는 아이스크림. 후식으로 아이스크림이나 먹어야겠다고 생각해서 가게에 들어가는데, 어디선가 기타 소리가 들려 왔다.
자신도 모르게 홀리게 되는 그런 기타 소리였다.
음악이 싫은 음악천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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