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 Regressor’s Tale of Cultivation RAW novel - Chapter (262)
겁천(劫天) (1)
그녀의 황금빛 비검과, 내 무색유리검이 서로를 겨눴다.
머리가 과열된다.
우리는 수십 합의 공방을 서로서로 예견하며 가상에서 공방을 주고받고 있었다.
그리고 공방의 결과는, 백이면 백 전부 나의 승리였다.
분명 등봉조극의 극한까지 미친 듯한 속도로 도달한 그녀였지만, 나는 공방 속에서 더 이상 봐주지 않았다.
답천까지 꺼내 쓰며 그녀를 밀어붙였고, 그 결과 의념 속에서 이뤄지는 공방의 예견은 몇 번을 싸우든 홍수령의 패배였다.
스릉―
하지만 그녀는 아랑곳하지 않고 일 보를 내디뎠다.
부웅!
홍수령이 비검을 잡고 좌하에서 우상으로 대각선으로 올려 벤다.
일순간 비검에서 뿜어진 뇌전이 크게 몰아치며 내 상반신을 쓸어버리듯 베어 왔다.
피이이잉!
공기가 찢어진다.
다음 순간, 나는 단악검법 1, 2, 3초를 한 번에 터트리듯 사용하며 상단세, 하단세, 올려 베기를 통해 그녀의 뇌전검을 찢어발겨 버렸다.
이어서, 그녀가 반응할 틈새도 주지 않는 나는 앞으로 나아갔다.
비둔술도, 요수공법의 육체 능력에도 의지하지 않은 채.
순수한 의식의 가속으로만 앞을 향해 나선 내 몸뚱어리에, 그대로 공기가 밀려 나가며 충격파가 생기는 것이 보였다.
일순간 소리마저 뛰어넘은 나는 홍수령에게 달려들어 그녀의 가슴을 향해 부드럽게 찌르기를 시도했다.
하지만 찰나의 틈새에서 나와 눈을 마주친 홍수령은 비둔술, 그리고 뇌도공법, 그리고 아홉 개의 강환을 써 내 가속에 쫓아 붙으며 찌르기를 튕겨 내었다.
일 보를 뒤로 물러선 그녀가 들고 있던 비검을 내게 던진 후, 양손을 벼락으로 변화시키며, 벼락이 된 손으로 결인을 맺었다.
파칙!
그에, 16자루의 비검이 순차적으로 나를 향해 날아들었다.
이제 싸움은 무공 대 무공이 아닌 비검술의 영역까지 넓어졌다.
그녀가 겨루고 싶은 것은, 무(武)가 아닌 검(劍)의 기예(技藝).
그녀 자신도 한 명의 검객으로서 죽기 전에 검을 겨룰 수 있다면 무공을 쓰든 비검술을 쓰든 상관은 없는 것이었다.
부우웅!
나는 더더욱 의식을 빠르게 가속화하며, 무색유리검을 들고 사방에서 나를 몰아치는 16개의 비검을 상대했다.
16개의 비검을 나를 중심으로 회전하며 검진을 짰고, 64개의 변화를 보여 주며 나를 몰아붙였다.
일전에라면 그저 비검술이라는 ‘술법’에 뇌도공법의 조화가 이뤄진 ‘법술’이었을 홍수령의 검진.
하지만, 지금 이 순간.
내게서 검에 대한 깨달음을 전해 듣고, 나와 만나 무(武)의 관점에서도 검을 다룰 수 있게 된 지금 이 순간.
그녀가 쓰는 것은 더 이상 단순한 술법이 아니었다.
윙, 윙, 윙, 윙!
홍수령의 검진이 마치 살아 있는 것처럼 변화하며 나를 몰아붙이기 시작했다.
마치, 16명의 홍수령이 직접 검을 잡고 사방에서 나를 몰아치는 듯한 느낌이었다.
나는 정말로 오랜만에 무공 대련다운 대련을 하는 느낌을 받으며 찰나의 시간 동안 수천 합을 주고받았다.
부웅!
검진에 갇힌 채 활로를 뚫기 위해 진의 약한 곳을 향해 무색유리검을 찔러 들어간다.
투콰앙!
그대로 진의 일부가 붕괴하는 듯싶었으나, 16개의 비검은 나를 포위한 것을 멈추지 않고 계속해서 따라붙었다.
나는 봉우리 하나를 찔러 들어간 후, 무너뜨리곤 자세를 바로잡고 나를 향해 쏟아져 들어오는 검기들을 향해 빠르게 가로 베기를 날렸다.
―――!
소리조차 끊겨 버린 찰나.
그대로 인근의 높은 봉우리들이 모조리 잘려 나가 버렸고, 홍수형의 검진 역시 일순간 흐트러졌다.
하지만 그녀의 검진이 흐트러지자마자 보인 것은 검진의 바깥에서 가속을 하며 내게 달려드는 홍수령이었다.
타악!
흐트러진 검진에서 한 개의 비검을 낚아채 잡은 홍수령은 그대로 검무를 추기 시작했다.
붕, 붕, 붕, 붕!
비둔술, 뇌도공법, 등봉조극의 가속.
이 세 가지를 동시에 사용하는 그녀는, 오직 순수하게 무공의 가속만을 사용하는 내 움직임에 간신히 따라오며 나와 합을 주고받는다.
하지만 그사이에 어느덧 또다시 그녀의 비검들이 검진을 안정시키기 시작했다.
수만에 달하는 미래를 서로서로 예견하며 서로의 경우의 수를 차단한다.
그 과정을 머리에서 겪은 후 현실로 옮기며 상대와 수 싸움을 벌인다.
나는 압도적으로 그녀를 밀어붙이며 공격을 가할 준비를 했다.
검진이 다시 발동되기 전 홍수령을 제압한다.
하지만 다음 순간, 그녀의 비검 중 8개가 내가 예상치 못한 각도로 갑자기 검진을 펼쳐 왔다.
나는 순간 놀랐으나 빠르게 홍수령을 향해 강하게 검을 떨쳐 그녀를 날려 버리고 여덟 개의 비검진과 부딪혀 검진을 파훼해 버렸다.
하나, 정신을 차리고 보니 어느덧 8개의 소형 검진이 파훼되며 비검들이 날아간 자리로 나머지 8개의 비검들이 모이며, 완전한 검진을 펼치기 딱 좋은 각도가 되었다.
파아아앗!
16개의 비검이 검진을 펼치며 다시 나를 가뒀다.
그녀와의 수 싸움에서 처음으로 밀린 것이었다.
나는 몸을 움직였다.
그리고 동시에 의념을 읽으며, 상대의 수를 차단하고 내 수를 이어 가며.
점차 그녀와 속으로 대화를 나누기 시작했다.
―이전과는 비할 수 없을 정도로 성장하셨군요.
나는 검을 휘둘러 검진을 뒤흔들고 눈을 돌려 검진의 약한 곳을 찾기 시작했다.
―그러는 너는, 검끝이 흔들리고 있군.
홍수령이 검진 밖으로 와, 결인을 맺었다.
그녀의 양손에 기(氣)가 응집되며 뇌검(雷劍)이 생겨났다.
―순수한 실력 차만으로, 나는 네게 닿을 수 없다. 이렇게 우리가 공방을 주고받을 수 있는 건… 네가 현재 검 끝에 너무 많은 망설임을 담고 있기 때문이겠지.
그녀는 망설임없이 검진 안쪽으로 뛰어들며 검진을 상대하는 내게 폭풍처럼 검을 몰아쳤다.
―그래야 대련이 되지 않겠습니까. 제가 제대로 검을 쓰기 시작한다면, 대련이 더 이상 성사되지 않습니다.
콰아앙!
나와 그녀가 부딪혔다.
우리는 서로의 검을 마주 대고 서로와 눈이 마주쳤다.
홍수령이, 육성으로 말했다.
“…상관 없다. 네가 힘을 숨기고 있단 건 알고 있어. 진짜 네 검을 보여 보아라.”
“제 진짜 검을 보이라고요?”
나는 공망한 미소를 지으며 뇌까렸다.
“의미 없습니다. 그리해서는 아무것도 성사되지 못합니다. 당신은 생의 마지막을 최고의 대련 속에서 보내고 싶은 게….”
“서은현!”
그리고, 그녀가 진심으로 화가 난 듯 외쳤다.
“진짜 검을 꺼내라.”
“….”
“최고의 대련 속에서 마지막을 보내고 싶은 게 아니야. 아직도 알지 못하느냐? 네가 의념을 넘어서 아예 그 너머의 시야를 가지고 있단 건 안다. 그런데도 알지 못하느냐?”
“…그 모든 게….”
나는, 음울한 표정으로 검에서 힘을 빼고 검을 늘어뜨렸다.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양수진이 주장한 비인간론.
금신천뢰문을 살리고자 이번 생을 바쳤음에도 불구하고 실패한 결과.
운명에는 저항할 수 없다는 쓰라린 결론.
나는 허망한 얼굴로 말했다.
“어차피… 이제 전부 죽을 것이 아닙니까. 이를 막으려면 제 멸신겁천을 쓰면 어찌 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멸신겁천을 쓰면 금신천뢰문은 사라집니다.”
나는 악을 쓰듯이 외쳤다.
“어떻게 해도, 내가 지키려 했던 것이 멸망합니다! 도대체 여기서 더 해 봐야 무슨 의미가 있다는 겁니까…!”
“…서은현.”
홍수령이 내게 비검을 겨눴다.
“나는.”
하늘의 거대한 ‘시선’을 견디느라, 수없이 자해를 해 대서 피 칠갑이 된 몸.
홍수령은 붉게 물든 장포를 입은 상태에서도, 피칠갑이 된 몸을 가눈 상태에서도 형형한 안색으로 나와 눈을 마주쳤다.
“너와, 검을 겨루러 왔다.”
“….”
“하늘이 아니라, 너와 겨루러 왔단 말이다.”
“….”
“무슨 의미인지 알겠느냐?”
나는 이를 악물었다.
그녀의 의도가 보였다.
그녀의 각오와 의지가 보였다.
홍수령이 무얼 원하는지, 알 수 있었다.
“네가, 네 손으로. 검을 겨루며 나를 끝내 줬으면 하는 것이다.”
“….”
“하늘이 아니라 네 손에 검으로 죽고 싶다. 그렇기에 널 찾아와 지금 겨루고 있는 것이다.”
“…잔인도 하시군요.”
턱이 부들부들 떨렸다.
잇몸이 아플 정도로 이를 거세게 악물었다.
그러지 않는다면, 울어 버릴 것 같았으니까.
“뭐 어떠하겠느냐. 너도, 나도, 이미 둘 다 잔뜩 미쳐 있는 몸이요, 언젠가 죽어 흙이 될 몸인데. 한순간이라도 살아 있는 지금. 이미 멸망이 예정된 것, 하고픈 것을 하면 아니 되느냐?”
“….”
“운명을 이길 수 없다면, 하물며 운명의 안에서라도 선택을 하면 안 되는 거란 말이냐.”
“….”
나는 고개를 들어 그녀를 바라보았다.
‘뭐지.’
울적했던 방금의 기분이 무색하게, 나는 그녀의 말이 내 가슴에 ‘닿았’다고 느꼈다.
“…방금, 뭐라고 하셨습니까?”
“어차피 죽음이, 멸망이 예정된 운명이라면 그 안에서라도 내 마음 가는 길을 찾으면 아니 되냐는 소리였다.”
“…예?”
순간, 진심으로 죽음을 앞둔 채 내뱉는 그녀의 그 말에.
내 동공이 흔들렸다.
꽈르르릉!
어디선가 천둥소리가 들려왔다.
하늘이 울린다.
천벌의 주인이 힘을 쓰려는 모양.
하지만 나는 그런 것보다 눈앞의 홍수령에게 더더욱 집중하였다.
“우리의 삶은 찰나. 번개의 본질도 찰나. 한순간 피고 지는 것이 우리의 삶이라면, 멸망을 코앞에 둔 지금의 짧은 찰나의 순간조차 내 삶이 아니냐. 수백 년간 뇌도공법을 익혀 온 종사로서, 검수로서, 나는 지금!”
부웅, 부웅, 부웅!
16개의 비검이 그녀를 중심으로 회전하기 시작했다.
붕붕붕붕!
점차 회전 속도가 빨라지며, 천지영기가 그녀에게로 점차 빨려 들어가기 시작했다.
“하다못해 죽음의 형태만은, 하늘이 아닌 네게 맡기려는 것이다!”
번쩍!
황금빛 뇌전이, 검기와 하나 되어 수천 개의 변화를 머금은 채 내게 쏘아져 들어왔다.
명백한 천인기 대원만 급의 일격.
그리고 나는, 그 모습을 보며, 그녀의 마음에 이끌려 나도 모르게 검을 휘둘렀다.
슈쾅!
무색유리검이 휘둘러지며, 그대로 홍수령이 반응조차 하지 못하고 그녀의 상반신이 대각선으로 잘려 나갔다.
푸콱!
“흐, 그래. 그거다!”
홍수령은 빠르게 상반신을 재생하며 비검을 움직였다.
그런 그녀를 보며, 나는 처음으로 공망한 마음이 떨어져 나가는 걸 느꼈다.
“…알겠다.”
나는, 백 살도 되지 않은 어린 천재 서은현이 아닌, 2천5백 살을 넘게 먹은 본래의 나로 돌아가 그녀를 상대하기로 마음먹었다.
“소원을 들어주마, 홍수령.”
슈릉―
나는 검(劍)이 되었다.
대지를 디딘 발도, 몸을 지탱하는 다리도, 사지를 다루는 허리도, 검을 휘두를 팔도.
그 모든 것을 판단할 머리도.
숨을 쉬는 폐도, 기운이 도는 영맥도, 피가 도는 혈맥도. 신호가 도는 신경도.
손끝과 이어진 무색유리검도, 내게서 뿜어지는 일말의 기운 하나하나마저도.
내 의념마저도 모조리 검이 되어 내 안에서 하나 된다.
나는 그녀와의 대련에서 처음으로 무형검을 꺼냈다.
스르르릉―
동시에, 나는 금단에 보관되어 있던 나머지 2,999개의 무색유리검을 전부 꺼냈다.
무색유리검이 허공에 만천하며, 보일 듯 보이지 않을 듯 은은한 투명함을 자랑하였다.
“지금부터, 너를 죽이겠다.”
나는 그 자체로 검이 된 상태에서 홍수령과 눈을 제대로 마주하였다.
“목숨을 태워라.”
“그럴 예정이었다.”
번쩍!
홍수령의 몸에서, 어마어마한 기운이 폭발적으로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천인기 대원만의 홍수령이, 일순간 전신의 수행을 격발시켰다.
자신의 본래의 수명을 전부 깎아 내서, 지금 이 순간!
번개와도 같은 멸망 직전의 찰나에 모조리 태워 빛낸다!
쿠구구구구!
찌릿거리는 느낌과 함께, 나는 그녀의 기운이 사축기 수준까지 치솟아 올랐다는 걸 인지하였다.
우리는 서로를 바라보았고.
다시금 말은 필요 없었다.
시간이 정지한다.
나는, 홍수령을 상대하며 처음으로 진심을 다해 무학을 펼쳤다.
자신의 목숨을 태운 그녀의 일격 일격은 한 대만 스쳐도 치명상이었기에, 월수궁무록을 극한까지 운용하며 피해야 했고, 3천 자루의 유리검을 전력을 다해 운용했다.
무형검의 천변만화에 따라 무색유리검은 서로서로 위치를 바꿔 가며 무형검의 이점을
대화시켰다.
목숨을 태운 그녀는 뇌전 그 자체가 되었다.
번개의 속도로 움직이며 비둔술, 등봉조극 등 모든 가속을 사용하는 그녀에 맞서, 나는 무형검을 통해 극한으로 의식을 가속했다.
정지된 시간 속인 탓인지, 소리조차 들리지 않았다.
그저 먹먹한 세상에서, 나는 봉우리 하나를 그대로 깔아뭉개며 검무를 펼쳤고, 무형검의 검무에 따라 인근에 있는 봉우리 수 개가 그대로 조각조각 나 흩어졌다.
홍수령은 내 검을 피한 후 자기 자신을 중심으로 비검을 움직였다.
그녀는 그 자체로 하나의 검진(劍陣)이 되었다.
스스로가 진의 축이 되어, 진을 운용하며 검을 다룬다.
번쩍!
검이 움직이며 빛을 쏟아낸다.
‘이건 못 막겠군.’
그렇다면 어찌해야 하는가.
나 역시도, 수결을 맺기 시작했다.
청문령에게 배워 극한까지 파고들었던 법술들이 무색유리검들의 사이로 섞이기 시작했다.
청문령의 기초법술.
김영훈의 무공.
둘로 인해 나는 각각의 분야에서 극점을 노릴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홍수령과 함께했던 나날들.
나는 그 나날들을 통해, 두 분야를 완전히 합일할 수 있게 되었다.
홍수령을 중심으로 검진이 회전하는 것처럼.
나를 중심으로 삼천 자루의 무색유리검이 일사불란하게.
그러면서도 무형검의 영향을 받아 자유분방하고 변화무쌍하게 회전하기 시작했다.
무(武)와 법술(法術)의 완전한 일체.
피이잉!
단악검법(斷岳劍法).
제이십팔초(第二十八招).
나는 새로운 일체감을 느끼며, 단악검법의 새로운 장을 개화해 냈다.
3천 자루의 무색유리검이, 무색유리검에 실린 무형검이.
나를 중심으로 원(圓)을 그린다.
원(圓)은 천인기의 핵심 이치이기도 했다.
어쩌면 하늘의 이치이기도 했고.
나는 천인기에 대한 어렴풋한 깨달음과, 내 무학의 지식, 홍수령에게서 배운 검진에 대한 지식을 총동원해 만든.
나만의 검진(劍陣)을 펼쳐 냈다.
검진의 이름은 금강(金剛).
단악검법의 새로운 초식이자 금강 속 변화의 이름은 일만이천봉(一萬二千峯).
쉬리리릭!
3천 자루의 무색유리검이 회전하며, 각각 세 개의 검영(劍影)을 만들어 냈다.
무색유리검은 검 본체와 검영을 포함해, 총 네 개로 나뉘었다.
각각의 검과 검영은 춘하추동의 사계(四界)를 상징했다.
사계절이 회전하며 원을 이룬다.
3천 자루의 무색유리검에 네 번의 변화가 더해지며 1만 2천의 공격 횟수를 만들었다.
나의 일만이천봉과, 홍수령의 검진이 부딪혔다.
내 무색유리검에서 뿜어지는 검기 하나하나에 봉우리들이 갈라지고, 계곡이 생겨나며 산이 깎인다.
홍수령의 비검에서 뿜어지는 뇌전 줄기 하나하나에 산이 녹아 유리가 되고, 숲이 불타 재가 된다.
우리는 정지된 시간 속에서, 서로가 서로에게 얻어 낸 극의를 펼쳐 내며 그렇게.
빛무리에 휩싸였다.
* * *
화르르르르―
나는 불타는 산자락.
그곳에 쓰러져 있는 홍수령을 바라보았다.
그녀는 웃고 있었다.
피 칠갑인 것을 빼면 눈에 띄는 외상은 없었다.
“좋…구나….”
하지만, 자신의 수명을 모조리 끌어 쓴 홍수령은 죽어 가고 있었다.
9백 세에 가까운 그녀의 머리가 하얗게 세고 있었고, 그녀의 탱탱했던 피부는 쪼그라들고 있었다.
“서…은현….”
홍수령은 나를 바라보며 말했다.
“내… 검은, 봐 줄만, 했나…?”
생기가 빠져나가, 빛을 잃어가는 와중에도.
홍수령은 나를 보며 그렇게 물었다.
나는 한쪽 무릎을 꿇었다.
그리고 그녀의 손을 잡으며 말했다.
“최고였다.”
“후, 후후….”
그녀는 하늘을 바라보지 않으려 눈을 감으며 웃었다.
“하늘이 아니라, 당신에게 죽을 수 있어….”
생명력이 다 빠져나갔지만.
늙어 버려 언뜻 추해 보이는 모습이었지만.
“너무, 좋았습니다….”
“…그래.”
내 눈에 지금 그녀의 모습은, 향화나 연이에게 못지않을 정도로 아름다웠다.
여자의 감인 것인지.
그도 아니면 자신보다 훌륭한 검수에 대한 존경인지.
그녀는 마지막에는 내게 존댓말을 쓰며, 그렇게 잠들었다.
“나도….”
영원히.
“너를, 좋아했다….”
이미 한참 뒤늦었지만.
나는 죽은 그녀의 입에 입을 맞추었다.
정을 주지 않겠노라 생각하였다.
하지만 정이란 계획으로 움직일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나도 너도 모르게 조금씩 조금씩 쌓여, 그렇게 다시 보니 어느새 태산이 되어 있는 것.
그것이 사람의 정이 아니던가.
세상 사람들에게 묻노니, 정이란 무엇이기에 생사를 가름하느냐(問世間 情爲何物 直敎生死相許 ― 안구사雁丘詞).
정이란 결국 세월이다.
켜켜이 쌓여 온 세월이 커지고 높아져 무시할 수 없게 된 것이 정이었다.
나는 홍수령에게 그런 정을 가졌고, 금신천뢰문에게, 유화에게, 규백에게, 규련에게, 창호자에게, 오현석에게, 창천개벽문에게, 김연에게, 북향화에게….
여태껏 나와 함께 세월을 쌓아 온 모든 이에게 정을 주었고, 또 정을 받았다.
그리고, 나는 내게 정을 주고 가 버린 홍수령의 사체를 자리에 눕혔다.
주변은 나와 그녀의 전투의 여파에 화마(火魔)로 이글거렸고.
하늘에서는 천벌의 신(神)이 강림하고 있었으며.
금신천뢰문은 신을 직시함에 미쳐 가고 있었다.
이 미쳐 버린 세계에서, 나는 한 걸음을 디뎠다.
사라락….
백란(白蘭)이 피어나기 시작했다.
새하얀 백란은 홍수령을 뒤덮었다.
그리고 사방으로 퍼져 나간 그 흰 꽃은 화마를 잠재우고, 대지 곳곳을 밝혔다.
―운명을 이길 수 없다면, 하물며 운명의 안에서라도 선택을 하면 안 되는 거란 말이냐.
홍수령의 말이 뇌리를 울렸다.
나는 그 말을 곱씹으며, 멸신겁천을 운용하기 시작했다.
‘양수진, 당신은 이 세상 전체를 일컬어 비인간이라 했지.’
돌이 나무에 부딪히는 소리를 듣고도 찾아오는 것이 깨달음이라 한다.
나에게는 도려(道侶)가 생명을 불태우며 의지를 부딪쳐 주었다.
그 덕에, 이제야 깨달을 수 있었다.
양수진의 비인간론에는 근본적으로 모순되는 문제가 있다는 걸.
‘운명의 노예이기에 삼라만상 모든 존재가 노예이며. 심족 역시 종명자에 의해서만 생겨 나는 이들이라면, 그래. 종명자가 운명을 바꿔 주어도 종명자에 의해서만이 운명을 바꿀 수 있으니 세상 모든 것은 노예이며 비인간이다. 하지만….’
저벅, 저벅, 저벅….
나는 뇌운봉으로 향했다.
저 멀리 뇌운봉 저편에서, 전명훈이 보였다.
뇌운봉에 모여 있는 무수한 장로와 원로들을 밑에 두고, 그는 하늘을 날아올라 천뢰번에게 뭔가를 하고 있었다.
원래라면 지금 당장이라도 천겁이 내리쳐 모두가 튀겨졌어야 했건만, 천인기까지 성장한 전명훈이 뭔가를 하고 있었다.
‘운명이 절대적이라면, [운명을 다하지 못하는] 약자는 무엇이란 말인가.’
운명이 완벽하며 전능한 것이었다면.
모든 존재에게 부여된 운명은 ‘반드시 일어나야’ 하는 필연이었다.
하지만, 어떤 약자들은 운명을 다 살지 못하고 그 이전에 죽기도 한다.
나 역시도 본격적으로 수선을 하기 전.
수명이 정해져 있었기에 매번 같은 날에 죽었으나, 내 수명을 다하지 못하고 죽은 적도 많았다.
이는 나뿐만이 아니었다.
괴군에게 들었던 운명에 대한 설명에서도, 내가 봐 왔던 무수한 이들도.
모두 운명을 다하지 못한 이들이 무수히 많았다.
물론 이들은 운명조차 감당하지 못할 정도로 약자였다.
하지만 오히려 약자이기에 선택할 수 있었다.
운명을 극복할 수 없을지언정.
홍수령처럼, 운명이 찾아오기 전에 내게 죽음을 맞이하며 가장 바라던 것을 하고 죽었던 것처럼.
운명 안에서 바라는 것을 선택할 수는 있었다.
운명은 극복할 수 없을지도 모른다.
우리는 영원히 운명의 노예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럴지라도 그 안에서 선택을 하고, ‘바라는’ 것은 명백한 존재의 ‘자유’였다.
“비인간이, 아니다!”
애당초 양수진의 논리라면.
오히려 종명자야말로 가장 끔찍한 비인간이 아니던가?
우리는 우리가 가진 명(命)에 따라 끊임없이 갈려 나가야 하지 않던가?
그렇기에 양수진조차도 운명을 부정하고자 했으면서도 운명을 행복한 것으로 바꾸려 하지 않았는가?
모든 것이 이미 운명에 의해 결정되어 있어 어떤 자유도 없기에, 혹자는 운명의 노예를 비인간이라 한다.
하지만, 운명에 의해 결정된 것이 있고 그것을 바꿀 수는 없을지라도, 운명 외에 것을 바라고, 자신이 그를 선택하며 꿈꾸는 것만은 존재에게 부여된 자유이다.
‘운명을 다하지 못하는 약자’라는 것이 존재한다는 것이 바로 그 증명이었다.
그러므로, 이 세상에 [비인간] 따위는 존재하지 않는다!
홍수령은 월도입천에는 끝내 도달하지 못했다.
하지만, 어쩌면 그녀에게서 보았던 기개를 보아 그녀가 나를 만나러 오지 않고 조금만 더 깨달음을 갈무리했다면 모를 일이었다.
하지만 그녀는 경지를 가다듬는 것보다는 나와 만나서 붙는 것을, 그녀 자신의 의지로 선택하였다.
앞으로 나아가는 것보다, 지금 그 자리에서 움직이는 것을 자신이 선택한 것이었다.
저벅―
‘그러니, 나도 선택하겠다.’
나는 하늘을 바라보았다.
등 뒤쪽으로, 홍수령과 전투를 벌였던 구역 전체가 백란축성문에 휩싸여 있었다.
“멸신(滅神).”
그리고 하늘을 올려다보며, 양 손을 뻗었다.
‘내 가족들을, 구해 낸다!’
“겁천(劫天).”
등 뒤의 백란축성문으로 가득한 지역을 넘어, 그 주변으로는 시커먼 음혼귀주문이 퍼져 나가기 시작했다.
음혼귀주문은 저주문의 바다를 이루며, 금신천뢰문의 영역 전체를 덮기 시작하였다.
순식간에 내가 백란축성문으로 덮은 지역이 점처럼 보일 만큼 거대한 지역이 덮였다.
그 모습은 마치, 태음(太陰)의 안쪽에 소양(小陽)의 형상이 들어있는 것만 같았다.
촤라라라락!
검은 저주문들이 금신천뢰문 곳곳을 뒤덮으며 무수히 세워져 있는 깃발(幡)들을 흑색귀주번처럼 시커멓게 물들였다.
일대를 나의 저주문으로 장악하였다.
[흐아아아아!]저 멀리서, 전명훈이 마침내 버티지 못하고 천뢰번에서 떨어져 나가는 것이 보였다.
그와 동시에, 완전히 강림하지 못하고 있던 천벌의 주인이 이 세계에 완전히 존재를 드러내는 것이 느껴졌다.
쿠구구구구!
이제 이곳은 나의 제단이자, 저주의 성역.
지금부터.
“제의(祭儀)를 시작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