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 Regressor’s Tale of Cultivation RAW novel - Chapter (129)
네가 밟아온 것 (17)
나는 멍한 표정으로, 성내를 걸었다.
쏴아아아아―
빗소리가, 어쩐지 기분이 좋게 들렸다.
그리고, 비를 맞으며 걸어간 길 끝에는.
꿈에도 그렸던 사람이, 서 있었다.
아니, 떠 있다고 해야 하나.
“향…화….”
나는, 잔뜩 말라붙은 목소리로, 그녀를 불렀다.
수많은 생각이 머리속을 휘몰아쳤다.
“어떻…게…?”
문득, 나는 어떠한 시선이 느껴져 옆을 바라보았다.
그곳엔 아무도 없었다.
착각이었던 것 같았다.
그녀가 싱긋 웃었다.
[어떻게는요. 원귀가 되어서 오라버니를 기다리고 있었지요.]“분명… 그때….”
그녀의 영체가 하늘로 올라가던 순간을.
나는 아직도 기억한다.
문득, 그녀는 내가 쳐다보았던 곳을 한 번 쳐다보고는, 다시 나를 보며 싱긋 웃었다.
[그런 것보다, 중요한 게 있지 않나요?]“….”
맞다.
한 명은 죽었고, 한 명은 살았지만.
우리는 아직도 서로 마음이 통했다.
나는 그녀가 뭘 원하는지, 단박에 눈치했다.
[연도성에서 같이 추고 싶었는데, 결국 여기서 추게 되네요.]“…잠시, 기다려 주시지요. 바로 준비하겠습니다.”
나는 허리춤에 찬 무색유리검을 들어, 온 힘을 짜내 법력을 불어넣었다.
파아아앗!
무색유리검들은, 본디 천색성에 사는 사람들의 묘비로 만든 것.
내 의지에 따라, 삼천 자루의 유리검들은 다시 각자의 무덤이 있던 자리로 가 꽂혔다.
나는 그런 후, 그녀를 보며 손을 내밀었다.
우리는 말없이 서로 웃었다.
부채는 서로 없었기에, 우리는 부채를 쥔 시늉을 하고, 자세를 잡았다.
악기 소리는 없었지만, 우리는 빗소리를 들으며 천천히 사위를 추었다.
우리는 서로 천천히 합을 맞추기 시작했다.
서로의 손에는 부채가 없었기에, 둘의 손끝이 스쳤다.
나는 왼쪽으로 세 번의 보법을 밟으며 한 바퀴를 돌았다.
그녀 역시 나와 똑같이 움직이며 한 바퀴를 돌고, 다시 한번 서로의 손끝이 스쳤다.
산 망인(亡人)과 죽은 망인(亡人)은 빗속에서 천천히, 유리검들이 꽂힌 묘지 사이를 돌았다.
쏴아아아아―
우리를 지켜보던, 뭇 영혼들은, 천천히.
한 명 한 명씩 빛이 되어, 하늘로 날아올라 갔다.
청문령도, 북중호도.
김영훈을 제외한 무수한 벗들과 이웃들의 얼굴이 보였다.
영혼들이 사라질수록, 비가 점차 그치며, 하늘의 구름 역시 물러나기 시작했다.
나는 그때의 축제에서 했던 것처럼, 그녀의 얼굴에 손을 가져갔다.
무명천은 없었기에, 내 손끝은 그녀의 얼굴을 살짝 스쳤다.
다시금 서로의 손끝이 스쳤다.
하늘의 빛깔은 자색이었다.
노을이 저물고 있었고, 밤하늘이 새록새록 떠오르는 중이었다.
우리는 다시금 오른쪽으로 세 번 보법을 밟으며 한 바퀴를 돌았다.
우리의 손끝이 몇 번이나 스쳤고, 우리는 마침내.
우리가 원래 서 있던 그 자리로 돌아왔다.
뚝, 뚝….
눈물이 나왔다.
놀랍게도, 200년간 떨어뜨렸던 검은 눈물이 아니었다.
나는 200년 만에, 맑은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나는, 향화를 바라보며 멍하니 말했다.
“당신이… 없는 세상에서, 살아갈 자신이 없습니다.”
다음 생이 시작되면, 몇 번이고.
몇 번이고, 그냥 무작정 자살할지도 몰랐다.
“그냥… 죽고 싶습니다.”
하늘에게, 무릎 꿇고.
두 손을 싹싹 빌며 간청하고 싶다.
제발, 제발 나를 죽여 달라고.
이젠, 정말로 죽고 싶다고.
‘이 생에 죽는다면, 황천에서 만날 수라도 있지 않나.’
하지만 내겐 죽음 이후는 허락되지 않는다.
황천에 도달하려는 순간, 나는 다음 생으로 가 버리니까.
그저, 그녀의 앞이었기에.
가까스로 그리 오열하며 빌고 싶은 것을 참는 중이었다.
그리고.
그녀가, 내 뺨을 양 손으로 살짝 누르며 말했다.
[안 돼요.]“향화… 당신 없는 세상은, 저주입니다. 살아 있는 것 자체가, 저주란 말입니다.”
[그럼, 저와 함께했던 순간도, 저주인가요?]그녀가 웃으며 말했다.
나는 입술을 떨며 고개를 저었다.
“그건, 아닙니다.”
[그럼, 제가 남겨 둔 것들도, 저주나 고통이었나요?]그녀가 무색유리검을 가리키며 물었다.
나는 고개를 저었다.
[그럼….]그리고.
그녀가 눈을 감고, 내게 입술을 가져왔다.
그녀가, 내게 입을 맞췄다.
나는 멍하니 있다가, 그녀의 차갑고, 비현실적인 느낌이 드는, 그녀의 입술을 잠시 가만히 느꼈다.
얼마 후, 내게서 떨어진 그녀가 물었다.
[제가 당신에게, 방금 드린 것도 저주였나요?]“…아닙…니다.”
향화는, 나를 껴안았다.
[제가 원귀가 됐든지, 누가 명계의 문을 열어 줬든지. 어쨌든 당신을 만나러 온 이유는 단 하나예요.]이어진 그녀의 말에, 나는 200년 동안 가슴 속에 묵혀져 있던 뭔가가, 새하얗게 밀려나는 기분이었다.
[당신을 사랑합니다. 이 말을 직접 남기지 못한 게, 제 가슴에 맺힌 한(恨)이었어요.]나 역시 그녀를 끌어안으며, 가슴에 응어리졌던 한 마디를 내뱉었다.
“나 역시, 당신을 사랑합니다.”
사람의 마음은 이렇듯 기이하다.
응어리졌던 한 마디를 내뱉고, 연분홍빛 의념 속에서 그녀의 마음을 읽던 중.
나는 그 무수한 변화를 읽으며, 음혼귀주문의 숨겨진 면을 깨달았다.
어쩌면, 창시자도 몰랐을 이 너머의 경지.
아니, 오히려 창시자를 한참이나 뛰어넘은 나였기에 발견한 경지.
파아아앗!
내 몸 곳곳에 맺혀 있던, 시커먼 저주문들이, 반전(反轉)되기 시작했다.
사람의 삶이 곧 고통이고 저주일지언정.
사람과 사람의 마음이 이어지고, 통한다면.
어쩌면 그것은… 가없는 축복이 아닐까.
시커먼 저주문들이, 일제히 반전되며 숨겨진 면을 드러내었다.
* * *
“음…?”
원립이 사망한 흑색성.
그곳에 있는 잔해들을 뒤지며, 아직까지도 원립이 숨겨 놓은 재물들을 뒤적이던 결단기 수도자들.
“원영기 노괴의 집안은 뒤져도 뒤져도 뭐가 계속 나오는군.”
“죽을 뻔했지만, 확실히… 그런데, 서란 수사는 어디 가셨소?”
수도자 중 한명이, 서란을 찾았다.
“음, 모르겠군. 어딘가로 황급히 날아가던데? 뭔가 발견했나 보더만… 도대체 무슨 보물을 발견했길래, 계속 텅 빈 표정을 하고 있던 그자가 그리 미친 듯이 날아갔던 건지.”
“그거 궁금하군… 뭐, 사실 상관은 없소. 어차피 우리도 챙길 만큼 챙겼으니까.”
그렇게 두런거리며, 원립의 처소를 뒤지던 이들 중 한명이, 무언가 이변을 감지했다.
“음? 잠깐, 저건…?”
서은현이 원립의 몸을 고정할 때에 썼던 흑색귀주번.
흑색귀주번의 곳곳에서, 새하얀 빛이 뿜어지고 있었다.
* * *
서은현이 사막 곳곳에 꽂아두고, 버리고 갔던 시커먼 덩어리가 매달린 막대기들.
그 막대기들에 달린 덩어리의 끝이, 새하얗게 빛나기 시작했다.
그리고.
파아앗!
덩어리가 터져 나가며, 꽃봉오리와 같이 개화(開花)하였다.
개화한 꽃은, 새하얗게 뒤덮여 있었고, 여섯 개의 꽃잎을 가지고 있었다.
파앗, 파앗, 파앗!
서은현이 밟아온 길을 따라, 사막에 수백 개의 백목련들이 봉우리를 틔우기 시작했다.
* * *
파아아앗!
나는 내 몸에서 피어나는 새하얀 주술문들을 보며, 웃었다.
사방에서 피어나는 새하얀 축문(祝文)들은 저주문과는 정반대의 속성을 지닌 것이 느껴졌다.
[이것 봐요, 살아 있으니까 새 공법도 창시하셨네요.]“그저 음혼귀주문을, 당신과 함께했던 마음으로 표현했을 뿐입니다.”
[에이, 완전히 다른 공법이잖아요.]우리 둘은 잡담을 주고받으며, 깔깔거렸다.
200년 만에 처음으로 웃는 것이었지만, 이상하게도 단 하나도 어색하거나 하지 않다.
[한 공법의 조사께 감히 말씀드리자면, 이 공법의 이름은 소녀가 지어도 되겠습니까?]“마음대로 하시지요.”
그녀가, 허공으로 떠오르는 축문에 손을 가져가며 떠받쳤다.
어쩐지 새하얀 축문은, 백목련의 형태로 승화하고 있는 듯했다.
[백란축성문(白蘭祝聖文). 괜찮으실까요?]나는 그녀의 손 아래에 내 손을 받치며 말했다.
“기억하겠습니다.”
잠시 축문이 허공으로 떠오르는 걸 보던 우리는, 눈을 마주쳤다.
그녀의 혼백이, 점차 더더욱 투명해지며, 허공으로 올라가고 있었다.
[저도 잊지 않을게요.]“…네.”
나는 떨리는 목소리를 참지 못하고, 그녀를 바라보았다.
문득, 나는 저물대를 열었다.
예전 서란의 서고에서 읽었던 기억이 났다.
“…상계의 선사들은, 부부의 연을 맺을 때에 이리한다고 하더군요.”
마침, 백홍주 한 병이 저물대에 남아 있었다.
“괜찮으시겠습니까?”
그녀는 허공으로 점차 떠오르며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저물대를 뒤적였다.
술잔은 없었다.
어쩔 수 없이, 나는 백홍주의 절반은 그녀의 묘 앞에 붓는 것으로 대체했다.
그리고, 나는 남은 백홍주 절반을, 그녀의 앞에서 마셨다.
우웅!
박살이 나기 직전인 금단에, 백홍주가 들어오자 백홍주의 효과가 발동하며 다시금 법보와의 연계가 생겼다.
우우웅!
사방에 꽂힌 삼천 자루의 무색유리검들이, 일제히 진동하였다.
그리고.
그것을 마지막으로, 그녀의 영체는 작은 빛무리가 되어, 완전히 형체를 잃고 하늘로 올라가기 시작했다.
빛무리는, 하늘을 향해 올라가며, 빙글빙글 허공을 돌았다.
마치, 누군가와 다시금 쌍선무를 추기라도 하는 듯.
어쩌면 살아 있던 그 시절의 기억과, 그 행복했던 순간의 기억과, 춤사위를 추는지도 몰랐다.
나는 하염없이 하늘을 바라보다, 천천히 자리에 앉았다.
이제, 힘이 다 빠져나가고 있었다.
나는 허리춤에서 그녀의 노리개를 빼들었다.
그리고, 마지막 힘을 쥐어짜, 단화(丹火)로 노리개를 달궈, 노리개를 법보화시켰다.
나는 눈을 감고, 노리개를 소중히, 내 가슴에 가져다 대었다.
백홍주의 약력이 남은 것인지, 노리개 역시 나와 강한 연계가 생기는 것이 느껴졌다.
힘이, 빠져나가기 시작했다.
원립이 마지막에 발악하며 외쳤던 말들이 떠올랐다.
‘축복과 저주의 차이가 무엇이냐… 라.’
축복과 저주는 생과 사로 나뉘는 게 아닐지도 모른다.
어쩌면, 사람의 마음이 이어진다면, 그것이 곧 축복이고.
사람의 마음이 끊어진다면, 그것이 곧 저주가 아닐지.
이번 생은 지옥이었다.
하지만, 나는 지옥의 끝에서 마음을 나누며.
어쩌면 지옥과 천국은.
저주와 축복은.
사람과 사람의 마음이 이어지는 것으로 결정되는 것이 아닐까.
나는 그 깨달음을 얻으며, 원립의 마지막 절규에서 벗어났다.
“당신을… 사랑했습니다. 감사합니다. 내게… 그 마음을 전달해 주셔서.”
나는, 옅은 미소를 지으며, 그렇게 전신의 힘을 완전히 뺐다.
진즉 무너졌어야 할 경맥과, 금단이 힘을 잃기 시작했다.
그렇게, 나는 지옥의 끝자락에서, 평안하게 눈을 감았다.
* * *
우우웅!
서은현이 눈을 감고, 사방으로 흩뿌려졌던 무색유리검들이, 하나하나 허공으로 떠오르기 시작했다.
주인과 강력한 연계가 생긴 무색유리검들이, 천천히.
하나하나씩, 주인의 몸으로 돌아가기 시작했다.
삼천 자루의 무색유리검들이, 웃으며 죽은 서은현의 금단으로 돌아가기 위해, 한 자루씩 날아와 그의 몸에 꽂히기 시작했다.
어느 순간.
서은현의 손에 들린 노리개와, 삼천 자루의 무색유리검들이, 일제히 환한 빛을 내뿜었다.
* * *
북향화의 어머니.
북중호의 아내, 연의 묘소.
그곳에 있는 목련나무 앞으로, 두 개의 나무가 커 있었다.
200년의 세월 동안, 어떻게 죽지 않고 커 간 두 나무는, 마침 우연하게도 같은 날 꽃이 피었다.
모과나무와 백목련.
두 꽃나무에서, 각각 한 송이의 꽃이, 아래로 떨어졌다.
두 꽃나무의 꽃은, 200년 전 누군가 준비해 놓은 혼례식의 단(壇) 위에 내려앉았다.
하지만 어느 순간.
휘이이이이!
묘소 안쪽으로 불어온 바람에, 모과꽃은 묘소 바깥, 사막의 어딘가로 날아가 버렸다.
백목련은 그 자리에 남아 자리를 지켰고, 모과꽃만이, 어딘가 알 수 없는 곳으로 날아갔다.
그것이, 서은현의 열한 번째 회귀(回歸)였다.
11회차의 첫날
깜빡.
나는 천천히 눈을 떴다.
여태까지와 달리, 그 어떤 때보다 평안한 죽음이었다.
그리고 동시에.
가장 쓰라린 죽음이기도 했다.
주륵….
나는 눈물이 나왔으나, 한 번 눈물을 닦고는 정신을 차렸다.
삶의 마지막에서, 그녀의 마음은 충분히 느꼈다.
그녀는, 내가 죽지 않고 살기를 바랐다.
그리고, 더 이상 슬퍼하지 않기를 바랐다.
앞으로 삶을 계속 살아가며, 슬퍼하지 않는 것은 불가능할 것이다.
하지만, 나 자신을 무너뜨릴 정도로 괴로워하지는 말자.
그녀가, 슬퍼할 테니까.
나는 그렇게 결심하며, 수결을 맺었다.
의식 영역이 파동치며, 일어나려는 동료들을 잠재웠다.
익숙한 두통이 생기려는 듯했지만.
우웅!
나는 머릿속에 들어 있는, 오행혈주번을 통해 의식을 바로 억눌렀다.
급하게 의식을 쪼개거나 영약을 먹을 필요가 없으니, 상당히 편했다.
그리고, 그때였다.
욱신!
“…!?”
나는 비틀거리며, 배를 부여잡았다.
‘이건 또 무슨….’
머리가 아픈 것이 해결되니, 이제는 배인가?
나는 이해가 가지 않아 배를 부여잡고 이를 악물었다.
갑자기, 배가 찢어질 듯이 아팠다.
정확히는, 단전 부근이었다.
‘왜 또….’
나는 이를 악문 후, 우선 영약을 찾아가기로 했다.
얼마 후, 나는 삼을 먹고 빠르게 환골탈태를 한 후, 빠르게 내단을 만들었다.
그리고, 내단을 만들고 나서야 배에서 느껴지던 통증이 잦아든 것이 느껴졌다.
‘도대체, 뭐지?’
내가 의아해할 때였다.
갑작스레, 내단 부근에서 뭔가가 느껴졌다.
‘이건…?’
나는, 내단에서 느껴지는, 그 익숙한 기운에, 두 눈을 부릅떴다.
“이건…!”
그리고, 나는 우선 내단에서 강기를 뿜어내어 정순지력으로 제련한 후, 약식으로 수결을 맺었다.
촤라라락!
그리고.
파아아앗!
내 주변으로.
삼천 개의 익숙한 것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법보(法寶) 무색유리검(無色琉璃劍).
향화가 내게 만들어 준 내 전용 법보가, 시간을 넘어서 나를 따라온 것이었다.
그리고.
포옹!
무색유리검이 나온 후, 마지막으로 비췻빛의 노리개 역시, 바깥으로 튀어나왔다.
나는 멍하니 그것들을 바라보다가, 덜덜 떨리는 손으로 눈을 닦았다.
눈물을 너무 많이 흘리지 말자고 생각한 게 방금 전인데.
또다시 추하게 질질 짜고 있다.
나는, 떨리는 목소리로 읊조렸다.
“전승… 되었어….”
사람의 인연이.
시간을 넘어, 전해졌다.
그녀와 지냈던 시간들.
순간들.
그 모든 것들이.
모두, 완전히 사라지지 않았다.
처음으로, 나는 시간을 함께 넘어갈 수 있는 동지를 얻었다.
* * *
얼마간, 실컷 무색유리검들을 보며 마음을 다잡은 후.
나는 고민을 해 보았다.
‘어떻게, 나를 따라온 거지?’
이건 중요한 문제였다.
내가 단화로 제련한 본명법보라서 나를 따라온 것인가?
아니면 특별한 뭔가가 더 있는가.
그리고 특별한 뭔가가 있다면, 그것은 무엇인가.
나는 고민해 보다가, 한 가지에 생각이 닿았다.
‘백홍주.’
선주(仙酒)라고 불리는 백홍주.
나는 백홍주의 능력을 떠올렸다.
‘분명, 법보와의 연계를 강화시키는 능력이었다.’
그리고, 그를 잘 생각해 보았다.
분명 백홍주를 처음 마셨을 때.
긴박한 상황이었어서 잘 생각이 나지 않았지만, 분명….
‘영혼 그 자체와 법보와 연결되는 듯한 일체감이 들었지….’
단순히 연계가 강화되는 정도가 아니었다.
이건 분명….
‘백홍주로 인해, 일순간 내 혼백과 법보가 연결되었다. 그리고, 혼백이 시간을 역행함에 따라, 법보 역시 나를 따라온 건가?’
그렇게밖에 설명이 안 되었다.
단순히 본명법보만이 나를 따라왔다 하기엔, 북향화의 노리개는 마지막에서야 단화로 법보화를 시켰었다.
‘백홍주가, 법보가 내 회귀를 따라오도록 도운 것인가?’
그렇게밖에 생각할 수 없다.
‘그렇다면….’
우선 이번 생에, 백홍주를 다시 얻어 시험해 보자.
그리고 만약 어쩌면….
가능하다면….
‘법보뿐이 아니라….’
타인의 혼백까지 나와 함께 회귀하는 게 가능하다면…!
만약 그리된다면, 그것은 엄청난 발견일 수도 있었다.
‘그래, 추후에 다시 봉명성에 가서 백홍주를 얻어 보고 확인해 보자.’
생각을 정리한 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지난 생의 깨달음을, 재현해 볼까.’
우우웅!
정신을 집중하고, 강환들을 띄워 올렸다.
총 아홉 개의 강환.
아니… 내단까지 합쳐.
열 개의 강환이다.
우우웅!
허공에 있던 강환이 의식 영역에 녹아들어 가고, 단전에 있는 강환이 똑같이 녹아내리며 체외의 무형검과 연결된다.
그리고, 체내의 내단과 연결된 무형검이, 다시금 내 전신 곳곳에 깃들기 시작했다.
다시금 그 기분이 내 전신을 장악했다.
근섬유 한 올 한 올에 무형검이 깃드는 기분.
이건 마치….
‘마치, 축기기 수도자가… 아닌가?’
축기기 수도자는 혈관에 강기가 흐르는 것처럼, 이 영역에 이른 무인은 전신에 월도입천의 깨달음이 깃들어 흐른다.
그리고 그 말인즉.
‘어쩌면, 월도답천의 경지부터는, 무인 역시 수명이 늘어날 가능성이 있다!’
지금은 연기기 칠성제의를 치르지 않아, 내 수명을 확인할 길이 없었기에 알 수 없었지만.
왠지 나는 그럴 것 같다는 직감이 들었다.
나는 우선 답천경에 이르며 얻은 것이 무엇인지를 조금 더 살펴보기로 했다.
그리고, 그때였다.
크르르르….
익숙한 녀석이 나타났다.
“그래, 나올 줄 알았다.”
여우는 나와 또다시 익숙한 문답을 주고받았다.
세 번에 걸쳐서, 기어코 나를 잡아먹겠다는 여우를 보며, 나는 살짝 한숨을 쉬었다.
“정 그렇다면, 일단 답천경의 공능은 너로 시험해 보도록 하마.”
“…?”
그리고.
콰아아앙!
나는 여우에게 달려들어, 발차기를 날렸다.
“케에엑!”
여우가 비명을 지르며 튕겨 나갔다.
월도답천의 공능, 첫 번째.
육신이 완전히 월도입천과 동기화되었기에, 신체 어느 부위로 공격을 가해도 무형검을 사용한 것과 똑같은 흔적이 남는다.
첫 돌격에서 나와의 차이를 깨달았는지, 기세가 죽은 듯한 모습. 하지만 나는 아랑곳하지 않고, 여우에게 달려들었다.
콰아아아앙!
육신이 완전히 무형검과 동기화되었으나, 무형검을 원래 휘두르던 대로 휘두르는 것 역시 얼마든지 가능했다.
놈은 두 번째 일격을 맞자, 꼬리가 상당히 처져 있었다.
답천의 공능 두 번째.
기본적인 공방의 능력이 훨씬 좋아졌다. 열 개의 강환을 모조리 써서 그런 것인지, 아니면 나의 생명력과 직접적으로 연결된 탓인지.
훨씬 더 무형검으로 끌어올릴 수 있는 힘의 한계치가 높아진 듯했다.
거기에, 무형검을 늘 잡고 있어야만 가속이 가능했으나, 지금은 이제 그냥 있어도 무형검과 하나였기에 가속이 가능했다.
거기에 가속 역시 단순한 10배를 넘어, 훨씬 더 빠른 속도로 가속이 가능했다.
콰아앙!
극속으로 달려들어 녀석을 후려치자, 이제 여우는 내게 완전히 반응할 수 없다는 걸 알아차렸는지, 두려운 눈으로 나를 보기 시작했다.
녀석은 나와의 거리를 재더니, 의식 영역을 제 몸과 같이 압축한 상태에서, 더더욱 빠르게 도망쳤다.
답천의 공능 세 번째.
무형검만을 다루던 시절에는, 사실 대부분 허공답보를 통해 날아다녔다. 결단기 수도자들이 갖는 비둔술을 쓰지 못했기에, 장거리 비행이 어려웠고, 허공답보로 비둔술을 멀리 쫓아가기에는 한계가 존재했다.
하지만, 무형검과 완전히 하나가 된 지금은, 마치 비둔술처럼 허공을 빠르게 날아다니는 것이 가능했다.
쐐애애애액!
콰아앙!
나는 도망치는 여우를 향해, 무형검 그 자체로 화하여 날아들어, 녀석을 메다꽂았다.
녀석의 덩치도 덩치였기에, 지축이 흔들렸다.
놈이 저항하려 했으나, 나는 놈의 가슴을 향해 손을 뻗었다.
우우웅!
답천의 공능 마지막.
슈왁!
내 손이 녀석의 가슴 어림에 닿았고, 여우의 몸이 딱딱하게 굳었다.
가만히 보면 내가 그저 여우의 가슴을 만지는 것 같았지만, 실상은 내 손에서 뻗친 무형검이 여우의 거죽을 그대로 통과해, 여우의 요단에 도달해 존재감을 발하는 상황이었다.
첫 번째부터 세 번째까지는 영훈 형님이 말한, ‘강환은 모두 하나, 무와 나는 일체’에 해당하는 깨달음이었다면.
마지막 공능은 나와 그의 차별점이었다.
‘영훈 형님은, 공간을 베어 냈다.’
그리고, 김영훈의 능광도를 모사했던 나 역시 일순간이나마 공간을 베어 내는 데에 성공했었다.
그러므로, 능광도가 답천에 도달할 때 가지게 되는 힘은 공간 절단, 혹은 공간 탈출이라고 보는 게 맞는 듯싶었다.
아마 그와 내가 추구하는 게 달랐던 탓일 가능성이 컸다.
그는 빛을 넘고 싶어 했고, 나는 모든 것에서 벗어나고 싶었으니.
결국 공간을 넘는 능광도라면 정말로 빛을 뛰어넘은 셈이고, 원하는 것만 골라 벨 수 있는 무형검이라면 정말로 모든 한계에서 벗어난 것이었다.
“요, 용서… 해 주십시오.”
여우가 몸을 덜덜 떨며 내게 말했다.
‘어떻게 할까….’
지금 당장이라도, 여우의 몸에 침투한 무형검을 사용해 놈의 요단을 바로 적출해 낼 수 있다.
사실 방금 전까지 몇 번 이 녀석과 씨름한 것은, 그냥 답천경의 공능을 시험해 본 것이었고, 처음부터 1초 안에 여우의 내단을 바로 적출할 수도 있기야 했었다.
난 잠시 여우의 처우에 대해 고민하다가, 여우의 가슴에서 손을 뗐다.
“됐다, 용서해 주마.”
“가, 감사, 감사합니다…!”
녀석은 내게 머리를 조아리며 인사를 하고는, 도망치듯 산을 넘어가 버렸다.
여우 녀석에게도 악감정은 남아 있었지만.
지난 삶.
너무나 큰 고통을 받았던지라, 여우 녀석에게 받았던 고통들 정도야, 어느덧 상당수 잊힌 상태였다.
‘그리고 한 번 정도 그 꼴을 당했으면 충분하기도 하고….’
나는 피식 웃었다.
여우에게 팔을 뜯어먹혔던 것이 엊그제 같건만.
어느새 1초도 들이지 않고 놈의 요단을 적출할 수 있을 만큼 실력이 올랐다.
물론, 월도입천에 이르고 400년 가까이 수련을 한 탓이었기 때문이었지만 말이었다.
나는 천천히 동료들에게 돌아갔다.
그리고, 나는 의식 법술을 이용해, 김영훈의 머릿속으로 우선 월수궁무록부터 시작하여, 월도답천에 이르는 깨달음의 구결을 전부 불어넣어 주었다.
‘진짜 완전히 기억을 전송하는 법술이 있으면 편하겠군.’
지금까지 계속 의식을 통해 김영훈에게 지식을 전달하고는 있었지만, 사실 이것은 ‘기억 전송’이라기보다는 ‘구결 전송’이라는 말이 더 맞는 술법이었다.
제대로 된 기억을 전달키보다는, 그저 정리된 구결을 전하는 기능이 더 컸다.
그렇게 김영훈에게 완전히 기억을 전송하였을 때였다.
저벅, 저벅….
‘답천경에 공능이 하나 더 있긴 하군.’
기다리던 자가, 뒤쪽에서 다가오고 있었다.
‘감지력이 더욱더 민감해졌다. 요족의 지각도, 의념의 흐름도. 전보다 더더욱 선명하고, 자세하게 보여.’
이전이라면 그의 접근을 알아차리지도 못했을 터.
하지만, 그래도 이 정도 경지가 되니, 알아차리는 것 정도는 허용되는 듯하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정중하게 고개를 숙였다.
“수도의 후배, 서은현이 괴군 조연 선배님을 뵙습니다.”
[호오, 여우와 싸우는 것은 흥미롭게 보았다.]내가 1초에 여우의 요단을 적출해 버리지 않고, 시끄럽게 싸우며 주의를 끈 이유.
그것은, 바로 괴군을 불러내기 위함이었다.
[네놈, 정말 이상한 놈이란 말이지. 원영기 수도자는 아니야. 그런데, 어떻게 결단 중기경 여우를 무슨 장난감 인형처럼 가지고 놀지? 거기다가, 그건 연체지법인가? 의식이 육신을 덮고 있는데… 신기하군, 신기해.]“수많은 세월을 살아오신 선배님께 미욱한 재주를 보여 부끄러울 따름입니다.”
[허어, 기이하군. 법력은 안 느껴지는데….]괴군은 이번에는 내 내단을 인지하지 못했다.
그야 당연했다.
답천에 이른 후, 내단은 무형검에 완전히 녹아 버렸으니까.
나는, 괴군을 쳐다보며 입을 열었다.
“선배님, 혹시 한 남녀 이야기를 아십니까?”
[음?]“성제국의 산간 지역에는… 두 신선에 대한 이야기가 내려오며, 그들의 의기(義氣)에 의해 구원받은 이들이, 그들의 행적을 기려 위령제를 하나 만들었다 하지요.”
움찔.
나는, 나를 쳐다보는 괴군의 눈빛에 흠칫 몸을 떨었다.
그는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것도, 희번덕한 눈으로, 어디 계속 해 보라는 듯이.
아마 괴군에 대해 잘못 말하면, 산 채로 잡혀서 그의 괴뢰가 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내가 얘기하려는 것은, 내 얘기였다.
“저는, 아주 먼 옛날. 성제국 산간 지역에서 한 사람과 사랑에 빠졌습니다.”
그렇게, 나는 괴군에게 회귀에 대한 것을 뺀, 내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 * *
“…하여, 저는 정인이 유해를 껴안고 맹세했습니다. 놈의 사지를 뽑아 동서남북에 흩뿌리고, 몸을 발기발기 찢어 개 떼에게 뿌려 준 후, 수급을 정인의 영전에 바치겠다고.”
[….]괴군은, 여전히 희번덕한 눈빛으로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모르는 사람이 보았다면, 이 자가 얘기를 듣고 있는 것인지, 나를 노려보는 것인지 모를 것 같은 눈빛.
하지만 나는 괴군의 의념을 지켜보며 알 수 있었다.
‘통했다.’
그리고, 괴군이 입을 열었다.
[그… 놈의 이름이 뭐라고?]“혈목자 원립. 답천사막… 이 좌표에 흑색의 성에 사는, 실력을 숨기고 있는 원영기 수도자입니다.”
[그렇군….]잘근, 잘근잘근잘근….
그가, 갑자기 자신의 손가락들을 입에 넣고, 마구 잘근거리며 씹기 시작했다.
침이 턱밑으로 뚝뚝 떨어진다.
괴군이, 그 상태에서 번들거리는 눈으로 나와 시선을 마주쳤다.
[안내해라.]11회차의 첫날.
본래는 원격 저주로 조금 도움이나 받을까 해서 괴군에게 이야기를 들려주었던 것이.
괴군과 함께 원립의 성으로 향하게 되는 결과를 낳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