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 Regressor’s Tale of Cultivation RAW novel - Chapter (313)
강녕하셨습니까 (1)
휘이이이―
황량한 사막.
황금빛 모래가 아닌, 퍼석퍼석하고 어쩐지 기분 나쁜 잿빛 모래로 가득한 곳.
난계(亂界) 지역 중 하나인 사토역(死土域).
그곳으로 한 무리의 둔광들이 나타났다.
그들은 하나같이 승천하는 교룡이 금실로 수놓아진 흑포를 입고 있었다.
그들의 우두머리로 보이는 소년 모습을 한 천인기 수사.
흑린어령문 소속 현귀가 빙긋 웃으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어디 보자…. 서 수사가 이곳에서 보자고 했는데….”
그때, 그가 한 곳에 시선이 닿았다.
“아, 저기 계시군. 하하, 그간 강녕하셨습니까, 서 수사. 못 본 새 많이… 역변하셨군요.”
부스스―
현귀가 시선을 준 잿빛 사막.
그 아래쪽에서, 모래를 파헤치고 18개의 머리를 가진 귀왕이 몸체를 드러냈다.
[현 수사도 그간 강녕하셨소?]서립이었다.
* * *
나는 숨결을 들이쉬며, 귀왕화된 육신을 다시 인간형으로 되돌렸다.
현귀는 그런 내 모습을 보며 눈에 이채를 띠었다.
“놀랍군요. 설마 지난번 뵈었을 때는 실력을 숨기셨던 겁니까…? 하긴, 그 저주는 고작 원영기 수사 따위가 다룰 수 있는 수준의 것이 아니었지만… 그래도 설마하니 사축기 선배님이셨을 줄이야.”
그는 나를 ‘선배’라고 판단한 듯 공손하게 두 손으로 읍을 했다.
“괜한 예를 차릴 필요 없소. 어차피 고작해야 사축기 중기인 몸. 그리고….”
나는 현귀의 뒤쪽에 기립해 있는 흑포 사내 셋을 보며 웃었다.
“뒤에 계신 분들도 쟁쟁하신 분들 같은데, 저런 분들을 이끄시는 현 수사야말로 더 대단해 보이시는구려.”
현귀의 뒤쪽에는 천인기 대원만으로 보이는 수사들 셋이 당당히 서 있었다.
그러나 나는 그들이 천인기라고 해서 얕보지 않았다.
‘흑린어령문의 사상원영….’
나는 인마전쟁에서 흑린어령문 수사들의 저력을 봤기에 굉장히 잘 알고 있었다.
흑린어령문 수사들은 자신들에게 깃들어 있는 현음의 피를 통해 선수혈통의 힘을 사용할 수 있었고, 그들이 익힌 사상원영의 술법으로 외부에서 힘을 받아들이는 법술의 대가들이었다.
‘흑린어령문 수사들은 하나같이 그놈의 사상원영으로 외부에서 힘을 빌려와 경지 하나는 뛰어넘고는 하지.’
그의 뒤쪽에 있는 건 천인기 대원만이 아닌, 사실상 사축기 초기 셋이라 봐야 할 터였다.
거기다가 현귀를 따라온 원영기 수사 일곱도 하나같이 나를 보고도 전혀 긴장하거나 두려워하는 기색이 없었다.
사축기인 나를 보고 예를 취하기는 하는 느낌이었지만, 하나같이 의념의 파동이 나를 전혀 존중하거나 두렵게 느끼고 있는 파동이 아니었다.
‘흑린어령문, 현귀를 포함한 11인…. 이놈들, 하나같이 숨긴 게 한가득인 놈들이군.’
나는 경계를 늦추지 않으며 현귀와 인사를 주고받으면서도 언제든 그들의 사정거리에서 벗어날 수 있게 인력을 준비해 두었다.
“그나저나, 서 선배님께서는 모래 속에서 무얼 하고 계시던 겁니까?”
“아, 이 사토역은 내 공법 수련을 하기 알맞은 곳이더이다.”
잿빛 사막으로 이뤄진 사토역은 대막사해성과 상당히 궁합이 좋은 땅이었다.
대막사해성은 주변을 사막화시키는 공법이기도 했지만, 동시에 죽음의 기운을 단련하는 공법이기도 했다.
사방이 죽음으로 가득 찬 사토역이라면 대막사해성을 단련하기에 최적의 지역이었다.
“호오, 그러시군요. 과연 사축기 선배님이십니다. 이런 곳에서조차 수선의 길을 갈구하시다니. 벌써부터 든든해집니다.”
“하하, 그렇게 금칠해 주실 것 없소이다.”
우리는 껄껄 웃으며, 그 자리에서 합류해 사토역의 서쪽 부근으로 날아갔다.
“으음, 과연 난계 지역이라 천지영기가 어지럽구려.”
나는 비둔술을 쓰다 말고, 그냥 인력을 조종하기 시작했다.
“저는 이제부터 축지법을 통해 가려 하는데, 흑린어령문 분들은 어쩌시겠소. 동행하시겠소?”
내 질문에 그들은 서로를 바라보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현귀는 빙긋 웃으며 그들의 의견을 전달해 주었다.
“그래 주신다면 정말 감사하겠습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나는 현귀와 흑린어령문 일행을 인력으로 붙든 후, 그대로 요전에 쌓은 부(富)의 축을 자극했다.
우우우웅!
축에서 강력한 인력이 발생하며, 공간이 접히기 시작한다.
나는 한 발을 딛었다.
파아앗!
한 발을 딛을 때마다 500리의 거리가 단축된다.
나는 그렇게 한 걸음 한 걸음을 축지법으로 옮겼다.
우리가 향하는 장소는 사토역에서도 서쪽 끝자락.
안계(安界) 지역에서 멀어지는 곳이었기에 갈수록 천지영기가 흐트러지고 있었다.
‘난계 지역에서는 천인기 미만은 전투력이 많이 제한되겠군.’
광한계는 난계(亂界)와 안계(安界) 지역으로 나뉘었다.
안계 지역은 천지영기가 안정되고, 정상적으로 생명체가 살 수 있는 대지를 뜻했다.
그와는 반대로 난계 지역은 생명체가 살기 힘들 정도로 천지영기가 뒤엉키고, 법칙이 괴상하게 꼬여 있어 마경에 가까운 곳을 가리켰다.
일반적으로 ‘광한계’라 하면 ‘안계 지역’을 가리킬 정도로 안계 지역 자체는 어마어마하게 넓었다.
하지만 그조차도 난계 지역에 비해서는 티끌이나 다름없는 크기였다.
‘대략 안계 지역 전체가 지구의 태양계… 아니, 그보다는 크려나. 대강 그 정도 된다면… 난계 지역은… 은하 정도 되지 싶군.’
건곤중역을 비롯해서 인족 영역이나 진룡맹 영역 등은 안계 지역에, 그리고 그 밖의 모든 구역은 전부 난계 지역이었으니 어쩌면 그 정도가 될지도 몰랐다.
나는 머릿속으로 광한계의 크기 개념을 비교해 보았다.
‘심족 영역은… 난계 지역에서도 상당히 먼 곳에 있다고 했는데. 그런 곳에서 어떻게 살고 있는 건지 모르겠군.’
난계 지역은 안계 지역과 멀어질수록 법칙이 더더욱 왜곡되기 쉽고, 생명체가 살기가 불가능에 가까워진다 했다.
나는 광한계의 구조에 대해 생각하던 중 문득 의문이 들어 현귀에게 물었다.
“그러고 보니, 현 수사는 그런 생각을 한 적이 없소?”
“어떤 생각 말입니까?”
“광한계에 안계 지역은, 거대한 난계 지역의 중심에 하나밖에 없다고 하고, 난계 지역은 대다수가 조사할 생각조차 안 한다만. 혹시 난계 지역에서도 다른 안계 지역을 찾을 수 있지 않겠소? 왜 그런데 다들 난계 지역을 조사해 볼 생각을 하지 않는 건지 말이오.”
내 말에 현귀는 진중한 표정을 지었다.
“음, 생각해 보니 그렇군요.”
‘음?’
나는 현귀가 겉으로만 진지한 표정을 지으며, 속으로는 나를 굉장히 비웃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뭐지, 상식 중에 하나인가.’
“그러고 보면, 다른 중경계에서도 안계 지역은 전부 하나밖에 없다고 합니다. 그리고, ‘안계 지역은 하나다’라는 정보의 출처는… 전부 쇄성기 존자들. 그리고 성반기 성사님이십니다. 어쩌면 위대하신 분들께서 무언가 비밀을 감추고 계신 것일지도 모르겠군요.”
“음….”
‘이놈….’
녀석은 내게 엄청난 비밀이라도 말해 준 것처럼 입을 털고 있었지만, 동시에 나를 깔보고 우습게 보는 의념은 더욱 강해졌다.
나는 다른 흑린어령문 수사들을 흘긋 보았다.
‘저 녀석들은 안 그러는데….’
어쩌면 현귀만 알고 있는 사실이 뭔가가 있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나는 현귀를 의식하며 그들과 함께 목표 지역으로 이동했다.
약 일각 후.
우리는 축지법으로 사토역의 끝자락에 도착할 수 있었다.
“이곳이….”
“예, 증룡진인의 저물도로 들어가는 입구입니다. 아, 저기 선객들도 계시는군요.”
우리가 도착한 저물도의 입구라는 곳은, 커다란 분지였다.
‘여긴….’
나는 분지를 둘러보며 이곳의 정체를 가늠했다.
‘남아 있는 수기(水氣)로 보아, 이전에 천지(泉池: 오아시스의 뜻으로도 쓰임) 같은 곳이 있었던 곳이군.’
하지만 주변을 둘러봐도 공간 균열이나, 이공간 같은 것은 보이지 않았다.
나는 현귀에게 전음으로 질문을 했다.
[이런 곳에 정말 저물도의 입구가 있소?] [하하, 확실히 모르는 분들이 더 많지요. 하지만 밤이 되면 이 천지에 물이 차오릅니다. 그리고 수천 년에 한 번인 사흘 후, 모든 별들이 잠시 빛을 잃는 암야(暗夜) 삭월(朔月)의 하늘이 천지를 비추면 그때 증룡진인의 유산이 모습을 드러냅니다. 초조해하지 않으셔도 되지요.]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땅으로 내려왔다.
주변을 둘러보니, 천인기 수사로 보이는 이들 몇몇이 먼저 도착해 자리를 잡고 있었다.
대략 쉰 명 정도가 먼저 자리를 잡고 있었는데, 그중 대다수가 요족이었고, 10명 정도만 천족이었다.
그중에선 인족과 비슷한 인접한 영역을 접하고 있는 도마뱀 인간인 엽타족, 피부에 녹색 비늘이 돋아 있고 영안 신통과 은신법술에 강한 영린족, 최근 괴군에게 망해 버린 한령족도 있었다.
‘엽타족, 한령족, 영린족….’
엽타족은 인족 눈치를 보며 살아가는 천족이었고, 한령족은 원래 인족과 사이가 좋은 천족이었으나 영린족은 일전 인족과의 전쟁에서 패배한 적이 있었기 때문에 사이가 안 좋은 이들이었다.
내가 그들을 흘끔 둘러보자, 그들은 나를 보고는 하나같이 화들짝 놀라 슬금슬금 뒤쪽으로 물러났다.
“이런 젠장, 탐욕스러운 인족 놈들. 사축기 노괴를 데려오다니….”
“사악한 인족 놈들답게 귀기부터 무시무시하군.”
“악랄한 인족 마수들 같으니, 저 경지에 오르기 위해 얼마나 많은 생령을 잡아먹었단 말인가.”
“….”
그들은 수군수군하며 나를 두려워하는 듯이 전부 나와 멀찍이 떨어진 곳으로 자리를 옮겼다.
‘…어차피 이게 평균적인 인족의 인상이니, 굳이 해명할 필요는 없겠지.’
나는 작게 한숨을 쉬며 자리에 앉아 가부좌를 틀고, 대막사해성을 수련하기 시작했다.
콰득, 콰드드득!
나는 다시금 18개의 머리를 가진 귀왕으로 변해서, 사토역에 가득한 죽음으로 내 귀기를 정련했다.
내 귀왕화를 본 이종족들은 더더욱 공포에 떨며 몸을 떨었다.
“미친 인족 사축기 노괴 같으니… 동급 경지 17명의 머리를 뽑아서 어깨에 박아 놓았어.”
“상당히 악랄한 존재일세. 절대 저 노괴에게 접근하지 말자고.”
“인족 놈들은 타 종족을 잘도 잡아먹는다더니, 타 수사의 머리를 뽑아 보관하는 관습까지 있었던 건가…?”
“쉿, 조용히 해. 눈 마주치지 마…!”
천족들은 입을 다물고 공포에 떨었고, 요족들은 내가 못 알아듣는다고 생각했는지 요족어로 미친 듯이 나에 대한 공포를 토로했다.
나는 해명할까 하다가, 안 먹힐 것 같았기에 그냥 가만히 있기로 했다.
그렇게 저물도 입구에서 얼마나 기다렸을까.
몇몇의 수사들이 더 도착했고, 그중에는 사축기 수사들도 셋이나 포함되어 있었다.
나는 현귀가 알려 준 정보를 통해 그들의 면면을 파악했다.
지족 중 혈교족의 사축기 초가 수사, 교염.
천족 중 비익족의 사축기 후기 수사, 백위익.
천족 중 장목족의 사축기 중기 수사, 녹주.
[조심하시지요, 선배님. 혈교족과 비익족이야 인족의 전투력에 비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니지만, 장목족은….] [알고 있소.]나는 현귀의 전음을 받으며 눈을 빛냈다.
장목족(丈木族).
이전 번번이 괴군에게 납치되었던 녹갑 목인이 속했던 종족이었다.
괴군에게 납치당했던 기억밖에 없어 굉장히 허약한 종족이 아닌가 싶지만, 그 경우는 괴군이 워낙 규격 외였던 것 때문이고, 실상은 훨씬 강력한 종족이었다.
지족에 13개 대형 종족이 있다면, 천족은 6개 대형 종족이 있었고, 그 내역은 다음과 같았다.
장목족(丈木族).
비익족(比翼族).
인간족(人間族).
투귀족(鬪鬼族).
부휴족(腐鵂族).
균해족(菌骸族) 등이 그것이었다.
이들은 각각 세 부류로 나뉘었는데, 이두(二頭), 이난(二難), 이악(二惡)이 그것이었다.
이두(二頭)는 일단 뛰어난 판단력과 상징성으로 천족을 규합하며 천족 전체를 이끌어 가는 장목족과 비익족을 가리켰다.
이난(二難)은 육대 종족 중 가장 상대하기 꺼려지고 독특한 생활 방식을 가진 부휴족과 균해족을 일컬었다.
이악(二惡)은 육대 종족 중 가장 흉포하고 공포스러운 투귀족과 인간족을 칭했다.
특히 투귀족과 인간족은 특유의 흉포한 성정과 잔혹한 기질, 그리고 특유의 전투력으로 인해 두 종족을 합쳐서 수라족(修羅族)이라고 부르는 이들도 있을 정도였다.
어쨌든 그중에서도, 특히 장목족은 성반기 성사인 백운 성사의 출신 종족으로 광한계 전체에서 굉장히 명망이 높았고, 본인들도 성반기 성사를 배출해 낸 종족이란 자부심과, 그 상징성으로 인해 천족의 중심인 이두가 되었을 정도였다.
물론 정작 들리는 풍문에 의하면 백운 성사는 본인의 출신 종족에 아무 관심도 없고, 도리어 본인을 숭배한답시고 백운 성사가 거하는 천련산을 함부로 침범하면 종족 전체에 재해를 내리기도 한다는 모양이었지만 말이었다.
‘그래도, 광한계의 시작부터 쭉 천족의 중심을 지킨 종족이다. 비익족과 힘을 합쳐서 공격하면 골치 아프겠지.’
나는 비익족과 장목족의 수사를 경계했다.
동시에 18개의 머리를 통해 눈에서 귀화를 흘리며 언제나 인력을 주변에 두르며 대막사해성을 수련했고, 마침내 시일이 되었다.
[오늘인가….]나는 눈에서 귀화를 토해 내며 하늘을 바라보았다.
몇천 년에 한 번만 생기는, 광한계의 별들이 짧은 시간 빛을 잃는 암야(暗夜)의 날.
그리고 그에 겹친 삭월(朔月).
노을이 지자 점차 하늘이 어둠으로 물들어 갔다.
그와 동시에, 밤이 되자 분지에 물이 차오르기 시작했다.
나는 느릿느릿하나, 은근히 빠른 속도로 높아지는 천지의 수위를 보며 귀화를 빛냈다.
[이제 곧인가….]나는 주변을 경계하기 위해 다른 종족의 사축기 수사들을 둘러보았다.
이상하게도 그들은 처음 도착했던 위치와 달리 나에게서 멀찍이 떨어져 있었고, 각자 나를 흘끔거리며 식은땀을 흘리고 있었다.
‘음, 왜 저러는 거지?’
나는 18개의 머리를 갸웃거리며 눈에서 귀화를 흘렸다.
* * *
증룡진인의 저물도 입구 앞.
그곳에는 삭월의 음기를 흡수하며 시퍼런 귀화를 전신에서 줄기줄기 뿜어내는 서립이 가장 눈에 띄고 있었다.
동급 수사 17명의 머리를 뽑아 어깨에 박아 놓았다는 소문이 퍼진 그의 무시무시한 외관, 그 강력한 귀기, 그리고 오행기축이 아닌 진 정통 기축으로 쌓은 독특한 기질.
서립은 몰랐으나, 그 자리에 있는 모든 종족이 서립을 일 순위 경계 대상으로 여기고 있었다.
장목족의 사축기 수사인 녹주는 이미 비익족의 사축기 수사인 백위익과 전음을 주고받는 중이었다.
[백 수사, 저물도에 진입하면 힘을 합쳐야 합니다. 인간족은 투귀족과 함께 특히 흉악하고 강력한 법술로 악명이 높으니, 저 괴상망측하게 생긴 인족 노괴가 어떤 마공을 보여 줄지 모릅니다.] [동의하오, 녹 수사. 만약 탐욕스러운 인족의 노괴가 우리를 기습하면 반드시 합공해서 대항해 냅시다!]두 명의 천족 사축기 수사가 힘을 합쳤고, 혈교족의 사축기 수사 교염은 그 자리에 모인 요족들 전체에게 전음을 보냈다.
[간악한 천족들이 무슨 짓을 꾸밀지 모른다. 특히 저 괴물 같은 인족 노괴는 동족의 머리를 뽑아 몸에 박고 다니는 것으로 추정되는 악랄한 마수다. 저물도에 진입하면 절대 저 자에게 한 명이서 접근하지 말고, 마주친다면 무조건 내게 연락을 해라. 특히 악랄하다는 귀도공법을 익힌 듯하니, 만약 잡힌다면 요단이 뽑혀 단약이 되는 것 외에 혼백마저 노예로 부려 먹힐 것이다! 우리는 전부 다른 종족이지만, 저 무시무시한 천족의 노괴들 앞에서는 힘을 합쳐야 살 수 있다!]교염을 중심으로는 요족 천인기 수사들이 똘똘 뭉쳤다.
어느새 천지의 주변에서는 네 개의 세력이 분할되었다.
마공을 익힌 노괴 서립을 중심으로 한 인족 흑린어령문 세력.
사축기 중기, 후기 수사인 장목족과 비익족 수사 둘의 세력.
사축기 초기인 혈교족 교염을 중심으로 한 요족 세력.
그리고 어디에도 들어가지 못한 몇몇 천족들.
그들은 모두 긴장의 찬 눈으로, 분지에 차오르는 물과, 서립을 흘끗거리며 시간을 기다렸다.
그리고, 시간이 되었다.
찰랑―
마침내 천지의 물이 분지를 모두 채웠다.
천지 위쪽, 투명한 물 위로, 아무것도 없는 검은 암야(暗夜)가 비췄다.
“옵니다. 저물도에 진입하면 일순간 공간 폭풍에 사방으로 흩어질 터이니, 저희를 묶어 둘 조치를 취하겠습니다.”
흑린어령문의 현귀가 부적을 꺼내 들고 수결을 외웠다.
그의 부적에서 새하얀 포승줄이 튀어나오더니, 흑린어령문과 서립을 묶었다.
잠시 그들을 묶은 새하얀 포승줄은 이내 새하얗게 빛나더니 사라져 버렸다.
그들을 제외한 다른 세력들 역시 하나둘 저물도 진입에 대비하기 시작했다.
얼마 후, 아무것도 없는 검은 하늘을 비추던 천지의 표면.
그곳에, 천천히 ‘달’이 떠오르기 시작했다.
서립은 신기한지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다시 천지를 내려다보았다.
수면에만 떠오르는 신비한 달.
그리고, 그 달의 표면에는 희미한 빛으로 된 고궁(古宮)이 그려져 있었다.
얼마 후, 달에 새겨진 고궁(古宮)의 문이 열렸다.
끼이이이익―
“지금입니다! 가시죠!”
현귀를 시작으로, 그곳에 모인 수도자들이 약속이라도 한 듯 동시에 천지에 뛰어들었다.
그렇게, 증룡진인의 저물도 탐방이 시작되었다.
* * *
파아아앗!
나는 나를 휩쓸어 오는 공간 폭풍에 인력으로 몸을 보호했다.
현귀가 사용한 포승줄은 희미한 인력을 발생시키고 있었고, 나와 흑린어령문 사람들은 그 인력으로 엮여 떨어지지 않고 있었다.
‘놀랍군. 수면에 비친 상(狀) 그 자체에 이계의 입구를 만들어 두다니.’
당최 어떻게 했는지 이해가 가질 않는 신기였다.
얼마간 공간 폭풍을 헤치며 나아갔을까, 우리는 어느덧 수많은 빛살을 넘어 어떤 사막에 떨어졌다.
[여긴… 사토역?]내가 주변을 둘러보며 의아해하자, 현귀가 옆에서 먼지를 털며 말했다.
“닮은 것 같지만 아닙니다. 수면에 비췄던 달의 대지 위이지요. 아니, 사실 달도 아닙니다. 이곳의 대지는 개열기 진인의 환상술법이니 실존하는 곳조차 아니지요.”
[으음, 이게 환상이란 말이오?]나는 바닥에 있는 모래를 들어 보며 침음성을 흘렸다.
너무나도 생생한 감촉이었다.
천, 지, 심 모든 감각을 깨워서 관찰해 봐도 ‘진짜’ 모래였다.
현귀는 빙긋 웃었다.
“준선(準仙)의 술법이니 말이지요. 특히나 증룡진인은 본래 대라신선이었다가 개열기로 영락한 존재라는 풍문도 있는 만큼 동급 개열기 진인보다도 훨씬 강했다 하니 말입니다. 자, 그럼, 일단 이 지역을 벗어나도록 하지요. 아까 보았던 고궁이 있는 곳을 찾아 들어가야 진짜 저물도의 안쪽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
현귀는 하늘을 가리켰다.
“이런 류의 환상진법을 벗어나는 방법은 여러 가지가 있지만, 가장 정석적인 방법은 두 가지입니다. 스스로를 가사 상태로 만들어 환상의 허점을 발견한 후 그 허점을 공략하거나, 그도 아니면… 별자리를 읽는 게 가장 좋지요. ‘하늘’이 존재하는 환상술법은 절대로 별자리를 빼놓을 수 없으니 별자리의 길을 해석해 나가는 게 가장 좋습니다.”
나는 그 말에 하늘을 바라보았다.
그러나 정작 하늘은 이곳에 들어오기 이전에 있었던 사토역의 하늘과 마찬가지로, 별은 하나도 보이지 않는 암야였다.
내 의문을 알아챈 듯 그가 말했다.
“선배님, 천기를 읽어 보시지요.”
[천기? 아….]나는 눈을 빛냈다.
확실히, 별빛은 보이지 않았지만 천기는 읽혔다.
그리고 나는 천기를 역추적해, 인력(引力)을 읽어 내서 별빛이 보이지 않더라도 별자리를 알 수 있었다.
아마 지족들도 천기는 읽지 못하지만 천지영기의 흐름으로 인력을 읽어내는 게 가능할 터였다.
‘방법은 간단하지만, 발상은 간단한 게 아니군.’
굉장히 노련한 수사가 아니라면 생각하기 힘든 방법이었다.
나는 현귀에게서 알 수 없는 노련함을 느끼며, 그에 대한 경계심을 높였다.
나는 별자리를 읽으며, 현귀의 안내대로 사막을 날아갔다.
우리는 얼마 지나지 않아 별자리를 보며 사막의 중앙이라 생각되는 곳에 도착했다.
“두수성의 끝자락이 이곳을 가리키는군요. 이 방향으로 조금만 더 가 보지요.”
현귀는 능숙하게 별자리를 읽으며 우리를 이끌었고, 나는 그를 따라가며 어느 순간 어떤 ‘장막’ 같은 것을 넘는 느낌을 받았다.
파아앗!
[음…!]어느새, 우리의 앞에는 아무것도 없던 사막에서 거대한 고궁의 앞에 도달해 있었다.
“아무래도 저희가 가장 먼저 도착한 것 같군요. 들어가지요.”
현귀는 빙긋 웃으면서 고궁의 입구로 걸어갔다.
나는 고궁의 위쪽에 걸린 현판을 올려다보았다.
고궁의 입구에는 강녕봉양사자증룡지도(康寧奉養使者嶒龍之圖)라는 글귀가 적혀 있었다.
‘강녕봉양사자?’
굉장히 재밌는 호칭이었다.
그러나 나는 진 정통 기축의 강녕(康寧)을 떠올리며 눈을 빛냈다.
‘뭔가 기축과 관련이 있는 존재인가?’
현귀가 이곳에서 얻었다는 부덕제사서 등을 생각해 보면 그럴 확률도 높았다.
저벅, 저벅….
고궁의 안쪽으로 들어가자 공간이 비틀리는 느낌과 함께 우리는 거대한 강에 진입했다.
맑은 하늘 아래, 맑은 강물이 흐르고 있었고, 민물고기로 보이는 영물들이 곳곳에서 한가로이 헤엄치고 있었다.
강의 폭은 어마어마하게 넓었고, 강 너머로 또 다른 강이 끝없이 이어진 것이 보였다.
그러나 나는 뭔가가 잘못되었다는 걸 느꼈다.
‘뜨겁다…?’
어째 굉장히 평화로운 광경이었다. 그러나 시원한 강바람 대신 후끈한 열기가 본능적으로 영혼을 타격하는 느낌이었다.
현귀는 주변을 둘러보며 나에게 부적을 나눠주었다.
“증룡진인의 이계는 바깥의 환상을 제하고, 총 4층으로 이뤄져 있습니다. 1층인 수류층(水流層), 2층인 도거층(道去層), 3층인 봉양층(奉養層), 4층인 치제층(廌祭層)이 그것이지요. 본래 저희가 서 있는 수류층은 눈앞의 광경처럼 수기(水氣)가 짙어, 거의 바다에 가까운 곳이었다 전승됩니다만… 증룡진인이 진마계의 어떤 존재와 싸우며 완전히 뒤바뀌었다 전해집니다. 부적을 써 보시지요.”
현귀가 준 부적을 발동시키자, 나는 체내의 피가 끓어오르는 느낌을 받으며 눈에 태극(太極)이 깃드는 느낌을 받았다.
동시에 내 눈에 눈앞의 풍경과는 정반대의 광경이 펼쳐졌다.
화르르르륵―
시뻘건 염화가 곳곳에서 타오르고 있었다.
방금 전까지 흐르고 있던 강물은 모조리 말라붙어 있었고, 대신 살아 있는 듯한 불길이 강물 대신 용암처럼 흐르고 있었다.
하늘은 맑지 않았고, 시커먼 연기로 가득 차 있었으며, 매캐한 냄새가 절로 후각을 자극해 왔다.
나는 천지심 어떤 감각으로도 알아차릴 수 없던 방금의 환상에 놀랐으며, 부적 하나로 이 환상을 뚫어 낸 현귀의 실력에 다시 놀랐다.
[이 부적은 뭐요?]“별것 아닙니다. 선수혈통의 힘을 잠시 대상에게 부여해 주는 부적이지요. 선수들이 가진 태극의 이치를 눈에 집중시켜 영안을 잠시 틔우는 방법입니다. 선수 혈통을 지닌 자라면 사실 누구나 할 수 있는 잔재주일 뿐이지요. 아는 분만 아는 사실일 뿐이지만 말입니다.”
주변을 둘러보자, 흑린어령문의 인원들은 전부 흑룡 진혈을 끌어올려 눈에 태극을 띄워 놓았다.
‘헌원의 것과 비슷하군.’
헌원의 영안 역시, 감(監) 자를 제하면 이들의 영안과 비슷한 느낌이었었다.
‘헌원도 뭔가 선수진혈을 가진 건가?’
나는 그런 생각을 해 보며 주변으로 한기를 내뿜었다.
치이이이이―
주변의 불꽃들이 내가 내뿜는 귀기에 의해 잠시 사그라들었다.
“감사합니다, 선배님. 그럼 저희의 목표를 설명해 드리자면, 저희 흑린어령문이 현음의 손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3층 봉양층에 있는 천련과와, 그곳에 있는 증룡진인이 직접 그린 식죄탱화도(識罪幀畫圖) 한 장이 필요합니다. 다만 3층인 봉양층에 가는 건 그 자체로 어마어마한 고난이도이며, 보시다시피 이런 불꽃이 상층으로 갈수록 강해집니다. 특히 3층으로 넘어가는 길목에는 재염(災炎)이라고 불리는 ‘살아 있는 불꽃’이 있습니다.”
그의 말이 이어졌다.
“재염은 그 자체로 하나의 재액이 불꽃의 형상을 빌어 태어난 생명체입니다. 아주 오래전 증룡진인과 힘을 겨뤘던 진마계의 어떤 존재의 악념과 증오로 인해 태어난 강력한 저주가 바로 재염의 정체이지요. 선배께서는 저주문으로 재염을 제압해 주시면, 그 사이 저희가 술법으로 재염을 꺼뜨리겠습니다.”
[재염을 제압하는 게 내가 할 일인 거요?]“그렇습니다. 물론 3층에도 저주가 꽤 남아 있어 선배님이 조금 수고를 해 주셔야겠지만, 선배님께서 해 주셔야 할 가장 큰 임무는 재염의 제압입니다.”
[알겠소. 해 보도록 하지.]우리는 불꽃이 흐르는 강을 헤쳐 나가기 시작했다.
* * *
거대한 고궁의 앞.
저물도의 진짜 입구.
서립과 현귀 일행이 지나친 그곳에, 하나둘 다른 이들이 모여들기 시작했다.
천족 사축기 수사인 녹주와 백위익이 가장 먼저 도착해 주변을 둘러보았다.
“아무래도 우리가 가장 먼저 도착한 것 같군.”
“그러게 말이오. 지족 놈들은 천기를 직접 읽을 수 없으니 한참 걸릴 테고, 다른 천족들도 별자리를 읽는 방법은 모르니 가사 상태에 들어갔다 나왔다를 반복하는 중일 터니 말이오.”
백위익은 코웃음을 치며 다른 이들을 비웃었다.
장목족의 녹주가 팔짱을 끼며 웃었다.
“천족 이두인 우리 장목족이나, 그대들 비익족. 그중에서도 고귀한 혈통을 지닌 가문의 수사들에게만 내려오는 것이 이 방식일진대 어느 누가 이런 방식으로 빨리 도착하겠소. 대부분 진법에 관한 별자리를 해석하는 방법조차 모를 터인데.”
“하하, 물론이지요. 다행히 그 무시무시한 인간족 노괴도 아직 도착하지 않았을 테니, 얼른 들어갑시다. 그 노괴가 익힌 귀도공법이라면 빠르게 가사 상태에 접어들어 허점을 찾아 이쪽으로 오고 있을 겁니다.”
“그러지요. 얼른 갑시다.”
두 사축기 수사가 들어간 이후, 얼마 지나지 않아 교염과 요족 무리가 고궁의 앞에 도착했다.
요족 무리는 대다수가 상처를 입은 듯이 안색이 파리해져 있었고, 핏자국이 묻어 있었다.
“자, 그럼 모두 들어가자. 얼른 안으로 들어가야 기물들을 선점할 수 있다.”
교염의 말에, 요족들이 앓는 소리를 냈다.
“어르신, 송구하오나 다들 가사 상태에 강제로 들었다 나오기를 반복한 탓에 매우 생명력이 떨어져 있습니다. 반나절만 휴식하고 진입하게 해 주십시오.”
“맞습니다, 어르신. 어르신의 말씀대로 하나같이 가사 상태에 들었으니 조금만 시간을 주시면….”
그 말을 들은 교염의 눈에서 시뻘건 혈화가 뿜어졌다.
“이 반동 놈의 자식들이… 감히 내 탓이라는 게냐?”
“아, 아니, 그것이 아니오라….”
“닥쳐라! 내 말하지 않았느냐! 우리 지족이 간악한 천족 노괴들 앞에서 살아남으려면 뭉쳐야 한다고! 지금 우리 무리의 화합을 깨서 지족을 천족에게 패배하게 하려는 발언을 하는 걸 보니, 네놈은 심족 첩자가 틀림없으렷다!”
“아니, 어르신. 그게 무슨….”
“죽어라, 심족 첩자 놈들!”
콰드득!
퍼벙!
교염의 일 수에, 그에게 항의하던 요수 두 명이 그대로 한 줌 육편이 되어 터져 나갔다.
그의 흉악한 태도에, 요족 무리는 모두 숨을 죽이고 움츠렸다.
교염은 혈교족 특유의 날카로운 이빨을 드러내며 으르렁거렸다.
“앞으로 우리 지족의 화합에 이의를 제기하는 반동은, 간악한 심족 첩자로 간주하고 즉시 참하겠다. 이는 모두 우리 지족이 천족 노괴들로부터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함이니 그 대의를 이해하라! 알겠는가!?”
“예, 어르신!”
요족 무리로부터 공포에 질린 감정이 섞인 대답이 튀어나왔다.
교염은 만족스러운 듯 요족 무리를 이끌고 고궁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기타 엽타족, 한령족, 영린족 등의 천족이 도착한 것은 그로부터 한나절은 더 지난 후였다.
* * *
치이이이―
나는 내 귀체가 내뿜는 한기로 주변의 열기를 식히며, 현귀와 함께 선두에 서서 걸어갔다.
그리고 우리 주변으로 흑린어령문의 천인기 수사들이 모여 흑룡진혈을 사용해서 흑룡진혈의 음기로 열기를 식혔다.
그러나 수류층 전체에 흐르는 불꽃과 열기는 그칠 줄을 몰라, 우리가 열기를 식히며 지나가도 다시금 불꽃이 그 자리를 메웠다.
그러나, 흑린어령문 수사들은 그것만으로도 부족했는지 본인들이 지나온 자리에 함정 같은 것을 잔뜩 깔아 두며 나아가고 있었다.
‘왜 인족이 탐욕스럽고 악랄하다고 불리는지 알겠군.’
뒤쪽에서 오는 다른 이종족 수도자들은 수류층의 열기에 더해 흑린어령문 수도자들의 함정까지 밟으며 나아가야 했으니 피똥을 쌀 터였다.
무슨 함정인지 물어볼까 했으나, 어차피 내가 알 필요는 없으리라 생각되어 그냥 무시하기로 했다.
수류층은 층 전체에 어떤 금제가 걸려 있어, 비둔술은 물론이고 인력을 통한 비행도 쉽지 않았기에 걸어서 빠져나가야 했으니 저 함정을 밟은 이후 이종족들이 무슨 반응일지가 궁금해질 뿐이었다.
[키에에에엑!]심지어 곳곳에서는 불타는 부정형의 괴물들이 우리에게 달려들어 불꽃을 뿜었다.
“화시(火尸)라고 불리는 것들입니다. 상고 요수라고 전해집니다만, 실상은 증룡진인의 살점 조각이지요.”
[어디서 본 느낌인데….]“하하, 이전에 보셨던 본문의 입구를 지키는 흉수, 비(泌)가 바로 이 화시를 잡아 연구해서 만든 것이랍니다. 공허간을 나도는 대다수의 시(尸)는 잡아도 별 쓸모가 없지만, 이 화시의 경우….”
푸콱!
현귀가 손을 휘둘러 화시 한 마리를 터트렸다.
화시는 비명을 지르며 소멸했다.
‘공허간의 시들과는 많이 다르군. 그놈들은 잡아도 잡아도 쉽게 죽지 않았는데….’
아무래도 현귀가 가진 선수진혈의 음기 때문에 쉽게 제압되는 것 같았다.
음기가 확실한 약점이었다.
그리고, 나는 소멸한 화시의 중심에서 뭔가를 발견했다.
‘음?’
치이이이―
죽은 화시는 작은 구름 같은 뭔가를 남겼다.
현귀는 주변의 연기에 구름이 증발하기 전.
바로 본인의 저물도에서 호리병 법보를 꺼내 뚜껑을 열고 구름에 가져다 대었다.
슈르륵―
구름은 작은 액체 한 방울로 압축되어 호리병에 빨려 들어갔다.
구름을 빨아들인 현귀가 설명해 주었다.
“이곳의 화시들은 수류층이 원래 머금었던 근원적인 물의 힘을 머금고 있습니다. 오래전 진마계의 어떤 존재에 의해 오염된 힘이라 저희는 마탁액이라 부릅니다. 비록 마기와 사기, 탁기에 오염된 힘이지만 오히려 마공을 익힌 마수들에게는 최상의 법보 재료지요. 저희의 비 역시 이 마탁액을 주입해서 만들었지요.”
그는 빙긋 웃으며 내게 호리병을 내밀었다.
“한번 잡숴 보시겠습니까? 마공을 익힌 수도자들에겐 특수한 신통을 선사한다는 풍문이 있습니다만.”
[으음, 사양하겠소. 내 공법과는 그리 안 맞는 액체인 거 같군.]나는 이 액체에 깃든 악념과 탁기, 사기를 느끼며 거절했다.
아무리 마공에 도움이 된다고 해도 저런 탁기를 지니고 있는 걸 함부로 흡입하면 정신에 문제가 생길 수도 있었다.
내 말에 현귀는 다시 빙긋 웃으며 말했다.
“하면 이 마탁액은 저희 흑린어령문에서 챙겨 가겠습니다. 괜찮으시지요?”
[마음대로 하시오.]그렇게 우리는 화시들을 보이는 족족 죽이고 마탁액을 얻어 가며 전진했다.
[증룡진인의 저물도라더니, 뭔가 기물들 같은 건 없는 거요?]“하하, 수류층은 일종의 도원도로, 본래 증룡진인의 수하들 및 증룡진인의 애완 종족들을 사육하던 곳입니다. 지금은 영수들과 애완 종족들의 잔해가 모조리 화시들에게 잡아먹히고 재가 된 상태라 볼 게 없지요. 아, 물론….”
화르르르르―
현귀를 따라 수류층을 나아가길 얼마나 되었을까, 우리는 어느새 커다란 분지 형태의 장소에 도착했다.
분지 전체가 불꽃에 휩싸여 불타고 있었는데, 분지 안쪽에는 무너진 듯한 석조 건물들이 꽤 보였다.
“증룡진인의 애완 종족들이 지내던 터전에는 그들이 사용하던 법구나 영약이 남아있긴 합니다. 지난번에 왔을 때 조사해 본 겁니다만, 이곳은 투귀족을 사육하던 장소지요.”
우리는 석조 건물로 들어갔다.
석조 건물의 안쪽은 불꽃이 타오르고 있지 않았고, 꽤 선선하기까지 했다.
곳곳에 걸린 진법이 불꽃의 침범을 막는 듯했다.
“지난번에도 한 번 뒤져 본 곳입니다만, 그때 못 찾은 게 있을 수 있으니 한번 전체적으로 훑어보도록 하지요.”
현귀의 말에 흑린어령문 수사들은 뿔뿔이 흩어져 석조 건물을 뒤졌고, 나 역시 잠시 떨어져 석조 건물을 둘러보았다.
그러나 지난번 와서 뒤졌다는 게 허언은 아닌 듯 딱히 찾을 수 있는 건 없었다.
‘흐음, 별로 눈에 띄는 건 없나….’
그때였다.
나는 문득 석조 건물 곳곳에 기묘한 흠 같은 게 있는 걸 알아챘다.
‘뭐지? 금? 틈? 그냥 노화되어 쪼개진 건가?’
그러나 나는 이 틈들에 뭔가 규칙이 있다는 걸 알아챘다.
나는 석조 건물의 침실로 보이는 곳을 벅벅 긁어 내며 뒤지고 있는 흑린어령문 수사 한 명에게 질문했다.
[이보시게, 혹시 이 금의 정체를 아는가? 무슨 진법이라든가… 어째 규칙성이 조금 있는 것 같은데.]“아, 그거 말입니까. 저희도 잘은 모르겠습니다. 영기도 흘려 보고, 그 틈새들에 따라서 진법도 그려 봤는데 영 뭔가를 발견하긴 쉽지 않더군요. 그냥 아무 의미 없는, 이 건물에서 지낸 투귀족 생존자의 마지막 발악이지 싶습니다.”
[음… 알겠네.]의념을 보아 진짜로 이게 뭔지 모르는 것 같았다.
나는 선들을 따라가 보며, 이 선들이 석조 건물 전체에 그어져 있음을 보았다.
‘도대체 뭐지?’
아무리 봐도 이해할 수가 없었다.
나는 선 하나를 향해 손을 뻗어 다른 선과 이어 보려 했다.
그때였다.
[…잠깐.]치이이이이―
나는 즉시 귀왕화를 푼 후 인간형으로 몸을 돌렸다.
“…이 선들….”
츠츠츳―
나는 귀기를 뭉쳐, 한 자루의 귀검을 만들어 냈다.
그런 후, 선들을 따라 검의 끝을 움직여 보기 시작했다.
‘아….’
석조 건물의 구조도, 그리고 실선들의 배치는 이미 뇌리에 남아 있었다.
나는 검을 움직여 보다 말고, 손을 띄워 강환을 만들어 냈다.
그런 후 의식을 집중시키며 강환을 석조 건물의 복도를 따라 이동시켰다.
‘그렇군, 이건….’
검진(劍陣)이었다.
비검 법기를 활용하는 검진의 흔적.
그러나, 나는 이 검진이 홍수령의 것과 같이 무학의 깨달음에 맞닿아 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아니, 무공의 깨달음 정도가 아니다. 이건….’
심족.
이 석조 건물을 사용했던 투귀족은, 틀림없이 본인이 심족이기도 했으리라.
난 강환으로 만든 의념 분신으로 석조 건물을 거닐며, 내가 석조 건물에서 검진을 펼치는 염상을 해 보았다.
검과 검이 얽힌다.
검들이 꼬여 진법을 이루고, 그 경로가 얽혀 공간을 장악한다.
특이하게도 이 검진은 비좁은 장소.
복도나 실내에서 쓰는 것에 특화된 검진이었다.
머릿속으로 이 검진을 펼쳤을 때의 위력이 상상되었다.
복도 전체가, 방 하나하나가 전부 빛의 폭풍에 휘말린다.
누구든지 이 건물에 들어온다면 결코 쉬이 바깥으로 도망칠 수 없다.
검으로 이뤄진 빛의 폭풍에 휩쓸려 갈려 버릴 것이다.
검기(劍氣)가 벽과 벽에 부딪히며 다시 튕겨 나온다.
그리고 허공에서 쪼개지고, 연사되며, 증폭되리라.
나는, 이 검진에서 의념의 흐름을 느꼈다.
‘아아….’
찌릿, 찌릿….
뭔가가, 해석될 듯 말 듯했다.
이 검진을 남긴 누군가는, 이 검진을 통해.
이 검진을 펼치며 생겨나는 의념의 흐름을 통해 어떠한 전언을 전하려 하는 듯했다.
하지만 나는 그 전언을 읽을 수 없었다.
‘제기랄! 왜 안 된다는 거냐!’
겁천의 시야는 아직 가지고 있다.
그런데도 부족하단 말인가!?
나는 탄성을 내뱉으며, 어쩐지 억울함과 분한 기분이 들어 나도 모르게 눈물을 한 방울 흘렸다.
* * *
유리로 이뤄진 검산(劍山).
그 위쪽.
백의의 남성이 눈을 반개했다.
스릉―
그의 주변으로 검기가 몰아치는 듯했다.
그의 검기는, 놀랍게도 서립이 보았던 검진의 검기와 완전히 같았다.
백의의 남성, 서은현은 천천히 고개를 들어 검진을 바라보았다.
그것은 검진이었지만, 오직 서은현의 눈에만 전혀 다른 형상으로 보여 나타났다.
그것은 머리에 새끼손가락만 한 뿔이 돋아난 근육질의 노인이었다.
―연자여, 언제가 될지는 모르겠지만 그대가 나를 본다는 것은, 나와 같은 경지의 심족이 다시 탄생했다는 것이겠지.
서은현의 의지에 따라 검진이 전개된다.
동시에 노인이 전언을 이어 갔다.
―타락한 판관의 침략에도 진인의 은혜가 있어 투귀족의 명맥은 이어 가겠지만, 우리 심족은. 그래, 우리의 기(技). 자네들은 뭐라고 부를지 모르지만, 우리의 혼(魂)은 흥망성쇠를 거듭하며 명맥이 끊길 터라네.
알아듣기 힘든 말.
그러나 서은현은 알아들었다.
무(武).
혹은 누군가는 투혼(鬪魂)이라 부르는 것.
서은현은 노인의 말을 무(武)로 해석하였다.
노인은 무(武)의 명맥이 끊기는 것을 걱정하고 있었다.
―나는 몰랐으나, 진인의 말에 의하면 무의 흥망성쇠는 아주 오래전부터 반복되어 온 일이라 하더군. 어떤 계기가 생기면 그에 의해 심족들이 우후죽순 생기고, 어떤 계기가 사라지면 반대로 하나둘 사라져 가다가 쇠락한다고. 그렇기에 심족은 늘 후대를 얻지 못해 금세 쇠락하곤 하지. 그리고 나는 지금 그 ‘계기’가 사라져 감을 인지했네.
노인의 표정이 씁쓸해졌다.
―심족의 힘이, 그 근간부터 어느 순간 ‘막혀’ 버렸네. 더 이상 투보를 사용하는 게 불가능해졌어. 1계도, 2계도, 3계도, 평생을 바쳐 도달한 4계도 말일세.
말을 잇는 노인은 점차 울적해지는 것 같았다.
그러나, 울적해질지언정 그의 눈빛은 죽지 않았다.
―연자여, 그대가 나를 동정할 수도 있네. 그리고 어쩌면 본인의 일이 될 수도 있다고 두려워할 수도 있네. 하지만 연자여, 내가 검진을 남긴 이유를 알겠나.
점차 울적해진 목소리가 잦아들고, 그의 눈빛이 더더욱 형형해졌다.
―심족의 힘은, 무(武)는! 누군가에게서 빌리는 힘이 아니야. 근간이 막힌다고 해서, 무를 위해 평생을 바쳐 온 내 모든 것이 사라지진 않는단 말이다!
처음에는 검진과 조금 분리된 환상처럼 보였던 노인이, 점차 검진과 하나 되기 시작했다.
―심족이 쇠락한다고 해도, 내 무는 죽지 않았다! 하늘이 허락하지 않는다 해도….
츠츠츠츠츳!
노인은 검진에 녹아들었다.
그는 검진이 되었다.
―우리의 의지는, 절대로 죽지 않아!
“좋군.”
서은현은 담담하게 검진을 향해 달려들었다.
분명 서은현의 손으로 만든 검진이었건만, 검진은 마치 의식을 가진 것처럼 서은현에게 달려들었다.
서은현과 검진이 부딪쳤다.
검진은 서은현과 부딪쳐 그대로 흩어졌다.
하지만 검진에 담긴 검의(劍意)는 유리의 검산에 녹아들었다.
* * *
나는 눈을 감으며 이전 시대의 거인에게 예를 취했다.
양수진은 말했다.
심족이야말로 진정 우리 모두가 운명의 노예이자 비인간이라는 증거라고.
오직 종명자가 나타날 때에만 생겨나고, 종명자가 사라지면 없어지는 존재라고.
그렇다면, 종명자가 없어진 후의 심족들은 힘을 잃게 되는가?
심상을 비출 수 없게 되는가?
그럴지도 몰랐다.
하지만, 나는 노인의 말을 가슴에 담았다.
―우리의 의지는, 절대로 죽지 않아!
종명자가 사라졌음에도, 그는 무를 갈고닦았던 한 명의 당당한 무인(武人)이었다.
비록 무(武)가 아닌 다른 호칭이었다고 해도, 사람의 의지는, 사람의 마음은 그대로 끝나지 않는다는 것을 증명한 것이다.
심족이 운명의 노예라?
웃기지도 않는 소리다.
이 세상 누구도 운명의 노예는 없다.
오직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만이 이 세상에 존재할 뿐.
“그러니, 서휼. 너도 내 마음을 언제까지고 노예로 삼아 가둘 수는 없겠지.”
나는 하늘을 바라보며, 아직도 뭐라 뭐라 혼잣말을 지껄이며 열심히 애를 쓰고 있는 서휼을 향해 읊조렸다.
“기다려라. 곧 벗어나 주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