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 musical genius who hates music RAW novel - Chapter 88
087화
내가 생각했던 멜로디를 연주한다기보다, 미디로 만들어진 음들을 연주만 하는 둘에게 정말 끊임없이 일주일 동안 나름대로 열심히 지적했다.
컴퓨터로 만들어진 음악들은 볼륨으로 강약 조절을 하더라도, 그 느낌이 실제 연주에서 사람이 조절하는 것과는 완전히 다르기 때문이었다.
전자 악기들이 이렇게 발전을 했음에도 여전히 좋은 연주가들을 가려내는 콩쿠르들이 없어지지 않는 것은, 기계음과는 전혀 다른 감정적인 부분이 담겨서 그런 것이 아닐까.
같은 대기실에 앉아 있는 나와 김시욱은 모니터를 바라보며 시시껄렁한 잡담을 나눴다. 같은 한국인이다 보니 아무래도 화제나 관심사가 비슷해서, 지금 내 주변에 있는 사람들보다는 비교적 잘 통하는 편이었기 때문이다.
“조금 떨리네요. 그래도 예선 통과자 중에 다섯 번째인 게 다행이에요.”
“그래요? 나는 가장 먼저 하는 편이 좋던데.”
연주 순서는 제비뽑기로 정했다.
토너먼트 형식이 아니라 모든 사람이 연주를 하고 인터넷으로 투표를 받는 방식이라, 이 연주 순서가 생각보다 엄청나게 중요한데 너무 가볍게 결정한 게 아닌가 싶었다.
예선 참가자와 시드 출전자가 번갈아 가면서 한 명씩 연주하게 되는 방식.
이런 점이 아무래도 백 년이 넘게 이어지고 있는 국제 콩쿠르와의 차이점이겠지.
연주 순서가 뒤로 가면 갈수록 부담이 커진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고, 처음은 싫다고 하는 사람도 있다. 보통은 접수 번호대로 순서를 따라가는 경우가 많지만.
대부분의 콩쿠르는 연주 순서가 굉장히 중요한 편에 들어가기도 하니까. 의외로 심리전 같은 느낌이랄까.
나의 경우에는 빨리 끝내고 쉬고 싶다고 생각을 하는 편이었는데, 마음대로 순서를 정할 수 있는 것은 아니었기에 뒤 순서가 걸릴 때는 조금 불편한 마음이 생겼었다.
답답한 마음에 대기실의 문을 살짝 열고 주변을 둘러보았다.
복도에는 웬일인지 평소에는 그렇게 많던 사람이 단 한 명도 보이지 않았다. 저 멀리 커다란 방송용 카메라를 들고 있는 사람이 보였다.
아무래도 입장하는 장면부터 촬영에 들어갈 모양인데, 어디 돌아다니기는 힘들 것 같다.
나는 기다리는 게 싫어서 맛있다고 소문난 맛집에 가도, 줄 서야 한다고 하면 바로 등 돌리는 사람인데….
[첫 번째 참가자를 지금 바로 만나 보시죠!]무대 연출이 엄청나다. 클래식 연주 무대에 저렇게 드라이아이스를 뿌려도 되는 건가 싶기도 한데…. 악기는 습기에 약하기 때문이다.
지금 내가 남의 악기를 걱정할 때는 아니지.
“정말 그걸로 괜찮겠어요?”
“제가 가장 처음 손에 쥐었던 녀석이에요. 어떻게 다른 악기를 쓸 수가 있겠어요.”
김시욱의 손에 쥐어진 연습용 바이올린은 현까지 그대로 바뀐 것이 없었다. 연습하는 과정에서 여러 번 악기를 바꾸는 것이 어떻겠냐는 말을 했었는데, 이상한 부분에서 고집을 부렸다.
“혹시나 하는 말인데, 최고의 연주자가 되려면 좋은 악기를 손에 쥘 기회가 생겼을 때 놓쳐서는 안 돼요.”
“아직은 잘 모르겠어요. 제가 바이올리니스트가 될 수 있을지. 만약에 여기에서 우승하게 된다면 그때 생각해 볼게요.”
연주를 하지도 않았는데 우승을 입에 담다니. 우승을 함부로 말하면 안 된다는 게 불문율이라고….
압도적인 실력이 있다면 클리셰를 깨 버릴 수도 있겠지만, 김시욱이 그 정도의 실력이라고 볼 수는 없다.
가능성이 있다면 김시욱이 아니라 엘레나 쪽이라고 볼 수 있는데, 과연 어떻게 되려나….
***
“심호흡하고!”
“후! 하!”
엘레나에게 심호흡을 시키는 크리스는 오히려 더 긴장한 것처럼 보였다.
그도 그럴 것이 정현과 함께 회사를 이끌어 나가면서 경연 같은 것에 참가했던 적이 없기 때문이었다.
“어떻게 하지…. 나 심장이 터질 것 같아요.”
“나보다 더 긴장하는 것 같네요….”
대기실 모니터로 나오는 다른 사람의 연주 따위를 볼 만한 여유는 전혀 없었다. 이들의 관심사는 오로지 컨디션 유지.
“괜찮겠죠?”
“괜찮을 거예요. 이정현 님이 저희를 위해 직접 편곡해 주시기도 했고….”
오히려 무덤덤해 보이는 엘레나에게 위로를 받는 크리스였다.
***
경연은 무난하게 흘러갔다.
앞에서 등장했던 여덟 명의 연주가 그럭저럭 들어 줄 만했다는 소리다. 엄청나게 좋았느냐고 물어본다면 카페에서 틀어놓으면 괜찮을 정도의 음악이랄까.
콩쿠르를 반복한 사람들에게는 있는 습관처럼 절대 튀지 않으려는 연주들이었다. 개성이 없는 소리.
“전 정말 여기까지 온 것만으로도 만족해요.”
“유종의 미를 거둔다는 생각으로 해 봐요.”
아홉 번째인 김시욱의 차례가 왔다.
나는 김시욱이 비장한 얼굴로 진격하는 장군의 얼굴을 보여 주기를 바랐지만, 세상을 모두 초탈한 듯한 사막 여우의 얼굴로 대기실 문을 빠져나갔다.
“뭔가 달관한 수도승 같은 얼굴이네….”
혼자 남게 된 대기실의 문을 닫고 적당히 소파에 앉아 감자 칩을 뜯었다.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다 했으니 이제 그걸 다른 사람에게 보여 주기만 바라야지.
벌컥-
“나 도저히 못 보겠어서….”
모니터를 보면서 감자 칩을 먹고 있던 대기실에 불청객인 크리스가 들어왔다. 크리스의 뒤로 엘레나도 따라온 것이 보였다.
“그래. 여기에서 같이 보자. 대기실이 다르다고 해도 어차피 차례가 바뀔 일은 없으니까.”
“괜찮지? 거봐요, 내가 괜찮을 거라고 했잖아요.”
“다행… 이네요.”
넓었던 3인용 소파에 세 명이 앉으니 조금은 비좁게 느껴졌다.
좀 가 줬으면 좋겠네.
[치열한 예선을 뚫고 살아남은 여섯 명 중 다섯 번째 참가자입니다! 한국에서 온 김시욱!]관객들의 박수 소리가 사회자의 멘트 뒤로 이어지다 김시욱이 바이올린을 턱 밑에 갖다 대자 조용해졌다.
“잘하겠지?”
“합…. 글쎄. 내가 말해 준 포인트만 잘 지키면 괜찮을 것 같은데.”
오도독오도독-
이질적인 소리에 고개를 돌려보니 엘레나가 앞니로 감자 칩을 부숴 먹으며, 모니터를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었다.
어이, 메이크업까지 다 하고 과자 같은 거 먹으면 부스러기 남아서 카메라에 다 나온다고.
김시욱은 현 위에 활을 내리그었다.
시이이이잉-
시작부터 가슴 떨리게 차가운 음이 뿜어져 나온다.
그 차가운 바람이 가슴을 스쳐 지나가며 날카로운 상처를 남기고, 한겨울 나뭇가지에 얼어붙은 상고대처럼 상처 위에 얼음을 덮어간다.
금속 현의 차가운 음에 더 강렬한 외로움이 밀려와 복잡한 생각을 하게 만들어 주고 있었다.
간결한 운지로 빠르게 표현하는 멜로디에 감정을 추스를 시간도 없이 바로 휩쓸리게 하는 김시욱.
스무 살이 넘어 바이올린을 시작했다고 하는 그에게는 어릴 때부터 연주를 해 왔던 신동들에게는 없는 것이 있었다.
바로 ‘삶의 경험’.
초등학교에 입학하는 시기부터 남들과 경쟁하는 삶을 살아야 하는 연주가들의 삶도 물론 고달프겠지만, 김시욱에게는 그들에게 없는 경험이 있었다.
그가 내가 만들어 준 곡에 자신의 경험을 담아내고 있다.
그는 대학교만 졸업하면 모든 것이 괜찮아질 거라고 생각했던 자신이 너무 바보스러워서 힘들었을 때, 바이올린이 위로해 주었다고 했던가.
아르바이트를 끝내고 집에 돌아와서 다른 집에서 항의를 할까 봐 소리를 죽여 방 안에서 혼자 연습을 했다고 했던가.
그의 바이올린은 지금 위로가 아닌 상처를 표현하고 있었다.
그것도 다른 그 어떤 약도 쓸 수 없는 자신 안에 있는 마음의 상처를.
“와…. 연습 때보다 잘하네.”
내가 편곡했지만 정말 금속 현의 차가운 음과 잘 어울린다는 생각이 들었다.
스트라디바리우스나 과르니에리 같은 전설적인 바이올린은 마이크 같은 것을 설치하지 않아도, 통 울림이 엄청나게 커서 홀 하나를 울리게 했다고 하던데….
좀 더 좋은 바이올린으로 연주를 했다면 이것보다 나았을까?
그건 알 수 없다. 김시욱이 다른 바이올린에는 손도 대지 않아서 비교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만약에 바이올리니스트가 될 거라면, 금속 현에 어울리는 전자 바이올린을 사용하는 것도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왜 이런 곡을 만든 거예요?”
“응?”
지금 와서 이런 걸 묻는다고? 엘레나는 가끔 엉뚱한 질문을 했지만, 왜 이런 곡을 만들었느냐는 질문은 조금 생소했다. 보통은 여기에서는 어떻게 연주하는 것이 좋으냐는 질문들이었으니까.
“이런 곡을 만든 이유가 있는 거예요? 멘토님도 상처가 많았어요?”
“상처라…. 세상에 상처가 없는 사람이 어디 있겠어요.”
“제가 알고 있던 멘토님은 항상 승자의 위치에 있어서, 그 어떤 상처도 없는 강한 사람이라고 생각했었어요.”
몇 년 전까지 발레를 하던 사람이라 나에 대한 것을 잘 몰랐으니 이런 말을 하는 것이겠지. 예전의 쌈닭 같았던 나를 알고 있는 김수원은 절대로 이런 이야기를 하지 않을 거다.
“승자라고 상처가 없는 건 아니에요. 싸움이 일어나면 상처를 입는 건 패자와 승자 양쪽 다 같죠. 차이가 있다면 패자는 쓰러졌고 승자는 자신의 두 다리로 서 있다는 것 정도?”
“아….”
프리마돈나 지망생이었던 엘레나는 정작 프리마돈나가 되어본 적은 없었다.
백조의 호수의 지젤이나 호두까기 인형의 주인공이 되기 전에 부상으로 이미 날개가 꺾여 버린 상태였으니.
어쩌면 시리도록 차가운 이 곡이 그녀의 마음속에 와 닿았을지도 모르겠다. 세상에 무언가를 잃어보지 않은 사람은 없으니.
무대의 주인공이 되어 본 적이 없는 엘레나는 승자의 마음을 느껴 본 적이 없었다.
하이라이트 부분을 중심으로 편곡했던 5분간의 짧은 연주가 끝나자 객석에 있는 사람들은 모두 박수갈채를 보냈다. 중간중간 자리에서 일어나서 기립 박수를 보내는 사람들도 보였다.
“시욱 씨 엄청 많이 늘었네. 일주일 동안 어떻게 했길래 저래?”
“그냥 보면 괜찮게 연주한 것 같은데, 아마 내 생각에는 점수는 그다지 높지 않을 거야.”
“어째서?”
“사람들은 슬픈 것보다 기쁜 것을 좋아하니까.”
간단한 논리다. 누구도 슬퍼지고 싶은 사람은 없으니.
그런 의미에서 나는 김시욱보다는 엘레나가 더 높은 점수를 얻을 것이라고 기대하고 있었다.
차라리 저런 천재적인 외모로 꽃의 왈츠 말고 대표적인 사랑 곡 사랑의 꿈 같은 달콤한 곡을 연주한다면, 사람들에게 훨씬 좋은 평가를 받을 수 있을 텐데.
하지만 엄청난 연습이 필요한 곡이니까 그건 좀 힘들겠지. 몇 개의 옥타브를 순식간에 넘나드는 초절기교가 핵심이니까.
나는 벌써 엘레나가 꽃 같은 외모로 꽃의 왈츠를 연주하는 모습이 기대되었다.
벌컥-
“저 잘했…. 어? 왜 다 여기 와 계시지?”
방금 무대에서 연주를 마치고 김시욱이 땀으로 흠뻑 젖은 이마와 함께 돌아왔다.
“긴장되어서 차마 모니터를 못 하겠다셔서….”
“엘레나가요?”
“아뇨. 크리스가요.”
그리고 나의 감자 칩을 빼앗으러 왔겠지.
감자 부스러기가 묻은 입을 손으로 닦아내며 대답했다.
“아, 참! 제 연주는 어땠어요?”
“좋았어요. 연습 때도 그 정도만 했으면 내가 잔소리할 일이 많이 줄었을 텐데.”
“흐흐. 아무래도 저 무대 체질인가 봐요.”
“아까는 바이올리니스트가 될지는 모르겠다면서요?”
확실히 무대가 올라가는 사람에게 주입하는 무언가가 있다. 누군가는 마약 같다고도 하고, 또 다른 누군가는 희열이라고도 한다.
지금까지 제대로 된 무대를 거치지 않은 김시욱이 이런 무대에 설 일이 없었을 테니, 그 뽕이 거의 치사량에 이르렀을지도.
“숨 쉬어요! 크게!”
“후! 하!”
응? 이건 또 뭔 소리야?
[다음 무대는 본선 시드 진출진의 에이스 창샤오위입니다! 큰 박수로 맞이해 주세요!]창샤오위가 무대 위로 올라오고 있었다.
온몸에 달라붙은 진한 붉은색 차이나 드레스를 입고 페달을 밟아야 하는 발에 붉은색 하이힐을 신고서.
이미지가 강렬하다. 붉은색이야 중국에서는 워낙에 행운을 상징하는 색이니 입을 수 있다고 쳐도, 하이힐을 신는 건 좀 오버 아닌가. 페달 밟을 때 거치적거릴 텐데.
연주할 곡의 품번이 아래쪽 자막으로 스쳐 가듯 나왔다.
오잉? 곡과 저렇게 안 어울리는 옷을 입고 연주한다고? 이 대결 어쩌면 이길 수도 있을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음악이 싫은 음악천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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