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 musical genius who hates music RAW novel - Chapter 86
085화
엘레나의 손으로 빚어진 소리는 신시사이저와 연결된 모니터 스피커를 통해 들려 왔다.
한겨울로 달려가는 LA의 날씨에도 봄이 피어오는 것이 느껴졌다.
피아노 벤치에 앉은 엘레나의 뒤에 두 개의 의자를 가져다 놓고, 김시욱과 나란히 앉아 꽃이 피어나는 것 같은 음악을 들었다.
고음을 향해 올라가는 오른손과 그 오른손에서 나오는 음들을 받치는 왼손의 조화. 피아노가 악기의 왕이라고 불리는 이유는 두 가지 이상의 음을 한 번에 표현할 수 있는, 혼자서도 조화로운 곡을 연주할 수 있는 표현력에 있다.
지금 내가 가끔 건반을 만지는 손놀림으로 이런 느낌을 표현할 수 있을까 싶을 정도의 연주. 기다란 손가락이 달린 손을 넓게 펴고 한 번에 한 옥타브를 감싸 쥐는 엘레나.
마치 스케이트를 타고 얼음판 위를 미끄러져 가듯 부드러운 연주를 하는 엘레나의 음악은 발레 공연을 보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차이코프스키는 추운 러시아에서 살아서 꽃이 피는 봄에 대한 환상이 굉장한 사람이 아니었을까. 이렇게 따사로운 음악을 만들어 낸 것을 보면.
게다가 엘레나가 우크라이나에서 태어났기 때문에, 봄에 대한 갈망의 표현이 더 좋은 것일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다.
꽃이 피는 언덕을 지나 따사로운 햇볕을 맞으며 봄을 만끽하는 느낌을 주었던 연주가 끝났다.
“굉장하네요. 발레 공연을 보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어요. 어떻게 이런 연주를 하면서 콩쿠르에 나가지 않았던 건가요?”
“우와…. 대단하시네요.”
나와 김시욱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손뼉을 치며 좋은 곡을 들려 준 것에 대한 답례를 보냈다.
“앗…. 가, 감사합니다.”
고개를 떨구고 부끄러운 듯이 자리에서 일어나는 엘레나는 자신에 대한 이야기를 시작했다.
“열다섯 살 때 발목이 부러져서 더는 무대에 올라갈 수 없게 되었었어요. 키가 갑자기 커 버리는 바람에 몸무게가 늘어나니까, 를르베 상태에서 무게를 감당할 수 없던 거죠.”
“발레는 키가 크면 불리한 점이 많은가 봐요. 를르베는 무얼 말하는 건가요?”
발레는 내가 모르는 분야라서 전문용어가 나오면 이해를 할 수가 없는 부분이 많다. 사실 내가 이해할 수 있는 것은 음악에 한정한 분야가 많아서 다른 분야들 대부분은 모르지만.
“발가락 끝으로서는 걸 말해요. 이걸 하기 위해서 발레를 하는 분들은 체중 관리를 엄하게 하는 편이죠. 공연 전에는 정말 아무것도 먹질 않아요.”
“그렇군요. 그러면 열다섯 살에 피아노로 전향하신 건가요?”
“맞아요. 바로 전향한 건 아니고 일 년 정도 재활 훈련을 했어요. 프리마돈나가 꿈이었거든요. 그런데 한번 부러진 곳이라서 그런지 겁이 나서 안무의 질이 떨어졌다고 해야 할까요. 제대로 된 춤을 추질 못했었어요.”
발레나 무용 같은 음악에 맞춰 춤을 추는 사람들은 박자 감각이 뛰어나다. 물론 격투기를 하는 사람들도 상대방의 스텝에 맞춰 움직여야 하는 부분이 있기 때문에, 박자 감각이 뛰어날 수밖에 없다.
그 말은 어떠한 연주를 하더라도 박자 감각이 틀어지는 일이 거의 없다는 것. 이것은 연주가에 있어서 굉장히 중요한 부분이다. 인간의 집중력은 길게 유지할 수 없기 때문이다.
고개를 숙이고 부끄러워하는 엘레나는 조금 전의 그 화사한 느낌이 사라진, 보통의 너드(Nerd : 모범생. 속어 범생이.) 같은 느낌의 얼굴이 되어 있었다.
“그래도 어릴 때부터 발레를 했으면 좋은 음악들은 많이 듣고 자랐겠네요.”
“네…. 부모님이 데려가 주셔서 상트페테르부르크에 교향악단의 공연을 보러 간 적도 있으니까요.”
“내 생각에 엘레나는 좋은 음악을 듣는 것보다는 자신감을 가지는 게 더 중요할 것 같아요. 조금만 꾸미면 엄청나게 예쁠 것 같거든요.”
“제, 제가요? 저, 전혀 예쁘지 않아요. 저는 그냥 평범하게 생긴 거 아닌가요? 동네에 있는 제 친구들이 훨씬 예쁜데….”
과연 장모님의 나라다. 이 이상 예쁜 사람들이 길거리에 널려 있다는 말인가.
“엘레나는 제가 사람을 붙여 줄 테니까, 바로 피부 미용에 들어가도록 해요. 자신이 다른 사람들보다 예쁘다는 자각을 해야 자신감이 붙게 되니까요.”
“저! 저! 저도 같이 가고 싶습니다. 저도 자신감이 필요합니다!”
“시욱 씨는 아직 어떤 곡으로 나설지 정하지 않았으니, 좀 더 음악을 들어 보셔야 합니다.”
응, 넌 아냐. 엘레나랑 친해지고 싶은 마음은 충분히 이해하지만, 피부 미용 아무리 받아도 안 예뻐져. 진정해.
내 말 한마디에 눈에 띄게 시무룩해지는 김시욱을 연습실에 내버려 두고, 크리스를 찾았다.
“같이 한인 타운에 있는 피부 미용실에 가서 마사지랑 이것저것 받고 와.”
“이분을 데리고 받게 하면 되는 거야?”
“아니, 크리스. 너도 같이 받고 와.”
피부 미용은 전 세계에서 한국이 최고다. 화장품의 품질은 다른 나라가 더 좋을지 모르겠지만, 사우나와 함께 피부 미용 같은 것들을 이것저것 받으면 훨씬 나아지겠지.
나는 40대의 한국 여자와 30대의 서양 여자를 둘이 같이 붙여 놓았을 때, 한국 여자가 더 나이가 어려 보이는 비결은 꾸준한 피부 관리에 있다고 생각한다.
유전적으로 동양인이 더 어려 보인다고는 해도, 어느 정도 관리를 하면 피부 노화를 막을 수는 있으니까.
“나도? 나는 어디 안 나가는데.”
“이번 기회에 피부 관리 좀 시작해. 내가 크리스의 나이를 물어본 적이 없어서 모르겠지만, 이제 적지 않잖아?”
“리보다 두 살 어리거든?!”
나이가 많다는 소리를 하자마자 발끈하는 크리스. 나보다 두 살이 어리면 한국 나이로 스물여덟이라고…. 그러고 보니 나 벌써 서른이 되었네.
“나보다 두 살밖에 안 어렸어? 나는 한 다섯 여섯 살은 어린 줄 알았잖아! 그런데 내 나이는 어떻게 아는 거야?”
“저기, 사장님의 서류 관리를 하는 사람이 저라는 사실을 잊으셨나 봐요?”
나는 모르고 있었는데 상대방은 나에 대해 너무 많은 것을 알고 있었다. 이거 반칙 아닌가?
그렇게 엘레나를 크리스에게 딸려 보내고 나서 나는 다시 연습실로 들어갔다.
김시욱의 본선 곡을 정해야 하기 때문이다.
“엘가의 음악을 좋아한다면, 소품집 위주로 찾아보는 것도 나쁘지는 않을 거예요.”
“엘가의 음악을 좋아해서 예선에 그 곡으로 참가했던 건 아니에요. 그 곡 연주를 그나마 가장 잘해서 참가했던 거예요.”
이쪽도 뭔가 복잡하게 꼬였네. 보통은 좋아하는 곡으로 참여하는 거 아닌가?
“그러면 좋아하는 곡은 어떤 곡인가요?”
“저는 좀 슬픈 음악 쪽이 좋아요. 같은 한국 사람이니까 이해하시죠? 한국 남자들이 좋아하는 음악들. 비즈라든지, 이경호라든지….”
“한국식 락 발라드를 좋아하는 사람이 어떻게 바이올린을…? 아 그리고 웬만하면 영어를 써 주세요. 저기 저거 보이시죠?”
나는 손가락으로 방의 구석에 달린 카메라를 가리켰다.
“아, 지금 이것도 촬영되는 건가요?”
“여기에 오신 목적을 잊으신 건 아니죠? 경연에 참여하러 오신 거잖아요.”
나와 둘이 남아 신나게 한국어를 쓰던 김시욱은 카메라를 의식했는지 갑자기 얼어붙었다.
“저. 는. 원. 래. 클. 래. 식. 을. 좋. 아. 했. 었. 습. 니. 다.”
“풉!”
나는 마시던 물을 뿜어 버렸다.
“미안합니다. 갑자기 그런 말을 할 줄은 몰라서….”
급하게 옆에 책상에 놓여 있던 티슈를 꺼내 그의 얼굴을 닦아 주었다.
“괜찮습니다….”
얼굴에 물이 끼얹어진 김시욱은 허탈한 표정으로 손에 티슈를 들어 얼굴을 닦아내었다.
“바지는 어떻게 하죠? 잠시만 기다리세요. 내가 사무실에서 옷을 좀 가져올게요.”
얼굴에 뿜어진 물 덕에 셔츠와 바지까지 완전히 홀딱 젖어 버린 모습이 되어 버린 그에게, 새로운 옷을 가져다주고 나서야 본격적인 대화가 시작되었다.
“내가 생각할 때 김시욱 씨의 문제점은 의외로 그다지 많지 않아요.”
“그래요? 저는 너무 어설픈 게 아닌가 싶었는데.”
“사용하던 게 금속 현을 달아 놓은 연습용 바이올린이죠?”
“네 맞습니다.”
금속 현을 사용한 바이올린의 현에 활대를 가져다 대면 누가 연주를 하더라도 좋은 소리를 들을 수가 없다.
일반적으로 완전한 금속 현을 사용하는 것은 마그네틱 픽업을 사용하는 전자 바이올린밖에 없는데, 그 현을 일반 바이올린에 달아 놓고 쓰는 것도 참 신기한 일이다. 그걸로 제대로 된 소리를 낸다는 것도 신기한 일이지.
“일반적으로 금속 현을 사용한 바이올린을 무대에서 연주용으로 쓰지는 않아요. 게다가 연습용 바이올린도 마찬가지죠. 울림이 적어서 공연할 때 쓰는 일이 거의 없어요.”
“아…. 그런 게 바로 보이나요?”
“저에게만 보이는 건 아니었을 거예요. 그런 악기를 사용해서 제대로 된 연주를 했다는 것에서 좋은 점수를 얻을 수 있었겠죠. 보통은 제대로 된 소리가 나질 않아야 정상이니까요. 거트현에 비해서 소리도 훨씬 날카로울 수밖에 없고요.”
“처음에는 삑사…. 음 이탈 때문에 엄청나게 고생했었어요. 한 6개월 동안은 제대로 된 소리가 나질 않았었거든요.”
그 소리를 6개월 만에 잡아낸 것도 대단하다. 인터넷 커뮤니티에서 질문만 하더라도 현을 바꾸라는 답변을 쉽게 얻을 수 있었을 텐데 말이지.
나는 힘 조절이 조금이라도 어긋나면 바로 이상한 소리가 나올 구성을 하고, 제대로 된 연주를 했다는 점에서 가산점을 주었다.
“현을 바꾸면 소리를 쉽게 안정적으로 만들 방법이 있지만, 물리적으로 엄청나게 섬세한 연습을 하지 않으면 제대로 된 소리를 낼 수가 없는 악기를 갖고 연주를 하신 거예요.”
“그렇군요…. 전혀 몰랐어요. 현의 종류가 잘못되었다는 생각도 해 본 적이 없거든요.”
“현만 거트현으로 바꾸어서 연주해 보시겠어요? 그러면 한 번에 알게 되실걸요.”
김시욱은 나의 말에 고민하는 듯한 표정을 짓더니 한참을 생각했다.
“제가 거기에서 점수를 더 얻을 수 있던 거라면, 바꾸지 않겠습니다.”
“소리를 내기가 더 쉬워질 텐데요?”
“그래도 지금 제가 내는 소리가 그렇게 특이하다는 거잖아요. 그게 제 장점 아닐까요?”
“그래요. 그건 본인의 선택이니까 제가 강요할 수는 없는 거겠죠.”
악기에 대한 이야기는 이 정도로 접어 두고 본선 참가곡을 정해 연습을 해야 한다.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은 길지 않으니까. 수많은 시간에 비례해 소리를 완성하는 음악의 세계에서 일주일이라는 시간은 너무 짧다.
연습실의 컴퓨터를 켜고 스트리밍 사이트를 연결해 음악을 들을 준비를 했다.
“그러면 정해 보죠. 엘레나 씨는 참가곡을 꽃의 왈츠로 정했으니 시욱 씨만 정하면 되잖아요.”
“G 선상의 아리아는 어떨까요?”
기본적으로는 오케스트라 곡이지만 바이올린 협연 곡으로 많이 쓰이는 곡.
연습실의 스피커에서 G 선상의 아리아가 흘러나왔다. 감미로운 도입부를 장식하는 바이올린의 소리가 나오는 협주곡 버전.
김시욱이 예선에서 연주했던 사랑의 인사와 똑같이 한국에서 굉장히 사랑을 받는 곡이다.
레퍼런스라는 것이 다 그렇지만, 자신의 안에 있는 것을 꺼내야 하므로 익숙한 것에서 찾을 수밖에 없는 것. 여기까지는 이해할 수 있지.
하지만, 그가 이 곡을 연주할 수 없는 치명적인 단점이 있다.
“개인적으로는 추천하지 않습니다. G 선상의 아리아는 활을 길게 그어서 내어야 하는 소리에 금속 현은 날카롭게 들릴 거예요. 듣는 사람에게도 연주하는 사람에게도 너무 가혹하죠. 아시겠지만 어지간한 연습이 없는 이상 음 이탈은 거의 100% 발생한다고 생각하셔야 해요.”
“그러면 어떻게 하지…. 아는 곡이 없는데….”
한참을 끙끙 앓던 김시욱은 결국 혼자서 결론을 내질 못했다.
늦게 시작했기에 아는 곡이 많이 없기 때문이기도 했고, 가끔 꺼내놓는 곡마다, 내가 연주하기 힘든 부분을 잡아 주자 자신감이 바로 땅바닥으로 곤두박질쳐 버렸기 때문이다.
“그러면 그냥 1번으로 할래요. 그게 가장 익숙하니까.”
“제 곡을 하겠다고요? 그거 바이올린 편곡도 아닐 텐데.”
게다가 25분짜리 곡. 경연의 무대에서 연주하기에는 지나치게 길다.
“그 곡이 제가 가장 많이 연습했던 곡이라고요. 오히려 사랑의 인사보다 훨씬.”
나도 모르게 한숨이 뿜어져 나왔다. 기존에 있는 레퍼런스로 진행하고 싶었는데 어쩔 수 없지.
“그거, 제가 바이올린 버전으로 편곡해 드릴게요.”
음악이 싫은 음악천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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