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 Regressor’s Tale of Cultivation RAW novel - Chapter (195)
배신 (1)
어떻게 할까.
어떻게 해야 서휼의 제안을 구색 좋게 거절할 수 있을까.
‘어지간한 변명은 통하지 않는다.’
지금껏 규련을 이용해서 그녀의 환심을 산다는 명목으로 행동해 온 게 한두 번이 아니고,
지금은 서휼이 규련을 움직여서 나를 압박하고 있으니, 어설픈 변명은 서휼뿐 아니라 규련마저 적으로 돌리는 행동일 뿐이다.
‘그렇다고 무력으로 둘을 떨쳐 내고 달아나는 것도 안 된다.’
천, 지, 심족의 모든 것을 다 드러낸다 치더라도 내 실력은 사축기 초기에 간신히 비할 정도.
의해은산과 일멸도차안을 사용하면 더 올라가긴 하지만 딱 그정도였다.
‘서휼과 규련을 따돌리는 건 불가능해.’
그렇다면 어찌해야 할까.
츠츠츳….
사고를 가속시키며 미친 듯이 머릿속으로 궁리하였다.
‘높은 확률로 피를 받겠다고 하면, 서휼이 직접 연화를 이 자리에서 돕겠다고 해 주겠지. 그 역시 규련이 보고 있는 앞에서는 거절할 명분이 없다. 거기에 서휼은 사축기인지라 뭔가 법술로 수작을 부리기도 힘들다.’
외통수다.
이대로라면 서휼의 피를 몸에 받아들이는 찜찜한 짓을 강요받게 되고, 그렇다고 거절할 명분은 아무리 찾아도 없다.
‘솔직히 흑룡의 진혈보다, 서휼의 진혈이 더 껄끄럽군.’
흑룡은 너무나 격이 높아서 별로 내게 무슨 짓을 할 것 같지 않았다면.
서휼은 지금 내미는 저 핏방울에 또 무슨 수작을 부려 놨을지 모른다는 것이 문제였다.
‘개수작좀 그만 부려라.’
나는 서휼을 욕하며 머리를 팽팽 돌렸고, 마침내 결정을 내렸다.
“감사합니다.”
답이 없다.
아니, 솔직히 몇 가지 조금 추한 방법이 생각나기는 했으나 그런 방법들은 구질구질하기도 했거니와 성공 확률도 낮았다.
‘정 이렇게 됐다면, 정면으로 받아 주겠다.’
“그래, 그렇다면 지금 당장 연화를 시작하지.”
‘이럴 줄 알았다.’
이렇게 됐다면, 답천의 경지를 사용해 체내로 들어오는 핏방울들을 빠르게 잘라 낸다!
‘어차피 서휼도 백녕을 통해 내가 심족이란 건 충분히 알고 있었을 터.’
그런데도 지금껏 말하지 않았다는 것은, 내가 어쨌든 쓸모가 있으리라 파악한 것.
‘답천의 경지로 핏방울을 쳐 내도, 그라면….’
그리고, 서휼의 입에서 나온 말은 상상초월이었다.
“아 참. 연화는 규 선배님께서 도와주실 걸세.”
“…!?”
툭툭.
그가 내 어깨를 친근하게 두들겨 주며 말했다.
“사축기 초기인 본 군보다야, 사축기 대원만이신 규 선배님께서 연화를 도와주시는 게 자네같은 천재에게 더더욱 격에 맞겠지.”
“그래, 그래. 본녀가 도와주면 분명 제대로….”
“….”
제대로 걸렸다.
이렇게 되면, 규련의 앞에서 은근슬쩍 답천으로 체내에서 서휼의 진혈을 소멸시키는 것도 불가능하다.
‘물론 서휼이 직접 연화를 돕는 것보다야 훨씬 덜 껄끄럽지만….’
껄끄러운 것은 서휼의 피 자체였다.
“자, 그럼 자리에 앉거라. 본녀가 도와주마.”
“…예.”
나는 잠시 머뭇거리다가 자리에 가부좌를 틀고 앉았다.
규련이 손가락을 펼치자, 주변 땅 위로 지난번 흑룡 진혈을 연화할 때와 비슷한 주술진이 음각되었다.
“이미 네 몸에는 흑룡 진혈이 흐르고 있고, 서 대군의 피 역시 흑룡의 방계 혈통이니 지난번처럼 엄청난 준비는 필요 없을 거다. 지난번보다 쉽기도 할 터고.”
“…예.”
“그럼 시작하자꾸나.”
나는 속으로 한숨을 쉬며, 눈앞의 옥병을 보다가 눈을 질끈 감고는 옥병 안에 담긴 서휼의 진혈을 들이켰다.
꿀꺽!
그리고.
찌이이잉!
서휼의 진혈이 내 체내로 들어오며, 나는 마치 거대한 해룡이 나를 집어삼키는 듯한 착각을 느꼈다.
우우웅!
규련이 황금빛 기운을 일으켜 내 몸을 도는 서휼의 진혈이 갈 길을 인도해 주기 시작했다.
하지만 나는 이를 악물며 이 진혈을 어떻게 하면 제압해 놓을 수 있는지를 궁리했다.
그러던 도중이었다.
쿠릉, 쿠르르릉!
몸 속에서 먹장구름이 이는 듯하며, 핏줄 속에 잠들어 있던 흑룡 진혈의 기운이, 해룡 진혈의 기운을 밀어내기 시작했다.
하지만 서휼의 피는 흑룡 진혈의 방계 혈통인 탓인지 자연스럽게 흑룡 진혈과 섞이려고 하였다.
그리고 그때, 내 귓전으로 규련의 목소리가 들렸다.
“억지로 흑룡 진혈과 해룡 진혈을 섞으려 하지 말고 적당히 겹쳐 있게 해 놓거라. 시간이 지나며 둘은 천천히 섞일 터고, 억지로 섞으려 하면 폭주가 일어날 수도 있으니….”
그리고, 나는 그녀의 목소리를 들으며 속으로 이를 악물었다.
‘그거다!’
우우웅!
규련이 황금빛 기운으로 혈맥의 힘을 잘 인도해 주는 듯했으나, 나는 은근슬쩍 해룡진혈과 흑룡진혈을 강제로 합일시키려 시도하였다.
그와 동시에, 두 진혈이 폭주하며 전신의 기혈이 들끓기 시작했다.
“잠깐, 서은현! 뭘 하는 거냐, 위험해! 멈춰!”
규련이 황급히 내 등에 손을 대고 황금빛 기운을 흘려넣으며 외친다.
그러나 나는 아랑곳하지 않고 두 진혈을 짓눌러 합일시키는 데에 주력했다.
전신의 피가 끓어오르다 못해 기화할 것 같았으나, 그래도 상관없었다.
‘이 기회를 통해, 서휼이 자기 피에 무슨 수작을 부려 놓았든 전부 영향력을 지워 버린다!’
그리고 내가 억지로 두 기혈을 통합시키려 할 때였다.
촤락, 촤라라락!
흑룡 진혈이, 서휼의 피를 잠식하기 시작했다.
어쨌든 본류(本流)는 같은 탓일까.
흑룡 진혈은 서휼의 피에 닿자, 마치 물 그릇에 떨어진 먹처럼 서휼의 피를 물들이고 그의 영향력을 지우는 것이 느껴졌다.
‘좋다, 이대로 가자!’
그러나, 나는 어쩐지 서휼의 피를 잠식한 흑룡의 진혈이 더더욱 강해지는 것을 느꼈다.
‘무슨, 왜 힘이 계속 강해지는….’
부글부글부글!
그와 동시에, 나는 내 전신에서 들끓던 기혈이 흑룡 진혈의 힘에 완전히 잠식당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왈칵!
내 입에서 피가 터져 나오고, 칠공에서 피눈물이 줄줄 흘렀다.
‘아, 안돼….’
이대로면 죽는다.
증폭되는 흑룡의 힘을 내 몸이 버티지 못하고 으스러져 버린다!
나는 그제야 서휼이 파 둔 양자택일의 함정에 걸렸음을 인지했다.
‘만약 흑룡 진혈로 서휼의 피를 잠식시키는 걸 이어 나간다면, 나는 죽는다. 이 짓을 멈추면 서휼의 피를 체내에 받아들여 살 수 있겠지. 하지만 서휼이 무슨 수작을 부려 놓았는지 모를 피를 내 몸속에 넣어 둔다고?’
뱃속에 칼을 삼켜 두고 지내는 것과 다를 바가 없는 게 아닌가.
나는 양자택일의 순간에서 고민했다.
고민은 짧았다.
‘죽을지언정, 서휼 이 더러운 놈에게 순순히 이용당할 것 같으냐.’
이 녀석의 위험도는 상상을 초월한다.
어쩌면 서휼의 피를 그대로 받아들였다가, 나도 모르게 놈의 꼭두각시가 될 가능성도 있었다.
나는 그대로 서휼의 피를 흑룡 진혈에 먹여 버렸다.
다음 순간, 나는 정신세계 안쪽으로 서휼의 환영이 비치는 것을 느꼈다.
그의 사념이었다.
서휼의 사념은 흑룡의 기운에 먹혀 부스러지고 있었다.
‘역시나, 뭔가 수작을 부려 놨었군.’
하기사 오히려 아무 수작도 안 부렸으면 그게 더 수상할 뻔했다.
꾸구구구국!
그러나 서휼의 피를 흑룡의 피에 먹인 대가인지.
흑룡의 피는 어마어마한 음기를 내뿜어 댔고, 나는 몸이 폭발할 것 같은 느낌을 받으며 이를 악물었다.
‘규련이 내 연화를 도움으로써 심족의 기술은 쓰지 못하지만, 도리어 서휼은 알지만 그녀는 모르는 기술은 써도 무방하다!’
츠츳, 츠츠츳!
나는 내 등 뒤에 손을 얹고, 황금빛 기운으로 내 흑룡의 힘을 눌러 주려는 규련의 힘을 받아 내 체내에 ‘회로’를 그리기 시작했다.
뿌득, 우드드득!
본래는 꼭두각시에 새기는 회로였기에 몸이 으깨질 듯이 고통스러웠으나, 나는 이를 악물고 회로를 새겨 갔다.
전신에 회로를 새기는 것까지는 지난 생에서도 무형검을 통해 일시적으로 회로를 까는 등 종종 해 왔던 일.
이번에는, 한 걸음 더 나아간다!
위이이잉!
‘금단’ 위쪽.
성천도와 태극이 새겨진 그 위로, 이미 그려진 별자리에 닿지 않게, 미세한 회로가 금단에 새겨졌다.
기기기긱!
“끄으으으읍!”
결단기 이상의 수사는 금단이 박살 나지 않는 이상 죽지 않는다.
하지만, 그 말은 즉 결단기 이상의 수사에게 금단은 가장 큰 약점이라는 의미도 되었다.
나는 그 약점에, 생물이 아닌 괴뢰에게 새기는 회로를 새기며 증폭되는 흑룡의 힘을 인도하였다.
쿠구구구!
태음의 기운이 괴군의 회로를 통해 순환한다.
하지만 그 힘은 가없이 패도적이었기에, 나는 금단이 박살 날 것 같은 기분을 느끼며 몸을 떨었다.
‘아니, 분명히 원래의 나라면 박살 났다.’
현재 내 금단과 원영은 천, 지족의 공법이 합일하며 타 수사의 금단보다 더더욱 크고 넓었으며 단단한 상태였다.
그렇기에 겨우겨우 괴군의 회로와, 그 위로 실려 나오는 태음의 힘을 버틸 수 있는 것이리라.
그 끔찍하고 거대한 흑룡의 기운을 얼마나 받아들였을까.
나는 마침내 어찌어찌 몸이 폭발할 듯 불어나던 흑룡의 힘을 제어할 수 있었다.
“…후우.”
내가 식은땀을 흘리며 눈을 떴을 때였다.
짜악!
매서운 손바닥이 내 뺨을 후려쳤다.
“이 멍청한 녀석! 내가 억지로 합일시키지 말라고 하지 않았느냐!? 방금 금단은 물론이고 막 응결한 원영까지 폭발해 죽을 뻔한 걸 모르는 거냐!?”
“…죄송합니다.”
규련은 노한 표정으로 나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정말로 천재라고 오냐오냐해 주니까 뭐든 할 수 있을 것 같았나? 사축기 선배의 말을 무시해도 될 정도로 네 자신이 잘나게 생각됐던 거냐?”
쿠구구구!
어마무시한 압박감이 내 몸을 내리눌렀다.
그녀는 진심으로 분노하고 있었다.
여지껏 친절하고 부끄럼을 타는 그녀의 모습만 보아 왔기에 잊고 있었다.
“끄흡…!”
‘이게 사축기 수사….’
아직 천인기도 되지 못한 나와는 격이 다르다.
그녀가 진노하는 것만으로, 갑자기 중력이 거세지고 몸이 짓눌린다.
전신의 영기와 생명력이 들끓으며 폭발할 것 같았다.
그때였다.
“그만 하시지요. 서은현의 실수는 제가 사과드리겠습니다.”
“….”
우우웅….
서휼이 규련을 달래자, 규련은 그제야 기세를 진정시켰다.
“자네 역시 천재성을 이용해서 어떻게 흑룡의 힘을 잘 제어한 것 같지만. 그래도 너무 무모했네. 거기다 사축기 선배이신 규 선배님의 말을 무시하고 일을 진행하다니….”
서휼은 부드러운 표정으로 내 앞에 다가와 내 어깨를 짚고 나와 눈을 마주쳤다.
“나와 자네, 그리고 자네와 규 선배님의 사이가 그렇게 멀지만은 않기에 크게 넘어가진 않을 걸세. 하지만 수도계의 선배의 말을 잘 유의하는 것은 분명 필요한 일일세.”
싸아아아….
나는 서휼의 눈을 보며 오한이 돋는 것을 느꼈다.
그의 눈은 오랜만에 세로로 쭉 찢어져서 나를 노려보고 있었다.
그의 말투는 부드러웠으나, 나는 규련이 분노하는 것보다 서휼이 나를 웃으며 쳐다보는 것이 더 소름이 끼쳤다.
그는, 이제껏 없었던 수준으로 나를 향한 의심의 의념을 내뿜고 있었다.
‘제길….’
세로 동공을 드러내며 나를 은은하게 쳐다보는 서휼은, 나를 의심하고 있다는 것을 숨길 생각조차 없어 보였다.
‘결국 대놓고 의심을 받게 되었나.’
솔직히 이전까지 내 행동들은 그래도 의심스럽기는 해도 내가 직접적으로 서휼의 뜻에 반하는 행동을 보여 주진 않았다.
하나, 방금 서휼의 피를 흑룡 진혈에 완전히 잠식시키며 서휼의 잔념을 흩어 버린 짓은 내가 직접적으로 서휼의 의지에 반한 일이었다.
물론 그 역시 규련 앞에서 자신의 피에 수작을 부려 놓았다는 것을 말하기는 싫은지 부드럽게 나를 타이르는 듯했으나.
나는 서휼이 대놓고 보여 주는 의념을 읽으며 깨달았다.
‘서휼에게, 나는 이제 완전히 제거해야 할 대상이다.’
7년.
고작 7년 만에 벌어진 일.
‘아니, 그래도 아직은 괜찮다.’
서휼이라면 분명 제거를 한다고 해도, 최대한 나를 이용하면서 제거하려 할 터.
‘최소한 그가 기축수행의 재료를 찾고 돌아올 때까진, 내 수명은 끝나지 않아.’
그리고 그때쯤이면….
‘서 장군을 어떻게든 급조할 시간은 될 터!’
서휼에게 대항할 힘을 찾기 충분한 시간이다!
서휼은 세로 동공으로 나를 쳐다보며 얼마간 부드러운 목소리로 설교를 이어 나갔고.
나는 감격을 받은 듯한 표정을 지으며 서휼에게 감복한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서휼 역시 내가 어찌되었든 대견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는 서로 칼을 품고서 규련의 앞에서 재미없는 연극을 이어 갔다.
* * *
“…뭐, 이런저런 불미스러운 일이 있었다만. 어쨌든 오늘 일은 예정대로 진행하지.”
규련은 살짝 째려보고는 하늘로 날아올랐다.
서휼은 그녀와 함께 허공으로 떠오르며 말했다.
“자네도 따라오게나.”
“예? 무슨 일이신지….”
“이번에 출타를 나가기 전, 규 선배님께서 우의를 다지자는 의미로 요선루(妖仙樓)에 가서 공연이나 보자고 하시더군. 자네를 비롯한 해룡족의 주요 인사들도 이번에 본 군을 송별하는 송별회를 겸하여 참석할 터라네.”
“아… 예. 알겠습니다.”
나는 서휼의 말을 듣고 날아올라 그들을 따라갔다.
서휼은 요선루로 이동하며, 규련의 앞에서 자신의 피를 통해 연락을 주고받는 법을 내게 알려주었다.
흑룡의 진혈에 잠식당했어도 어쨌든 서휼에게서 나온 피이니 그를 통한 연락은 되는 듯했다.
‘다행히 서휼이 피를 통해 내 몸에 심으려 했던 사념 자체는 없애 버렸다.’
같은 혈통의 피를 통해 연락을 주고받는 방식은 규련 역시 알고 있는 법술이라 하니 문제는 없을 성싶었다.
중간에 해룡족 장로와 원로들 몇몇이 우리에게 합류했고, 우리는 진룡맹의 중심지인 봉명주로 향하였다.
얼마 후. 우리는 마침내 요선루라는 곳에 도착하였다.
요선루는 요족들에게 선주(仙酒)를 판매하는 주루로, 요족들은 하계에 범인들처럼 간혹 요선루로 와서 선주를 마시고는 했다.
하지만 이들이 마시는 선주는 마시면 수행이 증가하거나, 백홍주처럼 법보와의 연계가 강화된다거나 하는 효능이 있었기에 광한계의 ‘주루’라는 곳은 하계의 주루보다는 법기점, 단약점, 혹은 공법서점의 개념에 가까웠다.
물론 그래도 풍류를 즐기는 ‘주루’였기에, 광한계의 주루에서는 주루를 찾는 귀한 고계 수사들을 위하여 그들의 눈과 귀를 즐겁게 할 공연을 준비하고는 했다.
‘이곳이 요선루….’
규련이 앞장서 도착한 요선루는 거대한 거북의 등껍질로 만들어진 건물이었다.
듣기로는 파산마원 진혈을 가진 원숭이 요족과 음귀현무 진혈을 가진 거북 요족이 만나 술을 먹고 놀며 벗으로 지내다가, 거북 요족이 죽자 원숭이 요족이 슬퍼하며 껍질을 벗겨 주루로 삼았다는 것이 이 요선루라고 했다.
‘…본인 친우의 시체로 만든 주루라….’
뭔가 그 원숭이 요족의 감성은 이해가 가지 않았으나.
그냥 그러려니 하며 일단 규련과 함께 주루로 들어갔다.
주루에는 규련과 해룡족 일원들을 제외하고는 아무도 없었다.
“본녀가 이번에 서 대군을 송별하기 위해 오늘 하루 요선루를 통째로 빌렸으니, 다들 음미하고픈 선주를 마음껏 음미하시게.”
규련은 해룡족 원로와 장로들을 바라보며 서휼을 주루의 위층으로 데리고 갔고, 그에 해룡족 원로들은 감사를 표하며 주루 곳곳으로 흩어져 앉았다.
나 역시 눈치가 있었기에 규련을 따라가지 않고, 요선루의 입구 근처에 따로 앉았다.
요선루는 총 4층으로 되어 있었으며, 4층에는 서휼과 규련이 단둘이 앉아 있었고, 3층에는 해룡족 천인기 원로들이.
1, 2층에는 나를 포함한 원영기 해룡족 장로들이 앉았다.
그리고 1층의 중앙에는 거대한 무대가 있었는데, 그 무대로 공연자가 올라와 무언가 공연을 보여 주는 것 같았다.
각자가 요선루의 점원들에게 원하는 선주를 주문했다.
나는 익숙한 백홍주를 주문했다.
모두가 선주를 주문하자, 주루 전체의 불이 갑자기 꺼졌다.
‘공연이 시작되나 보군.’
나는 백홍주를 홀짝이며 무대를 올려다보았다.
우우웅!
어찌된 일인지, 요선루 전체에서 강력한 금제가 발동하며 우리의 의식을 제약했다.
그에 해룡족 원로와 장로들 사이에 잠깐 소란이 있었다.
“모두 걱정하지 말아라. 요선루는 본래 공연을 하기 전, 공연의 완성도를 위해 의식을 제약한다. 본녀와 서 대군 역시 의식을 뻗치지 않고 있으니 당황하지 말도록.”
그제야 소란은 잦아들었고, 곧이어 요선루의 공연이 시작되었다.
파앗!
무대 중앙에 불이 들어오며, 몇몇의 아리따운 무희와 악사(樂士)들이 들어왔다.
무희들은 각기 인족을 닮은 무희들이었고, 악사들은 생김새가 전부 다양했다.
원숭이같이 생긴 악사는 비파를 들고 있었고,
인간의 상체에 거미의 하반신을 가진 악사는 금(琴)을 들고 있었다.
얼굴은 물고기였지만 하반신은 인간의 몸을 가진 악사는 피리를, 홍합 주제에 팔다리가 달린 악사는 북을 잡고 있었다.
얼마 후 무희들이 춤사위를 시작했고, 악사들이 악기를 연주했다.
그리고 그 음색에, 나는 솔직히 조금 놀랄 수밖에 없었다.
‘예상외로 훌륭하군.’
비파를 키는 원숭이는 진중한 표정을 지으며 비파를 통해 감정을 표현했고,
거미 여성은 눈을 뜨지 않고서 금을 타며 아름다운 음색을 만들어 냈다.
물고기 요족은 아가미로 공기를 빨아들이고 입으로 피리를 불며, 한 번도 숨이 멈추지 않고 피리를 계속 부는 신기를 보여 주었으며.
홍합은 북을 잘 쳤다.
거기에 다들 요수들인 덕인지, 전부 각자 영기(靈氣)를 음색에 실으며 더더욱 아름다운 파동을 만들어 내었다.
나는 물론이고, 해룡족 원로와 장로들 역시 악사들이 만들어 내는 음색이 만드는 파동.
그 파동이 음양의 흐름과 맞추어 이지러지는 것을 보며 모두 경탄을 터트렸다.
말 그대로 엄청난 예술이었다.
무희들 역시 음색에 맞추어 하늘하늘한 옷자락을 휘날리며 사위를 추었고, 요선루에 방문한 해룡족 원로와 장로들은 모두 공연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수준이 굉장히 높다.’
나는 진심으로 악사들에게 경탄하며 음악을 들었다.
음색을 들으며, 나는 서휼에 의해 한참이나 긴장되었던 마음을 조금이나마 진정시킬 수 있었다.
흘끗 서휼과 규련이 있는 사층을 보니, 규련이 뭔가를 했는지 의식은 물론이고 영기의 흐름조차 아예 안쪽으로 진입하지 못하게 막아져 있었다.
‘…모르겠다. 내가 더 신경 쓸 필요는 없겠지.’
안에서 서로 뭘 하든, 규련과 서휼의 일이다.
나는 신경을 끄며 음악에만 집중했다.
음색을 듣다 보니, 나는 어쩐지 악사들 사이에서의 실력차를 알 것만 같았다.
‘눈을 감고 금을 타는 거미 여인이 최고수로군.’
그다음이 장인의 얼굴로 비파를 키는 원숭이, 그다음이 피리 부는 물고기 머리였다.
홍합은… 열심히 하고 있었다.
‘금의 음색에 맞추어 전체가 어우러지고 있다.’
어느덧, 금을 중심으로 한 음악은 점차 절정으로 향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마침내 음색이 절정에 도달하며, 음색에 담긴 감정이 폭발하는 순간.
파앗!
주루의 불이 켜지며, 제약당해 있던 의식들이 전부 해방되었다.
“아…!”
순간 답답했던 의식의 제약이 풀리자, 해룡족 족원들은 모두 탄성을 터트렸다.
‘훌륭한 연출이군.’
공연이 절정에 달함과 동시에 억제해 둔 의식 제약을 해제하여 답답함을 풀어 주니, 느껴지는 감동이 배가 되는 듯했다.
마침내 공연이 끝났다.
어쩐지 졸음이 밀려왔다.
“훌륭한 공연이었소이다.”
“규 선배님께서 오자고 하신 이유가 있으셨군.”
“비록 경지는 축기기 이하들이지만, 진정 위인이라고 불려도 손색이 없는 악사들이군.”
공연이 끝나자, 모든 이들은 전부 어쩐지 나른해진 표정으로 입을 가리고 하품을 했다.
그리고 동시에 무대 위의 무희와 악사들에게 극찬을 해 주었다.
공연이 끝나고 악사와 무희들이 무대에서 내려갔으며, 이내 잠시 요선루 측에서는 쉬는 시간을 가지겠다고 하며 불을 켜고 선주들을 추가로 제공해 주었다.
그러나 나는 백홍주를 가지고 오는 원숭이 점원 중 하나에게 물었다.
“방금 공연이 너무 인상깊어서 그러는데, 악사들을 만나려면 어찌해야 하오?”
연기기 수준도 안 되는 점원은 내가 말을 걸어 주자 황공하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아! 악사님들은 모두 요선루 지하 3층에 있는 대기실에서 휴식을 취하고 계십니다. 원하신다면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부탁 좀 하지.”
나는 원숭이 점원에게 영석 주머니를 내밀었고, 원숭이 점원은 나를 요선루 지하 3층으로 안내하였다.
“상당히 넓군.”
말 그대로, 요선루의 지하는 상당히 거대했다.
공간 압축 법술이 걸려 있는 듯, 지하로 내려갈 때마다 공간이 웅장해지는 것 같았다.
내 말에 원숭이 점원은 헤실헤실 웃으며 설명을 해 주었다.
“아, 저희 요선루의 지하에서는 간혹 경매회 같은 게 열리기도 합니다. 경매회에 오시는 요수 선사님들 중에서는 크기가 거대하신 분들이 많으셔서 불편함이 없도록 공간을 압축해 놓았습지요.”
“호오….”
“도착했습니다. 여기가 악사님들 대기실입니다.”
“안내 고맙네.”
나는 원숭이 요족에게 영석을 쥐여 보낸 후, 지하 3층으로 들어갔다.
‘넓군.’
상당히 넓다.
그리고 경매회가 열리기도 하는 장소인 탓인지, 곳곳에 안과 바깥을 차단하는 금제진법들이 깔려 있기도 했다.
악사 대기실로 들어가자, 한담을 나누던 악사들이 일제히 내 쪽을 보며 인사를 올렸다.
“아, 어쩐 일이십니까, 어르신?”
그 중 대표로 보이는 비파의 원숭이가 내게 다가오며 물었고, 나는 그에게 웃어 주며 대답하였다.
“좋은 연주를 듣게 해 주어 고맙네. 개인적으로라도 보답을 하고 싶어서 쉬는 데 방해가 되게 찾아왔다네.”
“아…! 영광입니다. 용족 분께서 저희를 좋게 봐 주시다니….”
원숭이는 감격한 듯한 표정을 지었고, 나는 원숭이에게 영석이 든 주머니를 건냈다.
“영석 일만 개를 넣어 뒀네. 나눠 가지게나.”
“감사합니다, 어르신…!”
“그리고….”
나는 거미 여인을 쳐다보며 말했다.
“그대를 빼고 모두 잠시 나가 있게나. 그 금 타는 실력이 상당하여 감동을 많이 받았네. 잠시 독대하여 이야기를 나누고 싶은데 말이지….”
내가 원숭이를 바라보자 원숭이는 뭔가를 깨달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모두 잠시 나와라! 유화(油畫) 너는 용족 어르신을 잘 보필하도록!”
원숭이는 다른 악사들을 데리고 바깥으로 나갔다.
크지는 않았으나, 바깥에서 악사들이 떠드는 소리가 들렸다.
“저 용족 어르신은 취향이 굉장히 특이하신 모양….”
파앗!
나는 괴군의 회로를 금제 위에 깔아, 대기실의 바깥과 안을 차단시켰다.
바깥에서 떠드는 소리가 차단되었고, 안에서 들리는 소리도 밖으로 나가지 않을 터였다.
우우웅!
결계가 발동하며 안팎이 차단된다.
그와 동시에, 나는 무형검을 꺼내 들고 거미 여인에게 달려들어 그녀의 목을 노렸다.
다음 순간.
투웅!
그녀가 금을 튕기자, 주홍빛 강물이 눈 앞에 나타나 흐르며 내 무형검을 막아 냈다.
“역시… 그쪽이었군.”
나는 씨익 웃으며 그녀를 바라보았다.
“오랜만이오, 심족 양반.”
그녀의 음색을 들으며 알아챘다.
그녀가, 지난번 만났던 주홍빛 강물의 심상을 다루던 심족이라는 것을.
‘정말… 김영훈 때문에 나쁜 버릇이 생겼단 말이지.’
파앙!
나는 그녀의 주변에 둘려 있는 주홍빛 강물에게서 떨어지며 무형검을 들어 올렸다.
‘기(技)가 예(藝)에 달한 고수를 보면, 피가 끓는다니….’
너무 오랫동안, 무(武)를 제대로 겨루지 못했다.
심족이라는 이들이 쓰는 게 무(武)가 맞는지 아닌지도 몰랐다.
하지만, 나는 제대로 마주하게 된 동 경지의 심족 고수를 만나자.
음악을 예술의 경지로 펼치며, 그 음색에 기와 심상을 담을 수 있는 존재를 만나자.
도저히 참을 수 없을 정도로 피가 끓는 것을 느꼈다.
“한판, 붙어 보지.”
나는 검을 들어올리며 기수식을 잡았다.
투웅!
그리고 다시 다음 순간.
그녀가 금을 튕겼고, 주홍빛 강물이 움직이며 내 몸을 후려쳤다.
나는 그대로 뒤쪽으로 튕겨 나가, 홍합이 치던 북 위에 상반신이 처박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