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 Regressor’s Tale of Cultivation RAW novel - Chapter (322)
잘 가라 (2)
왈칵!
동시에 내 칠공에서도 피가 분수처럼 터져 나왔다.
‘제길….’
아니나 다를까, 선명(仙名)은 내게도 영향이 심각했다.
당장이라도 쓰러지고 싶을 정도로 다리가 덜덜 떨리고 고통스럽다.
하지만 죽지는 않는다.
홍범이 내게 다가와 산공독의 해독제와 기력 회복에 도움이 되는 약을 주었다.
‘서립도 대단하긴 하군.’
내가 항상 서립의 심상을 엿볼 수 있었던 건 아니기에 그의 모든 걸 알지는 못했다.
하지만 그래도 상당히 자주 그를 엿보았는데, 내가 안 보는 그 짧은 틈새에 홍범에게 명을 내려 대기시켜 놓다니 뛰어난 판단력이었다.
나는 해독제와 약을 받아먹으며 몸을 회복한 후 서휼을 바라보았다.
전투 중에는 나 역시 위험하기에 사용할 수 없다.
그럼 그렇다고 전투 중이 아닐 때 다른 이들에게 쉽게 쓸 수 있느냐 하면, 그 역시 아니었다.
‘오직 증룡진인의 저물도 안쪽, 해녕의 눈물인 청린갑을 지니고 있기에 가능한 거지.’
진선의 이름은 편리한 도구가 아니다.
자칫하면 내가 먹힐 수 있는 독(毒)이었다.
그게 설사 영멸해서 다시는 부활할 수 없는 존재의 것일지라도.
내가 ‘해녕’의 이름을 입에 담을 수 있는 건 단순히 그의 신체 일부인 청린갑이 있고, 그리고 그의 수하인 증룡진인의 이계 안쪽이기에 약간의 특혜를 받는 것이었다.
아마 해녕이 아니라 유호덕이나 유수련 등을 입에 담았다면 이 정도로 끝나지 않고 더 위험했을 터였다.
겁천 너머의 경계를 밟기 시작하며 서립의 심상을 엿볼 수 있게 된 덕에 그를 통해 정보를 얻을 수 있었다.
처음에는 그 [이름]을 보는 순간 죽는 줄 알았지만 다행히 심상을 집중시켜 미치지 않을 수 있었다.
나는 땀을 훔쳤다.
함부로 진선의 이름을 입에 담아서일까, 상당히 더운 것 같았다.
물론, 서휼 같은 경우는 상당히 치명적이었는지 얼굴은 웃고 있었으나 안색이 벌써 새하얘져 있었다.
‘그렇군.’
나는 그 모습을 보며 정보를 얻어 낼 수 있었다.
서휼은 지금 다른 ‘서휼’에게 영향력을 떠넘긴다든가 하는 일은 하지 못한다.
그 말인즉, 여기서 일어나는 모든 고통과 고문은 오로지 본인의 의지로만 견뎌야 하는 것이었다.
‘그 말은 곧, 다른 서휼들과 연결이 끊겼다는 의미기도 하지.’
이 녀석은 버림 패다.
서휼 자신으로부터 버림받은 서휼의 버림 패.
“내가 묻는 것에 답해라.”
“사실만을 말하겠습니다.”
푸콱!
나는 서휼의 몸에 흑색귀주번을 박아 넣었다.
“거짓을 말할 때마다 흑색귀주번을 박겠다.”
“후후, 사실을 말해도 박으면 어찌해야 합니까.”
푸욱!
“대단하군. 어떤 의미로는… 이미 버려졌는데도 그런 오기를 보이다니.”
“버려졌다니요, 무슨 말씀이신지?”
“다른 서휼들과 연결이 끊겼잖나.”
“후후, 오해하시는군요.”
서휼이 빙긋 웃었다.
“버려진 게 아닙니다. ‘남겨 둔’ 거지요.”
“….”
“오직 저 하나를 희생시켜서 서 도우를 손에 넣을 수 있다면 상당한 이득이 아닙니까? 만약 제가 성공하지 못해도 서 도우에게 재밌는 정보를 몇 가지 알려 드릴 수도 있으니….”
푸콱!
“뭐, 네가 버려진 게 아니라고 치자. 하지만 네가 ‘남겨진’ 목적은 제대로 말해야 할 거다.”
“후후, 재밌는 사실을 알려 드릴까요?”
“헛소리 말고, 네가 남겨진 목적을 말해라.”
푸욱!
“우선 서 도우. 도우의 만상인연도 안을 들여다보았을 때 제가 무얼 보았는지 아십니까?”
“입에서 ‘소’나 ‘염’ 자가 나오면 머리를 터트리겠다.”
“아, 그런 건 아닙니다. 서 도우는… 본인의 만상인연도 안에 ‘누군가’가 들어와 계시는 걸 알고 계십니까?”
“뭐?”
흠칫!
나는 그 말에 등골이 시린 느낌이었다.
주변은 점차 더워지고 있었지만 오싹한 한기가 뒤통수를 핥는 느낌이었다.
‘만상인연도 안에, ‘누군가’가 들어 있다고?’
나는 녀석을 노려보았다.
“홍범.”
내가 홍범에게 신호를 보내자, 홍범이 다가와 서휼의 머리통을 움켜잡고 투명한 무언가를 불어넣었다.
“무형지독을 불어넣었습니다. 독을 통해서 이 자가 받는 자극을 조정할 수 있습니다.”
“자백제 효과도 낼 수 있나?”
“충분하지요. 뇌를 직접 주무르기에 일반적인 자백제의 최소 백 배의 효과를 낼 수 있습니다.”
“사축기 수사에게 백 배로 충분한가?”
“의식을 직접적으로 건드리는 종류이기에 충분하지요.”
치이이이―
서휼의 칠공에서 새하얀 김이 새어 나왔다.
녀석의 눈이 조금 풀리는 것처럼 보였다.
“만상인연도 안에 ‘누가’ 있다는 말이 사실이냐?
나는 의념의 시야를 극도로 활성화시키며 질문했다.
정말로 자백을 토해 내게 할 수는 없지만 자백제의 효과로 의념을 더 잘 드러나게 할 수는 있다.
그리하면 진실과 거짓을 분간하는 건 더 쉬워질 터였다.
서휼은 조금 몽롱해진 목소리로 빙긋 웃으며 말했다.
“어떤 [여인]이 들어 있더군요.”
오싹!
나는 그 말에 소름이 돋는 걸 느꼈다.
‘거짓말이 아니다.’
그렇다면 도대체 어떤 존재이길래 내 만상인연도에 그리 쉽게 침범할 수 있단 말인가?
십중팔구 초월적인 존재일 터.
그리고 내가 아는 초월적인 존재 중 여성형은 하나밖에 없었다.
‘정려!’
얼굴을 볼 수 없던 백발의 천녀(天女).
천벌의 주인이 가진 선보(仙寶).
금신천뢰문의 신물, 천뢰번!
‘그 존재가 아직도 나를 주시하고 있단 말인가!’
아무래도 정려의 앞에서 내가 깊은 인상을 남겼던 듯했다.
‘여러모로 깊은 인상을 남기긴 했지.’
하지만 그래도 아직까지 나를 주시하고 있을 정도라니!
그것도 만상인연도 내부에 몰래 들어와 감시하고 있었다니.
등골이 오싹해질 수밖에 없는….
‘…아니, 잠깐.’
왜 그럼 번개가 아니라 소금이 된 거지?
‘이 자식이, 또 내게 거짓말을 한 건가.’
왠지 열이 뻗친다.
아까부터 점차 주변이 뜨거워지고 있는 탓일까, 머리가 시뻘게지는 듯한 착각이 들었다.
일단 나는 흑색귀주번을 한 번 더 박았다.
푸욱!
“거짓을 말하면 깃발을 박는다 말했다.”
“사실이었는데 말입니다….”
“제대로 말해라. 그 [여자]는 어떤 존재지?”
서휼은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
“어떤 존재냐고요? 후후…. 서 도우의 만상인연도… 제가 그 안에서 당신의 [기둥]으로 착각한 존재이지요.”
푸콱!
사실을 말하는 것 같았지만 말꼬리를 늘이는 게 마음에 안 들어서 흑색귀주번을 박았다.
서휼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말했다.
“당신의 만상인연도가, 그 [여자]를 첩첩이 둘러싸고 보호하고 있더군요.”
“뭐?”
‘어떻게 그런 게 가능한 거지?’
어떻게 타인이 내 만상인연도에게 보호받는단 말인가?
그가 눈웃음을 흘렸다.
“그 말인즉, 그 [여자]는 당신의 만상인연도에 있어 소중한 존재라는 뜻이지요. 맞습니까?”
“그래서 어떤 존재냐고 물었다.”
“후후, 그 [여자]에겐 이미 저를 심어 두었습니다. 실존하는 존재이니, 몇천 년만 있으면 천천히 제게 잡아먹힐 테지요.”
“그러니까 네 화법에 의하면 아직 심어 두지도 못했고, 나를 떠보려고 그런 질문을 한다는 거로군.”
푸콱, 푸콱, 푸콱!
나는 의념의 흐름 및 안색을 단단히 굳히며 그에게 물었다.
“마지막으로 묻겠다. 그 [여자]가 누구냐 물었다.”
키이이잉!
서휼의 목적은 분명했다.
이 녀석이 이곳에 남겨진 것은, 나를 세뇌할 수 있을지 없을지를 알아보는 것.
그리고 교언영색으로 내게 혼란을 주는 것과 더불어, 내게 있어 중요한 것이 뭔지를 파악하려는 것 같았다.
하지만 불가능할 것이다.
파아앗!
내 심상이 검으로 벼려진다.
동시에 내 일 검이 서휼에게 쏟아지며, 녀석의 안쪽에 검으로 틀어박혔다.
완전한 혼의 계위에 걸친 일격.
내 일 검은 놈의 심상에 틀어박히는 동시에 녀석이 다른 탁혼만천의 서휼들과 연결되는 것을 봉인해 버렸다.
‘이것으로, 이 녀석은 내 앞에서는 절대 다른 서휼들에게 정보를 전달할 수 없다.’
녀석이 뭔가 나에 대해 정보를 얻어도 무의미한 일이라는 뜻이었다.
서휼 역시 내가 자신의 의식에 뭔가 한 것을 알아챘는지 눈매를 꿈틀거렸다.
“후후, 귀찮게 되었군요.”
“네가 정녕 [해녕] 맛을 더 보고 싶나 보구나.”
“끄윽!”
왈칵!
서휼이 또다시 피 분수를 뿜었다.
그러나 그는 빙긋 웃으며 말했다.
“선수 해태의 진명이 그것인가 보군요. 후후….”
“그런 셈이지.”
“그러고 보니 생각나는군요. 서 도우는 혈음계의 법술이나 명귀계의 법술의 공통점에 대해서 알고 계십니까?”
콰드드득!
나는 흑색귀주번을 한 무더기 소환해서 서휼의 등짝에 박았다.
고환 적출과 6만 배 고통, 진선 이름을 들었던 고통을 듬뿍 담은 고통들이다.
서휼은 확실히 버티기가 힘들었는지 신음을 흘렸다.
“자꾸 말 돌리지 마라. [여자]가 누구냐 물었지 않았나.”
“혈음계와 명귀계의 법술은 둘 다 강력하지요. 둘의 공통점은… 둘 다 ‘힘을 빌린다’라는 것입니다. 명귀계의 귀도공법은 [명계]의 힘을 빌리는 공법과 법술들이고, 혈음계의 공법들은 [혈음]의 힘을 빌린다는 공통점이 있지요.”
그가 은근한 미소를 지었다.
“이 자식이 자꾸….”
“고계 공법일수록, 고계 법술일수록 힘을 빌리는 정도는 더더욱 강해집니다. 그리고 제 혈제비식 같은 경우. 혈음에게서 직접 비롯된 마술(魔術)이지요.”
“….”
나는 놈을 노려보며 혹시 모를 때를 대비한 기수식을 취했다.
이놈이 말하는 게 어째 불길하다.
“원래는 서 도우와 싸울 때 혈음계의 마술은 사용하지 않으려 했습니다. 왜냐하면, 혈음은 업화(業火)의 원주인이며, 이곳에서 혈음의 힘을 빌리는 마술을 사용하면 그 힘에 자극받아 업화가 어찌 날뛸지 모르기 때문이지요.”
그가 빙긋 웃으며 내게 말했다.
“당신이 입고 계신 청루가, 뭘 봉인하고 있었는지 모르시는 겁니까?”
“뭣…!”
그리고, 그와 동시에 나는 전신이 후끈해지는 느낌을 받았다.
‘이, 이건…!’
치이이이―
청린갑이 떨어지자 불길이 꺼지고 강줄기가 치솟던 수류층의 기온이, 갑자기 올라가기 시작했다.
아니, 아니다.
생각해 보면, 분명 모든 불길이 꺼졌을 수류층의 기온이 ‘아까부터’ 차근차근 올라가고 있었다.
콰르르르르르!
그리고 나는 저 위쪽.
봉양층에서부터 시뻘건 염화가 미친 듯이 터져 오르는 걸 보았다.
‘이런 제길!’
나는 일단 서휼의 머리카락을 잡고, 다시 봉양층으로 뛰어 올라갔다.
화르르르르륵!
“끄으으으윽!”
어마어마한 불길이 나를 덮쳐 왔다.
뜨겁다!
그리고….
“끄아아아아악!”
아프다!
너무나도 고통스럽다!
이건 마치, 진정한 지옥의 불을 현세에 강림시킨 듯한 고통이었다!
“끄, 으으윽…. 후, 후…. 사후에 죄인들을 심판하기 위해… 만들…어진… 불꽃입…니다.”
서휼조차도 간신히 웃으며 말을 잇는다.
“보아하니, 꽤 죄업(罪業)을 많이 쌓으셨나 봅니다?”
“끄아아아아악!”
“당신의 죄업을 모조리 태워 심판하기 전까지, 그 불은 당신의 혼에 들러붙어 절대 꺼지지 않습니다. 당신의 뜻대로 통제할 수 있는 것도 아니며, 당신의 혼을 완전히 태워 안식에 들게 해 주지도 않습니다.”
서휼은 입술을 파르르 떨며 말했다.
“청린갑조차 불을 방어해 줄 수 있을 뿐, 한 번 붙은 불을 꺼뜨리진 못합니다. 왜냐하면 그 업화는 정당한 심판의 결과기 때문이지요. 법(灋)을 관장하는 선수 해태의 힘이라면 업화를 도우면 도왔지, 절대 꺼트릴 수는….”
“조용히 해라. 안 아픈 척하지 말고….”
나는 바닥에 엎어져 침을 질질 흘리며, 간신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미친 듯이 아프군….’
하지만 도리어 주변에 불꽃이 이렇게나 가득한데 고통이 증가되거나 하지는 않고 일정했다.
딱 ‘내가 지은 죄’만을 심판한다는 듯.
업화가 내 혼을 태우는 것이었다.
귓가에서 불꽃이 타는 소리가 비명이 되어 울렸다.
그 비명은 이전에 들어 본 것이었다.
내가 죽여 온 이들.
무림인 당시 죽였던 산적들, 사파 무림인들, 막리세가 축기기 마도 수도자들, 원립….
나는 그 비명들 속에서 내 생(生)을 되돌아보았다.
‘의외로 내가 직접 죽이거나 고문한 건 마도(魔道)들밖에 없군.’
그러나 그 역시 죄로 쳤는지, 업화는 나를 지글지글 태웠다.
난 청린갑을 들고 멀구슬나무 방향을 바라보았다.
호숫가의 물이 청린갑으로 활동하는 탓인지, 멀구슬나무 아래쪽에서부터 어마어마한 열기의 근원이 뿜어지고 있었다.
‘다시… 청린갑으로… 봉인해야….’
나는 고통에 몸을 떨면서도 한 발 한 발 멀구슬나무 쪽으로 발을 옮겼다.
이대로면 업화가 밖으로 빠져나가며 광한계 전체에 번질 수도 있었다.
그때였다.
갑자기 어느 순간 비명 소리들이 완전히 이질적인 소리로 변했다.
그건 비명이 아닌 절규와 신음에 찬 울부짖음이었다.
내가 죽인 이들이 아닌, 내게 간접적으로 피해를 본 이들의 원한과, 그로 인해 쌓인 죄업.
내가 죽인 사파 무림인의 가족, 그들의 식솔, 막리세가에서 일하던 이들 등….
내가 해 온 짓으로 인해 간접적으로 피해 입은 이들에 대한 죄업들이 나를 덮쳐 온다.
그리고 어느 순간.
내 귓가에는 다시는 기억하기 싫었던 속삭임이 들려왔다.
―귀의하나이다….
“…!”
그것은 한순간의 어리석음과 부족한 자제심으로 인해, 천인도 전체를 귀의시켜 버렸던 나의 실책.
그리고 그로 인해서 피해를 보았던 모든 인족의 고통과 원한에 대한 간접적인 죄업!
“끄아아아아아아!”
나는 더 이상 걸음을 옮기지도 못할 정도로 고통스러워 그 자리에 무릎을 꿇었다.
무겁다.
뜨겁다.
고통스럽다!
서휼은 웃고만 있었지, 더 고통스러워하는 것 같았지만 나 역시 만만치 않았다.
우리는 서로에 대한 견제조차 멈추고 어느새 자리에 쓰러져서 함께 비명을 지르고 있었다.
아프다!
너무나도 아프다!!!
그렇구나.
이것이….
‘이것이, 나의 죄업의 무게.’
나는 이를 악물었다.
비명을 지르지 않는다.
단순히 오기로 참는 게 아니었다.
다른 죄업의 고통들에 대해서는 할 말이 있었다.
그들은 하나같이 죽어 마땅한 자였고, 민생에 해를 끼치거나 악업을 자신의 낙으로 삼는 이들이었다.
그런 이들은 죽는 게 차라리 세상에 더 나은 존재들이었었다.
나는 의협이 아니고, 정의롭지도 않다.
내 눈앞에서 일어나는 일에 대해서만, 내 지인들에게 일어나는 일에 대해서만 선함을 베푼다.
나는 어쩌면 위선자라는 말이 어울리는 사람일지도 몰랐다.
그러나 그럴지라도 내 눈앞에서 일어나는 악업에 대해서는 할 수 있는 한 해결하려 하는 편이었고, 그들을 죽인 것 역시 그런 일의 일환이었다.
하지만 ‘이건’ 다르다.
명백한 나의 실책에 의한 죄업이다.
이것은 나의 죄다.
나의 악덕이고, 내가 마땅히 치러야 할 죗값이다.
내 삶의 흔적일진대 어찌 감히 부정한단 말인가.
나는 말없이 내 죗값을 받으며 묵묵히 고통을 삭였다.
정신이 혼미해질 정도로 고통스러웠지만 그냥 받아들였다.
명계의 수석판관장이 다뤘던 것으로 예상되는 권능인 탓일까.
나는 진선의 이름을 들은 것보다, 천벌의 주인을 직시했던 것보다도 더더욱 괴로운 것을 느꼈다.
진선의 직접적인 권능이다.
괴롭지 않은 게 이상하다.
그렇게 주저앉아만 있을 때였다.
저벅, 저벅….
내 몸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서립이었다.
‘서립, 너는… 아프지 않은 거냐?’
“이상하군, 서은현. 나는 왜인지… 고통스럽지 않다.”
‘…그렇군.’
왜인지는 알 것 같았다.
이건 서립의 죄가 아닌, 나의 죄였으니까.
서립은 딱히 큰 죄를 지은 적이 없다.
생긴 게 조금 기괴하긴 했지만 그걸 제하고는 태어나서 함부로 벌레 한 마리 죽여 본 적 없는 게 서립이었다.
“어쨌든 잠시만 참아라, 서은현. 나는 멀쩡한 것 같으니 내가 봉인하겠다.”
서립은 내 몸을 움직여 청린갑을 가지고 멀구슬나무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저벅, 저벅….
멀구슬나무가 가까워진다.
그리고, 서립은 멀구슬나무를 향해 청린갑을 던졌다.
촤아아아아!
곧이어 청린갑이 멀구슬나무 아래, 분지 쪽에 던져지자 순식간에 부풀어 오르며 원래대로 호수가 되어 분지를 채웠다.
촤아아아아―
차석판관장 고력진군의 힘에 의해, 수석판관장 명마진군의 권능이 잦아든다.
다시금 업화는 꺼졌고, 주변의 불길이 사그라들었다.
하지만, 나는 여전히 고통스러웠다.
“…!”
‘아직도, 고통이 줄질 않는다!’
나는 그 이유를 알 수 있었다.
너무나 당연한 사실.
‘내 혼에 붙은 업화는 아직 꺼지지 않았다.’
오직 나만을 태우기 위해 들러붙은 업화다.
내 죄업을 태우기 전에는 절대 사그라지지 않는다.
그리고 내 죄업.
내가 수억 이상의 인구가 사는 천인도를 증발시켰던 그 죄업은 결코 가벼운 죄업이 아니었다.
설사 직접 한 것이 아닌 간접적인 죄업일지라도 그 무게는 가벼이 볼 수 없다.
뿌드득….
나는 고통을 참으며 일어났다.
‘그렇다면, 받아들이자.’
느낌이 온다.
내 죄업을 태우기 전까지는, 이 업화는 회귀를 하더라도 따라온다.
정신이 혼미해질 것 같을 고통을 몇 번의 생을 걸쳐서 겪어야 하는 것이었다.
‘내 삶이고, 내 역사다.’
내가 기억해야 할 응분과 원한이다.
그렇다면 내가 기억하고 새겨야 하는 것이 맞겠지.
‘달게 받겠다.’
나는 마음속으로 완전히 나의 죄를 인정하고 고통을 받아들였다.
어차피 삶은 곧 고통.
여기에 고통 하나가 더 추가된들 무엇이 어떠하리!
그렇게 다짐했을 때였다.
파아아아앗!
나는 눈앞이 뿌예지며, 어떤 환영이 보이는 걸 느꼈다.
‘이건….’
멀구슬나무.
내 앞에 있던 멀구슬나무였다.
그러나 주변 풍경이 달랐다.
멀구슬나무는 호수의 중심에 있지 않고, 언덕의 위쪽에 있었다.
수많은 총천연색의 꽃들이 곳곳에 즐비한 아름다운 화원이었다.
내가 그 아름다운 광경에 넋을 잃었을 때였다.
쿠구구구구구!
“…!”
나는 멀구슬나무 뒤쪽에서 어마어마한 그림자를 보았다.
“허, 허억…!”
위대한 존재.
저분은 위대한 존재다.
‘귀, 귀의해야….’
나는 저도 모르게 넋을 잃고 눈앞의 존재에게 흡수될 뻔했다.
그러나 흠칫 놀라며 귀의당하지 않을 수 있었다.
“엇…!”
멀구슬나무 뒤쪽에 있던 거대한 그림자가 인간형의 크기로 줄어들었기 때문이었다.
‘아….’
느껴진다.
눈앞의 존재가 나를 배려해 줬단 것이.
동시에 나는 저 그림자에게서 굉장히 선하고 고결하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의 입장에서 나는 벌레나 다름없을 터인데, 벌레를 위하여 자신을 깎아 격을 맞춰 준 것이었다.
그렇게 생각할 때였다.
[그대는 벌레가 아니다.]인간형이 된 그림자가 내게 말을 걸었다.
“예, 예?”
나는 그 존재의 말에 흠칫 놀라서 되물었다.
[자신의 죄를 뉘우칠 수 있는 이는 누구든지 고결함을 품고 있는 존재지. 고결함을 가진 존재라면 그게 천존이든 벌레든 상관없이 존중받을 가치가 있다.]“….”
나는 그 그림자의 말에서 은은히 느껴지는 고귀함과 선함을 느꼈다.
“위대한 분께서는 누구이시고, 이곳은 어디입니까. 어쩐 일로 저를 부르셨습니까.”
[내가 부른 게 아니다. 그대가 들어온 게지.]그림자가 말했다.
[이곳은 내 업화의 권능 안쪽에 남겨 둔 내 기억 속 한 장면이다. 업화를 맞고 죄를 진심으로 뉘우치는 이만이 이곳에 들어오게 되어 있다. 그대는 본인의 발로 이곳에 들어온 것이다.]‘내 업화의 권능!?’
나는 그 말을 들으며 몸이 움츠러듦을 느꼈다.
그렇다면 저 존재는….
“혹시 위대한 분께서는….”
[내 이름은 유호덕.]어째서일까.
분명 진선의 본명이다. 그런데도 직접 들어도 아무렇지 않다.
나는 눈앞의 그림자가 자신을 깎아 가면서까지 나를 배려하며 ‘격’을 조절한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선악좌주(善惡座主), 명부 수석판관장 명마진군이란 이름들을 가졌었던 존재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