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 musical genius who hates music RAW novel - Chapter 68
067화
처음 악보 읽는 법을 배우던 날이 떠올랐다. 콩쿠르에 나가기 위해 윤주란 교수에게 레퍼런스를 배우던 날.
“그때 좀 열심히 해 둘걸….”
메건을 따라 오선지에 펜으로 열심히 쓰다가 예전에 열심히 배워 둘 걸 하는 후회가 들었다. 해보지 않은 일을 한다는 건 생각보다 어려운 일이었다.
“그때가 언제예요?”
“콩쿠르 나가던 때요. 악보 안 보고 레퍼런스만 듣고 따라 불렀거든요. 그때 열심히 악보를 배워 놨으면 지금 이렇게 배울 필요가 없을 거 아니에요.”
악보를 그리는 일은 생각보다 손이 많이 가는 작업이었다. 마우스로 클릭해서 만드는 프로그램도 있었지만, 그것보다는 펜으로 그리는 편이 빠르기에 일일이 손으로 그려야 하는 작업.
“정현 님은 신기한 사람이에요. 어떻게 악보 그리는 법도 모르면서 이런 음악을 만들 수 있어요?”
“저 같은 사람 생각보다 많을걸요.”
세상에 알려진 음악가 중에 악보를 읽지 못하는 사람은 생각보다 많다. 화가 중에도 그림을 배우지 않았던 사람들이 많았다고 하지만, 음악가도 마찬가지.
음악이건 그림이건 결국에는 자신의 안에 있는 감정을 표출하는 것이 전부인 작업이니까.
음악을 만드는 일이 누군가에게 배워야만 할 수 있는 일은 아니라고 생각했었는데, 악보를 그리는 건 배워야 했다.
프로그램에서 재생을 누르고 음을 확인하고 악보를 그린다. 길게 들어서는 그릴 수가 없기 때문에 부분적으로 조금씩 만들어가야 하는 작업.
나는 그냥 머릿속에서 떠올릴 수가 있지만, 메건의 작업은 듣고 그리고 확인하는 복잡한 과정을 거치고 있었다.
게다가 모든 파트가 들어가는 지휘자용 총보를 그리는 일은 연주자용 악보보다 훨씬 어려웠다.
“그러니까, 이 부분에서 피아니시모. 그다음에 메조피아노로 조금 커지게 되는 거죠.”
볼륨 레버 조절만 하면 되던 걸 글씨로 표현하려니까 더 헷갈리는 것 같다.
메건이 작업하는 것을 보고 모르는 것을 물어보면서 작업하는 것만 보고 배우는 건 한계가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역시 한 번에는 안 되네요.”
한 곡 만에 모든 걸 배우려고 했던 내가 도둑놈 심보를 가진 걸 수도 있지만, 하나의 곡에 모든 기호가 들어가지는 않았던 것도 그 이유.
“그래도 금방 나아질 거예요. 이 곡을 직접 만드신 거잖아요. 그렇지만 프로그램에 나오는 악보는 참고할 게 못 되네요. 실제 악보랑 다르게 나오는 경우가 많은 것 같아요.”
“그런가요. 프로그램이 조금 더 발전하면 악보를 뽑을 수 있을 거로 생각했는데….”
열심히 악보 작업을 했더니 내가 생각하던 것과 조금 다르게 만들어지는 부분도 있었던 것 같아서, 중간에 수정하는 일도 있었다.
완성된 것은 다음 날.
양이 좀 적네. 최근에 만들었던 곡들은 책 정도 두께였는데, 이건 그 양이 반밖에 되질 않았다.
“뭐, 양은 상관없지. 악보 그리는 건 차차 나아질 거고.”
“사실 정현 님처럼 악보 쓰는 법만 배우려는 사람은 없어요. 다들 음악을 배우는 과정에서 악보를 배우게 되는 거죠.”
그건 남의 사정이니까 신경 쓰지 말자. 나는 나의 일만 신경 쓰기도 바쁘다.
“다음 곡들 악보가 나오기 전에 먼저 리처드 경에게 전해 줘야겠네요.”
1차 녹음을 끝냈다고 했으니 연습할 곡을 던져 줘야지. 이 곡을 연습하는 동안 다른 곡들을 만드는 작업도 해야 한다.
아직은 이미지만 떠올리고 만들지 않은 곡들이니까.
***
“늦어서 죄송합니다. 최근에 일정들이 많아서.”
“괜찮습니다, 리처드 경. 그럴 수 있죠.”
그 일정을 바쁘게 만든 것이 나다. 여기에서 늦었다고 뭐라 하면 내가 진짜 나쁜 놈이 되는 거지.
“연습하는 시간도 조금 빠듯해서 예상했던 것보다는 시간이 조금 더 걸릴 것 같습니다.”
“정말 괜찮아요. 저는 곧 미국으로 넘어가야 하거든요. 일정이나 녹음은 모두 리처드 경이 맡아서 해 주세요. 유니버설과 이야기가 다 되어 있으니까요.”
“알겠습니다. 일단 자세한 이야기는 사무국에서 하시죠. 이번 앨범에 대한 계약서도 준비되어 있을 겁니다.”
이런 것도 계약서를 작성해야 하는 건가 싶지만, 앨범 판매에 따른 수익 분배는 어쩔 수 없지. 돈으로 굴러가는 세상이니까.
사무국에서 수익 분배에 대한 계약서를 작성하고, 유니버설과는 공급 및 실물 앨범에 대한 계약서를 작성했다.
“리처드 경. 이거 받아 주시죠.”
“이건 뭡니까?”
“악보입니다. 1차 녹음을 끝내셨는데 죄송합니다만, 개선점을 정리한 것과 신곡의 악보입니다.”
“오! 신곡의 악보를 벌써 만드셨단 말입니까? 그런데 개선점이요? 설마 을 말씀하시는 겁니까?”
“네. 지난번에 들었을 때 생각해뒀던 건데 이제서야 드리게 되네요.”
지난번 런던 필하모닉의 연주를 들으며 생각해 두었었던 개선점을 이제서야 말할 수 있게 되었다.
몇 년 동안이나 공연의 주 레퍼토리로 삼아왔던 악단의 멤버들에게는 미안하지만, 주 멜로디의 선율이 조금은 복잡한 것이 낫지 않을까 하는 마음도 있었고.
이것으로 리메이크 앨범에 대한 사전 작업은 끝. 아직 새로운 곡은 연습도 되지 않은 상태에서 악보만 전달한 거라, 녹음이 완전하게 끝나려면 한참 멀었지만, 서류 작업은 먼저 끝내두었다.
“초연 일정은 연락을 드리고 잡도록 하겠습니다.”
“알겠습니다. 연락을 주시면 바로 비행기를 타고 날아올 테니까 걱정하지 마세요.”
리처드가 그냥 알아서 다 진행해 주기를 바라는 마음이지만, 연주자가 초연에 작곡가가 얼굴을 비추는 것을 원하는 것도 당연한 일이니까.
그런데 신곡이 한 곡이라고 생각하는 건가? 두 개가 더 있는데 아직 작업을 못 끝냈을 뿐이지.
런던 필하모닉이 상주하는 사우스뱅크 센터를 나와 차를 타러 가는 길에 조금은 후련한 마음이 되었다.
아직 두 번의 작업이 더 남기는 했지만, 영국에서 해야 하는 일 한 가지는 끝냈다는 성취감이 들었다.
해야 하는 일…? 응? 싸늘하다. 무언가 놓친 기분이 들었다.
“아, 알버트! 연락해 주기로 했었는데! 깜박했다!”
그걸 위해서 영국에 왔었는데, 잊어버리고 앨범 작업을 해 버리고 말았네.
나는 급하게 전화를 들어 알버트에게 걸었다.
[바쁜 일은 마무리되었습니까?]“죄송합니다, 알버트 경. 바로 연락을 드리기로 했는데 잊고 있었어요. 방금 런던 필하모닉과 이야기를 마무리 지을 수 있었습니다.”
[괜찮습니다. 메건에게 이야기를 들었으니까요. 허허.]다행히 알버트의 손녀인 메건이 미리 연락해 두어서 크게 일이 잘못되지는 않았지만, 약속을 잡아놓고 잊어버리는 일이 생기지 않도록 크리스에게 말해 두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
다음 날 알버트가 집으로 찾아왔다.
“오랜만입니다. 전화로는 여러 번 통화했지만 이렇게 얼굴을 마주하는 것은 정말 오랜만이네요, 알버트 경.”
“그러게요, 영국에 오시면 바로 만나서 이야기를 할 수 있을 줄 알았는데 서로 너무 바빴군요. 그나저나 반가운 소식을 들었습니다.”
“반가운 소식이요?”
“영국인이 되기로 하셨다는 이야기 말입니다.”
영국 국적과 미국 국적을 같이 신청한 건데 그걸 또 이렇게 받아들이시네.
“하하하. 외국인으로 일을 하기에는 불편한 점이 많아서요. 아직 여권도 나오지 않았습니다. 서류가 통과되었다는 것을 알려 주러 오지도 않더라고요.”
“아, 그건 죄송하게 됐습니다. 제가 알려 드리기로 했었는데 일정이 맞지 않아서…. 여권은 여기 있습니다.”
내가 깜박한 것과 알버트가 깜박한 걸 생각하면 쌤쌤인가. 다행이다. 나 혼자만 잊었다고 생각하면 뭔가 찝찝했단 말이지.
알버트가 건네준 붉은색 여권을 챙겼다.
“감사합니다. 저는 또 대사관에서 깜박한 줄 알았네요. 하하.”
“그런 게 아니라 요인 등록을 하느라 조금 늦었습니다.”
“요인이요?”
“네. 이정현 님이 이번에 보호 인물로 지정되었습니다.”
뜬금없이 보호 인물이라니. 그래서 집 주변을 지키고 있는 건가? 그러고 보니 아서가 알버트 경에게 물어보라고 했었지.
“경호원을 고용해야겠다고 생각하긴 했어도, 나라에서 보호받을 사람이라는 생각은 해 본 적이 없는데요.”
“이정현 님이 이번 3급 대영 제국 훈장 및 기사 서임 후보자에 들어갔기 때문입니다.”
“그건 또 뭔가요?”
“일반 기사 서훈이긴 합니다만, 후보자가 되면 보호 대상에 들어가게 됩니다. 나라의 중요한 인재라는 뜻이지요. 그리고 미스터(Mr) 대신 경(Sir)이 이름에 붙게 됩니다. 그래서 지금 제가 드린 여권에서 곧 호칭이 바뀌게 되기 때문에 오래 쓰지는 못하실 겁니다.”
오. 나는 공작이나 백작 같은 작위를 받아야만 경이라고 부를 수 있는 건 줄 알았는데, 기사 제도라는 게 생각보다 복잡하구먼. 이런 걸 보면 확실히 행정 같은 것은 나와 맞지 않는 것 같다.
“공작이나 백작이 아니더라도 경을 붙이게 되는 건가요?”
“그렇게 될 겁니다. 지금은 귀족 작위는 주어지지 않는 편입니다. 왕족들에게만 주어지고 있지요. 혜택 같은 것이 없는 상징적인 기사 서훈입니다만, 좀 더 많은 활동을 해 주시기를 바라는 마음을 담아 회의에서 결정되었습니다. 국왕 폐하께서 가장 원하시기도 하셨으니까요.”
그러고 보니 리처드는 경이라고 부르지만, 작위를 말한 적은 없는 것 같았다. 나와 비슷한 경우겠지.
“감사합니다. 기사가 된다는 게 조금 부담되기는 합니다만, 주신다면 거절은 하지 않겠습니다.”
“다행입니다. 간혹 거절하는 분이 계시기도 하거든요.”
지금 중요한 건, 호칭에 대한 문제가 아니라 집 문제인데, 이야기가 이쪽으로 흘러가서 차마 꺼내질 못하겠다.
“훈장을 거절하는 사람도 있나 보네요.”
“없지는 않습니다. 어딘가에 소속되는 걸 싫어하는 분들은 거부하기도 하지요. 그나저나 이 집에 관한 이야기를 하려고 합니다만, 괜찮으십니까?”
“네, 그럼요. 집은 어떻게 되었나요? 이제 팔 수 있는 건가요?”
“이 집을 외부에 판매하는 허가를 주기보다, 상응하는 금전적인 혜택을 주는 쪽으로 결론이 났습니다.”
이건 또 무슨 말이야. 알버트의 말은 어려운 단어를 섞어 써서 조금 이해하기 어렵다.
“그건 무슨 말인가요? 돈을 준다는 건가요, 아니면 면세 혜택?”
“세금은 왕실이 아니라 정부 측에서 관리를 하는지라 저희가 드릴 수 있는 부분은 아니고, 이 저택의 시세에 맞는 금액을 드리는 쪽으로 이야기가 되었습니다.”
“그렇군요. 그러면 언제까지 집을 비워 드려야 하나요?”
“자세한 이야기는 월말에 있을 훈장 수여식 때 폐하께서 하실 겁니다. 제가 할 이야기는 아니라서.”
“알겠습니다. 신경을 써 주셔서 감사합니다.”
“별말씀을요.”
“잠깐만요, 알버트 경. 지금 4월 중순인데 월말에 훈장 수여식을 한다고요?”
“네. 이번 달 말에 예정되어 있습니다. 일정이 잡히면 연락을 달라셔서 제가 2주 전에 연락을 드렸었는데, 연락을 받지 않으셔서 전달이 늦어졌네요.”
한 곡 작업을 마치고 조금은 쉴 수 있을 줄 알았는데, 다음 곡 악보 작업이랑 훈장 수여식이 겹치잖아.
전화 거는 거 한번 까먹었다고 일정이 엄청 빡빡해지는구나. 젠장.
음악이 싫은 음악천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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