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 Regressor’s Tale of Cultivation RAW novel - Chapter (221)
공연이 끝나고 (1)
내가 ‘귀의하나이다’를 입에 담은 바로 그 순간이었다.
무언가 반응이 오기도 전, 눈으로 좇기도 힘들 정도의 속도로, 서휼이 내게 달려들었다.
꽈드드드득!
서휼이 나를 후려치고, 그의 발이 내 가슴팍을 짓밟았다.
“끄…으으으윽!”
[말]이 안 나온다.아니, 뭐라고 해야 할까.
[말]을 포함한 내 [의지] 자체가 갑자기 억눌린 것 같았다.‘이게 무슨….’
서휼이 득달같이 달려들어 나를 이 세계 전체와 격리시킨 것만 같은 느낌.
그러나, 나는 당황하지 않았다.
오히려 서휼을 바라보며 히죽 웃었다.
처음이었다.
서휼의 심상이 이 정도로 요동친 것은, 처음이었다.
서휼은 여전히 얼굴 표정이 박제된 듯이 웃고 있었지만, 그의 심상은 처음 볼 정도로 놀랍게 폭풍이 치는 중이었다.
[말]이 봉인되었지만, 나는 서휼이 똑똑히 볼 수 있도록 입모양으로 말을 전했다.―너라도 진선은 무섭나 보지?
“…하하, 안 그래도 머나먼 차원에 유폐되어서 고생하고 계시는 분을 귀찮게 사바세계에 오라 가라 하는 것 역시 불경이 아니겠습니까.”
‘유폐?’
어쩐지 서휼은 천뢰번의 주인에 대해 뭔가를 아는 것 같았다.
‘머나먼 차원에 유폐되었다는 존재가 그 정도의 힘을 보여 주었다라….’
알면 알수록, 역시 진선이란 존재들은 언제나 내가 생각하는 한도와 한계라는 것을 가볍게 초월하는 것 같다.
우우웅!
나는 내 몸 상태를 확인했다.
가슴팍은 이미 뇌전화되었을 터임에도 불구하고, 서휼은 뇌전화된 몸을 ‘밟고’ 있었다.
눈알을 돌려보니, 내 중단전, 하단전에는 그 위에 호(好)와 덕(德) 자가 차례대로 떠올라 있었다.
나는 내 머리.
상단전 위쪽에 있는 유(攸) 자를 보며 비릿한 미소를 지었다.
―내게 무슨 짓을 한 거냐.
“서 도우께서 쓸데없이 입을 놀리신 덕에, 제 축 중 무려 하나를 소모해서 당신을 봉인 중입니다.”
‘봉인 중…!?’
말 그대로, 점차 내 전신이 우득거리며 점차 세계와 더더욱 격리되어 가는 듯했다.
“당신 덕에 네 번째 축을 소모해야 하니, 이를 보충하기 위해서 예정에도 없이 혈음계에 가야겠군요. 덕분에 일이 상당히 성가셔졌습니다.”
‘성가시다라….’
물론 표정만 보면 그냥 나를 놀리려고 하는 말인 듯싶다.
하지만, 서휼의 심상은 정말로 조금 복잡해져 있었다.
아무래도 ‘혈음계에 가야 한다’는 사실 자체가 서휼의 심기를 건드리는 것 같았다.
‘왜지, 서휼은 혈음계와 연결 고리가 있는 게 아닌건가.’
어쩐지 지금 서휼의 모습은 혈음계에 가기 꺼려하는 것 같은 모습이었다.
―혈음계에 가기 싫었으면, 다른 축을 소모했어도 됐지 않나.
분명, 지난번 서휼의 설명에 의하면.
명귀는 수.
자금은 부.
고력은 강녕, 진마는 유호덕이라 하였다.
혈음계는 진마계에서 떨어져 나간 곳이니 진마계와 다를 바도 없었고, 유호덕의 힘으로 나를 봉인하는 그가 혈음계에 가서 다시 힘을 보충한다는 것은 이해하였다.
하지만, 그가 혈음계에 가기가 싫다면 그냥 다른 축을 사용해서 나를 봉인하면 되는 게 아닌가?
그리 생각했을 때였다.
“저를 놀리시는 겁니까, 아니면 정말로 모르시는 겁니까.”
‘뭐지? 뭔가 잘못 말한 건가?’
내가 의아해할 때였다.
“자금계는 너무 멀리 떨어져 있어서 왕복하는 데에만 천 년은 걸리니 시간이 너무 낭비되고… 고력계는 진입하는 데에 조건이 필요하니 소모된 축을 보충하기가 어렵지 않겠습니까?”
―그럼 왜 명귀계로 가지 않았지?
내가 묻자, 서휼은 싱긋 웃었다.
그리고 나는 서휼의 심상을 보며 미간을 찌푸렸다.
‘뭔가 잘못 말했나.’
나는 서휼의 심상을 보며, 내가 무엇인가 말실수를 했음을 깨달았다.
서휼의 심상에 끓어오르던 긴장이, 방금의 내 대답으로 인해 많이 가라앉았다.
“이상하군요. 당신은 너무 이상합니다.”
서휼은 도저히 이해할 수 없다는 듯이 허리를 숙여 나와 눈을 맞추며 얼굴을 들이댔다.
“아까 했던 말에 이어서, 객체는 소중한 것. 즉 목적을 알기만 하면 제어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당신은 도대체 뭐지요. 저는 백여 년 동안 줄곧 원립의 혈체를 통해 당신의 동향을 감시해 왔지만, 도저히 당신의 목적을 모르겠습니다.”
“….”
“당신의 소중한 것은 도대체 무엇입니까? 때때로 당신은 소중한 게 있는 것도 같지만, 방금 전에 판을 부숴 버리려던 것처럼, 아예 어떤 것도 소중하지 않은 것 같기도 합니다.”
서휼의 새파란 동공이 쭉 찢어져서 나를 관찰하고 있었다.
내가 도대체 무얼 하는 존재인지, 이해하겠다는 듯.
“목적도 알 수 없고, 소중한 것도 없으며, 분명 힘을 잃고 영락한 존재일 터지만 어째서인지 명귀계의 흉험함 같은 당연한 정보는 아무것도 모른다라…. 힘을 잃고 영락한 게 아니라, 혹 어떤 고명한 존재의 찌꺼기인 겁니까? 기억 전부를 전수받지 아니하고 일부만이 눌어붙어 탄생한 찌꺼기라면 그럴 수도 있지요.”
서휼이 눈매를 가늘게 휘게 하며 웃었다.
“이단아 양수진의 시기를 제외한 근 12만 년 안쪽으로는 진선이 쇠락했다는 정보는 없으니, 당신은 높은 확률로 양수진 시기에 그에게 쇠락한 고명한 존재겠지요?”
“….”
“도우께서 그분을 부르려던 것을 보고 전후 사정을 유추해 보았습니다. 필멸자의 육신으로 그분을 직시했다면 필히 삽시간에 그분에게 귀의해 버렸겠지요. 하지만 도우가 천인도 증발 이후로부터 지금까지 버티고 있다는 것은, 그분께서 당신에게 호의를 베풀었다는 겁니다. 제 예상으로, 아마 대천벌의 정화가 제 주인을 찾아가도록 직접적으로 도우신 것일 테지요? 그분의 호의를 살 만한 행위는 그밖에 없을 테니….”
서휼의 추론이 이어졌다.
“그리고 대천벌의 정화를 도운 방법은 높은 확률로 그녀의 진명을 알고 입 밖에 불렀다는 것일 터. 그리고 그렇게 한다면 그분에게 원한을 산 양수진의 후예들이 어찌 될지는 너무나도 뻔히 알고 있었을 터였으니, 당신은 높은 확률로 양수진에게 살해당해 그에게 앙심을 품은 진선 중 하나일 터입니다.”
“….”
“양수진이 박살 내고 다닌 존재가 한둘이 아니라서 그래도 후보는 많지만, 후손들까지 그렇게 처참하게 몰락시킬 정도로 양수진에게 원한을 품은 존재들은 많지 않고… 거기에 그분의 힘을 절대 빌리지 않을 존재들을 제한다면, 열 손가락 안으로까지 후보지가 좁혀지는군요.”
내 정체에 근접했다는 듯, 서휼은 싱긋 웃으며 물었다.
“이쯤 됐으면 그냥 정체를 공개해 주시는 것도 나쁜 선택은 아닌 듯합니다. 서 도우도 제가 누구인지는 짐작이 가지 않으십니까?”
나는 뭐라 해야 할지 잠시 답을 찾을 수 없어 입을 뻐끔거리다가, 차갑게 웃었다.
―우리 사이에 그런 걸 알려 줄 이유가 있나?
“음? 우리 사이라니요. 무슨 말씀을 하시는 겁니까.”
그러나 서휼은 이해가 안 된다는 듯이 내게서 얼굴을 떨어뜨렸다.
―수십 년간 서로를 감시하고, 의심하고, 뒤통수를 치려 준비한 사이가 아닌가?
“아, 그거야….”
서휼은 내 입 모양을 보며 헛웃음을 흘렸다.
“장난일 뿐이잖습니까?”
“….”
순간, 나는 서휼의 대답에 머리가 멍해지는 것 같았다.
“하하, 왜 그러십니까. 서 도우. 당신이 제가 짐작하는 존재들 중 하나라면… 우주를 손아귀에 쥐고 차원과 차원을 넘나들며 무수한 음모와 계략을 운명과 역사의 단위에서 풀어 나가던 것이 우리와 같은 존재들이 아니었습니까. 이깟 사바세계에서의 사건 몇몇 개 가지고 왜 그리 다투려 하십니까. 저희에겐 그저… 장난과 같은 것이 아닙니까.”
‘장난…?’
나는 서휼의 말을 듣자 정신이 요동치는 것을 느꼈다.
‘이 모든 게, 전부 장난이라고…?’
어이가 없다.
하지만 나는 요동치는 심상을 억누르며 서휼을 쳐다보았다.
‘동요하지 말자.’
분명하다.
저 중에도 또 거짓말이 섞여 있다.
그리고, 서휼은 또다시 거짓이 섞인 정보를 내게 던지며 나를 관찰하고 있다.
‘서휼에게 휘말리지 말고, 시간을 끌어야 한다.’
조금만 있으면, 괴군이 아예 봉명주의 정식 입구인 7층을 뚫고 이곳으로 올 터다.
그때까지만 서휼이 나를 완전히 봉인하지 않고 나와 대화를 나눠주면 희망이 있다.
‘서휼의 말에 휘둘리지 말고, 있어 보이는 척하며 녀석에게 정보를 더 뜯어내 보자.’
―모든 게 장난이라면, 명귀계가 조금 흉험하더라도 모험심 정도만 있다면 명귀계에 다녀오는 것도 좋지 않나. 혈음계에 가는 건 싫은 듯한데?
“흐흠… 명귀계에 대해서는 정말 뭐가 뭔지 모르시는 겁니까.”
‘…?’
“아시다시피, 절대다수의 개열기 진인(眞人)들은 편법으로라도 진선계에 진입하고 싶어 하고… 그렇기에 득시글대는 개열기들이 눈을 시뻘겋게 뜨고 관측하고 있는 곳이 명귀계입니다. 개열기쯤 되면 장난의 대상으로는 하기에는 많이 성숙한 존재들이니… 왜 명귀계를 관측하는지는 대강 짐작 가시겠지요?”
―….
‘명귀계가 진선계로 진입하는 편법과 관계가 있다고?’
이 역시 거짓일 수 있었지만, 어쩐지 이번에 내뱉은 서휼의 말은 사실이라는 느낌이 들었다.
명귀계는 득시글거리는 개열기 수사들이 눈에 불을 켜고 관측하는 곳이라는 정보를 얻었다.
‘직접 들어가서 찾지 않고 구태여 [관측]한다는 건 아마 흑룡왕과의 약속 때문일 테고….’
흑룡왕.
명귀계.
혈음계.
개열기.
성계.
서휼….
모든 게 어떻게 관련이 있는가.
어떻게 하면 이런 정보들을 취합해서 서휼과 더 대화를 이어 나갈 수 있는가.
내가 고민하고 있을 때였다.
“그래서, 다시 묻겠습니다. 서 도우.”
서휼은 빙긋 웃으며 내 눈을 바라보았다.
“그저 저희끼리의 장난이었을 뿐입니다만. 그래도 정체를 알려 주시지 않으시렵니까?”
그리고 그때였다.
“장…난…?”
꿈틀, 꿈틀….
아까 쓰러졌던 규백이.
심장이 뚫렸던 그녀가, 몸을 꿈지럭거리며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기 시작했다.
“호오….”
서휼은 흥미롭다는 듯이 그녀를 쳐다보았다.
심장이 뚫려 구멍이 난 자리는 벌써 지혈이 되어서 피가 흐르지 않고 있었다.
난 규백이 어떻게 움직이는지를 알고 헛숨을 들이켰다.
‘체내 곳곳에서 기를 강제로 순환시키며 몸을 일으켰다.’
일시적으로 심장이 해야 할 일을 기운을 돌려 본인이 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저렇게 된 이상 이미 규백은 죽은 것이나 다름없다.
최대한 저런 방식으로 생기가 빠져 나가는 걸 막았음에도 불구하고 그녀의 얼굴은 실시간으로 파리해지고 있었다.
이미 죽음이 목전에 있는 상태였으니 더 이상 뭔가를 하는 것은 의미가 없다.
그러나, 그럼에도.
규백은 떨리는 목소리로, 폐에서 공기를 쥐어짜 말했다.
“장난… 이었다고? 다시 말해라, 서휼. 너에게, 규련과의 시간은, 정말로 장난일 뿐이었나?”
가슴에 구멍이 뚫린 규백은 구멍난 가슴에 덜덜 떨리는 손을 가져다 대며 서휼을 노려보았다.
“규련은… 나는… 너를 사랑했어… 진심으로…! 그런데, 네게 있어 나는 단순히 장난이었던 건가?”
규백은 울부짖듯이 외쳤다.
“대답해, 서휼…! 이 모든 게, 그냥 장난질일 뿐이었냐고!”
그리고, 서휼은 혀를 찼다.
“자네는 규 선배가 아니네.”
그 냉랭한 태도에, 규백은 입술을 악물었다.
“찌꺼기 주제에 심도공법을 익혀 여기까지 어찌어찌 온 것 같네만. 그게 다야. 자네는 그냥… 규 선배의 찌꺼기일 뿐. 그 본인이 아니야. 착각하지 말게. 규련은 이미 죽었고, 자네가 이러는 것은 아무런 의미도 없을 뿐일세.”
“나는… 아니.”
규백은 눈물을 흘리며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그래, 규련은… 정말로 너를… 너를 좋아했단 말이다. 서휼…!”
“흐음, 어쩌라는 건가. 혹시 규 선배님께 이전에 드렸던 말이 자네에게는 전승되지 않은 건가? 감정이란 폐 안쪽에 들어간 공기의 양에 불과할 뿐이고….”
“아니야!”
촤르륵!
서교정표가 다시금 발동했다.
사슬이 서휼에게 날아들었다.
하지만 서휼이 손을 휘젓자, 서교정표의 사슬은 그대로 튕겨 나갈 뿐이었다.
규백은 용형비호조를 펼치며 사슬을 몇 번이나 서휼에게 다시 날렸지만, 서휼은 우습지도 않다는 듯이 사슬을 튕겨 냈다.
“이거 참. 귀찮게 하는군. 혜서 양, 저 찌꺼기 좀 치워주시겠습니까?”
“예? 싫은데요? 재밌잖아요.”
“….”
오혜서는 규백과 서휼을 보며 재밌다는 듯이 원유의 몸으로 한쪽에 앉아 턱을 괴고 있었다.
“뭐… 혜서 양이 귀찮다면 어쩔 수 없지요.”
저벅, 저벅….
서휼은 내 가슴팍을 밟던 발을 내렸다.
그러나 여전히 내 상중하단전 위쪽에 떠올라 있는 유호덕의 문자 때문인지.
나는 말은 물론이고 손가락 하나 까딱하기가 힘들었다.
챙, 채앵!
서교정표의 사슬이 몇 번이고 서휼을 노렸으나, 서휼은 여전히 그 특유의 기분 나쁜 웃음을 지으며 몇 번이고 사슬을 튕겨 냈다.
유화에 의해 잠들었을 당시 잠시 사슬이 박혔던 것은 그냥 잠들었을 때 잠시 박혔을 뿐이라는 듯.
규백의 마음은 절망적일 정도로 서휼에게 들어가지 않았다.
투웅!
서휼이 마지막으로 사슬을 튕켰다.
그리고, 어느새 서휼은 규백의 바로 앞까지 도달한 상태였다.
“분풀이는 조금 되셨습니까?”
“너…!”
따악!
서휼이 규백의 앞에서 손가락을 튕겼다.
그러자, 규백의 칠공에서 피가 뿜어지며 그녀는 그대로 주저앉아 버렸다.
규백의 안에서 억지로 순환하는 천지영기를 그대로 진탕시켜 버렸다.
규백의 몸이 폭발해서 한줌 육편이 되지 않은 것이 더 용할 정도의 충격.
서휼은 규백을 잠시 내려다보더니, 그녀의 머리채를 잡고 이쪽으로 질질 끌고 왔다.
“한이 많은 몸이니, 혈음계에 혈제로 바치면 바로 서 도우의 봉인을 강화할 수 있겠군요. 자, 서 도우. 잠시 소요가 있긴 했지만, 봉인되시기 전에 하던 얘기를 계속해 보시겠… 뭘 하시는 겁니까?”
우득, 우드드득….
[말]은 어떻게 해도 나오지 않는다.하지만, ‘몸을 움직이는 것’은 온 힘을 짜내자 어떻게든 되는 것 같았다.
나는 무형검의 힘을 한쪽 팔에 집중하며, 팔을 천천히 들어 올렸다.
유호덕의 문자가 나를 더욱 더 거세게 내리눌렀지만, 나는 아랑곳하지 않고 손을 뻗었다.
규백에게로.
“흐음, 다 죽어 가시면서 이 찌꺼기에게 무슨 볼일이 그렇게 남으신 겁니까. 아, 혹시 봉인되기 전에 교미라도 하고 싶으신 겁니까?”
―닥쳐.
“이해가 안 되는군요. 사바세계의 찌꺼기에게 뭘 원하시는 건지…. 장난감에게 정이 많이 드신 겁니까?”
―아니야.
“아니다?”
나는 온 신경을 규백을 향해 뻗은 팔.
무형검에 집중했다.
답천에 달한 무형검은 계위의 수준에서 유호덕의 문자를 헤집어 가며, 느릿하게 규백에게 다가가고 있었다.
―장난이, 아니야!
규백은 이번 생에서밖에 만날 수 없다.
만약 다음 생에 그녀를 만난다면, 그때의 규백은 절대로 지금과 똑같을 수 없다.
오직 규련의 집착과 원망, 잔념에 의해 태어난 자이기에.
이번 생과 완벽히 똑같은 감정과 기억을 지닌 규련이 아니라면, 절대로 이번과 똑같은 규백을 볼 일은 없다는 것이다.
하지만 아쉽지는 않았다.
어차피, 내게 있어서 세상의 모든 존재는 그 한 번의 생에서밖에 못 만나는 존재였고, 규백 역시 똑같은 존재였으니.
그래.
이번 생에서밖에 못 만나는 인연들이다.
―유일한 인연들과 쌓은 추억이, 어떻게 장난이라는 거냐.
나는 마침내, 규백의 손을 잡는 데에 성공했다.
용형비호조를 익히느라 손가락 끝에 굳은살이 많이 배긴 손이다.
서휼을 만나기 위해 단련한 손이며, 나와 함께 무공을 익힌 손이다.
동시에 아무것도 이루지 못한 동료의 손이기도 했다.
“장난이 아니라는 겁니까.”
내 입모양을 관찰하던 서휼은 잠시 우리를 지켜보더니, 규백의 머리채를 놓았다.
그녀는 힘없이 땅에 처박혔다.
‘…?’
그러나 나는 서휼의 행동이 뭔가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뭐지?’
방금 뭔가를 잘못 본 것인가.
순간, 나는 서휼의 심상 속에서 아주 얄팍한 빛살을 본 것 같았다.
너무 순간적으로 지나간 것이라 진짜인지도 확실하지 않았다.
‘잘못 본 거겠지.’
나는 서휼에게 일어날 리 없는 일에 대해서는 신경을 끄고, 쓰러진 규백의 손을 맞잡았다.
규백은 아직 죽지 않았다.
곧 죽기야 하겠지만, 그녀의 손은 미약하게 파르르 떨리고 있었다.
나는 그 떨리는 손을 통해 그녀의 감정을 느꼈다.
분노와 원망.
그리움과 슬픔.
그리고… 사랑.
규련은 서휼을 사랑했다.
그리고 규련의 기억을 이어받은 규백은 서휼을 너무나도 사랑했던 규련의 기억 역시 이어받았기에.
규련의 원망으로 점철되었을지라도, 규백은 서휼을 사랑하는 마음도 존재했다.
비록 사랑하는 대상은 너무나도 역겨운 존재일지언정, 그녀의 사랑 자체는 서휼에게 어울리지 않을 정도로 빛났다.
나는 그녀의 심상을 바라보며, 그 빛을 내 가슴에 담았다.
‘기억하겠습니다. 당신의 마음을….’
이 생에 만날 수 있는 유일한 인연이니, 마음 속에 묻어 이 마음을 기억할 것이다.
그렇게, 만상인연도에는 규백의 마지막 모습이 추가되었다.
그것이, 그녀의 마지막 모습이라고 생각했다.
사라락―
“…?”
연분홍빛의 실 한 가닥이 내 손에서 뻗어나오기 전까지는.
사라라락―
어쩐지, 향긋한 꽃 내음이 사방으로 퍼져 나갔다.
그와 동시에 내 몸에서 뻗어 나온 한 가닥의 실에서 뿌리가 돋아났다.
실이 여러 갈래로 쪼개지며 사방으로 펴져 나가는 듯했다.
사방으로 퍼져 나가려는 듯하던 실은 이내 한데 묶여 얽히더니, 하나의 형상을 취하였다.
그것은 김연의 형상이었다.
* * *
우우우웅―
홍범이 파 놓은 지네굴 안쪽.
그 가장 깊숙한 곳에, 한 명의 인영이 누워 있었다.
아직도 정신을 차리지 못한 김연이었다.
그녀는 몇 날 며칠을 멍한 눈으로 누워만 있었다.
김연은 꿈을 꾸고 있었다.
좋아하던 사람과 출장을 가서, 과수원에서 모과나무의 꽃이 흐드러지게 핀 것을 보았던 그때 그 장면이었다.
그리고, 그녀의 꿈 안쪽으로 무엇인가 소리가 울려 퍼졌다.
―기억하겠습니다. 당신의 마음을….
그것은 김연이 의식을 붙여 놓았던 서은현의 목소리였다.
그리고, 서은현의 목소리 너머로 서은현이 기억하고자 하는 ‘마음’이, 서은현에게 붙여 놓은 의식을 타고 그녀에게 전해졌다.
그것은 한 사람을 사랑하는 이의 마음이었다.
서휼에게 모든 것을 다 바쳐 왔던 규련의 마음.
비록 결말은 파국에 치달았으나, 그 과정에서 있었던 규련의 마음만큼은, 너무나도 빛이 났고.
그 빛은 서은현을 통해 김연에게 전해졌다.
그리고, 그 빛이 김연에게 전해짐과 동시에.
그녀의 기묘성심전은 김연의 재능과, 그녀의 명(命)과 결합하여 어마어마하게 증폭되었다.
그 결과, 김연은 잠든 상태에서 기묘성심전을 통해 그녀 자신도 모르는 사이, 자신의 진짜 능력을 개화하였다.
* * *
츠츠츠츠츳!
연분홍빛으로 이뤄진 김연의 형상은 규백의 손을 잡은 내 손과 포개어졌다.
나, 규백, 그리고 김연 셋의 손이 포개진 형상이 되었다.
서휼은 예상외의 상황에 당황했는지 몇 발짝 뒤로 떨어졌고, 오혜서는 반가운 얼굴로 김연에게 손을 흔들었다.
“어머나, 연이잖아?”
그리고 오혜서는 반가운 얼굴로 김연을 향해 손을 뻗었다.
“연아, 방해되잖니. 다시 찾아가서 옛날처럼 귀여워해 줄 테니까 잠시 사라져 줄래?”
츠츠츠츳!
김연의 주변으로 음양이 휘몰아치는 듯하며 그녀의 모습이 잠시 흐릿해졌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연분홍빛 김연의 형상은 규백의 구멍난 가슴 위로 손을 올렸다.
그와 동시에, 규백의 텅 빈 가슴 안쪽에서 황금빛이 뿜어져 나오기 시작했다.
그것을 본 서휼이 오혜서를 향해 버럭 소리쳤다.
“혜서 양! 빨리 저걸 막으세요!”
우우웅!
동시에 푸른빛이 번뜩였고, 서휼은 그대로 본체로 변해서 날아가려 하였다.
하지만, 황금빛이 더더욱 빨랐다.
황금빛은 한 가닥의 얇은 실이 되어 서휼을 향해 날아갔고, 서휼의 가슴팍과 자연스레 이어졌다.
나는 저 황금빛 실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이해했다.
‘저것이… 광한지약…!’
그와 동시에, 가슴이 황금빛으로 채워진 규백이 파르르 눈을 떴다.
그녀는 얼마간 김연의 형상과 눈을 마주치더니, 피를 토하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아아아아악!!!”
그리고, 광한지약의 실타래를 빠르게 읽어내리던 오혜서는 갑자기 비명을 질렀다.
원유의 몸을 입고 있음에도, 그녀는 눈알이 터져 버린 채 눈을 부여잡고 피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마치, 봐서는 안 될 것을 봐 버린 듯이.
“저게뭐야저게뭐야저게뭐야….”
공포에 질린 듯이 머리를 부여잡던 오혜서는 얼마 후 원유의 육신과의 연결을 끊어 버리고 그대로 어딘가로 사라졌다.
원유의 육신은 눈알을 잃은 채 그대로 그 자리에 털썩 쓰러졌다.
그리고, 규백은 가슴을 부여잡고, 저 멀리 도망치는 서휼을 향해 손을 뻗었다.
우우웅!
그녀의 의념이 사방으로 흘러넘쳤다.
월도입천.
“서교정표.”
다시 한번, 규백의 월도입천이 발동되었다.
이번에는 규백의 가슴에서 사슬이 뻗어나왔다.
갈색의 사슬이 아니었다.
황금빛의 사슬이, 서휼을 빛살과도 같은 속도로 쫓아가 서휼이 반응할 틈새도 없이 그에게 연결되었다.
촤라라락!
서휼과 연결됨과 동시에, 황금빛 사슬은 빠르게 짧아지더니 멀리 날아가던 서휼을 다시 이곳으로 끌고 왔다.
서휼은 끌려오는 와중 다시 인간형으로 변화하며 이곳으로 내려앉았다.
서휼은 규백을 쳐다보고, 다시 김연을 쳐다보았다.
“…너는 뭐지.”
여전히 웃고 있는 얼굴.
하지만, 서휼의 목소리는 그 어떤 때보다 싸늘했다.
“오직 광한이 주재하여야만 발동하는 비술이 광한지약이거늘…. 어째서 네가 광한지약을 주재할 수 있는 거지? 너는 누구냐.”
그의 미소는 어느 때보다 냉랭했고, 서휼의 심상은 어떤 때보다 요동쳤다.
* * *
진룡맹 모처.
흑룡왕의 동부.
그 안쪽에서, 거대한 용의 거체가 움틀거렸다.
검은 용의 거체가 하늘로 머리를 들어 올리며, 믿을 수 없다는 듯이 입을 열었다.
“광한…? 대체 어떻게…?”
* * *
봉명주 바깥.
기묘성채.
그 성채의 중심에서, 갑작스레 괴군이 머리를 부여잡고 [그녀]의 무릎에서 내려왔다.
괴군의 기묘성심전이, 무엇인가에 의해 강하게 공명하고 있었다.
그리고, 괴군은 갑자기 가슴을 움켜쥐더니 눈물을 흘렸다.
여태껏 시끄럽게 발광해 대며 뿜었던 눈물이 아니었다.
말없이 흐르는 괴군의 눈물은 그의 진심을 담고 있었다.
“…내 제자가, 뭔가를 하고 있군.”
기묘성심전의 공명 너머로 느껴지는 김연의 존재를 느끼며, 괴군은 봉명주를 바라보았다.
“저곳에서 뭔가가 일어나고 있구나. 가 봐야겠어. 연의 연과 비슷한, 아니… 더더욱 엄청난 뭔가를 목격할 수 있을지도….”
가슴을 부여잡던 괴군은 눈물을 닦지 않고, 진중한 표정으로 기묘성심전을 펼쳤다.
우우웅!
괴군의 기묘성심전이 밝게 타올랐다.
“어설픈 인형놀이는 그만 해야겠어. 제자가 무얼 하려는지 봐야 한다. 기묘성심전에서 느껴지는 이 공명으로 보아… 제자가 하려는 것이, 기묘성심전이 나아가야 할 진정한 다음 단계일 터…!”
부우우웅!
잠시간 이성을 되찾은 괴군에 의해, 기묘성채가 더더욱 효율적이고 합리적으로 가동되기 시작했다.
그리고, 지금껏 무식하게 수량으로만 사방을 폭격하던 기묘성채의 괴뢰 군단이, 빠르게 편제를 갖추기 시작했다.
* * *
“이 아이가 중요한 게 아니잖아, 서휼?”
규백은 김연의 형상과 잠시 눈을 마주친 후 다시 서휼과 눈을 마주쳤다.
“실로 기적 같은 일… 아니, 기적이 맞지. 기적이 일어나서, 광한지약이 발동되었어. 서휼.”
규백은 해맑게 웃으며, 황금빛이 뿜어지는 자신의 가슴을 가리켰다.
“내 심장은 이미 사라졌고, 나는 이제 죽어. 그리고 광한지약은 기적에 의해 발동되었고, 너도 이제 죽을 거야.”
“….”
“나보다 더 잘 아는 것 같으니 알고 있겠지만… 광한지약은 천명과 관계된 술법이야. 육신을 갈아타도, 생명력을 보충해도 소용없어. 부활도 불가능해. 하늘이 우리의 운명을 끝내겠다고 하는 것이니까.”
“….”
“하지만… 알다시피 서휼. 이건 서로가 합의 하에 맺은 광한지약이 아니야. 오직 규련이 일방적으로 네게 걸어 둔 광한지약. 거기에 증인도 이 자리에 참석했으니, 네게는 광한지약을 풀 자격이 있어, 서휼.”
규백은, 서휼을 향해 천천히 양 팔을 벌렸다.
“규련이 네게 사랑의 마음을 전달해서 광한지약을 걸었듯이, 광한지약을 푸는 것 역시 역순으로 해야만 하지. 서휼, 광한지약을 푸는 방법은 간단해.”
이어진 그녀의 말에, 나는 실소를 금치 못했다.
“내게 입맞춤을 해 줘, 진심으로. 규련이 네게 준 것 이상의 마음을 돌려주지 않으면 광한지약은 풀리지 않아.”
연인이 등장하는 많은 동화에서는, 입맞춤으로 연인의 저주를 풀고 백년해로하는 결말이 대다수이다.
그렇듯이, 저주에 걸린 서휼은 저주를 풀기 위해 진심을 담은 사랑의 입맞춤을 규백에게 해야 하는 것이었다.
“자, 서휼. 네 진심을 보여 줘.”
마음을 잃어버린 서휼에게 진심만이 지약을 풀 방법이라 알려 준 규백은, 잔인하며 아름다운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처음으로 서휼의 입가에서 미소가 사라졌다.
이제 길고 길었던 공연은 끝났다.
무대 아래로 끌어내려진 서휼만이 남았을 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