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 musical genius who hates music RAW novel - Chapter 65
064화
이름도 없는 125번 훈련병으로 살았던 훈련소 기간이 끝나던 퇴소식날.
누나들과 어머니 그리고 크리스가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머리 봐, 밤송이 같아. 크크크크.”
훈련소 때문에 짧게 자른 내 머리를 만지며 크리스가 말했다.
“지금 많이 즐거워해라. 내가 이런 머리 하는 건 다시 볼 수 없을 테니까.”
고작 3주밖에 되질 않는 예술 체육요원 훈련 기간이었지만, 머리는 짧게 잘라야 했다.
현역병보다는 적당히 긴 머리였지만, 훈련병끼리 머리를 잘라 주는 것을 믿을 수가 없어서 건드리질 않았더니 제멋대로 자라 있었다. 말 그대로 밤송이처럼.
훈련소에 들어가기 전에는 정식 입대도 아닌데 그 정도는 봐주었으면 좋겠다고 생각을 했지만, 들어가고 나서야 짧은 머리가 편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땀이 나도 쉽게 닦을 수 있고 씻기도 쉬웠으니까.
“얼른 타. 기자들 몰려오기 전에 빨리 빠져나가자.”
퇴소의 해방감을 느끼기도 전에 기자들이 몰려와 차를 타고 훈련소를 빠져나가야 했다.
“그러면 이제 어떻게 할 건데?”
나와 함께 차의 뒷좌석에 앉은 정희 누나는 나에게 앞으로의 계획을 물었다.
“대사관에 국적 신청해 뒀으니까, 그거 받고 영국 가야지. 할 일이 많아. 미국에 가서 직원들도 뽑아야 하고.”
국적을 신청한다고 하더라도 바로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 검토하는 시간과 승인되는 시간이 필요하다.
영국의 경우에는 지속해서 귀화를 권했기에 그렇게 오랜 시간이 걸릴 것이라는 생각은 들지 않았지만, 미국의 경우에는 이번에 처음 가 보았기 때문에 알 수 없었다.
워낙에 국적 없이 미국 내에서 활동하는 사람들이 많았기에, 미국은 국적에 대한 것을 그렇게 크게 신경 쓰지 않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캐나다나 유럽의 사람들이 미국 내에서 활동하는 것을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었으니까.
하지만 내 예상과는 다르게 미국의 국적이 영국보다 더 빠르게 승인이 되었는데, 일주일이 지나기 전에 대사관 직원이 방문해서 결과를 알려주었다.
“이 서류를 갖고 미국 내 법원에 방문하셔서 선서만 하시면 바로 승인이 될 겁니다.”
“아, 네. 감사합니다. 서류도 직접 가져다주시고.”
“뭘요. 이정현 씨가 귀화하겠다고 하셔서 저희 대사님이 아주 기뻐하시던데요.”
“하하, 다행이네요.”
그리고 이날 저녁 뉴스에 어떻게 알았는지 나의 미국 국적 획득에 대한 뉴스가 나왔다.
[얼마 전 그래미 어워드에서 5관왕을 차지한 음악가 이정현 씨가 미국 국적 획득을 타진했다는 정보를 저희 뉴스타임이 긴급 입수하였습니다.얼마 전 예술 체육요원으로 병역의 의무를 마친 음악가 이정현 씨가 미국에 귀화를 요청한 정보를 미 대사관 직원의 측근에게서 들을 수 있었습니다.]
“아오, 웬일로 빠르게 처리해 준다고 기뻐했더니만 아주 그냥 동네방네 광고를 했네, 광고를 했어.”
아무래도 지금 미 대사가 나를 자국민으로 받아들이는 데 일등 공신인 것처럼 포장을 해서 광고를 한 것 같다.
이 때문에 양재동 집 앞은 오랜만에 기자들로 둘러싸여 있었다.
“한국의 기자들은 항상 미리 연락도 없이 찾아오는 거야?”
“내가 인터뷰 요청을 안 받아서 그런다고 하는데, 받아도 그냥 찾아오는 건 항상 똑같더라고.”
크리스는 한국의 기자들을 마주한 적이 없기 때문에 이들의 행동에 대해 이해를 하지 못했다.
심할 때는 초인종도 안 누르고 막무가내로 문을 열려고 하기도 하고 참 제멋대로다. 취재를 거부하면 협박하기도 하고, 이러면 강도랑 다를 게 뭐가 있냐. 그냥 경찰에 신고해 버릴까.
저 사람들이 말하는 국민들이 알 권리를 충족시켜 주는 것이 기자의 의무라고 한다면, 나에게도 말하지 않을 권리가 있는데 그걸 자기네들이 좋을 대로 해석하는 것들이다.
내가 저들에게서 죄인처럼 집 안에 숨어 있어야 할 이유는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현관문을 열고 밖으로 향했다.
대문밖에 여러 겹으로 기자들이 기다리고 있는 것이 보였다.
숨을 들이마신다. 들이마실 수 있는 만큼 최대한.
“내가 당신네 같은 사생활이라는 게 무슨 의미인지도 모르는 기레기들 때문에 한국을 떠나려는 거라고! 사람 그만 귀찮게 하고 좀 꺼져!”
오랜만에 소리를 질렀다. 폐 안에 한 줌의 공기도 남아 있지 않은 느낌. 스트레스가 풀렸다. 어릴 때부터 이 말을 얼마나 오랫동안 하고 싶었는지 모른다.
난 이제 이미지 관리 따위는 하지 않을 거다. 한국의 기자들에게 잘 보여 봤자 좋은 것이 없다는 걸 이미 경험했으니까.
이날 저녁에는 또 다른 뉴스가 나왔고, 그 뉴스에서는 내가 기자들에게 시달리는 것이 싫어 한국을 영영 떠나려 한다는 말이 나왔다.
뉴스는 내가 마치 한국의 국적을 포기하려고 한다는 투의 말투로 말을 했는데, 그럴 거면 내가 훈련소를 왜 갔겠냐. 안 가고 그냥 외국으로 튀었겠지. 바본가?
확실히 뉴스의 힘은 강력했다.
“야, 너 소리 지르는 거 아홉 시 뉴스에 나오더라? 그거 보고 사람들이 국민청원도 올리고 난리 났어, 지금. 사생활 보호법인지 뭔지도 생긴다더라.”
“그런 거 몰라. 음료수 사러 편의점도 못 가게 막고 있잖아. 짜증 나게.”
조금 충동적으로 저질렀는데 생각보다 효과가 좋았다. 집 앞에 진을 치고 있던 기자들은 이제 보이지 않았다.
“너답네. 나는 네가 지금까지 어떻게 참았는지 모르겠다. 평소에 나 대하듯이 기자들한테 대했으면 진작 안 찾아왔을 텐데.”
수원은 그렇게 말하더니 자조적으로 웃었다. 갑자기 저 표정을 보니 미안함이 밀려왔다.
“됐고. 구했냐?”
마치 어린애들이 야동 구했냐고 물어보는 말투 같았지만, 부탁한 것은 야동 같은 것이 아니었다.
나는 수원을 통해 괜찮은 세션을 수배했다. 리카르도와 함께 내 곡을 연주해 줄 기타리스트와 베이시스트, 키보디스트와 드러머를 원했다.
“기타리스트는 구했는데 네 마음에 들지는 모르겠다.”
“왜?”
“성격이 지랄 같거든.”
성격이 지랄 같은 건 괜찮다. 연주자가 연주만 잘하면 되지 뭐. 성격이 연주해 주냐.
“연주만 잘하면 성격 같은 건 괜찮아. 외국에서 오래 지내야 하는데 영어는 좀 해?”
“내 생각에는 영어 같은 건 전혀 못 할 것 같은데, 일단 만나 보고 나서 결정해라.”
그렇게 부푼 기대를 안고 새로운 기타리스트가 될지도 모르는 사람을 만나러 나간 자리.
“야, 이! 사기꾼아!”
나는 수원을 향해 소리를 칠 수밖에 없었다.
수원이 데리고 나온 사람은 고등학교 밴드를 같이 했던 유자, 유재욱이었으니까.
“작년에 너 만나러 가고 뭐 하고 우리 예전 생각하다가 유자 떠올렸잖아.
그래서 뭐 하나 싶어서 알아봤더니 얘가 지금 한국에서 꽤 잘나가는 기타리스트더라고. 단가가 안 맞아서 우리 회사에서는 쓴 적이 없지만.”
“잘 지냈냐?”
와…. 낙원상가에서 ‘만 원만 깎아주세요’ 하면서 스트라토캐스터를 샀던 놈이 기타리스트가 되었다니. 내가 들었던 이야기 중에 가장 놀라운 이야기였다.
유자가 나를 향해 씨익 웃어 보일 때 예전의 그 얼간이 같던 유자의 얼굴이 남아 있는 게, 그리 나쁜 느낌은 아니었다.
수원이와 유자가 나와 함께 있는 이곳은 커피숍이었지만, 셋이 함께 있다는 것만으로도 고등학교 동아리방의 분위기가 느껴지는 것 같았다.
“내 소식은 뉴스로 봤을 거 아냐. 너는 잘 지냈냐?”
“요즘엔 괜찮게 산다. 얼마 전에 유지현이 미국 진출하면서 한국 음악 시장이 호황기라 몸값도 비싸졌고.”
“서른이 내일모레인 남자 셋이 커피숍에서 이게 뭐 하는 거야. 차라리 삼겹살에 소주나 먹자고 할걸 그랬나 봐.”
10년 차 기타리스트가 된 유자는 얼굴에서 자신감이 묻어났다. 더는 내가 기억하는 초보의 얼굴이 아니었다.
“영어는 좀 해?”
“영어 같은 건 몰라. 기타 말고 다른 건 생각도 안 해 봤거든. 군대 있을 때도 연습은 꾸준하게 했어. 기타리스트가 기타만 치면 되는 거 아니냐?”
군대에 기타를 가지고 갈 수 있나? 어떻게 연습을 했다는 건지 알 수는 없었지만, 연습을 했다면 한 거겠지.
“그런데 너도 참 대단하다. 영어도 못 하면서 외국에 나가겠다고? 연주할 때는 상관없겠지만 생활하는 게 불편할 텐데?”
“나 처음에 기타 시작할 때 정현이 네가 했던 말 기억나냐?”
내가 무슨 말을 했더라? 얘한테는 워낙에 말을 많이 해서 무슨 말을 했는지 기억나지도 않는다.
“모르지. 너도 네가 한 말을 모두 기억하고 살지는 않을 거 아냐.”
“‘기타리스트는 기타로 말해야지 입이 아니라’.”
아…. 그런 말을 한 것 같기도 하고. 하도 입으로 나불대면서 에어기타를 쳐 대서 했던 말 같은데. 내가 했던 말로 내 입을 막아 버리네.
“내가 그랬냐?”
“나 그 말 듣고 상처받았는데 상처 준 놈은 기억도 못 하네. 역시 이게 가해자의 법칙인가?”
“야. 솔직하게, 너 그때 진짜 못 쳤었어. 내가 아니라 누가 보더라도 그렇게 말했을 거야. 그런 사람한테 잘 친다고 말해 주는 게 더 나쁜 거야.”
“그때는 그때고. 내 입으로 말하기는 좀 그런데, 지금은 꽤 친다.”
“와. 이 근자감 보소. 일단 확인은 나중에 날 잡고 하기로 하고, 미국 대사관 가서 워킹 비자부터 받아.
보증은 내 회사에서 해 줄 테니까. 돈 몇 달러 들어가는데 그건 영수증 갖고 오면 회사에서 영수증 처리해 주니까.”
“적당히 마무리하고 나가서 맥주나 한잔하자.”
유자와 둘이 아웅다웅하고 있는 모습을 보고 있던 수원이 맥주나 마시러 가자는 말을 해서, 우리는 대낮부터 치맥을 달리기 위해 자리를 옮겼다.
수원이 데려간 곳은 칸막이가 쳐진 고급스러운 분위기의 치킨집. 사실 치킨집이라기보다는 조금 다른 야릇한 분위기였긴 하지만, 다른 사람들이 시야에 보이지 않는다는 것만으로 나는 만족할 수 있었다.
항상 나를 괴롭히는 것은 음악과 사람이었으니까.
오랜만에 만난 반가운 친구와 맥주잔을 부딪치며 이야기하는 건, 내가 생각하던 것보다 더 즐거운 일이었다.
그리고 치맥은 환상의 조합이었다. 영국이나 미국에서는 안주를 먹는 일이 많이 없으니 안줏거리라고는 땅콩이나 나쵸 정도였다. 그런데 한국은 안주로 책도 낼 수 있을 것만큼 양이 많았다.
오랜만에 만난 친구와의 회포를 그렇게 풀고 마음속으로 그렇게 바라던 해장국을 체험해 본 것은 다음날이었다.
“어후. 돌았어! 돌았어. 대체 술을 왜 그렇게 잘 먹는 거야.”
속은 조금 나아지기는 하지만 엄청나게 속이 편해진 것은 아니었다. 그래도 매번 커피만 마시던 것보다는 나았다.
다만 알게 된 것은 해장국을 먹는다고 엄청 괜찮은 건 아니구나 라는 것.
내 안에 있던 해장국에 대한 판타지가 조금 무너져 내렸다.
“리, 요즘에는 술을 마시면 너무 많이 마시는 것 같아. 예전에는 맥주 한두 잔만 마셨었잖아.”
“친구들이랑 술 마시는 건 처음이었어. 지난번에는 누나가 끼어 있었잖아. 이제는 많이 마실 일 별로 없을 거야.”
어머니도 일 때문에 나가신 텅 빈 집에 크리스와 단둘이 남아 있었다. 단둘이 남으니 잔소리를 했다. 가끔 보면 나보다 어리다는 걸 잊게 된다. 영국 엄마 같달까.
아차. 영국 생각을 했더니 알버트가 생각이 났다. 전화해서 약속을 잡아야 하는데 지난 두 달 동안 떠올리지도 못하고 있었다.
나는 서둘러서 전화기를 꺼내 그에게 전화를 걸었다.
“늦어서 죄송합니다. 이곳에서의 일정이 늦게 끝나서요.”
[아무 일 없으시다니 다행입니다. 새벽에 전화하셔서 다급한 일이 있는 줄 알았습니다.]어? 젠장. 매번 LA에서 전화를 걸어서 시차를 잘못 계산했다. 런던은 LA에 비해 8시간 빠르고 서울과 비교해 9시간 느리다.
“앗, 정말 죄송합니다. 지금 제가 한국이라는 걸 깜박하고 있었네요. 시간 계산을 잘못했어요.”
[괜찮습니다. 그럴 수도 있지요. 그러면 곧 돌아오시는 겁니까?]“네, 4월에 돌아갈 것 같습니다.”
“감사합니다. 알버트 경.”
전화를 끊고 한숨 돌릴 수 있었다. 숙취로 울렁거리는 속을 뒤로한 채 억지로 정신을 차리며 생각했다.
한국의 일이 마무리가 되었으니 슬슬 영국으로 돌아가 볼까.
“어후, 그전에 해장국부터 한 그릇 더 마셔야지.”
음악이 싫은 음악천재
x