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 Regressor’s Tale of Cultivation RAW novel - Chapter (220)
광대와 공연 (7)
온다, 온다, 온다!
그가 온다!
기기기기긱!
공간의 틈새가 열리며, 저 멀리서부터 거대한 존재감을 지닌 뭔가가 이곳으로 도약해 오려는 것이 느껴졌다.
기묘성채!
괴군의 기묘성채가, 봉명주 안쪽으로 도약해 오려 하고 있다.
서휼 역시 익숙한 괴군의 기묘성채를 느낀 것인지, 기묘성채의 기척이 느껴지는 곳을 향해 머리를 꺾었다.
“어, 떠, 냐…!”
서휼이 정신을 못 차리는 지금!
괴군이 도착한다면, 서휼은 더 이상 아무것도 할 수 없다.
어떠한 수작도 부릴 수 없게.
어떠한 흉계도 더 꾸밀 수 없게, 말 그대로 날것처럼 조리되어서 괴군의 앞에 놓이는 것이나 다름없다.
나는 어차피 며칠 뒤면 전신이 전부 뇌전으로 화해 죽을 목숨.
서휼이 괴군에게 박제당해, 괴군의 괴뢰와 혼례식을 올린다면 그 역시 죽어 간 규련과 서휼에게 희생당한 모든 이들에게, 나름 만족스러운 결말일 것이다.
쩌어어억!
공간 균열이 열리고, 저 멀리, 허공간 너머로 철컥거리는 기관장치의 성이 이곳으로 날아들려 하는 것이 보였다.
하지만 그럼에도 서휼은 표정을 바꾸지 않았다.
오히려, 그는 고통이 익숙해졌는지 나와 같이 입을 열었다.
“봉명주는… 폐기된 선보라지만… 그래도 선보는 선보….”
잠시 기묘성채를 바라보던 서휼은 고통을 간신히 견뎌 내면서도 싱긋 웃었다.
그리고 그의 시선은 이내 기묘성채에서 떨어졌다.
“안으로 바로 진입할 수 있는… 특별한 직인이 없다면… 아무리 괴군이라도… 이곳으로 그렇게 쉽게는 못 들어온답니다.”
“…들어오고 있는 거 같은데?”
기기기기긱―
서휼의 말을 농락하기라도 하는 듯.
거대한 기묘성채는 공간을 넘어 이곳으로 점차 가까워지고 있었다.
봉명주의 영향인지, 분명 중간중간에 무엇인가가 기묘성채를 막아 내는 것처럼 보이기는 했다.
하지만 기묘성채는 그러한 항력을 모조리 뚫어 버리고 이곳에 진입하는 중이었다.
기기기기긱―
봉명주의 항력을 다 뚫어 버리고 점차 이곳으로 가까워지는 기묘성채의 모습에, 서휼은 잠시 말을 잇지 못했다.
아무리 서휼의 흉계가 음흉한들, 아무리 놈의 지략이 출중한들.
괴군에게는 어떠한 상식도, 논리도, 흉계도 통하지 않는다.
그리고 마침내.
기기기기긱!
끼이이익….
허공간에서 봉명주 안쪽까지, 약 10장 정도의 거리만을 남겨 놓은 채로, 기묘성채는 그대로 멈춰 서 버렸다.
그리고, 기묘성채의 문이 열렸다.
끼이이이익!
철컹!
전신이 찌릿거린다.
저 안쪽에서 느껴지는 28기의 어마어마한 기세들.
나는 그 기세들이, 하나하나가 일전 보았던 합체기에 도전하던 규련의 기세와 뒤지지 않는다는 것을 깨닫고는 침을 삼켰다.
쩌억, 쩌어어억!
물론, 봉명주가 다 망가졌어도 선보라는 서휼의 말은 완전히 허언은 아니었는지, 28기의 괴뢰들은 이쪽으로 진입하지 못했다.
하지만 28기의 괴뢰들이 일제히 이쪽으로 손을 뻗자, 봉명주에 둘려 있는 보이지 않는 어떠한 항력에, 틈새가 나는 것이 느껴졌다.
쩌저저적!
그리고 마침내.
어린아이 한 명이 겨우 들어올 정도의 틈새가 만들어졌다.
부우우우웅!
그것으로도 충분했다.
저 너머에서, 괴군이 괴뢰들을 지휘하는 것이 느껴진다.
기묘성채 안쪽에서, 무수한 일벌 괴뢰들이 날아와 작은 틈새 안쪽으로 진입하여 사방을 감쌌다.
부우우우웅!
벌 괴뢰들은 우리가 대치하는 곳으로 넘어와, 나와 서휼을 둘러싸고 마구 회전하였다.
벌 괴뢰들에 의해 우리를 둘러싼 회오리가 생겨났고, 그 덕에 서휼은 혈제를 지내 사축기 수사들을 제물로 바쳐 힘을 강화할 수 없게 되었다.
“이제, 어쩔, 거지?”
나는 혈제의 기운이 모여 있는 곳으로 손을 뻗은 서휼을 바라보며 비릿하게 웃었다.
느껴진다.
방금 전까지 어마어마하게 거대했던 혈제의 기운이, 점차 줄어들고 있다.
많은 부류의 마공이 그렇듯이, 이러한 대규모의 희생을 필요로 하는 비술은 유지 시간이 짧다.
그 짧은 시간 안에 목적을 이루지 못하면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어지는 것이었다.
기운이 순식간에 작아지고 있는 것으로 보아.
서휼이 혈제로 만들어 낸 저 기운은, 흩어지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거기다가 이 일벌 괴뢰들은 분명히 공간 도약을 할 수 있도록 만들어진 일벌 괴뢰들.
분명 이 녀석들은 봉명주의 안쪽에서 기묘성채를 완전히 이곳으로 불러낼 작업을 준비할 것이다.
그렇게 되면 괴군이 완전히 안쪽으로 진입할 터였고, 서휼은 끝이다.
‘그래도 마지막까지 긴장을 놓지 말자.’
하지만, 나는 여기까지 서휼을 몰아넣었음에도 도리어 더더욱 긴장을 곧추세웠다.
내가 아는 서휼이라면, 분명 뭔가를 더 해 뒀다.
갑자기 땅 밑에서 서휼이 하나 더 튀어나와, 사실 지금까지 상대한 건 분신이라고 해도 이상하지 않을 것 같았고.
홍범이 배합한 독에 갑자기 수작을 부려 놓았다 해도 이상하지 않을 것 같았다.
‘오혜서와 만난 이후부터 부조화를 느꼈었다.’
십중팔구 서휼의 수작이다.
오행혈주번으로 봉인을 해 놓았다지만, 어쨌든 나는 지금 서휼이 부려 놓은 수작에 빠진 것이니 끝까지 주의에 주의를 기울여야 하리라.
‘지금도 서휼을 더 몰아넣을 수는 몇 개가 더 있다.’
하지만, 나는 일단 유화가 원군으로 올 때까지 기다리기로 했다.
더더욱 확실한 전력이 생길 때까지는 신중해야 한다.
‘참자. 놈에게 더더욱 확실한 타격을 입힐 때까지!’
쩍, 쩌저저적!
일벌 괴뢰들의 너머.
공간 균열 방향.
그곳에서, 일벌 괴뢰들이 뭔가를 해낸 것인지 기묘성채가 공간 균열을 조금 더 벌려 냈다.
‘좋아, 이대로라면….’
그러나, 그때였다.
덜컹!
갑자기 기묘성채가 움찔거리더니, 뒤쪽으로 조금씩 밀려나기 시작했다.
‘뭣…!’
서휼은 미소를 잃지 않은 채 입을 열었다.
“지족의… 요왕들이… 놀고 있지만은 않나… 보군요.”
우우웅!
나는 어쩐지 공간 균열 쪽에서 기이한 인력이 느껴지는 것을 보며 깨달았다.
공간 균열 너머.
기묘성채 뒤쪽.
그곳에서, 지족의 합체기 태수들이 괴군을 다시 봉명주 바깥으로 끌어내기 위해 기묘성채를 인력으로 당기고 있는 것이었다.
“저걸, 믿고, 있는 거냐?”
그러나 나는 피식 웃었다.
기묘성채라면 내가 제일 잘 안다.
기묘성채는, 아직 제대로 힘을 쓰지 않고 있다.
쿠구구구구구!
기묘성채의 뒤편에서 몇 개의 원통형 추진체가 나타났다.
그리고 동시에, 추진체들에게서는 어마어마한 영력이 뿜어지더니, 기묘성채를 당기는 인력에 저항해 다시 원위치가 되어, 공간 균열 안쪽을 뚫고 들어올 듯이 달라붙었다.
‘애당초 기묘성채를 쉽게 막거나 제지할 수 있었으면, 괴군이 천 년씩이나 마음대로 활개 칠 수 있었겠나.’
성과 같은 형태라서 굉장히 둔해 보이지만, 기묘성채의 실상은 어마어마하게 빠른 기동 요새다.
진심을 낸 괴군의 기묘성채는 무엇으로도 막을 수 없다.
“확실히, 조금 어렵겠군요.”
그러나, 서휼의 안색은 달라지지 않았으며, 심상 역시 아무런 요동도 치지 않았다.
‘뭐지?’
뭘 믿고 있는 거냐.
서휼.
서휼은 씨익 웃었다.
그리고 나는 그 웃음에서 말할 수 없는 위화감을 느꼈다.
“저는, 일반적인 생물들이 말하고 나눈다는 감정이라는 것은 이해할 수 없습니다.”
‘말도 하기 힘든 고통일 텐데, 뭐지? 벌써 고통에 완전히 익숙해졌나?’
“폐의 진동으로 감정이라는 것을 분석해 보고 모사해 보려 해도 그것만으로는 생물들의 행동 양식을 전부 이해할 수는 없었지요. 그래서 저는, 괴군의 행동 양식을 연구하며 한 가지 가설을 세웠습니다.”
나는 서휼의 헛소리를 한 귀로 흘리며, 그가 무슨 수작을 또 부리려 하는지에 정신을 집중했다.
달각….
서휼은 품속으로 손을 넣어, 품 안에서 한 개의 목걸이를 꺼냈다.
얇은 무명실로 만들어진 볼품없는 목걸이였으나, 목걸이의 장식물은 녹색의 수정으로 된 아름다운 보석이었다.
서휼은 목걸이를 손에 감아, 보석이 자신의 손바닥에 묶이게 하였다.
“생물들에게는, 각 개체가 저마다 ‘소중한 것’이라고 부르는 삶의 목적 같은 것이 있는 겁니다. 지성체라고 불리는 이들은 대다수가 이런 걸 가지고 있더군요. 놀랍게도 저를 포함해서도 말이지요.”
“…?”
나는 서휼의 개소리에 집중하지 않으려 했으나, 스스로에게도 소중한 것이 있다는 서휼의 말에는 순간 흠칫하며 녀석의 눈을 바라보았다.
“괴군에게는 [그녀]가 그것이었고, 후손인 란이에게는 ‘가족의 애정’이 그것이었으며, 제가 거둔 백녕은 ‘종족의 안녕’이 그것이었지요. 그리고 백녕을 구하러 갔을 그 심족에게는 ‘제자의 안전’이 그것이었을 테고 말입니다.”
척!
서휼은 수정 목걸이를 감아쥔 손을, 괴군이 진입하려는 공간 균열을 향해 내밀었다.
‘뭔가를, 하기 전에, 막아야 해!’
그러나 움직일 수가 없다.
도대체 서휼이 어떻게 갑자기 저렇게 태연하게 움직이는지도 이해가 불가능하다.
‘처음부터 고통을 못 느꼈나? 아니야, 그럼 처음에 머리를 부여잡고 쓰러지면서 저주문을 밀어내려 하던, 그런 병신같은 연기는 하지 않았겠지.’
그렇다면 서휼은 현재도 나와 같은.
아니, 나 이상의 고통을 느끼고 있다.
그렇다면 어떻게 저렇게 멀쩡한가?
역겨운 심정을 뒤로하고 서휼의 심상을 뚫어지게 노려보았다.
“제가 하고 싶은 말은, 객체들이 원하는 것만 알아내면, 그 원하는 것들을 조금 통제하는 것으로 각기 다른 객체들은 너무나도 쉽게 제어할 수 있다는 겁니다. 제자의 안전을 위해 완전히 다른 곳으로 멀리 돌아가서, 지원을 오는 데에 한참은 걸릴 그 악사와, 종족의 안녕을 위해 제게 스스로 영혼을 바친 백녕처럼 말이지요.”
위이이잉!
서휼이 쥔 녹옥에서 녹색의 빛이 터져 나오며, 백녕의 환영을 비추었다.
‘저건…!’
백녕!
백녕이었다!
‘그런…!’
서휼은 백녕의 혼백을 뽑아 목걸이에 불어 넣어 부리고 있는 것이었다.
“백녕, 척산편을 발동해라.”
[…예, 주인님.]그와 동시에, 혼백이 뽑힌 백녕은 서휼의 힘과 자신의 혼백을 결합하여 그의 입천을 발휘하였다.
서휼은 빙긋 웃으며 말했다.
“천, 지족들은 심도공법 3단계에 이른 심족들만을 보고 혐오하지만, 제가 보기에 심족들의 가능성은 무궁무진합니다. 고작 원영기에 불과한 당신이 천, 지, 심 삼재를 융합하여 사축기에 준하는 저력을 낼 수 있듯이… 심족의 힘은 잘만 이용하면, 이렇게….”
쿠구구구구!
백녕의 ‘무게’를 조절하는 입천의 힘.
그리고 서휼의 손에서 뿜어지는 인력(引力)이 합쳐지며 미친 듯이 증폭하기 시작했다.
‘저건…!’
마치, 단순한 답천의 무형검과 내 원영이 합쳐지자 어마어마한 증폭률을 보였던 것과 같이.
서휼의 손에서 뿜어지는 인력이 어마어마하게 증폭된다.
그리고.
파아아앙!
파공음과 함께 서휼의 손에서 뿜어지던 인력은 일순간 척력(斥力)이 되어 괴군의 기묘성채를 밀어내었다.
꾸구구구구!
천지족의 수행이 더하기라면, 심족의 수행은 곱하기.
안 그래도 사축기 최정상을 넘어, 합체기에 준하는 힘을 가진 서휼이다.
그런 서휼의 힘에, 비록 입천일 뿐이지만 [무게]를 조종하는 백녕의 능력이 더해지자, 그의 인력은 합체기 최정상만큼이나 올라갔다.
뒤쪽에서는 합체기 요왕들이 당기고, 앞에서는 서휼이 민다.
결국, 기묘성채는 점차 밀려 나가는 듯하더니 다시금 허공간의 어둠 너머로 사라져 버렸다.
“이렇듯이 심족을 잘만 이용하면 너무나도 유용한 것을 할 수 있는데, 이상하게도 심족을 이용한 법기나 법구는 잘 나오지 않습니다. 기이하지 않습니까? 심상을 읽는다거나, 천겁을 추가한다거나 하는 둥 심족을 혐오할 개연성 자체는 차고 넘칩니다만. 어째서 광한계 주민들은 심족을 이용하는 것에조차 생각이 닿지 않았던 것인가…. 그런 간단한 것조차 혐오감 때문에 하지 않는 것인가?”
그는 나를 향해 싱긋 웃으며 물었다.
“마치, 누군가가 광한계에 일부러 이식해 놓은 혐오감 같지 않습니까? 천지심을 전부 품은 서 도우께서는 혹시 이에 대해 아시는 게 있으신지요?”
“….”
“알려 주시지 않는 겁니까?”
“…그렇군, 고통을 느끼지 않는 게 아니야.”
나는 그제야 서휼이 어떻게 이 정신 나간 고통을 견디고 있는지 깨달았다.
서휼은 자기 자신의 정신을 해체했다.
자신의 혼백을 여러 조각을 자른 후, 완전히 붙지는 않게 다시 붙였다.
그렇게 하여 정신을 해체해서 기절한 것과 같은 형태가 된 것이다.
한 마디로, 내 앞에서 말을 하고 있는 저것은 서휼 본인이 아닌, 서휼이 자신의 혼백을 해체하기 전 자신의 몸에 입력해 놓은 행동들인 것이었다.
‘괴군이 나타난 그 순간, 자신의 정신으로 고통을 견디는 걸 포기하고 일시적으로 정신을 해체한 후 괴군을 밀쳐 냈다.’
괴군을 떨어뜨리는 데에 성공했으니, 아마 이제 입력해 놓은 대로 정신을 되돌려서 돌아올 터였다.
‘서휼이 하는 말은 그 어떤 것도 귀담아들을 필요 없다.’
놈의 말은 모조리 거짓말.
뭔가 있어 보이는 말로 주저리주저리 떠든 이유는 자신이 의식을 잃었다는 것을 들키지 않게 하기 위한 눈속임일 뿐!
그렇다면.
‘지금이, 서휼의 빈틈이다!’
촤락!
내 옆으로 내 저물도가 떠올랐다.
단순한 저물도가 아니었다.
생물을 넣어놓을 수 있는 특별한 저물도.
도원도(桃園圖)라는 종류의 저물도였다.
촤라라락!
그리고 그 안쪽에서, 낡은 갈의를 입은 한 여인이 걸어 나왔다.
규백이었다.
괴군이 물러갔지만, 그것도 좋다.
어쨌든 이것으로 서휼이 빈틈을 보였으니!
[규백 님!]나는 심어로 규백에게 바로 내 뜻을 전달했다.
규백은 고개를 끄덕이며 한쪽 손을 뻗었다.
키이이잉!
그녀의 손에서 황금빛 인장이 빛났다.
관주사자(官舟使者)의 인(印).
봉명주의 안팎을 자유자재로 드나들 수 있는, 규련의 권한 중 하나.
그리고 그 권한을 사용하면, 미리 지정해 놓은 장소와 봉명주의 안쪽을 일순간 연결하는 것이 가능했다.
공간의 문이 열린다.
‘괴군의 앞에서 규백을 꺼내면 규백이 무슨 짓을 당할지 몰라서 쓰지 않았지만….’
“유화!”
유화를 부르는 것이라면, 오히려 지금 사용해야만 한다.
“백녕은 이곳에 있소, 넘어오시오!”
그리고, 공간의 문 너머로 주홍빛 강줄기가 빠르게 이쪽으로 넘어왔다.
키이이잉!
완전히 괴군을 밀어내 버린 서휼의 손에서는 아직도 백녕의 형상이 아른아른하게 비치고 있었고, 유화는 도착하자마자 그 광경을 포착했다.
백녕, 유화가 아꼈던 그녀의 제자는 서휼의 손에서 혼백이 뽑혀 법기로 사용되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본 유화는 별말 하지 않았다.
대신 그녀는 본모습을 드러내고, 금(琴)을 자신의 앞에 내려놓은 채로.
이제껏 없었던 진중한 표정으로 금을 뜯기 시작했다.
지이이이잉―
공간 전체가 울리는 듯했다.
유화의 환람연하는 오직 서휼에게만 집중되며, 해체되어 있는 서휼의 의식을 깊숙이.
더더욱 깊숙이 끌어내렸다.
분명히 서휼에게만 집중되는 음색임에도, 그 편린을 듣는 것만으로 말할 수 없을 정도로 졸음이 솟구쳤다.
하지만 나와 규백은 각자 정신을 다잡고 서휼이 비틀거리는 것을 바라보았다.
어쩐지, 이번에 유화에 의해 잠들게 되면 다시없을 악몽을 꾸게 될 것 같았으니까.
나는 규백을 바라보며 말했다.
“제가 저주로, 유화가 잠으로. 그리고 서휼 자신이 잠시 정신을 해체하여 어렵사리 만들어진 틈새입니다.”
규백은 두 주먹을 꽈악 쥐었다.
“마음은 다 정하셨습니까?”
“…그래.”
그녀의 심상은 서휼을 본 순간부터 매우 흔들리고 있었다.
하지만, 흔들리는 심상 속에서도 한 가지의 심상만은 흔들리지 않았다.
제한이 덕지덕지 붙은.
그러나, 그렇기에 특정한 대상을 상대로는 다시 없을 위력을 보이는 규백의 입천.
“규련의 원한을, 갚겠다.”
월도입천(越道入天).
서교정표(瑞交情表).
오직 서휼 한 명만을 끝내기 위한.
서휼과 나누었던 약속의 정표.
광한지약을 기반으로 만들어진 월도입천이, 지금 발동되었다.
철컹, 철컹, 철컹!
규백의 옷과 같은 갈색의 사슬이 그녀의 손에서 흘러나왔다.
그와 동시에 갈색의 사슬은 서휼의 심장 부근을 자연스레 투과해 들어가, 서휼의 심장을 비롯해 주요 장기, 그리고 서휼의 요단 곳곳에 얽혀 갔다.
‘그렇군….’
나는 규백의 손에서 뿜어진 저 사슬이, 규백의 어디와 이어져 있는지를 눈치챘다.
규백의 심장과 이어진 사슬.
그 사슬은 마찬가지로 서휼의 심장과 주요 장기, 그리고 요단과 이어져 있었다.
말 그대로, 서휼과 함께 죽기 위한 월도입천.
서로가 한날한시에 죽기 위해 만들어진 광한지약의 내용을 구현시키는 것이 바로 규백의 월도입천, 서교정표인 것이었다.
철컥, 철컥, 철컥!
나는 저물도에서 무수한 서 장군들을 꺼내, 등 뒤에서 입을 벌리게 했다.
그리고 언제라도 내 몸을 바쳐, 저주와 무형검을 폭발해 자폭할 준비를 끝마쳤다.
혹여나 규백이 서휼을 죽이지 못하더라도, 내 자폭과 같이 서휼은 끝난다.
설령 서휼을 끝내지 못하더라도 서휼이 잠시 거동이 힘들 만한 부상은 입힐 수 있고, 그 정도라면 괴군이 다시 이쪽으로 오기에 충분한 시간이었다.
‘다사다난한 생이었다.’
서휼의 밑천을 까고자 그의 밑으로 들어왔다.
실제로 서휼의 밑에서 그를 지켜보며 많은 걸 얻기는 했지만, 모든 것을 알아내지는 못했고, 오히려 폭탄 같은 것만 많이 터졌다.
‘과연, 후회는 없었는가.’
이 생에 후회가 있었는지는, 최후의 일격을 휘두르며.
그때에 주마등을 다시 보며 알게 되리라.
‘마지막까지 절대 긴장을 풀지 마라.’
서휼은 서휼이다.
저 심상을 보면 분명히 저 녀석은 서휼 본인이 맞으니, 언제 어디서 어떻게 수작을 부릴지 모른다.
서휼에게 온 집중을 쏟으며 그를 관찰해라!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절대로 긴장을 놓지 말….
푸욱!
“…어?”
부웅!
규백이 서교정표를 발동하기도 전.
시뻘건 손아귀가 규백의 등 뒤에서 그녀의 심장을 뚫고 나왔다.
키리리릭!
음양이 제멋대로 회전하며 규백의 몸에서 나왔던 사슬이 그대로 흩어졌다.
그리고, 시뻘건 손은 다시 내게 쏘아져 왔다.
쩌엉!
나는 시뻘건 손에 실린 가공할 힘에, 그대로 내리찍혀 자리에 주저앉았다.
왈칵!
이미 8할 이상 뇌전화된 내 몸체가 금방이라도 흩어질 것 같다.
2할밖에 안 남은 육신에서 붉은 즙이 줄줄 흘러나오며 주변으로 퍼져 나간다.
“넌….”
나는 황망한 눈빛으로 규백과 나를 기습한 이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원유…?”
서휼이 사축기 수사들을 모조리 혈제 지내서 얻은 막대한 힘.
나는 그것이 모조리 흩어 없어졌다고 생각했다.
아니었다.
그것은, 모조리 원유가 흡수했던 것이었다.
그리고, 이어서 원유가 입을 열자 나는 허탈한 심정이 되었다.
“이상하네, 유리공작의 빛을 맞았는데 어떻게 나를 인식하는 거지?”
원유의 입에서는 아주 익숙한 목소리.
오혜서의 목소리가 흘러나오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역시 넌 너무 이상해, 서은현. 희뿌연 안개 같은 게 너를 지켜 주고 있어. 그 안개 때문에 너에 대해서는 피상적인 것들밖에 읽을 수가 없단 말이지.”
츠츠츠츳!
나는 그제야 머릿속에서 느껴지던 기묘한 부조화의 정체를 깨달았다.
내 기억은 유리공작의 빛에 의해 왜곡되어 있지만, 내가 무의식 수준에서 운용하고 있던 만상인연도가 정답을 보여 주고 있었다.
나는 오혜서와 만나고 ‘돌아갈 때’ 유리공작의 빛을 맞은 게 아니다.
오혜서와 ‘만나러 갈 때’ 기습적으로 유리공작의 빛을 맞았다.
오혜서와 만나서 그녀와 나눴던 대화들, 내가 그녀의 심상을 읽었던 일들, 유리공작의 빛을 맞았던 시간의 서순 등….
모든 것이, 그녀가 내게 최초로 걸었던 유리공작의 빛에 의해 뒤섞이고 왜곡되었던 것이었다.
비틀, 비틀….
유화 역시 원유의 몸으로 새하얀 빛을 내뿜는 오혜서의 힘에 의해 비틀거렸고, 유화의 연주는 그쳐 버렸다.
그와 동시에, 서휼이 해체되었던 정신을 다시 봉합하며 자리에서 일어나 있었다.
원유의 몸을 입은 오혜서는 천천히 서휼의 곁으로 걸어갔고, 서휼은 상냥한 미소를 띠며, 친근하게.
아주 친근하게, 내게 굉장히 자주 했었듯이 원유의 어깨를 두드렸다.
툭툭―
“원립은 고대 유적에서 혈체를 만드는 법을 배웠고, 자신만의 비술이라고 생각했지. 그런데 애초에 원립에게 고대 유적을 통해 혈체 제작법을 전달한 건 저랍니다, 서 도우.”
툭툭―
“혈음계의 법술이 섞여 있는 호풍성혈변을 제 권고대로 얌전히 익히셨다면, 제가 혈체에 무슨 짓을 했는지도 알아채셨겠지만… 안타깝게 되었군요.”
툭툭―
오혜서는 자꾸 원유의 어깨를 두드리는 서휼의 손길을 피하며 말했다.
“혈체를 활성화시키는 정확한 법을 아는 사람이 이 혈체라는 걸 만지면 혈체에 기록된 기억을 열람할 수 있대. 비술의 활성 방법이 아마… 극한 환경에서 혈체의 생명력을 끌어올린다고 했었나요?”
“저런, 혜서 양. 그런 엄청난 비밀을 함부로 발설하시면 곤란합니다.”
“뭐, 상관없지 않나요? 어차피 서은현도 죽을 거고, 내 입장에서는 서은현의 감정을 흔들면 저 희뿌연 것들을 흔들 수 있는지가 더 중요하다고요.”
“흐음….”
분명 그랬다.
어쩐지, 서휼은 이번 생에 유난히 내 어깨를 툭툭 치는 짓을 자주 했다.
그리고, 내 어깨를 칠 때의 절대다수는 내가 혈체피갑을 입고 있을 때였다.
‘극한 환경에서 혈체를 활성화시키는 게 비술의 일부라고?’
처음 만났을 때부터 친근한 듯이 계속 어깨를 두드려 주었었다.
그냥 친근감을 연기하기 위해서라고 생각했다.
그게 아니었다.
서휼은 어째서 처음 보는 녀석이 원립의 혈체를 입고 비승했는지, 그것부터 알아보려 했던 것이었다.
선수혈합 이전에도 계속 어깨를 두드려 주고, 선수혈합 이후에는 제대로 혈체를 활성화시켜서 혈체의 기록을 열람했으리라.
나는 그동안 서휼이 얼마나 내 어깨를 친근한 듯이 두드려 댔는지를 깨닫자, 허망한 기분이 들었다.
“…나는, 네놈의 앞에서 춤추던 광대(廣大)에 불과했던 거군.”
지금껏 괴군의 회로로 서휼을 감시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오히려 혈체를 통해서 나야말로 끊임없이 감시당하고 있었던 것이리라.
말 그대로, 광대가 펼치는 한 편의 연극이었을 뿐.
그래, 광대의 공연이다.
그리고, 우스꽝스러운 광대의 공연은, 이렇게 막을 내린 것이다.
“…그래, 내가 졌다.”
나는 허탈한 웃음과 함께, 내 앞에서 나를 바라보는 서휼과 원유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이왕 이렇게 된 거….”
나는 양손을 맞잡아 깍지를 끼고 눈을 감았다.
그리고, 읊었다.
“…귀의하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