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 Regressor’s Tale of Cultivation RAW novel - Chapter (196)
배신 (2)
“흐음….”
우수수….
나는 박살 난 북에서 상반신을 빼내며 먼지를 털었다.
“과연 기오막측하군.”
주홍빛 강물이 나를 튕겨 낸 것이 아니었다.
주홍빛 강물에 닿자마자 내 몸이, 아니, 내 체내에 흐르는 정순지력들이 저절로 반응하며 튕겨 나간 것이었다.
한 마디로 주홍빛 강물은 내 몸에 닿기만 했을 뿐.
내가 튕겨 나가 처박힌 건 온전히 내 체내에 흐르는 힘들 덕이었다.
“흐음, 그쪽도 마찬가지인 것 같군요.”
거미 여인.
유화라고 불린 그녀는 눈을 감은 채로 팔을 들어 올렸다.
그녀의 팔에는 내 무형검이 남긴 검흔이 생겨, 피가 흐르고 있었다.
“설마하니 그대로 제 방어를 통과할 줄은 몰랐습니다.”
“나도 내 체내의 법력이 타인의 의지대로 움직일 줄은 또 몰랐다만… 어떻게 한 거지?”
“순순히 자기 절기를 가르쳐 줄 리가 있겠습니까, 스스로 알아내 보시지요. 저 역시 최선을 다해서 그 검(劍)의 능력을 알아내 볼 테니까.”
“호오, 검이라는 걸 알아본 건가?”
아무런 형태도 없는 무형검을 보고 어찌 알아낸 거지?
“형태가 없을지언정 의(意)가 그리도 또렷한데 뭘 들고 있는지도 알지 못하겠습니까.”
“우문현답이었군.”
나는 무형검을 들고서 그녀를 덮쳐 갔다.
하지만 그녀의 주홍빛 강물이 내 몸에 닿을 때마다 나는 이리저리 튕겨 나갔다.
마치 내 몸이 내 몸이 아닌 것 같은 느낌.
부웅!
뭔가가 붕 떠 있는 느낌을 느끼며, 나는 그녀에게 접근하려고 했으나 저 주홍빛 강물이 문제였다.
부웅, 쾅, 쾅, 쾅, 쾅!
무형검이 휘몰아치며 어느새 대기실은 난장판이 되었지만 나는 아랑곳하지 않고 그녀에게 접근하는 것에만 집중하였다.
그렇게 얼마나 그녀와 공방을 치고받았을까.
“잠깐….”
그녀가 어느덧 갑자기 싱긋 웃으며 말했다.
“그럼 이쯤 하시는 게 어떨지요?”
“음?”
그녀는 양 손을 금에서 떼어 내며 두 손을 들어올렸다.
“저희가 계속 싸울 필요는 없지 않습니까.”
“그게 무슨 소리인가. 무인이 만났으면….”
문득, 생각해 보니 유화라는 녀석은 무인인지 아닌지 잘 모른다는 것을 깨달았다.
“뭘 원하시는지는 알겠습니다. 심족 영역 내에서도 당신 같은 분은 상당히 많으십니다. 자신의 구현과 타인의 구현을 겨루어 스스로를 증명하고 싶으시다거나, 혹은 그냥 대련을 순수하게 좋아하시는 분들도 한둘이 아니시지요. 당장 저희 존자께서도 그런 취향이시니 말이십니다.”
“…그럼 왜 안 싸우겠다는 건가.”
“저는 그런 부류의 심족은 아니기 때문이지요. 귀하의 검에 흥미가 있기는 하지만, 저는 본래 잠입과 첩보, 그리고 선동과 반란 작업에 더 적합한 몸입니다.”
“흠….”
“이런 무의미한 짓보다는, 조금 더 건설적으로 서로의 정보를 나누는 것은 어떻습니까?”
나는 그녀를 쳐다보며 씨익 웃었다.
“혹시 ‘날조’도 네 특기 중 하나인가?”
“예?”
부웅!
나는 무형검을 역수로 잡은 채, 내 머리를 향해 휘둘렀다.
무형검은 그대로 머리통을 훑고 가며, 혼의 계위에서 내 뇌리에 영향을 미치는 기이한 음파(音波)를 베어 내었다.
슈칵!
그리고, 그제야 나는 뭔가가 깨어지는 느낌과 함께 ‘현실’로 의식이 되돌아오는 것을 느꼈다.
방금 전의 상황과 크게 다를 것은 없었다.
나는 그녀와 대치하고 있었다.
하지만 내가 그녀의 강물에 튕겨 나가 북에 처박혀 박살이 난 상황부터 시작해.
나와 그녀가 합을 주고받은 흔적은 전부 사라져 있었다.
“상당한 환술이군.”
그녀와 싸우며 계속 느꼈던, 내 몸이 내 몸이 아닌 것 같은 기분.
붕 떠 있던 것 같은 감각.
그것은 전부 실재가 아닌, 내 꿈속에서 일어난 일이었기 때문이었던 것이었다.
“환술 속에서 싸우는 것도 재밌어서 계속 해 보려 했더니만… 환상 속에서도 나와 싸우기 싫다면서 대놓고 정보를 뽑아가려길래 나왔다.”
그녀는 정보를 나누자고 했지만, 환술 속에서 그녀와 주고받는 정보가 진짜라는 보장도 없다.
그녀는 여전히 눈을 감은 채로 내 쪽으로 고개를 돌린 채 담담하게 말했다.
“엄밀히 말하면, 제가 보여 드린 것은 환술이 아닙니다. 귀하를 잠재우고 꿈을 꾸게 만들어, 귀하가 원하던 방향으로 꿈을 유도한 것이지요.”
“그 과정에서 네가 조금 끼어들어 궁금한 것도 질문하고 말이지.”
“부정은 않겠습니다.”
“지난번에 만났을 때와 말투가 상당히 달라졌군.”
“심족 첩보공작원인 제가 그렇게 쉽게 특정당할 수 있는 말투를 쓰면 쓰겠습니까. 목소리도 말투도 얼마든지 바꿀 수 있도록 연습해 왔지요.”
“음(音)을 자유자재로 바꾸는 것, 그게 네 답천… 아니, 구현 2단계인가?”
부웅!
슈칵!
나는 은근슬쩍 금에 손을 가져가는 그녀의 손에 무형검을 날려 상처를 냈다.
나와 대화를 나누는 채 하며 슬금슬금 금을 타 나를 잠재워 버리려는 속셈인 듯했다.
그녀는 자신의 팔에 난 상처를 보며 웃었다.
“쉽게는 말씀드릴 수 없지요. 귀하는 천족인지 지족인지, 저희 쪽인지 당최 감이 잡히지 않으시는 분이시니까요.”
“하긴… 그럼 그건 됐고, 정말 나랑 한판 붙지 않을 텐가? 너희 쪽에서도 어쨌든 내 정보를 얻으면 유리한 건 맞을 텐데?”
“그건 그렇지요.”
그러나 그녀는 은근하게 웃으며 말했다.
“하나, 당장 몇 층 위에 사축기 지족이 둘씩이나 자리 잡고 있는 이 상황에서 전력으로 붙어보자는 겁니까? 분명 들통이 날 겁니다. 지금 대련을 해 봤자 아무런 이득도 없다는 겁니다.”
나는 그녀가 하려는 말을 눈치챘다.
“이득이 있다면 나와 대련하겠다는 건가?”
“그렇다면 못할 것은 없지요.”
“좋아, 원하는 것을 말해라.”
“귀하는 분명 현재 해룡족의 궁에서 지내고 있습니다. 그렇지요?”
“그래.”
“해룡족의 궁에, 제가 지난번에 구출하여 심족 영역으로 탈출시키려 했던 백염족, 백녕이란 자가 억류되어 있다고 알고 있습니다. 그자를 제가 구출할 수 있게 도와주시겠다고 약조해주신다면 대련 한번 못 해 드릴 것도 없지요.”
“…으음….”
억류라….
그걸 억류라고 표현해야 하는 건가.
내가 답천의 경지로 심상을 숨기면서도 심각한 표정을 짓자, 그녀는 그걸 다른 의미로 오해했는지 혀를 찼다.
“아무래도 귀하께 너무 큰 폐가 되는 부탁이었던 겁니까. 해룡족에 정 소속감을 느끼신다면….”
“아니, 그게 아니다.”
나는 어느새 본인들이 지배 계층이 되어서 채찍을 휘두르고 다니는 운심호 인근의 백염족들과.
그들을 통솔하는 백녕을 떠올리며 아리송한 기분이 들었다.
“…내일이나 모레쯤 서휼이 기축수행을 위해 진룡맹을 떠날 거다. 그 이후에 시간을 맞춰 너와 백녕을 만날 수 있게 해 주지.”
“아…!”
“다만… 음. 구출하게 도와주는 것은 모르겠군. 일단 네가 운심호 인근 백염족들이 거주하는 거처로 들어올 수 있게 해룡족 순찰대를 물려 주고, 빠져나갈 수 있게도 도와주겠지만… 그를 데리고 가는 건 스스로 하도록.”
“감사합니다. 그 정도라면 굉장한 도움이 될 것입니다.”
나는 밝게 웃으며 좋아하는 그녀를 보고 문득 의아해져서 물었다.
“내가 거짓말을 하려는 거면 어쩌려고 그러지? 같은 답천경… 아니, 구현 2단계라서 거짓말도 할 수 있을 텐데?”
“후후… 귀하께서는 혹여 동 경지의 심족과 대련해 보신 적이 없으신 겁니까?”
“…없군.”
“뭐, 그렇다면 오히려 잘 되었군요. 가르쳐 드릴 수 있게 되었으니.”
“…?”
그녀가 금에 손을 대며 말했다.
“서로 힘 조절은 하면서 대련하기로 하지요. 말씀드렸듯이 위층에만 사축기 지족이 둘에… 대기실에 결계가 쳐져 있으며 요선루의 금제가 의식을 억제하고 있다곤 해도 자칫하면 들킬 수 있으니까요. 서로 힘은 연기기 초반으로 제어하고, 각기 구현의 공능만을 겨루는 것으로 하지요.”
“좋지.”
오히려 순수한 공능과 깨달음의 대결이라면 나야 환영이다.
다음 순간.
투웅!
그녀의 금이 울려 퍼졌고, 내 검이 허공을 쇄도했다.
하지만, 막 자세를 잡고 초식을 사용하려던 나는 그대로 몸이 엎어지려던 것을 참아냈다.
‘졸리다!’
말 그대로, 어마어마한 수마(睡魔)가 나를 덮쳐 오고 있었다.
‘이게 연기기 급으로 힘을 제약한 수준임에도 이 정도의 졸림이라니….’
힘을 제약하지 않고, 서로가 제대로 된 답천으로 싸우면 방금 전처럼 내가 언제 잠들었는지도 모르고 환몽 속으로 빠졌으리라.
퉁, 투웅, 퉁!
그러나 그녀의 연주는 이제 시작이었다.
점차 금이 튕겨지며, 음률이 생겨나기 시작하자 내 전신의 힘이 흩어지며, 눈꺼풀이 천근만근 무거워지는 것이 느껴졌다.
“끄으으읍!”
쿵!
나는 억지로 몸을 일으키며 그녀를 노려보았다.
우우우웅!
점차 그녀의 주변으로 옅은 빛의 주홍빛 강물이 넘실거리기 시작했다.
“제 이것이 제 하현(下弦), 환람연하(幻籃宴霞)이오니, 부디 즐겨 주시길.”
주홍빛 강물이 아니다.
저것은 노을(霞)이었다.
하루를 마친 이들이 집으로 들어가 잘 준비를 시작하는, 저녁놀!
티이잉!
나는 안간힘을 써, 겨우 졸음을 쫓아내며 산명곡응의 초식을 내게 사용했다.
무형검이 파동으로 바뀌며, 검명이 계위를 넘어 내 혼을 때려 제정신을 들게 한다.
하지만 정신이 맑아진 것도 그 순간뿐.
그녀의 연주가 계속되자, 나는 다시금 수마에 빠져드는 것을 깨달았다.
“무시무시한… 절기로군.”
연기기 급의 힘만 써서, 나를 졸도시키기 직전까지 몰아가는 졸음이다.
천인기 수사라도 기습적으로 그녀가 작정하고 펼치는 연주를 듣는다면 바닥에 처박혀 잠들어 버리리라.
손가락 하나 까딱하기가 힘들다.
‘내게는 특히나 더 치명적이군.’
졸리다.
당장이라도 쉬고 싶다.
지금 당장이라도 푹 드러누워 잔다면, 정말 오랜만에 마음 놓고 잘 수 있을 것 같았다.
‘서휼의 아래에 들어온 후 7년간… 한 번도 제대로 자지 못했다.’
그뿐인가.
이전 생, 마계에서 총독 짓을 했을 때도.
그 이전 창천개벽문에서 온몸을 두들겨 맞을 때도.
그 이전 괴군에게 잡혀서 개조되어 일천 년을 버텼을 때도.
제대로 쉰 적이 없었다.
‘아니, 그 이전에는 제대로 쉬었던 적이 있었나.’
향화와 함께하며 마음이 풀어졌을 때를 제외하고는 제대로 쉬었던 것이 얼마 만인지 가늠도 되지 않는다.
쉬고 싶다.
제대로 푹 자고 싶다.
유화가 발현하는 그녀의 답천은, 내가 지금껏 가져오고 있던 근원적인 욕망을 부추기고 있었다.
‘조금 쉬어도 되지 않나.’
그러나.
씨익….
“쉬는 건.”
콰드득!
나는 내 어깨에 무형검을 박아 넣었다.
찌릿한 고통에 눈이 번쩍 뜨였다.
“죽어서 쉬어도 되지 않나.”
나는 무형검을 잡은 채 히죽 웃었다.
“오늘 아침에 깨달음을 얻으면 저녁에 죽는 것도 좋겠지. 참아라, 서은현! 이 좋은 기회를 처자는 것으로 놓칠 셈이냐. 죽어서라도 쉬게 해 줄 테니 눈을 떠라!”
나는 고함을 지르며 어깨에 박은 무형검을 비틀었다.
피싯, 피싯!
어마어마한 고통이 어깨에서 느껴진다.
그러나 나는 핏발이 선 눈으로 무형검을 비틀어 뽑아낸 후, 유화에게 겨누었다.
“좋군. 그럼 계속해 볼까?”
“…그러시지요.”
다음 순간, 나는 찰나를 찢고 그녀에게 쇄도하여 무형검을 내리쳤다.
검은 일순간 도끼와도 비슷한 형체가 되어 그녀에게 꽂혔다.
그러나 이번에도 여실히 그녀의 주홍빛 강물이 내 무형검을 틀어막는다.
하나.
‘못 막는다.’
슈욱!
내 무형검은 그대로 노을빛을 통과하여 그녀에게 쇄도하였다.
부웅!
그녀는 금을 든 채로 메뚜기처럼 뛰어 뒤쪽으로 물러났고, 나는 검을 내리친 직후 자세를 바꾸었다.
내 자세와 함께 무형검은 길쭉해지며 창처럼 변하였다.
‘쏜다!’
다음 순간.
내 손에 들린 무색의 창은 마치 포탄처럼 쏘아지며 그녀의 주변으로 세 발의 산바람을 꽂아 넣었다.
투웅, 퉁, 투웅!
그러나 그녀는 계속해서 손을 놀리며 금을 탄다.
노을빛 강물이 넘실거리며, 강물에 닿은 무형검들이 그대로 흩어져 사라져 버렸다.
‘저건….’
나는 그녀가 방어한 원리를 깨닫고 놀랐다.
‘내 무형검을, 살아 있는 객체로 취급하여 [재우고] 있다?’
단순히 흩어지는 것이 아니었다.
내 무형검은 그녀의 노을과 닿을수록 잠들어 가고 있었다.
점차 내가 쥔 무형검의 기운이 연기기 이하로 떨어지는 것이 느껴졌다.
이대로 가다가는 단순히 검강을 쓴 것만도 못한 위력이 되리라.
‘재밌군.’
먼 예전의 기억이 떠오른다.
내가 절정 고수도 되지 못해 김영훈을 따라다닐 때.
김영훈은 연국 여러 문파들을 찾아다니며 간판 떼기를 벌였고.
그 결과는 당연히 백전백승.
그리고 그가 대련을 했던 문파 중에서는 음공(音功)을 주력으로 하는 문파도 존재했었다.
그때의 김영훈은 분명 음공을 상대로 하는 문파의 장문인을 이기며, 가장 까다로운 상대였다고 말한 바 있었다.
그때의 기억이 새록새록 살아난다.
[후우, 제일 쉽지 않은 상대였다.] [형님 입에서도 ‘쉽지 않다’라는 말도 나오시는군요.] [뭐, 아무래도 음공 고수는 찾기 힘드니 말이다. 어중간한 음공을 익힌 놈들이야 전부 병신이나 다름없지만, 저렇게 삼화취정에 달한 이들이 제대로 우리의 시야에서 음공을 펼치면 상당히 끔찍한 위력이 된단 말이지.] [그 시야라는 게 뭔지 모르니, 저로서는 잘 모르겠군요.] [아, 참. 안 그래도 이걸 말해 주려고 했는데 말이다.]그때 들었던 김영훈의 조언을 떠올렸다.
[음공이란 결국 소리이다. 그런데 어떻게 소리 따위로 상대에게 해를 끼치느냐, 그건 네가 연구하는 독과 같다.] [독 말씀입니까?] [그래, 독이지. 상대의 음률을 처음 들은 순간부터, 상대가 만들어 낸 음(音)에 기(氣)가 실리며 그 순간부터 내 체내에는 상대의 음이 들어와 있는 거지. 상대의 음파가 내 체내에 집어넣은 음파와 공명하면 공명 수에 맞춰 체내가 붕괴하는 거다.] [무시무시하군요.] [그래, 그래서 결국 음공을 쓰는 고수를 만나면, 선발제인으로 먼저 상대가 음파를 쏘기 전에 제압해 죽이던가. 그렇지 못하고 상대가 음파를 쏘는 것을 허용했다면….] [해독법을 찾아야겠군요.] [의원다운 시점에서의 방법이군. 하긴, 내가 독으로 비유했으니…. 하지만 내 해법은 조금 다르다.]나를 향해 덮쳐 오는 노을의 파도.
유화가 사용하는 저것은, 음공(音功)과 다를 바 없다.
아니, 사실상 음공을 수 단계나 진화시킨 진화판이라 할 수 있으리라.
어쩌면 내가 오늘 요선루에서 그녀의 음향을 처음 들었을 그 때부터.
나는 그녀의 독에.
그 ‘자고 싶다’라는 심상의 독에 걸려 있는 상태일지도 몰랐다.
‘선발제인은 불가능해졌고, 그녀가 내게 불어넣은 것은 심상 그 자체이니 해독도 안 된다.’
그렇다면 남은 방법은 하나.
[독을 네 것으로 만들어라. 전신의 기를 완벽히 조절하면, 체내의 파동 역시 지배할 수 있다. 상대와 대련하며, 끊임없이 기를 순환시키고 움직이며 파동 자체를 상대가 흘려넣은 것과 다르게 변질시켜 버려라!]나는 내 몸과 연결된 무형검을 통해 사고를 가속시키기 시작했다.
점차 시간이 느려지고, 나는 가속한다.
콰앙, 콰앙, 콰앙!
월악으로 가로 베기.
직후 다시 가속한 상태로 측면으로 파고들어 유릉으로 찌르기.
전부 막힌다.
하지만 다시 가속한 후 위쪽에서 떨어져 내리며 용맥의 초식으로 내려 베기.
꾸구구궁!
내려 베기를 하며, 그녀의 노을빛 강물에 무형검이 다시금 막힌다.
저 강물에 닿으면 투과하고 말 것도 없이 힘 자체가 ‘무화’되기에 투과도 불가능했다.
하지만 다음 순간.
피잇!
그녀의 뺨에 작은 상처가 났다.
무화되었을지언정, 어쨌든 그녀의 강물을 투과한 무형검이 유화의 얼굴에 상처를 낸 것이었다.
촤라락!
다음 순간 나를 향해 주홍빛이 파도처럼 덮쳐 왔기에 나는 뒤로 물러섰다.
졸리다.
당장이라도 쓰러질 것 같다.
이건 내 심상이기도 했지만, 그녀가 자신의 답천을 통해 내게 은근슬쩍 불어넣은 독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이 독을 내 것으로 만든다!
‘졸린 게 아니라, 한계를 마주한 것이다.’
그리고 한계를 마주했다면.
한계를 넘어설 수도 있다!
붕, 붕, 붕붕붕!
점차 내가 무형검을 휘두르는 속도가 빨라지기 시작했다.
‘한 번 졸음을 견딜 때마다 한계가 찾아온다.’
유화 역시 금을 타며 내게 끊임없이 강물을 몰아쳐 왔다.
‘하지만 한계를 마주하고, 졸음을 극복할 때마다 한계를 돌파하는 것이다.’
내 안의 심상이 변질되며, 졸음이 아닌 정신 도약으로 변화한다.
‘그러므로, 졸음을 이겨 낼 때마다 나는 강해진다!’
진짜로 내 영력이 늘어난다거나 모르는 검법을 알게 된다거나 하진 않는다.
하지만, 본디 무(武)란 스스로를 어찌 정의 내리는가를 포함하는 것이 아닌가.
그렇다면.
‘나는 성장하고 있는 게 맞다!’
연기기의 힘으로 힘을 제약하고 있으나, 점차 내 속도는 빨라져 갔다.
힘 그 자체를 더더욱 완벽하게 조절하고, 더더욱 힘의 묘용을 극대화할 방법을 찾는다.
단악검, 요산요악!
무형검의 검기가 마치 바둑판처럼 종횡하며 상대에게 쏘아져 나간다.
유화가 다시 금을 튕기자, 노을빛 파도가 굽이치며 무형검을 막아선다.
내 초식은 무화되는 듯했으나, 그게 끝이 아니다.
피싯, 피싯!
유화의 전신에 핏줄기가 스쳤다.
점차 그녀가 연주하는 ‘졸음’의 심상은 내 무형검에 먹혀들지 않았다.
나는 그녀의 졸음을 내 안에서 ‘성장의 기회’로 변질시켜 그녀와 싸우고 있었으니.
‘이대로라면, 이긴다!’
그렇게 생각할 때였다.
씨익….
“동 경지의 하현과 싸우는 건 오랜만이라… 역시 안되겠군요.”
유화의 입에 진득한 미소가 새어 나왔다.
그것은 즐거움이었다.
나와 수를 주고받는 것이 너무나도 즐겁다는 감정!
“조금 더 거칠게 해도 되겠지요?”
그리고 다음 순간.
그녀의 꽁무니에서 무수한 백색의 거미줄이 뿜어져 나왔다.
그녀의 하반신에 달린 거미 다리들이 움직이며, 사방으로 거미줄을 엮어 마구 던진다.
곧이어 대기실 전체가 거미줄에 휩싸였다.
그리고.
투웅!
그녀가 거미 다리를 움직이며 거미줄 하나를 퉁겼을 때였다.
지이잉!
“…!!!”
대기실 곳곳에 그녀가 뿌린 거미줄들이 일제히 진동한다.
그리고 주변의 공간 전체에 노을빛이 차오르기 시작한다.
‘크윽…!’
내 심상 안에서 그녀의 심상을 변질시키려 해도, 계속해서 바깥에서 새로운 독이 스며든다.
‘제길…!’
졸리다.
미칠 듯이 졸리다.
‘눈앞이 희미하다.’
어느덧 나는 벌써 꿈과 현실의 경계에서 비몽사몽하게 되어 있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내 육신은 지금껏 휘둘러왔던 대로 정직하게 무형검을 휘두른다.
하지만 동시에, 나는 내 눈앞의 대기실이 사라지고, 사방이 기묘한 심산유곡으로 변하는 것을 보았다.
‘꿈과 현실의 경계에서, 꿈을 통해 내 정신을 제압하려는 건가.’
촤아아아!
심산유곡의 안개가 살아 있는 듯이 나를 덮쳐 왔다.
그와 동시에, 현실에서 강물이 나를 덮쳐 온다.
비몽사몽한 상태였으나, 나는 정신을 분할하여 심산유곡의 안개를 베어 버린 후.
반쯤 정신이 나가 버린 육신을 이용해 노을빛을 피하였다.
그리고 그녀의 대대적인 반격이 이어졌다.
눈앞의 심산유곡은 어느새 바다가 되어 나를 에워쌌고, 파도가 나를 덮쳐 온다.
그런가 하면 어느새 뜨거운 사막 위에서 모래폭풍이 나를 집어삼켰다.
하지만 현실에서의 내 몸은 끊임없이 뛰어다니며 심상에서의 나와는 다르게 계속 다른 공격을 그녀에게 넣고 있었다.
정신이 분할된 채로, 각자 다른 환경에서 싸우는 것을 강제받는다.
‘어마어마하군.’
상성만 잘 맞으면 천인기 수사와도 일대일로 붙어서 살해할 수 있을 법한 절기였다.
물론 암습이라면 상성이고 뭐고 없이 치명상을 입힐 수도 있을 터였다.
현실의 시야와 꿈속의 시야를 병행하며, 나는 졸음을 참고서 계속해서 그녀와 공방을 주고받았다.
‘주홍빛 강물은 그녀의 곡(曲)을 유형화시킨 심상.’
저 강물에 닿으면 내 ‘힘’ 자체가 잠들어 버리며, 내 몸에는 졸음의 심상이 불어넣어져 결국 잠들게 된다.
겨우겨우 심상을 변질시켜 꿈과 현실을 병행하고는 있다지만, 정통으로 맞으면 그대로 기절해 버릴 게 뻔했다.
‘강물 자체로 물리력을 가지고 있으며, 힘 자체는 강하지 않지만 닿으면 잠들어 버리는 저 무시무시함…. 그리고 사방에 자신의 금과 같은 거미줄을 깔아 놓아서 어디서든 곡이 연주될 수 있게 했으니….’
대기실 전체가 주홍빛으로 가득 찬 상황이었다.
나는 주홍빛의 틈새를 겨우겨우 찾아 숨어들어 그녀의 틈을 노려야 했으며, 그녀는 사방에서 내게 폭격을 퍼붓는 형국이었다.
‘즐겁군.’
그러나, 그녀가 내쏘는 주홍빛은 하나하나가 서로의 의념과 심상을 읽어 내며 최적의 경로로 내쏘는 빛살이었다.
내 무형검도 마찬가지였고, 나는 그녀와 합을 주고받으며 점차 신이 나는 걸 느꼈다.
우리의 공방이 격화된다.
그리고, 나는 그녀에게서도 황금빛 의념을 느낄 수 있었다.
즐겁다.
재밌다.
그리고 어느 순간.
나는 꿈의 세계에서, 어느덧 주홍빛 강물이 가득 찬 세계로 진입하였다.
‘이곳은….’
촤르륵….
강물에 발을 담글 때마다 어마어마한 피로가 내 정신을 덮쳐 왔다.
―피곤하다.
―쉬고 싶어….
―제발, 조금이라도….
‘이건….’
같은 답천경끼리 부딪치면, 의념을 교류하다 못해 서로의 심상을 공유하게 되는 모양.
나는 유화의 심상을 헤쳐 나가며 그녀의 피로를 느꼈다.
피곤함.
그것이 곧 그녀가 도달한 깨달음의 본질이었다.
‘이건….’
그리고, 답천의 시야뿐만이 아닌 지족의 시야를 가진 내게.
이 심상 속에 있는 음양의 흐름이 회전하며 나에게 얼핏 어떠한 장면들을 보여 주었다.
그것은 유화의 삶이었다.
그녀는 반인지주(半人蜘蛛)라는 종족으로 태어났다.
그녀의 종족은 거미줄을 뿜어, 거미줄을 튕겨서 좋은 소리를 만드는 종족으로 유명했다.
물론 그 외에 가진 능력은 아무것도 없었고, 선천적으로 영력의 격렬한 흐름을 버티지 못해 요수공법도 익힐 수 없었다.
그렇기에 그녀의 종족은 노예 종족으로 취급받으며 광한계 곳곳으로 팔려 나갔다.
유화는 이곳저곳으로 팔려다니며 금을 연주하는 법을 배우고, 잠시도 쉴 틈 없이 금을 연주해야 했다.
그녀의 금 타는 솜씨는 정말 좋았고, 그녀를 소유한 주인은 그녀를 데리고 공연을 시키면 공연 시간만큼이 곧 부(富)였으니.
절대로 그녀를 쉬게 하지 않았다.
피곤하면 피로를 없애 버리는 영액을 주고, 게으름을 피우면 갈아서 단약으로 만들겠다고 협박하며 쉴 새 없이 공연하기를 5년.
유화는 점차 미쳐 가기 시작했다.
피로하지 않다고 하여 누가 쉴 새 없이 금을 타며 끊임없이 재능을 뽑아낼 수 있겠는가.
―자고 싶다.
간혹 다른 공연장으로 이동하며 기절하듯이 쪽잠을 자는 게 아닌, 제대로 푹 자고 싶었다.
바라고, 바라고, 또 바랐다.
그녀가 바라던 휴식은 쉽게 찾아오지 않았다.
그렇다고 공연 중에 졸기라도 하면 즉시 주인이 그녀를 갈아서 단약으로 만들 테였다.
피로를 강제로 없애는 영액을 주입하다시피 넣고 있으니, 피곤하다는 변명도 통하지 않았다.
하지만 잠을 안 자기를 몇 년째.
그녀는 이제는 잠을 자지 않으면 정신이 나가 버릴 것 같다는 생각에, 방안을 찾았다.
그리고 그녀가 찾은 방안이란 바로 ‘다른 것’에 미치는 것이었다.
그녀는 자신의 연주에 몰두했다.
잠을 자고 싶다는 광기를 모조리 금을 타는 것에 쏟아부었다.
그녀의 연주 실력은 어느덧 같은 반인지주들 사이에서도 독보적일 정도로 성장했다.
더더욱 완벽한 연주를, 더더욱 완벽한 음색을 갈구하였다
그러던 어느 날, 그녀는 음(音)에 기(氣)를 싣는 법을 깨달았다.
그리고 다시 어느 날.
그녀는 음(音)을 연주하며, 음에 감정의 색(色)이 보이는 것을 깨달았다. 그날부터 그녀는 그녀의 연주를 들으러 온 손님들의 의념을 볼 수 있게 되었다.
또다시 어느 날, 그녀는 어느 순간 무수한 감정의 색이 하나로 통합되며 하나의 의식 영역을 형성하는 것을 보았다.
그때부터, 그녀는 자신의 연주가 어떠한 방향성을 띄고 있음을 깨달았다.
그리고 그녀는 그 방향성에 도달하기 위해 계속해서, 손과 발에서 피가 나도록 금을 연습했다.
그리고 마침내.
금(琴)의 연주가 완벽에 완벽을 더하여 마침내 극의(極意)에 달한 날.
그녀는 자신에게 있는 기본적인 기(氣)와 금을 타며 흘러나오는 의(意)를 합일하여, 그녀가 수년 동안 갈구하고 또 갈구해 온 것을 얻는 데에 성공했다.
자고 싶다.
평생에 한 번도 제대로 얻지 못한 ‘휴식’을 구현해 낸 그녀의 연주는 그 날 그녀를 찾았던 모든 손님과, 그녀의 주인.
그녀 자신까지 모두 잠재우는 데에 성공했다.
그녀는 잠든 상태에서도 연주를 하며, 그동안 자신에게 쉴 틈을 주지 않았던 악독한 결단경의 주인을 죽여 버렸다.
그렇게 그녀는 심족(心族)으로 각성하였고.
추후에 심족 영역으로 도망쳐, 심족들과 합류하였다.
그것이, 그녀의 이야기였다.
콰아아앙!
번뜩!
나는 눈을 떴다.
내 무형검은 어느새 유화의 목 끝에 닿아 있었고, 그녀의 금은 두 쪽으로 박살이 나 있는 상태였다.
“파란만장한 생을 살아왔군.”
나는 이제야 왜 그녀가 내 대련에 응했는지 알 수 있었다.
심족은 동 경지의 같은 심족과 대련하면, 상대의 심상과 그 심상에 녹아 있는 상대의 본질을 보는 것이 가능하다.
그녀는 나에게 백녕과 만나게 해 주겠다는 약속을 받은 후 내가 믿을 만한 사람인지.
과연 거짓말을 한 것인지 알아보려 대련을 청했던 것이리라.
‘대련을 받을지 말지 떠본 게 아니라, 나를 봤을 때부터 대련을 하는 건 예정되어 있었다는 거군.’
상당히 발칙한 여자다.
내가 그녀를 내려다보며 말하자, 그녀는 피식 웃었다.
“귀하야말로, 저에게 뒤지지 않는 삶을 사신 것 같군요. 당신의 심상에 들어가서는 정말… 죽는 줄 알았답니다.”
“아무래도 내 심상이 조금 쉽지 않지.”
그랬다.
내가 그녀의 꿈과 심상에서 빠져나와 그녀를 이길 수 있었던 것은, 그녀 역시 내 심상에 들어왔기 때문이었다.
내 도산지옥에 입장하여 전신이 꿰이는 경험을 했으니 그녀의 집중력이 흐트러졌던 것이리라.
“그나저나 신기하군.”
나는 눈을 감고 있는 그녀를 보며 말했다.
지금까지는 그냥 눈을 감고 있는 건가 했지만, 그녀의 심상과 기억을 얼핏 읽으며 확실해졌다.
“그냥 눈을 감은 게 아니라, 여지껏 계속 자고 있는 거였나?”
그랬다.
그녀는 눈을 감고 있는 게 아니라, 계속 자고 있는 것뿐이었다.
입천에 들어간 그 날부터, 그녀는 지금까지 한 번도 잠에서 일어난 적이 없다.
계속 잠을 자며, 자신의 꿈 속에서 자신의 육신을 통제하여 움직이는 신기한 존재인 것이었다.
“어머, 숙면은 정말 중요한 것이랍니다. 어린 시절에 한 번도 잔 적이 없다면 보상을 받기 위해서라도 계속 자는 게 당연하지 않나요?”
“아니, 그게 문제가 아니라… 됐다.”
도대체 어떻게 잠을 자면서 꿈속에서 자기 몸을 통제한다는 짓거리가 가능한 것일까….
“그나저나… 귀하께서는 제 기억을 읽으셨나 보군요? 지족의 끈적한 시야가 제 머릿속을 훑는 느낌이 들었는데….”
“미안하게 됐군. 시야는 내가 어찌 통제할 수 있는 건 아니라서.”
“뭐, 괜찮습니다. 당신의 심상은 광인의 것이긴 해도, 당신 자체는 악인이 아니란 것은 확연히 느꼈으니까요. 당신의 투명한 하현(下弦)만 해도 말이지요.”
“하현이란 건… 뭐지?”
“구현을 뜻하지요. 심족들이야 서로 만나면 그래도 어느 정도의 통일성을 위해 모두 구현 1, 2, 3단계 등이라고 칭하지만…. 솔직히 모든 심족은 모두 각기 다른 단어로 ‘구현’을 칭한답니다. 저는 ‘하현’이라고 부르는 편이지요.”
‘그렇군….’
내 ‘답천’과도 같은 느낌이리라.
그때였다.
그녀가 눈을 감은 채로 내게 물어왔다.
“그래서 어떠셨나요, 저라는 존재에 대한 평가는?”
“아….”
그랬다.
나는 그녀를 바라보며 생각을 정리했다.
이번에 심족과 지족의 시야를 동시에 사용하며, 한 가지를 새로 발견하게 되었다.
상대의 심상을 읽는 답천의 시야.
그리고 영기의 궤적을 읽는 지족의 시야.
두 시야가 합쳐지자, 마치 원영기에 이를 때에 음양의 궤적을 통해 내 인생의 주마등을 보았던 것과 같이.
타인의 생을 아주 짧게 볼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고생스러운 삶이었군.”
나는 유화를 보며 말을 이었다.
“고생 끝에 염원하던 것을 넣었으니, 축하해야 할 삶이기도 하고.”
내 말에 그녀는 활짝 웃었다.
“칭찬 감사합니다.”
그리고 이어진 말에 나는 흠칫 놀랄 수밖에 없었다.
“저 역시 귀하가 어떤 분인지 본질을 잠시 접하였으니… 이번 제 임무가 끝나고 나서,
원하신다면 심족 영역으로 가 정식으로 심족(心族)의 일원으로 삼아 드리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