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 Regressor’s Tale of Cultivation RAW novel - Chapter (172)
스승의 은혜 (9)
새로 태어난 단악검법 25번째 식.
의해은산(義海恩山).
내가 만들어 낸 이 단악검법의 극의는, 사실상 순수한 무(武)라고 보기도 힘들었다.
단악검법의 전반부인 1초부터 12초까지는 기초적인 초식들을 조합하여, 무공의 동작과 동작들로 하여금 최대의 위력을 끌어낼 수 있는 무공이었다.
가로 베기인 월악이나 하단 베기인 입산, 올려 베기인 등맥부터 시작하여,
12초인 십이광일출봉 역시 무수한 찌르기를 바탕으로 하는 초식이었다.
단악검법 전반부의 각각의 초식은 정밀하게 펼칠 것을 요하는 무공 초식이긴 했지만, 각각의 초식이 복잡하다기보다는 초식을 연계하여 펼치는 연계기가 더더욱 중요시되는 편이었다.
그리고 그 이후 펼쳐지는 단악검법 후반부, 13초부터 24초까지는 단악검법 전반부에서 체득한 검기(劍氣)를 다루는 감각을 바탕으로 하여금 검기를 다루고, 상대와 의념의 간합을 재는 데에 특화된 무공 초식이었다.
특히 22초 단악은 1초부터 21초까지의 초식을 전부 상대에게 때려 넣는 초식인 만큼, 그 모든 초식이 상대에게 ‘적중’해야만 의미가 생기는 초식이었다.
그런 만큼 상대의 의념과 간합을 재는 능력을 극한으로 요했다.
23초 산외산부진과 24초 우공이산 역시 의념으로 상대의 전력과 나 자신의 몸 상태를 재어 보아야 하는 것이 본질이었다.
지금까지 사용해 온 단악검법의 전반부는 정밀한 기본기와 기본기들의 연계.
후반부는 기본기로 생성된 검기의 사용법과 의념의 간합, 그리고 전투 경험이 중점이 되는 무학이었다.
그리고, 단악검법 후반부를 넘어서 만든 25번째 식(式).
나는 눈을 감고 새로 만들어 낸 식의 본질을 참오하였다.
‘내 모든 것을 그때의 일참(一斬)에 쏟아부었다.’
함천존자의 일식을 쫓아가며 만들어 낸 일참.
그의 일격을 따라 하며, 내가 가진 모든 힘을 쏟아부었던 극한의 일수.
우공이산이 티끌 같은 힘을 내 몸 안에 모아 끊임없이 적을 몰아친다면.
의해은산은 내 몸 안에 모인 힘을 극한으로 쥐어짜 내어, 최후의 단 하나로 뽑아내는 공격이었다.
그렇다면 의해은산의 본질은 일격필살인가?
‘아니다.’
의해은산의 본질은 그런 것이 아니었다.
나는 스물다섯 번째 식을 만들며 떠올랐던 깨달음을 갈무리하며 눈을 감고 의식을 집중했다.
‘의해은산의 본질은… 통합(通合).’
극한으로 힘을 짜내는 것이 본질이 아니다.
힘을 극한으로 압축하며, 내가 일궈낸 무수한 잡다한 힘을 그 압력 안에서 통합시켜서 내지르는 것이 의해은산이라는 초식의 본질이었다.
그러므로, 통합을 유지한다면 언제든 다시 방금의 일격을 재현하는 것이 가능했다.
‘통합한다.’
오월입도경의 모든 기본 법술들.
선각후통(先覺後通)으로 깨달은 모든 법술의 흐름.
그 이후에 익힌 음혼귀주문, 천린수해성, 규토장성공….
여러 공법의 구결과 흐름들이 뇌리를 스쳤다.
처음으로 의해은산을 썼을 때는 깨달음이 일순간 몰아쳐 한 번에 펼쳐 낼 수 있었다.
그러나 그런 식의 돈오가 없다면, 결국 내가 스스로 모든 공법의 흐름을 풀어헤쳐 통합시켜야 하는 것이다.
‘그나저나… 나는 흙(土) 속성 공법을 많이 익혔군.’
음혼귀주문은 팔괘의 괘상 중 태음(太陰)을 상징하는 곤(☷)의 괘에서 만들어진 공법이었다.
그리고 곤괘는 결국 오행 중 지(地)에 해당하는 괘상.
무림인 시절 익힌 용맥기공도 토 속성.
처음으로 익힌 수도공법도 지월입도경.
음혼귀주문도 토 속성.
규토장성공도 토 속성.
군마용갱권은 연동하는 법보에 따라 속성이 갈리는데, 내 무색유리검은 사막의 모래로 만들어졌기에 엄밀히 말하면 이 역시 토 속성이었다.
천린수해성은 그나마 목 속성이었고,
백란축성문 역시 천린수해성의 영향을 받아 목 속성의 힘을 가지고 있었으나 결국 음혼귀주문에서 탄생한 것이기에 토 속성도 섞여 있는 공법이었다.
‘어째… 굉장히 흙과 인연이 많군.’
그렇다면 역시, 통합의 중심은 대지(大地)다.
무수한 공법 구결이.
오월입도경과 오행장원전.
천린수해성 등 타 속성의 공법들이,
토 속성의 영기를 중심으로 뭉친다.
흙(土)은 본디 오행(五行)의 중앙.
오행의 속성이 가진 방위로만 보아도 중심을 잡는 데에 무리는 없다.
우우웅!
토 속성을 상징하는 황색의 영기가 전신에서 치솟아 올랐다.
본디 하늘은 검고 대지는 누렇다는 말이 있지 않은가.
모든 흙은 황색(黃色)이다.
하나, 나는 황색의 영기를 끌어모은 채 눈을 반개하고 의식을 더더욱 집중하였다.
유리(琉璃).
흙을 녹여 깨끗한 유리로 제련한다.
극한으로 영기를 가속시키고, 단련한다.
의식을 압축하여, 혼의 계위에 있는 의식과 기의 계위에 있는 영기를 합일한다.
츠츠츳!
무형검이 내 손에 잡힌다.
그리고 무형검이 가진 무색(無色)이 전염되듯 주변으로 퍼져 나가며, 황색의 영기를 투명하게 물들였다.
하지만 본디 아무런 색도 없다는 것은, 어떤 색도 될 수 있다는 뜻.
‘간다.’
의식을 손에 쥔 것에 불어넣는다.
의식뿐이 아닌 모든 것을 불어넣는다.
원영기에 이를 때 한 번 펼쳤던, 은하수(銀河水)를 담은 듯한 검(劍)이 내 손에 들린다.
어쩌면 원영(元靈)의 경지에 이를 때부터 의해은산의 단초는 잡았던 것이리라.
무색(無色)의 검이 삼라만상 모든 별의 색을 담은 총천연색(總天然色)의 은하검으로 변화한다.
마치 별하늘이 내 손에 잡힌 것 같다.
그리고, 나는 다시금 이 별하늘을 바라보며 드디어 완전히 의해은산의 깨달음을 정립할 수 있었다.
‘혼(魂)을 불어넣은 일검(一劍).’
의해은산의 초식.
그 본질이란, 자신의 혼(魂).
혹은 원영(元靈)을 검(劍)에 불어넣은 후, 기와 혼의 두 계위에 걸쳐 있는 원영의 안쪽에서 자신의 모든 힘을 합일(合一)시켜 내지르는 필살(必殺)의 일초(一招)였다.
내가 쥐고 있는 것은 나의 혼(魂) 그 자체였으므로, 의해은산의 초식이 실패하면 나는 그 즉시 원영이 붕괴하여 죽는다.
나 자신의 모든 것을 불어넣어, 모든 것을 걸고 벌이는 단 한 번의 도박.
우공이산은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위험한 일수!
“의해은산(義海恩山)!!!”
연이를 향해 일수를 내지르며, 나는 필생의 의지로 정신을 곤두세웠다.
나 자신이 검(劍)이 되어 그녀의 안으로 파고든다.
알 수 있다.
내가 익힌 선각후통의 지식을 통해, 상대의 심상에 선각후통의 깨달음을 남겨 줄 수도.
무학의 깨달음을 남겨 줄 수도.
괴뢰의 회로에 대한 깨달음을 줄 수도.
내가 느낀 감정에 대한 깨달음을 줄 수도 있으며.
백란축성으로 축복도, 음혼귀주로 저주도 할 수 있다.
푸확!
삽시간에 그녀의 심상에 ‘들어’간다.
월도답천의 시야로, 단순히 상대의 심상을 보는 것에서 그치지 않는다.
내 심상에 들어가는 것처럼 자연스럽게 상대의 심상에 침입한다!
파츠츠츠!
나는 무수한 색채의 근원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다음 순간.
나는 어마어마하게 아름다운 광경을 보았다.
인간의 몸은 소우주라 하던가.
그렇다면 인간의 마음은 어떤가.
사람의 마음 역시, 무량심천(無量心天)이라 할 수 있지 않는가.
마치, 성천이 가득한 우주 같다.
‘이게, 연이의 표면 심상인가,’
인간의 심상은 크게 표면의 심상과 안쪽에 있는 핵심 심상으로 나뉜다.
그리고 내가 진입한 영역은 표면의 심상이었다.
입천의 경지에 달한 이는 자타의 심상을 볼 수 있다.
어째서일까.
그것은, 입천에 달한 존재들이 보는 ‘심상’이란, 본래 인간의 가장 깊숙한 영역에 있는 것이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입천에 달한 이들은 그런 가장 깊숙한 영역에 있는 자신의 본질적인 심상을 표면적인 심상과 통합시키게 된다.
이미 자기 자신이 거리낄 것 없기에, 남의 심상 역시 제대로 볼 수 있는 이들.
그것이 입천의 경지에 다다른 이들이었다.
그러나 일반인은 이처럼 심상 깊숙이 들어가려면 표면 심상을 거쳐야 했다.
아마 의식의 크기가 큰 사축기 이상의 수사들이라면, 의식 상태가 멀쩡하다는 가정 하에 의해은산의 침입을 막을 시도를 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아무 제지 없이 그녀의 안쪽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그리고 의식의 보호가 되지 않는 표면 심상인 탓인지.
나는 그녀의 심상 안쪽으로 들어가며 뭔가를 느낄 수 있었다.
‘이게….’
연분홍빛 의념이 나를 스쳐 지나갔다.
나는 새하얀 빛살이 된 채, 마치 우주 같은 그녀의 의식을 활공하는 중이었기에 스쳐 지나가는 의식은 그다지 신경 쓸 수 없었다.
하지만, 비슷한 의식이 끝없이 나를 스쳐 지나간다면 신경을 안 쓰더라도 알 수밖에 없지 않겠는가.
―좋아한다.
총천연색의 별이 떠 있는 우주 속.
나는 별이 몰려 있는 의식의 심부로 중심부로 들어갈수록 연분홍빛 별들이 점차 많아지는 것을 느꼈다.
―대리님, 안녕하십니까, 이번에 새로 온 신입 사원 김연이라고 합니다!
―대리님, 이거 어떻게 하나요?
―아, 들어 주신다고요? 감사합니다.
―아하하, 전 대리님이 괴롭히신다고요? 저도 그분 마음에 안 들던데. 엑? 그 인간이 과장 돼요?
―혈액형 뭐라고요? 아, 저랑 똑같이 A형이네요?
―서 대리님도 혜서 언니 참 좋죠? 정말 천사 같다니까요.
―우왓, 서 대리님도 엑셀 헷갈리시죠? 저도 이거 엄청 헷갈리던데, 혜서 언니한테 물어보러 갈까요?
―네? 제가 최근에 혜서 언니랑 친하게 안 지내는 거 같다고요? 하하…. 아. 근데 점심시간인데 뭐 먹을까요?
―헤헤, 역시 탕수육은 부먹…. 아, 대리님도 부먹이에요? 역시 통하는 게 있는 거 같다니까요.
모든 기억을 상세하게 들여다보는 것은 불가능했다.
하지만 별들이 내는 목소리는 얼핏얼핏 들려왔다.
나는 얼핏얼핏 들리는 목소리들을 들으며 더더욱 안쪽으로 진입하였다.
그리고 어느 순간.
나는 무수한 별들이 모이는 은하의 한가운데에 도달하였다.
무수한 의식과 감정.
그중에서 가장 행복했던 감정이 모이는 장소.
인간의 깊은 의식으로 들어가는 데에는 일곱 개의 문이 있었다.
그리고 내가 도달한 방법은 아무래도 사랑을 관장하는 문인 듯싶었다.
이곳만 넘으면 곧 그녀의 내부 심상.
그녀의 본질을 품고 있는 곳이었다.
문득, 나는 그녀의 내부 심상으로 도약하기 전.
그녀의 의식을 스쳐 간 어떠한 환영을 바라보았다.
사라락….
‘아….’
생각난다.
회사에서 봄날에 식물원과 관련 업무가 생겨 식물원에 출장을 간 적이 있었다.
김연은 출장 업무를 전부 끝내고, 누군가와 식물원 거리를 걷고 있었다.
그 누군가는 그녀의 감정에 의해 잔뜩 미화되어, 정말로 아름답게 기억 안에 남아 있는 것이 보였다.
두 사람은 모과나무 앞에 서서 잠시 나무를 구경했다.
―그나저나, 혹시 무슨 꽃 좋아하세요?
그녀가 호기심이 생긴 듯, 미화된 누군가에게 물었다.
미화된 누군가는 모과나무를 가리키며 말했다.
―…해요. 주임님은 따로 좋아하시는 꽃 있나요?
―저는….
잠시 고민하던 그녀는 부끄러운 듯 뭐라고 입을 열었다.
‘저 때 분명….’
나는 그때의 기억을 떠올리며 피식 웃었다.
그때 그녀가 한 말을 생각해 보면, 그냥 고백이나 다름없었는데.
멍청하게 그걸 못 알아차린 것이었다.
‘미안하다.’
한심한 놈인지라, 고백조차도 늦게 늦게 알아차리는구나.
‘그래도 용서해 다오.’
파츠츳!
은하의 중심.
연분홍빛 빛무리 너머로 뛰어들어 심상에 도달하며, 미소 지었다.
‘지금이라도, 그 대답을 들려주겠다.’
그녀의 심상으로 향하는 통로에 들어왔다.
하지만 그 통로에는 질척질척하고 더러운 무언가가 끼어 있었다.
피비린내와 오물 냄새가 나는 그것.
존자의 금제.
‘벤다.’
츠츳!
나는 검이 되었다.
내 혼은 검으로 제련되어 눈앞의 방해물을 그대로 베어 가르고 으스러뜨렸다.
일반적인 의식 법술로는 이것을 절대 쉬이 부수지 못할 터.
하지만, 내 혼(魂)을 걸고 이 자리에 그대로 들어온 나로서는 금제와 동등한 입장에서 너무나도 쉬이 그것을 베어 낼 수 있었다.
부스스….
금제는 그렇게, 먼지처럼 부스러지는 듯싶더니 그녀의 의식 속으로 흩어지며 그녀의 정신과 하나 되었다.
그리고, 금제가 사라짐과 동시에 나는 그녀의 심상으로부터 강력한 항력(抗力)을 느꼈다.
봉인된 의식이 해방되며, 이물질인 나를 배출하려는 것이다.
‘됐다.’
그녀가, 이제 금제에서 벗어난다.
나는 그녀의 의식 속에서 자연스럽게 튕겨져 나갔다.
그때.
‘음?’
나는 그녀의 의식 사이에서, 등선향에떨어지기직전의기억속장면에있는존재가거대한옥.
* * *
찌릿!
주르륵….
나는 따끔하고 머리가 아파 오는 것과 동시에, 코피가 흘러내리는 것을 알아챘다.
의식 세계에서야 길었던 순간같이 느껴졌지만, 의해은산의 초식을 사용한 후, 눈 두 번 깜빡일 시간밖에 지나지 않았다.
현실 시간으로는 찰나의 시간인 셈.
그런데 그 찰나에, 뭔가 상단전에 부하가 간 것인지 안쪽에서 피가 밀려 오는 게 느껴졌다.
‘왜 갑자기 코피가 나지?’
분명 그녀의 의식이 주는 항력에 힘입어 자연스럽게 의식 세계에서 빠져나왔다.
‘아니, 웃긴 소리군.’
쿨럭!
전신에 어마어마한 탈력감이 맴돈다.
온몸의 생명력을 짜낸 것 같다.
아니, 사실 생명력을 짜낸 게 맞을 거다.
자신의 원영을 검에 불어넣고, 두 계위의 힘이 합일하여 양 계위에 걸친 원영 안쪽으로 모든 힘을 불어넣어 합일시켜 낸 후 펼친 일참.
의식은 물론이고, 당연히 몸에도 무리가 갔다.
‘의식이….’
목숨뿐이 아닌, 영혼 그 자체를 건 일격을 두 번이나 날렸다.
긴장이 풀리며 앞을 향해 쓰러졌다.
그리고.
꼬옥….
부드러운 손길이 나를 끌어안으며, 앞으로 몸을 박아 버리는 걸 막아 주었다.
“…고마워요, 은현 오빠.”
연분홍빛 경장을 입은 그녀가 나를 안은 채로 미소 짓고 있었다.
나는 입을 달싹이며 그녀를 쳐다보았다.
우우우웅!
오행혈주번처럼.
방금 전까지 그녀의 정신을 봉인하던 금제는, 방금의 일로 인해 도리어 그녀에게 제압당한 모양인지, 그녀의 의지에 따라 구현되는 것이 보였다.
파아앗!
그녀의 머리 위로, 마치 서양의 왕관(王冠)처럼 보이는 새하얀 원형의 고리가 생겨났다.
“…연, 아….”
“네, 알고 있어요.”
부우웅!
새하얀 의식의 실이 내 머릿속을 빠르게 스쳐 지나갔고, 나는 의식의 실을 통해 그녀에게 심어로 내 뜻을 정했다.
그녀의 눈에 굳은 결의가 빛났다.
“이제 이 전쟁을 끝내요.”
한 팔로 나를 안은 채.
남은 한 팔을 들어 올렸다.
‘뭔가, 변했다.’
나는 나를 끌어안은 그녀를 보며 생각했다.
내가 알던 김연과는 조금 달라졌다.
단순히 금제를 그녀에게 연화시켜 주어서인가?
금제 역할을 하던 의식 법술이, 그녀의 의식을 증폭시켜 주는 것 때문인가?
아니면 괴군에게 잡혀 지내던 천 년의 그녀와 달리 조금 더 의식이 안정화된 곳에서 생활했기 때문일까?
여러 가지 생각이 뇌리를 스쳤다.
하지만 다시금 나를 바라본 그녀의 눈빛에서, 나는 뭔가를 알 수 있었다.
‘…그런가.’
내가 그녀의 심상에 들어가며 무수한 감정을 보았듯이.
어쩌면 그녀 역시 내 감정을 조금 들여다보았던 것이리라.
심연을 들여다보면, 심연도 나를 들여다본다는 말처럼.
누군가를 들여다본다면 어쩌면 나 역시 누군가에게 들킬 것을 각오해야 하는지도 몰랐다.
‘너도, 내 마음을 읽었구나.’
“고마워요, 오빠.”
김연은 환하게 웃으며 주먹을 쥐었다.
“나를 좋아해 줘서.”
새하얀 의식의 실이 그녀의 손으로 몰렸고, 존자의 왼손이 걸었던 금제가, 왕관이 되어 빛나며 의식의 힘을 더더욱 극대화시킨다.
보인다.
혼(魂)의 계위에 있는 의식이, 너무나도 거대하게 넘쳐흘러 기의 계위에도 영향을 끼친다.
꾸드드드드득!
공령지 지하 공동의 천장이 그대로 뜯겨 나간다.
쿠구구구구!
폭음이 울리며, 아직도 벌어지고 있는 무수한 전장이 눈에 담겼다.
쿠구구구구!
저 멀리, 존자의 왼손이 [그녀]의 창에 꿰뚫리며 무너지는 것이 보인다.
전장은 종막으로 향하고 있었다.
전명훈 역시 괴군의 인해전술에 버티지 못하고, 봉인에서 풀려나오자마자 다시 괴뢰들에 의해 봉인된 듯했다.
그리고, 괴군의 시야가 밑에 있는 우리를 향했다.
“호오, 이게 누구야. 내 제자로구나! 그래, 내 사랑스러운 제자야. 이 몸, 조연(早緣)의 제자 김연(金然)아! 너와 달라붙어 있는 그놈에게 서신을 받았다! 네가 드디어 내 숙원을 이뤄 주기로 했다고? 연아! 오오, 내 제자야! 좋자! 좋다, 좋다, 좋다좋다좋다좋다좋다좋다좋다어디한번해보려무나! 결과가 시원찮으면지금사축기극한으로개조해놓은서장군의몸에저서가놈의머리를박아넣어버릴테니!!!”
나는 연이의 품에 안겨, 말없이 비명을 지르듯 소리치는 조연을 바라보았다.
우리는 말없이 심어를, 마음을 주고받았다.
방금 전 한 번 마음속 깊이 들어갔다 온 탓인지.
더더욱 마음이 잘 통하는 듯했다.
그리고, 우리는 말없이 하늘을 향해.
기묘성채를 향해 손을 뻗었다.
“…시작하자.”
“네.”
나와 그녀가, 기묘한 세계를 향해 손을 뻗는다.
그리고,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의식을 뻗으며 외쳤다.
“기묘(奇妙)!”
“성심(成心)!”
순식간의 두 사람의 의식이 실타래처럼 풀어헤쳐지며 사방팔방으로 뻗어 나갔다.
그리고, 기묘성채의 몸체에 닿은 두 사람의 의식이 기묘성채를 장악하기 시작했다.
“흐호!?”
괴군이 눈에 이채를 띄었다.
기이이이잉!
‘발동하라, 서 장군의 독(毒)이여!’
기묘성채 안쪽에 있던 서 장군의 영향이 날뛰기 시작했다.
짧은 찰나.
기묘성채의 명령 체계가 마비가 되었고, 나는 그 틈을 타서 빠르게 의식으로 기묘성채 곳곳을 점하였다.
내 의식이 뻗어 나가며 길을 알려 주면 그 뒤로 김연의 의식이 따라오며 기묘성채를 차근차근 장악한다.
이전 생에 비하면 경지는 모자랐지만, 존자의 왼손이 넘겨준 정신 법술.
그리고 훨씬 더 안정된 그녀의 의식이 더해지며, 그녀는 지난 생과 그리 다를 것 없이 기묘성채를 장악하기 시작했다.
“아아….”
그리고, 괴군은 아련한 표정을 지으며 기묘성채를 바라보더니, 방금 막 봉인해서 손에 들고 있던 전명훈의 금단을 던져 버렸다.
그는 빠르게 기묘성채로 들어갔고, 존자의 왼손을 완전히 정리한 [그녀]가 괴군을 뒤따라 기묘성채로 들어갔다.
이미 지난 생에 연이와 발동해 봤던 것.
김연은 아직 제대로 몰랐지만 나는 그녀의 의식을 인도하며, 아주 자연스레 연의 연으로 그녀를 이끌었다.
지난 생과 달리, 그녀가 연의 연에 모든 기력을 빨릴 걱정은 하지도 않았다.
지금이라면 그녀와 연의 연 사이의 연결 고리를 무형검으로 끊을 자신이 있었다.
그리고 마침내.
파아아앗!
기묘성채에서 찬연한 빛이 터져 나오며, 괴군의 마지막 꼭두각시극이 발동되었다.
등장하는 꼭두각시는 괴군 자신이었으며, 조종사는 그의 제자였던 김연.
연의 연이, 모습을 드러내었다.
우우웅!
‘아아….’
나는 [완전한 상태의 기묘성채]가 연의 연을 발동할 때.
어떤 모습이 되는지 몰랐었다.
지난 생에 발동했던 연의 연은 결국 다 망가진 기묘성채로 펼친 것이었으니.
“…솔직히.”
김연이 쓰게 웃었다.
기묘성채의 중앙에서, 괴군은 자신의 생명을 뽑아 가며 연의 연을 완성시키고 있었다.
김연의 힘 역시 저 안으로 빨리고 있었으나, 안쪽에서 직접 꼭두각시가 된 괴군에 비해서는 상대적으로 힘을 덜 빨리는 중이었다.
“아름답네요. 정말, 미치광이하고는 너무 어울리지 않게.”
“…어쩌면.”
나는 그녀와 함께 기묘성심전을 발동하며, 눈앞에서 찬란히 빛나는 기묘성채를 보았다.
기묘성채는 여태껏 본 적 없을 정도로 찬란히 빛나고 있었다.
“저 순간만큼은, 그도 미치지 않았을지도 모르지.”
지금껏 드러나지 않았던 가짜 혼들의 의념이 육안으로 보이며 일렁인다.
그리고 그 혼들은 기묘성채를 감싸고 나선을 그리며 회전한다.
기묘성채의 모든 빛이 나선을 그리며.
은하수를 그리며 그 중앙으로 빨려 들어가는 듯한 모습.
그리고 은하수의 중심에서는, 기쁨을 뜻하는 황금빛의 의념이.
기묘성채를 통해서 육안으로 드러나게 찬연히 표현되고 있었다.
나무.
그것은 황금빛 나무였다.
우우웅!
황금빛 기운은 기묘성채 곳곳으로 뻗어나가다 못해, 넘쳐흐르며 기묘성채의 바깥으로도 뻗어 나갔다.
그리고 그 모습은 마치, 기묘성채를 줄기로, 황금빛 가지들이 사방으로 뻗어가는 듯한 모습이었다.
‘저 나무….’
본 적 있다.
분명, 괴군의 심상 속에 존재하던 썩은 고목과 똑같은 생김새.
하지만 다 썩어 가던 그 고목과 달리, 조연의 마지막을 장식하는 황금의 나무는 너무나도 찬연히 빛났다.
나뭇가지는 앙상했다.
나뭇잎도, 그 어떤 꽃도 달리지 않았다.
하지만 나는 마치, 그 앙상한 나뭇가지가 하늘을 떠받치고 있는 것만 같은 느낌을 받았다.
어쩌면, 저 나무의 잎과 꽃은 저 예측 불가능한 하늘 그 자체인 것만도 같았다.
나무의 안쪽에서는 음악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쌍선무의 곡.
쌍선무의 곡은 본디 요수에게 잡혀간 사람들의 혼을 위로하는 위령의 역할도 맡고 있다.
황금의 중심에서 울려 퍼지는 진혼가(鎭魂歌)를 들으며, 모두가 기묘성채를 바라보고 있었다.
존자의 왼손과 전명훈은 괴군에 의해 잠들었다.
급한 불은 모두 꺼졌고, 이제는 쉴 수 있는 시간이 왔다.
현운을 비롯하여, 탐욕스레 타 종족을 착취했던 수사들, 제 이득만을 위해 움직였던 이들.
악한 이들, 혹은 선한 이들.
모두가 가리지 않고, 진혼가를 들으며 숨을 몰아쉬었다.
나는 진이 빠진 상태에서, 억지로 몸을 돌려 뒤를 보았다.
내가 지키려 했던 이들은 전부 존자의 힘에 당해, 끔찍하게 죽었다.
내가 지켜왔던 선의는 항거할 수 없는 폭력에 이토록 무참히 짓밟혔다.
이제 내가 내세우던 모든 의미가 사라진 것이었다.
그러나.
“잘 가라.”
나는 후회하지 않는다.
“너희와 함께했던, 그 짧았던 시간들은….”
의미가 없다면 어떤가.
내가 의미를 부여하겠다.
내가 너희를 기억하고, 너희를 기리겠다.
아무것도 얻지 못했을지언정, 이 시간을 양분 삼아 앞으로 더 성장하겠다.
그러니, 너희 모두.
“절대 잊지 않으마.”
정말 고마웠다.
진혼가 속에서, 나는 죽어 버린 소중한 이들을 떠올리며 눈을 감았다.
그렇게.
진마계에서의 모든 일이 끝나게 되었다.
* * *
쿠구구구구!
나는 김연과 함께 기묘성채의 꼭대기에 올라앉아 진마계의 바람을 쐤다.
이제 괴군의 기묘성채는 그녀의 것이었다.
[그녀]는 연의 연을 발동한 이후, 어찌 된 것인지 더 이상 움직이지 않았다.나와 김연은 조연과 [그녀]의 시체를 공령지 옆에 묻어 준 후, 기묘성채를 이끌고 광한계로 향하였다.
무수한 인족 패잔병들 역시 우리를 뒤따랐다.
김연의 휘하에는 이제 [그녀]를 제하더라도 합체기 급 괴뢰 8기가 남았으니, 이제 인족 총연맹 역시 우리를 무시할 수는 없을 터였다.
“은현 오빠.”
“응?”
진마계의 마기를 맞으며 앞으로 향하던 그녀가, 씁쓸하게 웃으며 기묘성채의 안쪽을 내려다보았다.
“…전 과장님… 구할 수 있을까요?”
“….”
나는 말없이, 기묘성채 안쪽.
봉인당한 전명훈의 금단을 바라보았다.
봉인당한 상태였지만, 의념을 볼 줄 아는 우리의 눈에는 분명히 보였다.
전명훈의 금단에서 줄기줄기 뿜어지는 감정들이.
이러니저러니 해도, 우리는 같은 고향 사람이었다.
그리고 그녀는 몰랐지만, 적어도 내게 있어서 전명훈이 나를 조금 괴롭혔던 일들은 이제 와선 크게 와닿지도 않았다.
나를 여우에게 제물로 바치자고 작당 모의했던 일들 역시, 입천에 이르기 전까지는 짜증이 나기는 했지만 입천경에 이른 후, 여우 녀석을 잡고 죽도록 팬 이후에는 그다지 신경도 쓰이지 않았다.
거기에, 모든 것을 잃은 녀석의 심정은 나 역시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기에 녀석을 이대로 영원히 봉인해 두고 싶지는 않았다.
“방법을 찾아보자.”
나는 전명훈을 내려다보며 말했다.
“뭔가 방법이 있을 거야. 광한계는 넓으니… 광한계를 찾다 보면, 언젠가 녀석을 치유할 수 있도록 도울 수 있는 것들도 나올 테니까….”
기억이 온전할 때는 녀석이 너무 하찮아서 별 신경을 쓰지 않았다.
기억을 잃었을 때는 녀석이 누군지 잘 생각이 나지 않아서 신경을 쓰지 않았다.
하지만 역설적으로 녀석에 대한 기억을 찾고 나니, 그제야 녀석을 신경 쓸 수 있었다.
“…조금 의외네요. 은현 오빠, 전 과장한테 조금 당한 거… 많잖아요?”
“맞아.”
나는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연이를 쳐다보며 웃어 주었다.
“그러니 더더욱 맨정신으로 되돌려서 사과를 받는 게 중요하겠지.”
좋은 인연도 나쁜 인연도 결국은 연.
그렇다면, 나쁜 인연은 확실하게 사과를 받고 매듭을 짓는 게 좋지 않겠는가.
물론 원립 같은 경우는 화해하라고 하면, 몇 번은 더 찢어 죽여야 화해를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전명훈은 그 정도까지는 아니었으니, 온전한 정신으로 사과를 받는 정도면 충분했다.
우리가 대화를 나눌 때였다.
“애인들끼리 즐겁나 보구나.”
쿵!
오현석이 비둔술을 써 날아와 나와 김연의 옆에 내려앉았다.
“방해해서 미안하다만, 저 뒤쪽에서 뭔가가 쫓아오는 것 같아서 말이다.”
“쫓아오다니요?”
“모르겠다. 아무래도 합체기 태수인 것 같은데, 한 명인 것 같다. 김연이 이 기묘성채라 했던가? 이걸 다룰 수 있다고 해도 합체기랑 싸우면 귀찮을 테니, 속력을 높이는 게 어떠냐.”
“네, 그럴게요.”
김연은 선선히 말하며 기묘성채의 속도를 높였다.
이제 얼마 후면 광한계 본토.
인족 영역이다.
그렇게 생각하고 있을 때였다.
우웅!
기묘성채의 안쪽에서, 몸을 요양하고 있던 현운이 날아와 지붕 위에 내려앉았다.
“오, 무슨 일이십니까, 군사님?”
“…뭐, 여러 가지 할 말이 많아서 말이다. 일단… 지금 뒤에서 쫓아오는 합체기 태수는… 어째선지는 모르지만 본 흑린어령문의 시초이신 흑룡왕 현음이신 것 같다.”
“아, 그럼 적이 아닌 것 같은데….”
그러나 내 말에 현운이 얼굴을 굳히며 말했다.
“아니, 속도를 더 높여라.”
“예?”
“선수 혈맥을 가진 이들은, 같은 선수 혈맥을 가진 이들끼리 의식에 영향을 받는다. 그리고 보통 높은 경지의 존재가 낮은 경지의 수사들에게 영향을 많이 주지. 지금 내가 흑룡왕의 의식에 영향을 받고 있다.”
그가 머리를 부여잡으며 미간을 찌푸렸다.
“어째선지는 모르지만, 지금 흑룡왕께서 격노하셔서, 화가 머리끝까지 치솟은 상태다. 자리에서 멈추면 전투가 일어날 수도 있으니 계속 전진해라.”
“예? 왜 흑룡왕이 화가 나 있단 말입니까?”
나는 이해가 가지 않아 그에게 물었다.
현운은 고개를 저으며 한숨을 쉬었다.
“…나도 모른다. 묻지 마라.”
우리는 의아해하며 기묘성채 위에 앉아, 빠르게 지나쳐가는 마계의 풍광들을 바라보았다.
이제 곧 있으면 이 진마계의 풍광도 끝이다.
‘잘 있어라, 진마계….’
많은 것을 배워 간다.
나는 진마계라는 세계 그 자체에, 작게 감사를 표하며 전방을 바라보았다.
저기, 우리가 최초로 넘어왔던 진마계와 광한계의 입구.
입구가 있던 1차 점령지가 보인다.
“뭐, 이런 일 저런 일 많이 있었지만….”
오현석이 피식 웃으며 말했다.
“모두 수고 많았다! 이제 돌아가자!”
그리고, 우리는 1차 점령지.
광한계와의 차원 출입구가 있는 곳으로 갔다.
“….”
“….”
“….”
분명, 왔다고 생각했다.
“…분명, 여기 차원문이 있지 않았나요?”
김연이 얼굴이 딱딱히 굳은 채로 주변을 둘러보았다.
나 역시 사방을 둘러보았다.
분명했다.
내가 처음 진마계에 발을 디딘 그곳.
그 자리였다!
그런데 왜….
“왜 차원문이 사라진 거냐?”
오현석이 비명을 지르듯이 부르짖었다.
얼굴이 딱딱하게 굳은 현운이 눈을 감고 무언가 법술을 썼다.
그리고, 그가 눈을 다시 번뜩 떴다.
“하…하하….”
그의 목소리에는 허탈함이 가득 차 있었다.
“하하하하… 빌어먹을. 인족 총연맹 측에서, 반대편에서 문을 닫았다.”
“…예?”
“공간의 흔적에, 인족 총연맹에서 사용하는 폐문(閉門)의 법술이 보인다.”
“그, 그게 무슨 말입니까!? 아직 우리는 물론이고, 진마계에 남은 인족 수사들이 한둘이 아닐 텐데… 명적에 불도 남아 있지 않습니까…!?”
이어지는 그의 말에, 나는 정신을 못 차릴 것 같았다.
“…총연맹 입장에서는, 아직도 돌아오지 못한 인족 수사들보다는, 진마계에서 설치는 쇄성기 존자의 분체들이나 진마계 합체기 태수들을 막는 게 더 중요한 것이었겠지.”
“….”
“우리는, 진마계에 갇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