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 musical genius who hates music RAW novel - Chapter 60
059화
“우와! 리! 여기 봐 주세요! 여기에요!”
“저도 한번 봐 주세요!”
재지와 함께 레드 카펫을 밟고 양옆에 늘어선 사람들을 바라보자, 그들의 입 모양과 함께 무슨 말을 하는지 들리기 시작했다.
이들은 그저 시끄럽게 소리를 질러 대는 것이 아니라, 다들 나에게 한 가지씩 원하는 것들을 말하고 있었다.
재지에게 등을 떠밀려 안전선을 지키는 보안 요원들이 서 있는 곳으로 다가갔다.
넓지 않은 틈새 사이로 나를 향해 손을 내밀고 눈짓을 하는 그들의 손에 나의 손을 가져다 대었다.
이렇게 손이 닿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가장 앞줄을 지키기 위해 움직이지도 못하고 기다리고 있었다는 걸, 이들의 뒤에 이어진 끝도 보이지 않는 인파를 통해 알 수 있었다.
내가 손을 내민 것은 그것에 대한 일종의 보상이었다.
재지와 내가 마지막 입장이었으니 이제 이곳을 지날 사람은 아무도 없을 테니.
그들이 나에게 더 가까이 다가오고 싶어 하는 것이 들썩이는 철제 안전 바리케이드를 통해 느껴졌다.
“내 손에 리의 손이 닿았어! 이제 이 손은 씻을 수가 없는 손이야!”
“원래부터 팬이었지만 앞으로도 리의 음악만 들을래요!”
“리가 팬들을 좋아하지 않는다는 말은 역시 헛소문이었어!”
그저 손만 닿았을 뿐인데도 세상을 다 가진 것처럼 말을 하며 만족해하는 사람들.
내가 가장 당황했던 것은 자신이 사용하는 악기를 들고 와서 사인해 달라고 하는 사람들이었다.
나는 제대로 다룰 수 있는 악기가 없는데도 말이다.
“여기 제 바이올린에 사인 한 번만 해 주시면 안 돼요?”
“괜찮겠어요? 난 바이올린을 다룰 줄 모르는데?”
레드 카펫을 몇 걸음 걷지도 않았지만 조금은 익숙해졌는지 이제는 답변도 할 수 있었다.
“전혀 상관없어요! 저는 리의 음악을 듣고 바이올린을 시작했거든요. 그래서 항상 리의 음악을 연습하고 있어요! 여기에 사인을 해 준다면 내가 연습할 때마다 당신의 힘을 얻어서 더 좋은 연주를 할 수 있을 거예요!”
내 음악을 듣고 바이올린을 시작했다는 말에 가슴이 뭉클해졌다.
한편으로는 사인한 바이올린을 사용하다 보면 사인이 지워지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떠올랐지만, 뭐 내 바이올린도 아니니까.
그렇지만 피아노는 간혹 만져 보았지만, 바이올린은 건드려 본 적도 없는데 내 기운을 받는다고 잘 될까?
그녀가 가져온 검은색 유성 마커로 바이올린의 뒷면에 사인해 주었다.
“저는 같이 셀카를 찍고 싶어요!”
셀카를 요구하는 일이 많은지, 보안 요원이 셀카를 찍고 싶다고 한 사람의 휴대폰을 받아서 나에게 건네주었다.
내 셀카도 찍어 본 적이 없어서 방법을 몰라 조금 헤매고 있었더니 보안 요원이 사진을 찍어 주었다.
“미안해요. 내가 셀카를 찍어 본 적이 없어서.”
“아니에요! 같이 사진을 찍었는걸요. 꼭 셀카가 아니라도 괜찮아요!”
휴대폰을 돌려받은 여성 팬은 만족했는지 활짝 웃어 보였다.
아직 입구를 향한 수십 개의 계단 중에 하나도 올라가질 못했는데 정말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재지가 나의 팔을 잡아끌지 않았다면 아마 이곳에서 몇 시간을 보냈을지도 모르겠다.
그래미 어워드의 시상식이 끝날 때까지 여기에 붙잡혀 있지 않았을까?
“흐흐. 나는 리가 현존하는 음악가 중에 상을 가장 많이 받았다고 알고 있었는데, 아직 팬서비스가 능숙하지는 않네? 레드 카펫은 처음이라서 그런가?”
“휴우~ 고마워요. 재지. 그래미는 처음이라. 정신이 하나도 없네요.”
확실히 그랬을지도 모른다. 물론 국제 콩쿠르의 시상식도 레드 카펫을 깔아 두기는 하지만, 이렇게 사람들이 몰려드는 행사는 아니었으니.
“난 내가 알던 브로의 모습이 아니라서 재밌는데? 내가 알던 리는 뭐든 다 알고, 앞장서서 지휘하며 즐기던 모습이었는데 말이야.”
“처음이라 조금 당황했을 뿐이에요.”
그 후에 맞이한 포토 존은 재지가 먼저 들어가서 시범을 보였기에 조금은 쉽게 넘어갈 수 있었다.
기자들이 ‘여기 보세요, 저기 보세요’ 하는 것까지는 괜찮았지만, 어떤 포즈를 취해 달라고 하는 것은 도무지 적응되질 않았다.
“벌써 지치면 어떻게 해. 아직 시상식장 입구에도 들어가질 못했는데.”
재지의 웃음이 오늘따라 더 내 가슴을 찔러 들어왔다.
“집에 가고 싶어요, 진짜.”
“하하하하하. 오늘 들은 말 중에 가장 재밌는 말인데?”
아직 스테이플스 센터 로비에도 들어가지 못했건만, 나의 다리는 조금씩 떨려오기 시작했다.
포토존에서 로비까지 수백 명의 기자들이 자리싸움하며 서 있었고, 나와 재지는 그 사이를 가로질러 로비에 들어갈 수 있었다.
겨우겨우 행사장 안에 들어갈 수 있었던 나는 이마에서 땀을 흘리며, 몇 시간이나 걸려서 받은 메이크업을 지워내고 있었다.
나에게 주어진 자리는 하필 가장 앞자리. 무대의 바로 앞에 있었다. 내 옆에 앉은 사람은 재지.
의자의 팔걸이 밑에는 생수병이 하나 놓여 있었다.
“이게 끝이야? 음식도 없고. 술도 없고.”
실망이 너무 커서 나도 모르게 본심이 입으로 나와 버렸다.
“여기는 디너 쇼가 아니야, 브로. 행사가 끝난 다음에 애프터 파티에서 음식을 마음껏 먹을 수 있을 거야. 물론 도망가지 않는다면 말이지. 크크.”
이상하게 재지는 나에 대해 너무 많은 걸 알고 있었다. 내가 그런 곳에 참석하지 않을 거라는 것도 이미 느끼고 있었나 보다.
“차라리 집 앞에 있는 햄버거집에 가겠어요. 파티라니 생각만 해도 끔찍하다고요.”
“그래도 오늘은 가야 할걸? 이 안에 있는 사람들이 모두 너만 보고 있는 거 보이지 않아? 모두 너를 붙잡아 옆에 앉혀 두고 싶어 안달이 나 있는 사람들이라고.”
재지가 하는 끔찍한 말에 주위를 둘러보자, 눈을 마주치는 사람들이 하나둘 고개를 돌려 아닌 척을 한다.
순간 나 자신이 아프리카에서 사자에게 쫓기는 톰슨가젤이 된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
“난 운동을 안 하니까 고기가 그렇게 맛있지는 않을 거예요.”
“크크크크, 네가 하는 말들을 들어 보면 이상한 게 참 많아. 아마 그 이상한 점에서 오는 감성 같은 게 있는 모양이야.”
뭐가 그렇게 이상한지는 모르겠지만 나에게 이상하다는 말을 자주 하는 재지였다.
쇼를 구경하려면 팝콘 같은 거라도 있어야 할 텐데, 내게 주어진 것은 물 한 병이 전부. 이번 그래미는 철저히 방관자로 있겠다고 했지만, 입이 심심한 것은 참을 수 없었다.
항상 무언가를 시청할 때 감자 칩과 초콜릿이 함께였기 때문일 거다.
“초콜릿이라도 가져오는 건데….”
“이거 드실래요?”
나의 혼잣말에 재지가 있는 오른쪽이 아닌 왼쪽에서 감자 칩이 다가왔다.
내 왼쪽에 앉아 있던 사람은 엘리 베일리스. 그래미 트로피를 몇 번이나 들어 올린 10대 시절부터 슈퍼스타로 불리는 여자.
자신이 부르고 싶은 노래만 만든다고 알려진 조금은 특이한 사람이었다. 그 부르고 싶은 노래들이 모두 특유의 암울함이나 모호함을 음악으로 표현하는 데 특화된 싱어송라이터.
“고마워요, 엘리! 아, 엘리라고 불러도 되죠?”
“베일리스도 성이 아니라 이름이기는 하지만, 편한 대로 부르세요. 나도 리라고 부를게요.”
엘리가 웃는 모습을 처음 보았다. TV에 가끔 얼굴을 비추는 그녀의 얼굴은 항상 무표정에 가까웠었으니까.
“웃는 얼굴은 처음 보네요.”
“나 자주 웃는 편인데? 아빠나 오빠랑 가끔 팟캐스트 라디오 진행을 할 때는 미친 듯이 웃기도 해요. 언제 한번 들어 보세요.”
초록색과 형광색을 좋아한다고 알려진 것처럼 온갖 녹색들이 그녀의 몸에 둘려 있었다. 머리카락부터 귀고리, 셔츠와 운동화까지도.
참 편하게도 입고 왔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크리스가 옷이 꼭 필요할 거라고 해서 맞춰 입은 투피스 정장에 나비넥타이를 하고 있는데 말이지.
이 자리에 있는 사람 중에 엘리만큼 자유분방하게 입은 사람은 없었지만, 저렇게 입고와도 된다는 걸 자리에 앉고 나서야 알게 되었다.
아무튼 그녀가 나눠준 감자 칩 덕에 조금은 입이 심심하지 않을 수 있었다. 탄산음료가 없어 물을 마셔야 했지만.
굉장히 편안하고 마치 공연을 구경하러 온 것처럼 자유로운 분위기가 스테이플스 센터 안에 퍼져 있었다.
[신사 숙녀 여러분! 곧 그래미 어워드 시상식이 시작됩니다. 자리에 앉아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학교로 따지면 예비종 같은 걸까. 본 행사까지 참 길기도 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자리에 앉은 지 얼마나 되었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시간이 꽤 지나간 것 같은데 이제서야 시작을 하려는지 무대 위로 악기를 든 사람들이 올라오고 있었다.
자리를 잡은 사람들이 각종 악기로 연주를 하기 시작한다. 악기 소리에 맞춰 조명들이 현란하게 움직이며, 이곳이 음악과 관련된 행사를 하는 중이라는 것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제75회 그래미 어워드 시상식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큰 박수로 맞아주십시오. 올해 호스트를 맡아 주신 통산 15회의 그래미 위너, 엘리야입니다!]무대에서 연주하는 밴드의 음악이 아직 끝나지 않았지만, 박수 소리와 함께 엘리야가 등장했다.
[안녕하세요, 안녕하세요! 좋은 저녁입니다. 2020년에도 저를 만났었으니까 13년만인가요? 아니 2019년에도 호스트를 맡았었으니 14년 만이라고 해 두죠.저는 아니지만, 숫자에 불편함을 느끼는 분들도 있을 수 있으니까요.
어쨌거나 이 자리에 다시 한번 설 수 있어서 영광입니다. 제 친구 지젤의 남편이 제 앞에 앉아 있어서 긴장이 크게 되질 않네요. 지젤, 절 위해 남편을 보내줘서 고마워요!]
엘리야가 과장된 몸짓으로 카메라를 향해 하트를 날리자, 안에 들어와서 앉은 사람들이 모두 웃었다.
[많은 분이 아시다시피, 이번 그래미가 더욱더 놀라운 것은 아까 제가 말했었던 지젤의 남편인 재지의 옆에 있는 사람 때문입니다. 우리가 그토록 만나고 싶어 했던 사람이 앉아 있거든요.]엘리야가 서 있는 무대 뒤편의 스크린에 내 얼굴이 나왔다.
감자 칩을 먹으면서 얼굴에 부스러기들을 다 묻히고 있었는데, 그 부스러기들의 입자 하나까지 보이는 초고해상도 스크린이었다.
꼭 이런 비춰도 이런 타이밍에 카메라가 들이 댈 줄이야.
그래도 얼굴을 비춰 주어 카메라가 있는 방향을 향해 손을 흔들었더니 뒤에서 엄청난 박수 소리가 들려왔다.
스크린의 주인은 다시 엘리야를 비춰주었다.
[‘만나서 반갑습니다, 이정현 씨.’내가 당신의 이름을 정확하게 발음하고 싶어서 얼마나 연습했는지 당신은 아마 모를 거예요.]
무대 위에서 엘리야가 나를 바라보며 한국어로 또박또박 만나서 반갑다고 말했다.
나조차도 가끔 전화하는 가족들 외에는 한국어를 들을 일이 없었기에, 조금 기분이 이상해졌다.
엘리야는 고개를 돌려 객석의 중앙을 바라보고 진행을 이어갔다. 환영사와 약간의 농담들, 그리고 시상식 중간마다 막간 공연을 하게 되는 사람들을 소개했다.
[오늘의 첫 번째 퍼포먼스로 그래미를 열어 보죠. 에릭과 제이드가 무대를 꾸며 줄 겁니다. 큰 박수로 맞아 주세요!]그리고 본격적으로 그래미 어워드 시상식을 시작하는 것을 알리는 호스트, 엘리야.
그렇게 쇼가 시작되었다.
음악이 싫은 음악천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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