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 musical genius who lives twice RAW novel - Chapter 99
99화
플러그인.
20세기 공연장의 모습을 그대로 간직한 21세기의 라이브 공연장 겸 카페.
이 장소의 특징은 바로.
‘진짜 딱 수십 년 전 물건들이네.’
건물 사이즈 타임머신이라는 것이었다.
타임머신, 말 그대로 옛날 물건들이 온 사방이 가득하다.
책이나 포스터 같은 자잘한 소품은 물론.
자잘한 악기, 마이크, 앰프.
릴 테이프나 릴 데크까지 흔히 찾아보기 어려운 음향기구까지도 전부 수십 년 전을 그대로 옮겨 놨다.
하물며 보관 상태까지 양호 그 자체.
‘없는 게 없네.’
예전에는 그냥 추억의 장소라는 느낌이었는데, 이제 보니까 보물창고를 보는 듯하다.
내 보물창고.
“이야.”
“…….”
“크.”
“…….”
그렇게 감탄을 터뜨리며 이곳저곳을 둘러보는 와중이었다.
“뭐, 임마, 왜.”
한윤태가 내 뒤에서 그림자만큼 떨어진 채로 팔꿈치를 낀 채로 어딘가 불편한 시선으로 나를 바라봤다.
“남의 가게에 꿀 발라 놨냐? 뭘 그렇게 열심히 살펴?”
뭔가 꿍꿍이를 감추고 있냐는 게 아니냐는 눈길이군.
그 말이 맞다.
꿍꿍이가 있다.
저벅저벅.
나는 실내를 돌아다니기를 한참.
끝내 릴 테이프가 수십 개씩 들어 있는 진열장을 손바닥으로 쓰다듬어 보았다.
그 순간이었다.
“손 떼! 지문 묻어!”
한윤태가 움찔하더니 외쳤다.
나는 그 말에 슬그머니 한 걸음 물러나고는, 작게 헛기침을 뱉으며 말했다.
“일본어로 손이 떼가 맞죠.”
“말 빙빙 돌리는 거 보니까 할 말 있는 것 같은데, 그냥 직구 던져라.”
안 통하는군.
나는 가슴속으로 숫자 3을 세기 시작했다.
셋, 둘, 하나.
됐다.
지르자.
“사장님.”
나는 양심을 질끈 감으며 말했다.
“여기 있는 것들 제가 가져가면 안 될까요?”
그 순간이었다.
“뭐?”
한윤태의 얼굴이 지금껏 본 적 없는 방향으로 구겨졌다.
이럴 줄 알았지.
하지만 멈출 수 없으니 재차 말했다.
“음악에 필요해요.”
“저런 낡은 골동품이 왜 필요해.”
“그게, 골동품이라서 필요하게 됐어요.”
“…….”
그의 표정이 재차 꿈틀거리는 순간이었다.
이번에는 디마가 나를 대신해 앞으로 나서며 말했다.
“최근에 신곡을 녹음하려고 장비를 준비하고 있었는데요.”
그렇게 운을 떼고 이것들이 내게 필요한 이유를 기다랗게 늘어놓기를 몇 분.
“옛날 느낌을 살리려면, 옛날 장비들이 필요할 것 같아서요. 다시 구하려고 해도 도저히 못 구할 물건들이라. 또 사양 문제도 있고요. 시중에 풀린 것보다 여기 있는 것들이 훨씬 상태도 좋고 모델도 높은 거네요. 다 스튜디오급 장비들이에요.”
할 말은 다 했다.
우리 엔지니어 설명 잘하네.
‘하나도 못 알아듣겠지만.’
그런데 모든 설명을 들은 한윤태는 도깨비처럼 눈을 부릅뜨더니 외쳤다.
“안 돼!”
결사의 의지가 담긴 목소리였다.
“다른 건 다 내줄 수 있어도 이건 안 돼!”
“그럼 이거 말고 집문서 좀.”
“농담할 상황 아니야!”
그가 호통치듯 큼지막한 목소리로 다시금 말했다.
“내가 여기 있는 것들을 몇십 년 동안 모았는지 알아?”
“몰라요.”
“자그마치 40년이야! 40년! 거의 반세기!”
와, 그렇게 오래 모았구나.
어쩐지 뭐가 많더라.
그 말을 듣자 더더욱 욕심이 생기려는데 그가 테이블을 한 손으로 짚으며 말을 이었다.
“여기 이 컬렉션들은 가게 차리기도 전부터 나랑 함께해 온 분신 같은 물건들이다. 그런데 이걸 녹음에 필요하다고 그냥 달라고? 어림도 없는 소리. 이 강도 놈들, 차라리 내 배를 째고 가져가라.”
“요한 씨, 메스.”
“나 지금 진지하다.”
“…….”
가드가 굳건하다.
‘웃어넘기기는 어렵겠네.’
처음에만 해도 반은 농담, 반은 농담인 줄 알았다. 적당히 옥신각신하다가 내줄 줄 알았지.
내 친구이기도 하니 쉬이 주지 않을까 기대했던 것도 사실.
하지만 아무래도 진심으로 주기 싫은 모양이다.
나는 그 태도에 설득이 쉽지 않으리라는 걸 직감하고는, 이내 다시 진열장에 든 장비들을 곁눈질로 훑었다.
‘하기야, 여기 있는 물건들은 뭐든 윤태 입장에서 피와 살 같은 물건이겠지.’
하나하나가 수십 년의 세월을 걸친 물건들이었다.
예로부터 오랫동안 보관한 컬렉션에는 소유자의 영혼이 깃든다고 했던가.
이 말이 단순히 미신에 불과할지라도, 한윤태가 품은 애정은 그에 못지않을 터.
대뜸 달라고 한들 쉽지는 않겠지.
‘뭐, 예상이야 했어.’
반발할 걸 몰랐겠나.
나는 두 번째 플랜으로 넘어갈 생각으로 말했다.
“요한 씨, 사장님이랑 사업 이야기 좀 하게 잠시만 나가서 기다려 주실래요?”
“짧게 끝내주세요. 슬슬 집에 돌아가고 싶어서.”
“옙.”
내 말에 디마는 별 반발 없이 가게 바깥으로 나갔다.
자, 이제부터 진짜 협상을 시작할 순간이 왔다.
딸랑.
디마가 완전히 나가는 걸 확인했다.
나는 가게 내부에 손님이 단 한 명도 없다는 것까지 완전히 파악한 뒤에야 입을 열었다.
“윤태야.”
“왜.”
나는 그의 눈을 지그시 바라보며 말했다.
“장비만 몇 개 내주고 말래, 아니면 여기에 놔둔 내 물건들 싹 다 돌려줄래.”
“……!”
* * *
‘아, 나도 이런 말은 하고 싶지 않았는데.’
한윤태의 표정이 우스꽝스러울 정도로 구겨졌다.
하지만 어쩔 수 없다.
설득으로 안 된다면, 협박을 살짝 섞는 수밖에.
“네 물건?”
“왜 이래, 대충 둘러보니까 내 유품도 몇 개 있는 것 같던데.”
그렇다.
이 플러그인이라는 가게에는 내가 옛날에 썼던 물건이 생각보다 많이 보관되어 있었다.
‘나를 기억해 준 게 고맙기도 하고 새 마음으로 시작하자는 생각에 내버려 뒀지만, 상황이 여의치 않으면 어쩔 수 없지.’
급할 때는 급한 방법을 쓰는 수밖에.
“저 기타도 그렇고.”
“저건 네가 준 거잖아.”
“그래? 그러면 저기 저 선반 위에 있는 옷이라도 다시 가져갈게. 저기 진열대에 걸어 둔 내 옷들이랑 피크도.”
“…….”
한윤태는 말이 없어졌다.
“으으으윽.”
그는 작게 신음을 흘리더니 다시금 입을 열었다.
“비겁한 자식, 꼭 그래야겠냐?”
“임대료 개념으로 잠깐만 빌려주면 안 되겠냐.”
“보관료 내놔.”
“잠깐 쓴다고 닳는 것도 아니고.”
“테이프는 진짜로 닳아.”
흠, 논리적이군.
하지만 그의 말마따나 지금은 농담보다는 진심이 필요한 순간이었다.
나는 몇 차례 눈을 깜빡이고는 다시 입을 열었다.
“윤태야, 저 컬렉션들도 그냥 여기 보관된 채 방치당하는 것보다는, 누군가가 써 주길 바랄 거야.”
“내가 바라지 않아.”
진심이 패배했다.
그렇다면 다른 방향으로 가 보자.
“그러니까 하는 말이야.”
나는 다시금 그를 바라보며 말했다.
“김한석이라는 이름으로 전시에 잘 사용했지? 홍보도 됐을 테고. 이 가게에 찾아온 사람 중에는 김한석 물건이라는 걸 듣고 보러 온 사람들도 있었을 거야.”
조은솔은 쥐뿔도 안 믿었지.
하지만 분명 믿었던 사람도 있을 터.
이것만큼은 한윤태도 부정하기 어려운지 지그시 듣고만 있는 사이, 나는 그에게 말을 이었다.
“이제, 저기 저 물건들도 머지않아 김한영이 녹음에 사용했다는 타이틀로 유명해질 거야.”
“…….”
그 순간 한윤태의 눈에 황당하다는 빛이 물들었다.
그라면 당장이라도 반박을 꺼내야 했겠지만, 이번만큼은 할 말을 잃었다는 눈빛.
유감이다.
하지만 이번에는 나 할 말을 마저 해야겠다.
나는 말을 꺼낼 타이밍을 내어주지 않으며 말을 이었다.
“악기의 값어치는 그걸 다룬 사람이 얼마나 값지게 사용했는가에 따라서 결정된다고 하잖아.”
“…….”
“무대도 그렇지. 그 무대를 밟았던 뮤지션이 얼마나 대단한 사람들이었는가가 정말로 중요하잖아. 웸블리가 그랬던 것처럼.”
음악이라는 게 다 그러했다.
어느 국가의 정부가 엄청난 예산을 들여서 초호화 공연장을 만들었다고 치자.
그렇다면 그건 그냥 돈이 많이 들어간 공연장일 뿐이다.
그 자리에 정말로 값진 무대가 펼쳐지지 않는다면, 그저 넓고 깨끗한 공연장에 지나지 않았다.
어째서 낡고 지저분한 웸블리가 세계 최고의 공연장으로 꼽히겠는가.
그건 바로.
세계 최고의 스타들이 그 바닥 위에서 피와 눈물 그리고 땀을 흘렸기 때문이었다.
“저기 저 물건들은 내가 만지지 않았더라면 그냥 잘 만든 악기.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겠지.”
내가 하는 말이지만, 조금 부끄럽기는 하다.
하지만 이 상황에 내색하면 될 말도 안 되기에 나는 겉으로 티를 내지 않고 말을 이어나갔다.
“날 믿어 줘. 네가 저 물건들을 소중히 여기는 건 알아. 그러니까 나도 그만큼 좋은 음악만 담을 거야. 언젠가 김한영이라는 브랜드가 담길 수 있게끔.”
그렇게 말을 늘어놓기를 한참.
한윤태는 어처구니가 없다는 듯 눈을 꿈틀거리더니 말했다.
“스스로 당연히 뜰 거라고 자부하는 게 차-암 대단하다.”
“뜰 거니까. 실제로 뜨고 있고.”
“재수 없는 자식. 그래, 너 대단하다.”
“감사.”
“칭찬으로 한 말 아니야.”
그는 툴툴거리듯 말을 쏘았다.
이번에도 실패했나.
영 쉽지 않다.
더는 준비한 패가 없는데, 좋은 술이라도 사 들고 올 걸 그랬나.
그렇게 생각한 찰나였다.
“어휴.”
그는 찌푸린 표정으로 진열장을 응시하더니, 한숨을 길게 내쉬며 말했다.
“솔직히 말하자면, 언젠가는 이런 순간이 올 줄 알았다.”
“…….”
예상외의 말이었다.
순간이라니.
무슨 순간.
“그 웃기지도 않은 브랜드 이야기는 치워 두고, 그냥 내버려 두는 것보다는 쓸 사람이 쓰는 게 맞지.”
다음 순간이었다.
끼익.
한윤태가 스스로 진열장을 열었다.
“……!”
사고가 안 돌아간다.
한윤태는 벌벌 떨리는 손놀림으로 안에서 릴 테이프가 담긴 회색 케이스를 꺼냈다.
흰 먼지가 살짝 끼었지만, 상태는 여전히 훌륭하기 짝이 없었다.
과장 조금 보태서 새 제품이라고 말해도 속을 수준.
“쓰읍, 물건은 그냥 물건이지. 그냥 물건. 공산품. 그냥 그뿐이지. 후우, 물건은 물건이다. 물건.”
한윤태는 자기 자신을 세뇌하려는 듯 케이스를 손에 든 채로 혼잣말을 중얼거리기를 잠시.
나를 바라보며 말했다.
“하지만 딱 하나는 확인해야겠다. 그래서 이 안에 어떤 곡을 담을 건데? 너한테도 양심이 있다면 이 정도는 생각하고 왔겠지?”
아.
그 순간 떠올랐다.
‘그러고 보니 윤태한테 아직 안 들려줬구나.’
항해.
이번에 녹음하려는 곡은 식구들과 디마에게만 들려준 채였다.
딱히 한윤태한테 들려줄 생각이 없었던 건 아니고, 의도치 않게 순서가 돌아갔다.
상관없다.
지금 연주하면 그만이니까.
“들려줄게.”
그렇게 말을 한 찰나 나는 한 가지 사실을 깨달았다.
“아.”
이 가게에 기타를 안 가지고 왔다는 것이었다.
평소에는 내 분신처럼 잘도 들고 다니면서, 이번만큼은 나도 모르는 사이에 디마의 작업실에 두고 왔다.
하지만 이것 또한 상관없다.
“기타 좀 쓰자.”
여기에도 내 기타가 있으니까.
“무슨 기타?”
“저 기타.”
나는 손가락으로 저 멀리 특별 케이스에 담긴 기타를 가리켰다.
그 안에는 무려.
‘오래간만에 만지네.’
내가 한창 쓰다가 한윤태한테 공짜로 넘긴 기타가 담겨 있었다.
그것을 바라보자 모처럼 상쾌한 기분이 들었다.
달짝지근한 가을바람이 불어오는 것만 같은 그런 기분이.
나는 은은한 단맛을 느끼며 물었다.
“써도 되지?”
“……너는 정말 양심이라는 게 없다.”
한윤태는 고개를 절레절레 젓더니 말했다.
“누가 널 말리겠냐. 맘대로 해라.”
“감사.”
그렇게 살짝 들뜬 마음으로 기타를 집어 들고, 짧게 현을 퉁겨 본 순간이었다.
‘역시.’
아니나 다를까, 음이 완벽하게 나간 상태였다.
정말로 진열만 해 두고, 아예 한 번도 손을 안 댄 모양.
하지만 괜찮다.
이런 것쯤이야 즉석에서 맞추면 그만이니까.
퉁, 퉁.
나는 현을 퉁기면서 즉석에서 내 방식대로 헤드 머신을 조이기 시작했다.
“아- 아-.”
“이건 봐도 봐도 신기하네.”
한윤태가 헛웃음을 터뜨리더니 말했다.
“그거 절대음감이라고 하나? 몸이 바뀌어도 잘 되나 보다.”
“그러게, 되네.”
끼릭.
마침 조율이 딱 맞았다.
‘어디 보자.’
나는 작은 기대감을 품고 짧은 애드립을 연주해 보았다.
탕! 다다단.
어색하다.
분명 내 기타가 맞는데, 한참 오랜만에 들은 기타라서 그런지 소리가 어색하다.
새로 얻은 기타에 슬슬 몸이 적응해 버린 탓이겠지.
‘짧은 손가락으로 연주할 때가 편했는데.’
내 몸이라는 게 달라졌다.
새 기타에 익숙해질 때까지 어색했던 만큼, 익숙해진 지금은 옛 기타가 어색해져 버렸다.
이 묘한 거리감은 뭘까.
‘전 여자 친구한테 차인 기분이네.’
연애라는 걸 해 본 적은 없지만 말이다.
기타에 은근한 섭섭함을 느끼면서도 짧은 연주를 마쳤을 무렵이었다.
“어때?”
내 질문에 한윤태는 오늘까지 들었던 웃음 중 제일 허탈한 웃음을 짓더니 말했다.
“너 언제는 이거 쪽팔려서 절대 안 내놓을 거라며.”
“응.”
나는 피식 웃고는 말했다.
“이미 내놨으니까, AS라도 하려고.”
음.
그럴듯한 대사라고 생각했는데, 입밖에 뱉고 보니까 묘하게 부끄럽다.
방송 중이 아니라서 다행이군.
나는 그런 생각을 하며 마지막으로 물었다.
“그래서, 가져가도 되지?”
“후우.”
한윤태는 이마까지 주름이 질 정도로 눈을 꾸욱 감더니, 몇 초 뒤 다시 뜨며 말했다.
“험하게 다루면 내 손에 죽는다.”
우선은 이 정도면 충분했다.
“노력해 볼게.”
“아니, 노력을 하지 말고 부드럽게 다루라고.”
내게 노력을 요구했는가.
하지만 내게는 노력보다 좋아하는 게 있다.
“최선을 다할게.”
“아오.”
이제 정말로 끝났다 싶은 순간이었다.
“야, 그럼 네 물건은 안 돌려줘도 되는 거다. 알았지?”
“…….”
윤태야.
그걸 아직까지도 의식하고 있었느냐.
– 다음 화에 계속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