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 Regressor’s Tale of Cultivation RAW novel - Chapter (224)
검은 뱀(1)
쌍수도려?
나는 순간 그 말을 이해하지 못해서 가만히 그 자리에 서 있었다.
그리고 다음 순간.
“말이 없는 걸 보니 부끄럼이 많은가 보군. 그럼 어디 보자…. 일단 뇌성체 외에도 자네가 가진 혈맥을 조사해서 혈맥에 가장 적합한 여인을 찾아 줄 테니….”
“자, 잠깐!”
나는 정신이 퍼뜩 들면서 황급히 원로를 말렸다.
“쌍수도려라고 하셨습니까?”
“그래, 쌍수도려. 아까 태상장문께서 설명해 주셨잖은가. 뇌도공법을 익히는 방법과 우리 금신천뢰문의 문파원들의 사이가 어째서 끈끈한지 등…. 자네도 같은 수계 사람이면 모를 수가 없을 텐데?”
“….”
몰랐는데….
아니, 중요한 건 그게 아니다.
쌍수(雙修)란 무엇인가.
두 명 이상의 수도자가 서로의 기운을 교류하는 식으로 수행을 증폭시키는 방법의 일종이었다.
의형제를 맺은 수도자들끼리 나란히 앉아 수도공법을 수련한다거나, 같은 문파원 사이에서는 쌍수진법 등을 만들어서 기운을 교류하게 하여 쌍수를 하는 경우가 많았다.
하지만, 보통 음과 양, 혹은 남과 여가 들어가는 ‘쌍수’는 그러한 건전한 쌍수 방법과는 많이 달랐다.
음양의 교류를 주로 하는 쌍수란 절대다수가 방중술을 통해 기운을 증폭시키는 부류였으니 말이었다.
거기다가 그냥 쌍수라면 몰라도, 수도계에서의 부부를 일컫는 ‘도려’라는 말까지 등장한 이상 너무나도 명백했다.
눈앞의 원로는 나와 음양의 쌍수를 맺을 여인을 찾으려 하는 것이었다.
“본래 금신천뢰문에 가입하자마자 쌍수 상대를 맺어 주지는 않는다네. 왜냐하면 그렇게 했다가는 남녀 성비가 깨져 버릴 수도 있으니, 일반적으로는 금신천뢰문의 기본공을 어느 정도 익혀 칠성제를 지낸 이후에야 쌍수를 맺을 수 있게 해 주지.”
“그, 그럼 저는 왜….”
“그야 자네 같은 전설상의 체질은 빠르게 쌍수를 맺어 진정한 뇌도공법을 빨리 익히는 게 모두에게 도움이 되니 말일세. 물론 이건….”
따악!
그가 손가락을 튕기자, 원로의 허리춤에 있던 호리병 안쪽에서 빛 덩이가 뿜어지더니 땅바닥 아래쪽으로 뭉쳤다.
파앗!
빛이 빛나고, 빛 덩이는 한 명의 사람의 형상으로 변하였다.
기절해 있는 전명훈이었다.
“여기 천상금뢰지체를 타고난 이 녀석도 마찬가지일세. 자네들 둘 다 금신천뢰문에 전해지는 전설적인 혈맥을 각성한 것이니 빠르게 쌍수 상대를 맺어 주는 게 어마어마한 도움이 될 터.”
“….”
나는 잠시 침묵했다.
‘곤란하게 됐군.’
인연에게 정을 주느냐, 주지 않느냐에 대해서는 회귀를 거치며 마음을 결정했다.
회귀를 아무리 하더라도 그 생에서밖에 볼 수 없는 인연이니만큼 정을 줄 수 있는 이라면 정을 준다.
그것이 나의 신조였다.
하지만 이 건은 얘기가 달랐다.
부부가 되고 서로와 정을 나눈다는 것은, 인연을 만나는 수준이 아니라 인연이 맺어지는 수준.
비록 사랑하는 마음이 없이 쌍수 상대로만 맺어졌다 하더라도 앞으로 수십 년간 얼굴을 마주 보며 정이 안 들 리가 없었다.
그리고, 금신천뢰문은 앞으로 언제고 천뢰번의 주인이 찾아와 멸문한다.
‘정려의 이름을 안 부르고 입만 꾹 닫고 있다고 해결되는 게 아니야….’
전신이 번갯불이 되어 ‘귀의’ 당하며.
나는 점차 뇌전에 대한 지식을 얻을 수 있었고, 그 과정에서 점차 천뢰번과 그 주인 사이에 있는 인력(引力)을 깨달았다.
정려의 이름을 부르든 안 부르든.
천뢰번의 주인은 결국 자신의 선보와 이어진 인력으로 인해 언젠가 반드시 광한계를 찾아오게 되어 있다.
수계에서 나온 순간부터, 그것은 이미 예정된 일이었던 것이다.
‘천뢰번을 수계에 봉인하기 전까지는, 함부로 정을 줄 수 없다.’
거기에….
‘김연도 있는데 쌍수 상대까지 만들어 놓으면….’
어쩌면 김연을 괴군에게서 구하자마자 김연이 나를 서 장군으로 개조해 버릴지도 모르는 일이었으니, 조심해서 나쁠 것은 없으리라.
“저는… 기본공부터 익히고 싶습니다.”
“으음?”
나는 천인기 원로에게 내 의견을 피력했다.
“특별한 체질을 타고났다고 해서 특별 취급을 받고 싶지 않습니다. 금신천뢰문의 기본에서부터 차근히 기초를 다지며 위로 올라가고자 합니다.”
“흐음….”
나와 전명훈에게 쌍수 상대를 찾아 주기 위해 이 자리에 남은 두 명의 원로.
그중 한 명은 내 말에 고개를 끄덕였고, 한 명은 마뜩잖다는 표정을 지었다.
“원칙상 그게 맞기는 하지.”
“하지만 저런 자질을 칠성제를 지낼 때까지 썩혀야 한단 말인가….”
의견이 둘로 갈렸다.
잠시 고민하던 둘은 한숨을 쉬며 전명훈을 일으켰다.
“이보게, 일어나게나.”
파치지지직!
원로 중 한 명이 기절한 전명훈에게 전기 충격을 가했고, 전명훈은 전신을 바르르 떨면서 비명을 질렀다.
“흐어어억!”
“자, 일단….”
수염을 기른 원로는 전명훈의 머리통을 붙잡고 영기를 끌어올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전명훈의 머릿속으로 빠르게 성제국어를 비롯한 인족 총연맹 공용어를 주입하는 것이 보였다.
“흐끄아아아아악!”
전명훈은 강제로 머릿속에 주입되는 지식에 비명을 지르며 저항하려 했지만, 천인기 원로들의 손에서 저항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나는 그 광경을 보며 씁쓸한 기분이 들었다.
‘아마 나도 지금보다 약하거나 식견이 낮았다면 저 꼴을 당하고 있었겠지.’
새삼 내가 수준이 낮았을 때는, 천인기라는 존재들이 그 존재만으로도 얼마나 위협이 되는 이들이었는지가 실감이 되었다.
지금이야 답천의 힘과 월수궁무록 등을 쓰면 눈앞의 원로 한 명과도 단기전으로는 대등히 싸울 수 있으니 전혀 무섭지 않았다.
하지만 수계에 있던 시절만 해도 천인기는커녕 원영기조차 내게는 공포의 대상이었다.
‘이번 생의 초기 목표는, 최대한 빠르게 힘을 쌓는 것으로 해 보자.’
원래 경지만 회복해도….
아니, 양신을 이뤘던 16회차의 경지까지 전부 회복한다면!
‘원영 후기, 그리고 대원만은 다시없을 정도로 빠르게 건너뛸 수 있다.’
그렇게 되면 천인기를 코앞에 두게 되는 것이었다.
‘이번 생에서, 반드시 천인기에 오른다.’
단순히 원영 중기 같은 걸 노리지 않는다.
무조건 천인기를 뚫을 것이다.
어째서인지, 천족공법, 지족공법.
그리고 답천 너머의 경지.
이 셋을 모두 함께 올리게 된다면, 천인기부터는 무언가가 확실히 변할 것 같은 직감이 들었다.
그리고, 어느새 정신을 차린 전명훈은 혼란스러운 모습으로 머리를 부여잡고 주변을 둘러보았다.
아마 정신이 없을 것이다.
갑자기 금벽호에게 납치당한 후 눈 떠 보니 등선향에서 이상한 장소였고, 이상한 장소에서 다시 이상한 지식들을 주입받았다.
“자, 그럼 내 말을 알아듣겠나?”
천인기 원로들의 질문에 전명훈은 흠칫 놀라더니, 어눌한 음성으로 말했다.
“여, 여긴, 어디, 어딥니까. 당신들, 누구….”
“좋아, 좋아. 언어가 제대로 입력되었군. 언어뿐 아니라 성제국의 기본 문화와 금신천뢰문, 그리고 수도계에 대한 간략한 정보들도 추려서 입력했으니, 용어의 설명은 필요 없을 것이라 생각하네.”
“예, 예? 금신… 천뢰문… 수도계… 으윽….”
전명훈은 머리를 부여잡으며 새로 들어온 지식에 고통스러워하는 모습을 보였다.
그리고 얼마 후 눈을 빛내며 떨리는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여기는… 선협 소설? 그런 곳인가?”
“…?”
“그게 뭔가?”
전명훈은 머리를 부여잡으며 헛웃음을 흘렸다.
“그렇군…. 이곳은 선협 소설 속 세상이었던 거야. 그리고 나는 소설 속으로 들어온 게 틀림없어. 책 빙의물인 건가? 후후… 딱 봐도 내가 보던 소설인 ‘뇌조도사’의 세계관이었던 거로군.”
“….”
나는 현실 분간을 하지 못하는 전명훈을 딱하게 내려다보았다.
아마 본인이 월급 도적질을 하며 봐 왔던 선협 소설인 모양이었는데….
‘전혀 아닌데.’
나도 녀석이 뭘 보는지는 대충은 알았다.
하지만 애당초 전혀 달랐다.
전명훈은 자신이 소설의 주인공이 되었다고 생각하며 천인기 원로들에게 팔짱을 끼고 말했다.
“그래, 다시 한번 말해 주시오. 뭘 맺어 준다고?”
그리고, 그 말에 천인기 원로들은 눈살을 찌푸렸다.
“…너는 쌍수 이전에 일단 예절부터 가르쳐야겠구나.”
퍼억!
원로의 손이 전명훈의 머리통을 후려치자 전명훈은 다시 그 자리에 기절해 버렸다.
전명훈이 기절한 후, 원로들은 나를 보며 한숨을 쉬었다.
“자네와 이 자는 동료로 알고 있는데, 이 자는 왜 처음 보는 어른에게 다짜고짜 저런 오만한 태도인 건가? 혹 본인이 천상금뢰지체인 걸 알고 있는 건가?”
“…모릅니다. 이 녀석 성격이 이런 건… 원래 귀한 집안에서 자라 예절이 조금 없는 녀석이어서 그러니 이해해 주시지요.”
“그런가…. 아직 속세의 물이 덜 빠진 거로군.”
원로들은 혀를 차며 손을 털었다.
“그럼 일단… 자네는 문파가 안정된 후에 기본공을 익히도록 하고, 이 녀석은 예절을 주입하도록 한 후에야 쌍수도려를 맺어 주어야겠어.”
“하나 예절 주입은 누구에게 맡겨야 하겠소? 당분간 모두가 문파 안정에 한참 바쁠 텐데….”
“소해에게 맡기면 되겠지. 원래도 문파의 규율을 어기는 문도들을 잡아 심문하는 기율대의 일원이었는데, 태상 문주의 직계 혈손인 이유로 이번 문파 안정화 시기에는 문파 내부에서 보호받고만 있으니….”
“딱 좋구려.”
그렇게, 나와 전명훈은 일단은 쌍수도려를 맺지 않고 넘어가게 되었다.
우르릉―
그리고 나는 기절한 전명훈과, 두 명의 원로들과 함께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뇌령도 전체가 떨려 오며, 뇌령도의 하늘 전체에 번개가 꿈틀거리기 시작했다.
* * *
“뇌운각에 들어간 금신천뢰문의 배신자는 열을 셀 동안 나와라.”
금벽호는 굳은 얼굴로 천뢰번을 들어 올린 채 뇌운각을 바라보았다.
뇌운각의 천지영기가 가장 많이 몰려 있는 영산.
뇌운봉의 끝자락에서 뇌기가 진동하기 시작했다.
‘저게 수세월 이전 금신천뢰문을 배신했다던 배신자인가… 사축기 최정상이라….’
금벽호는 빠르게 판단을 내렸다.
태극진뢰신을 극성까지 익혔다는 무시무시한 문파의 선배다.
조금이라도 시간을 끌면 당하는 것은 금벽호가 될 터였다.
“하나, 둘… 열.”
금벽호는 열을 세고서 바로 천뢰번을 휘둘렀다.
콰르르르릉!
천뢰번에 의해, 뇌령도 전체에 낙뢰가 요동쳤다.
쿠르르릉!
빛살이 뇌운각 인근을 완전히 잠식했다.
금신천뢰문의 천인기 원로들은 모두 금벽호의 뒤쪽에서 뇌력의 힘을 피해 보호막을 치는 중이었다.
찌릿, 찌릿, 찌릿….
그러나 금벽호는 뇌전에 의해 뇌운각은 물론, 뇌령도 전체가 번갯불에 휩싸이는 상황에서도 전신이 찌릿거리는 것을 느꼈다.
‘저것이, 합체기에 도달할 자격을 지닌 존재….’
어마어마하다.
‘사실상 준 합체기 태수(太修)라 봐야겠어….’
저것은 금신천뢰문의 긴 역사 동안, 합체기를 목전에 둔 몇 안 되는 괴물.
양수진의 직계 제자를 제외하고 저 존재만큼의 천재는 이전에도, 이후에도 없었다.
아마 이번에 들어온 천상금뢰지체와 뇌성체만 아니었다면, 어쩌면 금벽호 역시 저 존재를 죽이는 것이 아닌, 수행을 전부 폐하고 살려 두는 방식을 택했을지도 몰랐다.
‘하지만 이제 문파에 배신자는 더 이상 필요 없다.’
천상금뢰지체가 손에 들어왔다.
양수진 생전, 전 대륙을 넘어 전 삼천세계에 이름을 날렸다는 금신천뢰문의 위명을 재현할 시기가 도래한 것이다.
‘안 좋은 선례는, 그저 잘라 낼 뿐!’
쿠르르릉!
금벽호는 천뢰번에 더더욱 힘을 불어넣으며 낙뢰의 힘을 증가시켰다.
콰지지지직!
그리고, 금벽호의 이마에 한 줄기 땀이 흐르기 시작했다.
우우웅!
거대한 태극(太極)의 형상이 낙뢰 속에서 불거졌다.
음양의 상징이 회전하며, 뇌운각이 있던 자리에서 천뢰번의 번개를 흡수하고 있었다.
쿠릉, 쿠르르릉!
사방이 낙뢰로 인한 빛살뿐이던 공간.
그 공간에, 태극의 흐름이 나타나 벼락을 먹어치우며 다시금 뇌운각과 뇌운봉의 형상이 드러났다.
뇌운봉 최정상.
그곳에 있던 작은 전각.
그 전각의 위쪽으로 떠오른 태극의 형상은 뇌전을 먹어치운 후, 먹어치운 뇌전의 힘을 전각의 안쪽으로 전송하는 중이었다.
[나와 배분 차이가 4만 년은 날 핏덩이 주제에… 사문의 어른에게 무얼 하는 게냐?]찌이이잉―
금벽호는 상대의 [음성]에 머리가 띵해지고, 내장이 진탕되는 걸 느꼈다.
“웃기지 마라, 금위(金瑋). 네놈은 아예 시조령(始祖令)으로 파문되었으니 장문의 자격을 지닌 이들에게 주어지는 ‘금’ 씨의 성은 빼 버리는 게 맞겠지. 네놈 따위가 무슨 사문의 어른이라는 말이냐! 네놈의 배신 때문에, 4만 년 전 금신천뢰문의 위상이 얼마나 추락했는지 아느냐! 그 죗값을 알렸다!”
[4만 년 전의 당시에는 네놈의 증조할애비도 태어나지 않았을 텐데, 건방진 것이 뭘 안다고 입을 나불거리는 것이야…. 내가 금신천뢰문을 위해 뭘 했는지나 알고 지껄이는 게냐?]쩌적, 쩌저저적!
음성이 들려오는 전각이 점차 쪼개진다.
그리고.
콰아아앙!
전각의 지붕이 뻥 뚫리며, 그 안쪽에서 길쭉한 [팔]이 튀어나왔다.
금벽호는 점차 식은땀을 흘리기 시작했다.
[그 당시에는 시조의 의발을 이어받은 금신천뢰문의 이름이 중경계에 존재하면 아니 되었어. 그랬기에 내가 피눈물을 머금고 시조의 흔적을 일일이 지운 것이다.]거대한 팔!
마치 인간의 것 같지 않고, 비쩍 말라붙은 채 뇌기를 흘려 대는 그 팔은 작은 봉우리만 한 크기였다.
쿠구구구!
곧이어 또 하나의 팔이 전각에서 튀어나왔다.
그리고, 비좁은 전각 안에서 거대한 괴생명체의 모습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그런데 네놈은 지금 뭘 하는 게지? 불길한 이야기가 전해지는 그 흉물(凶物)을 기어이 중경계로 가지고 올라온 것도 모자라, 사문의 어른에게 흉물을 들이대는 게냐?]“무슨 소리… 천뢰번은 수세대 전부터 신성하게 봉양받아 온 본문의 신물이다! 불경스러운 얘기를 하지 마라!”
[그 불길한 년이 신물로 봉양받아 왔다고? 대체 4만 년 전의 사건 이후로 얼마나 문파가 망가졌던 것인가… 금신천뢰문에 망조가 들었구나. 시조시여, 어찌 후예들을 버리시나이까.]쿠구구구구!
이윽고, 마침내 금벽호의 눈앞에 위(瑋)의 진체가 드러났다.
‘저것이, 태극진뢰신을 대성한 금위의 모습….’
봉두난발을 한 흑발과 백발.
[두 개의] 머리를 가진 말라 비틀어진 거인이 뇌운봉 위쪽에서 일어나기 시작했다.흑발의 머리에는 말라비틀어진 모습이 어울리지 않게 화려하고 요사스럽게 분칠이 되어 있었고, 백발의 머리에는 땟국물이 줄줄 흐르며 수염이 달려 있었다.
거인의 등에는 네 개의 싯누런 북이 원형을 그리며 매달려 있었고, 누란 색의 북에는 각기 소음, 소양, 태음, 태양의 사상(四象)이 그려져 있었다.
[자아, 덤벼 봐라, 후배 놈아. 부디 내게 이길 수 있기를 바란다. 너희가 지면 내 눈물을 머금고 횡액을 피하기 위해 후학들을 모조리 집어삼켜 흉(凶)으로 하늘을 뒤덮어야만 하노니….]남성과 여성의 목소리가 겹쳐 울리며 금벽호를 비롯한 천인기 원로들이 피를 한 움큼 내뿜었다.
“…동문들을 잡아먹었다는 식인 요괴의 전설이 사실이었나…. 쓰레기 같으니. 이 자리에서 네놈을 벌하겠다!”
[무슨 일이 있었는지도 모르면서 나불대는 것만큼 꼴 보기 싫은 것도 없구나…. 올라오자마자 사축기에 이른 걸 보니 재능은 나와 비슷해 뵌다만, 나는 네놈이 상정하던 사축기와는 다를 것이다….]키이이잉―
거인의 등에 떠오른 사상이 그려진 북들의 위로, 문자가 떠올랐다.
수(壽), 부(富), 강녕(康寧)… 그리고 토(土).
쿠르르릉!
뇌령도 전체에 휘몰아치던 모든 벼락이 뇌운봉으로 몰려들기 시작했다.
뇌운봉 위쪽.
여섯 개의 팔에, 여섯 개의 육색(六色)의 깃발을 들고 머리 위쪽에는 천뢰번을 띄운 뇌신(雷神)이 떠올랐고, 그 앞에 봉두난발한 흑발과 백발, 두 개의 머리를 가진 귀신이 벼락을 먹어치우며 일어섰다.
무지막지한 두 존재의 싸움에, 천지간이 진동했다.
* * *
쿠르르릉―
두 명의 천인기 원로들이 보호막을 치고서 나와 전명훈을 보호해 주었다.
나는 보호막 바깥에서 휘몰아치는 ‘여파’를 보며 식은땀을 흘렸다.
‘저게 전성기의 연위와, 천뢰번을 든 금벽호의 힘인가….’
금벽호 자체는 나와 싸워도 질 정도로, 그렇게 강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천뢰번을 들자 그야말로 천지가 개벽할 정도로 흉악한 힘을 보여 주었다.
저건 차라리 준 합체기 요왕 수준이었던 규련에 준할 정도로 보였다.
쿠릉, 쿠르르르릉!
“…!”
나는 천지간이 흔들리는 와중.
저 멀리, 육비의 뇌신이 쌍두의 귀신에게 점차 밀리는 광경을 보며 숨을 들이켰다.
‘저게 무슨… 연위가 금벽호를 몰아붙이고 있는 게 아닌가?’
말 그대로였다.
흑발과 백발을 산발한 귀신은 번개를 먹어치우고, 먹어치운 번개를 다시 뱉어내며 육비의 뇌신을 몰아치는 중이었다.
한 번 공격이 반사될 때마다 뇌신은 뒤로 물러나고 있었다.
그리고 비쩍 마른 쌍두의 거인이 뇌신에게 달려들려 할 때였다.
육비의 뇌신이, 손에 든 여섯 개의 깃발을 전부 흡수해 버린 후 여섯 개의 손으로 천뢰번을 움켜쥐었다.
천뢰번은 주변의 벼락을 흡수해 크기가 커지며, 뇌신이 딱 들기 좋은 크기로 거대해졌다.
그 모습을 본 연위가 갑자기 비명을 지르기 시작했다.
[미친놈! 뭘 하려는 거야!!! 하지 마라! 어찌 뒷감당을 하려는 거야!]어찌나 크게 소리를 질렀는지, 연위의 음성이 뇌령도 전체에 쩌렁쩌렁 울렸고, 천인기 원로들과 우리 역시 그 목소리에 서린 분노를 읽으며 식겁했다.
이윽고 연위의 주변으로 뇌전으로 이뤄진 사축기 수사의 ‘장막’이 나타나며 두 존재를 삼켜버렸다.
* * *
봉두난발을 한 쌍두의 거귀.
연위는 눈에 핏발을 세우며 금벽호를 노려보았다.
[흉물의 봉인을 기어이 한 겹 풀었구나. 멍청한 녀석. 집안싸움을 끝내려고 최악의 선택을 했어. 오직 시조만이 걸어 놓을 수 있는 봉인을 풀었으니, 흉물이 횡액을 불러오기가 더더욱 쉬워졌겠구나! 무슨 병신 같은 생각으로 봉인을 푼 것이야!!!]방금 전보다는 작은 소리로, 연위가 금벽호에게 쏘아붙였다.
그러나 금벽호는 비릿하게 웃으며 거대해진 천뢰번을 휘두를 뿐이었다.
[시조께서 천뢰번에 걸어 놓으신 봉인에 대해서는 나도 잘 알지. 천상금뢰지체만이 할 수 있는 봉인이라지?] [그래, 이 어리석은 놈! 오직 신화 속에서나 등장하는 천상금뢰지체가 없다면 봉인을 복구하는 건 불가능하다. 피눈물을 흘리며 동문들을 삼킨 나보다 네 죄가 더 크도다!] […괜찮다.] [뭐야?]쿠릉, 쿠르르릉!
뇌신은 여섯 개의 팔로, 거대해진 천뢰번을 휘두르며 외쳤다.
[천상금뢰지체는 이미 손에 넣었다. 봉인의 한 겹 정도는 풀어도, 천상금뢰지체가 원영 중기에만 이르면 다시 복구할 수 있어!] […천상금뢰지체를, 손에 넣었다고?]연위는 멍한 눈으로 그에게 쏘아지는 번개를 피하지도, 삼키지도 않고 얻어맞으며 금벽호를 바라보았다.
마치 금벽호의 말에 진위를 판별하려는 듯.
그의 네 개의 눈이 금벽호를 바라보았다.
얼마 후.
연위는 더더욱 강화된 천뢰번의 힘에 직격으로 얻어맞으며 잿더미가 되었다.
그렇게, 4만 년이라는 긴 시간 동안 살아왔던 태수 급의 수도자, 연위는 명을 달리했다.
치이이이―
잿더미만이 남은 뇌운봉 위쪽.
금벽호는 뇌신화를 풀고, 거대한 숯덩이 형태로 뇌운봉에 기댄 연위의 시체를 보며 말했다.
“유언은 있나.”
“…천상금뢰지체를 손에 넣었다고? 하, 하하… 무슨 말도 안 되는…. 그럼 내가 4만 년 전에 했던 짓은… 도대체 나는 뭘 위해… 내 동문들은 뭘 위해….”
남성과 여성의 목소리가 겹쳐졌던 기이한 음성은 이내 하나로 합쳐지며, 옥구슬 같은 여인의 목소리로 변해 갔다.
얼마간 횡설수설하던 그는, 떨리는 목소리로 숯덩이가 된 목 하나를 들어 올렸다.
“…금신천뢰문이 다시 만대에 이름을 누리겠군. 축하한다.”
“그게 마지막 말인가.”
“…내 죄는 씻을 수 없겠지만, 그래도 천상금뢰지체가 후에 잘못된 방식으로 축을 쌓게 할 수는 없으니, 정통 기축에 대해 알려주마.”
“정통 기축?”
“그래. 4만 년 전의 전쟁 때, 명귀계에서 온 흑색귀골곡의 귀수(鬼修)에게 들은 진실이지.”
부스스….
숯덩이는 점차 무너져 갔고, 그 사이 금벽호와 연위는 몇 마디 말을 주고받았다.
“…명귀계에 사람을 보내 봐라. 보다 많은 걸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러도록 하지.”
“나는 문파의 대죄인이지만, 마지막은 문파를 위해 좋은 정보를 전달할 수 있어… 좋…았….”
부스스―
마침내, 거대한 거귀의 숯덩이는 모조리 흩어졌고, 그 자리에는 한 명의 여인의 시체만이 남아 있었다.
그나마도 번개 때문에 전부 숯이 되어 본래의 형상은 알 수 없었지만, 금벽호는 문파의 선배로 죽어 간 연위를 보며 눈을 감고, 잠시 고개를 숙였다.
“편히 주무십시오, 선배ㄴ….”
그리고.
번쩍!
연위의 시체에서 빛 덩이가 번쩍이더니, 번개와 같은 속도로 어딘가로 날아가 버렸다.
금벽호와 천인기 원로들이 전부 긴장을 풀고 숙연해진 상황에서, 그 빈틈을 노리고 빠르게 날아간 빛 덩이.
빛 덩이를 보며, 금벽호의 눈에서 불똥이 튀었다.
“제길…! 전부 연기였던 거냐!?”
콰르릉!
금벽호가 천뢰번을 휘두르자, 빠르게 날아가던 연위의 진혼에 한 줄기 낙뢰가 꽂혔다.
낙뢰가 꽂힌 그의 혼은 비틀거리는 듯했으나, 다시 어딘가로 멈추지 않고 날아갔고, 금벽호는 그를 쫓으려다가 결국 포기해 버렸다.
“미리 어딘가에 부활할 육체를 숨겨 놓았나 보군. 저 정도의 속도는 반대편에서 부활체가 ‘당겨야’ 나오는 속도다.”
“태상장문… 하면 어찌합니까? 사문의 배신자, 미치광이 요괴가 또다시 제 실력을 찾아 나타나면….”
“흥! 아마 그건 쉽지 않을 것이다. 천뢰번의 낙뢰에 혼을 직격당했으니, 원기를 회복하는 데에만 5백 년은 걸리겠지. 그리고 그 정도 시간이면, 이번에 우리에게 온 천상금뢰지체가 능히 합체기에 이를 수 있는 시간이다!”
금벽호는 천뢰번을 든 채 명했다.
“뇌운각의 최대 전력은 죽었으니, 빠르게 뇌운각을 몰아내고 금신천뢰문을 안정시킨다! 그리고… 명귀계로 사람을 보내 봐야 하니 명귀계에 갈 탐사대를 소집하거라! 또한 금위의 후손을, 뇌령도 곳곳을 뒤져서 찾아내라! 이번에 올라온 이들을 제하고, 모든 금씨(金氏)를 잡아 색출해 내라. 놈은 분명 부활체로 제 후손을 찾아 부활할 것이니!”
금신천뢰문이 뇌령도에 발을 딛고, 하루.
금신천뢰문은 빠르게 안정화되기 시작했다.
* * *
“자, 일단 문파가 안정화를 하느라 바쁘기는 해도 네 재능을 썩힐 수는 없으니… 오늘부터 노부가 네 스승이 되어 기본공부터 가르치겠다.”
금신천뢰문의 당대 부문주이자, 천인기 대원만의 원로.
진휘(震輝)가 나의 스승이 되기로 하였다.
원래는 전명훈도 나와 함께 기본공을 익혀야 했지만, 전명훈은 금소해와 함께 이 세상의 문화와 예절을 주입받아야 하기 때문에 며칠 후에야 수련에 들어갈 것이라 하였다.
나는 진휘와 함께 금신천뢰문의 서고에 들어갔다.
금신천뢰문이 쇄천봉에서 건물째로 뽑아 온 서고 안쪽은, 창천개벽문의 서고보다도 압도적으로 넓고 방대했다.
“본문의 공법은 방대하지만, 가장 유명한 공법은 세 가지이지.”
진휘는 서고 안에서 세 개의 공법서를 꺼내주었다.
“칠뢰진경(七雷震經), 그리고 태극진뢰신(太極震雷身), 멸뢰내천궁(滅雷內天宮).”
칠뢰진경은 금벽호와 전명훈이 사용했던 육비 거인으로 변신해 칠색의 번개를 다루는 공법.
태극진뢰신은 연위와 연진이 익혔던 공법.
그리고 멸뢰내천궁은 체내에 뇌궁(雷宮)이라는 것을 형성해, 뇌 속성 법술에 극단적인 저항력을 가지게 하고, 뇌궁을 중심으로 하늘에 제의(祭儀)를 지내는 데에 최적화된 공법이라고 하였다.
“가장 익히고 싶은 것을 골라 보거라.”
나는 망설임 없이 대답했다.
“전부 익히고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