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 Regressor’s Tale of Cultivation RAW novel - Chapter (331)
축 (4)
빛이 사그라들고, 나는 몸이 만신창이가 되었음을 깨달았다.
‘젠장, 죽을 것 같군.’
하지만 기분만은 날아갈 것 같았다.
알 수 있었다.
서휼은 정말로 나에게 큰 피해를 입었다.
늘 거짓말을 하는 놈이었지만, 정말로 놈의 계획이 한참 뒤로 밀린 건 사실이었다.
놈이 그렇게 아끼던 오복축을 희생시켰기에, 다시 오복축을 구하러 다닐 테니 말이었다.
업화를 통해 놈에게 입힌 피해를 생각해 볼 때, 녀석은 한참 동안 전면에 모습을 드러내고 활동할 수 없으리라.
쿨럭, 쿨럭!
나는 피를 토해 내며 자리에 쓰러졌다.
저 멀리서 영린족 몇몇의 기척이 느껴졌다.
괴수들의 기척이 사그라드니 확인해 보려는 것 같다.
손가락 하나 까딱할 힘도 없었다.
영린족은 인족과 사이가 좋은 편은 아니니 아마 잡힌다면 썩 귀찮을 터.
물론 힘이 다 빠진 상태에서도 움직일 방도는 있었다만, 나는 계속 누워 있었다.
콰르릉!
적뢰가 번뜩이며 전명훈이 신경질 어린 표정으로 혀를 찼다.
“이 새끼… 제발 부탁인데 말 좀 하고 움직이면 덧나는 거냐?”
나를 통해서 서휼에게 붙은 업화는 전명훈의 안쪽에선 이미 꺼져 있었다.
본래는 나만 태우게 된 업화였지만 애초에 서휼이 ‘나’의 존재 자체를 차지하려는 방금의 상황이 특이한 것이었으니, 그에게서 업화가 꺼진 건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전명훈에게 붙어 날아온 홍범이 나를 부축해 들었다.
“일단 인족 영역으로 향하겠습니다만, 그 전에 응급 처치부터 좀 하지요.”
“뭘 응급 처치냐. 한숨 자면 다 낫는다.”
“사축기가 되셨다고 생명력만 믿고 날뛰시면 탈 납니다.”
홍범은 자신의 저물도에서 독액들을 꺼내서 즉석에서 섞고 뭔가를 배합하는 듯하더니 내 입에 흘려 넣었다.
순간적으로 몸에 활력이 돌며 재생력이 강해진 게 느껴졌다.
약독(藥毒)에 있어서만큼 대가에 오른 홍범이니만큼 상당한 약효를 자랑하는 듯했다.
“처치 완료했으면 이만 물러나지. 괜히 이종족 땅에서 이러고 있으면 위험할 수 있으니.”
전명훈은 나와 홍범의 뒷덜미를 잡고, 그대로 비둔술을 썼다.
콰르르릉!
우리는 한 줄기 붉은 번개 안쪽에 휩싸여 인족 영역을 향해 날아갔다.
그렇게 일주일이 지났다.
우리는 인족 영역에 도착해 시운도 명적에 정식으로 ‘재비승’을 등록하고, 전명훈은 금신천뢰문 원로의 이름으로 내 수배를 공식적으로 풀어 주었다.
그리고, 우리는 일단 뇌령도로 향했다.
콰르르릉!
지난 생에는 서휼에게 침식당하고, 서립의 몸으로 지내느라 찾지 못했다.
나는 전명훈과 함께 뇌령도 금신천뢰문의 잔해로 가, 홍수령이 죽은 곳으로 갔다.
장례식은 하계에서 진행했지만, 정작 그녀의 유해는 이곳에 있다.
저벅, 저벅….
내가 음혼귀주문을 통해 흙으로 돌려 버렸기 때문일까.
홍수령이 죽은 곳에는 그녀의 몸은 없다.
나는 그녀가 죽은 곳의 흙을 쓸었다.
이 흙이, 그녀의 유해다.
전명훈은 금소해의 동부를 찾아갔고, 홍범은 우리를 위해 잠시 자리를 비켜 주었다.
우드득―
목 속성 비술로 나무 삽을 생성한 나는, 천천히 땅을 파고, 그 땅에 홍수령의 몸이 녹아든 흙을 묻어 주었다.
그런 후 작은 봉분을 만들고, 그 앞에 앉아서 술을 따라 주었다.
“오랜만이다. 다시 왔다.”
쪼르륵….
생각해 보면 지난 생에 회귀하자마자 해 줬어야 할 일이었다.
하지만 서휼 때문에 생각도 하지 않고 넘어가 버렸다.
“거기는 편한가?”
대답은 없다.
“죽음의 신이, 우리한테는 냉정할지언정 타인들에겐 온화한 편이면 좋겠군.”
네가 죽음 이후에는 평안했으면 좋겠다.
넋두리는 추하고 구질구질해 보일 수 있다.
하지만 어쩌면 인간의 삶에는 그런 구질구질한 게 필요한 것일 수도 있다.
나는 얼마간 봉분 앞에서 두런대며 넋두리를 했다.
귀신의 한은 사람에게 전하지 못해 쌓인다.
나 역시 죽어도 죽지 못하는 귀신인 탓일까.
홍수령에게 혼잣말하듯 두런대는 것만으로도, 조금은 마음이 가벼워졌다.
저녁이 되었다.
나는 그제야 말을 마쳤다.
“…아무튼, 여러 일이 있었다.”
대답은 없다.
하지만 그래도 슬퍼질지언정 마음은 안정된다.
회귀가 고정되어, 홍수령의 인연은 시간 너머로 스러지지 않았으니까.
공망하게 사라지진 않았으니까.
나는 홍수령에게 인사를 하고 봉분이 있는 자리를 떠났다.
‘향화….’
만약 그녀가 죽은 후 회귀가 고정되었다면 어떨까.
그녀가 살아서 움직이진 못하겠지만, 그래도 나와 함께 인연을 보낸 ‘그’ 북향화는 사라지지 않는다.
문득, 지난 생 서립이 내게 남긴 마음을, 나를 동정한 그 마음을 떠올렸다.
―그의 육신은 흙이 되어도, 그의 혼은 회귀하여 영원히 삶을 반복할 것이다.
―그의 육신은 이곳에 남아도, 그의 혼은 다른 시간으로 가서 그를 기억해 온 인연들을 다시는 추억할 수 없게 될 것이다.
―오직 만상인연도에 저장한 기록들만이, 따뜻하되 쓸쓸하게 서은현을 위로해 줄 것이다.
부스스―
문득 자연스럽게 만상인연도가 내 주변으로 펼쳐졌다.
그리운 기억들이 잔뜩 남아 있다.
남들의 눈에는 그저 공망한 안개처럼 보이겠지만, 내게는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마음의 기둥들이다.
스륵―
나는 만상인연도 안에서 웃고 떠드는, 울고 눈물 흘리는, 피 흘리며 분노하는, 과거의 그들에게 손을 뻗었다.
너무나도 허무하게 내 손은 그를 통과했다.
그저, 기록일 뿐이니까.
“….”
나는 잠시 그를 쳐다보았다.
그리고 만상인연도 안쪽에서 짜증 나는 시선을 보았다.
서휼이었다.
어찌 되었든 놈도 이 안에 있었다.
―하하, 이런 무시무시한 술법을 만들어 놓고도 활용을 안 하셔서 제게 당하시다니, 억울하시겠습니다.
나는 놈을 바라보며, 그리고 만상인연도를 둘러보며, 이번 생의 목표를 정했다.
‘이번 생은….’
“만상인연도의… 비밀을 알아볼까.”
북향화는 어떻게 내 만상인연도에 접속했다는 건지.
지금도 이 안 어딘가에 들어와 있는 건지.
내 선수혈통과는 정확히 어떤 관계가 있는 건지.
또 만상인연도로 서휼의 탁혼만천에 대응할 수 있는지.
어쩌면 역 잠식을 통해 놈의 본체를 추적할 수 있을 가능성도 있으니, 만상인연도의 비밀을 알아보는 건 중요했다.
그리고 무엇보다.
사라락―
나는 허무하게 만상인연도의 장면들을 통과하는 내 손을 보며 쓰게 웃었다.
이전 강민희와 남산에서 노을을 보았던, 서립이 그토록 기억하고자 했던 기억이 나를 스쳤다.
더욱더, 만상인연도를 깊이 파고들 것이다.
단순히 바라만 보는 건 너무 슬프지 않나.
서립의 생각대로다.
만상인연도는 너무나 따스하지만, 너무나 쓸쓸하다.
조금이라도 이 온기를 잘 느낄 수 있도록.
이번 생의 제1 목표는 만상인연도의 힘을 외부로 표출할 방법을 찾는 것이었다.
내 선수혈통의 문제와도, 서휼의 탁혼만천에 대항할 문제와도, 만상인연도에 들어왔다는 북향화의 문제와도 연관된 목표다.
지금으로선 가장 중요한 문제였다.
‘김연도 구하고, 강민희도, 오현석도 구한다.’
이제 내 힘은 그리 부족하진 않다.
구하고자 하는 것을 구할 자격 정도는, 있지 않겠는가.
그들을 구하는 건 딱히 목표는 아니었다.
그들을 구하는 건 이제 목표로 세울 필요조차도 없는 당연(當然)한 거니까.
나는 하늘로 떠올라서 전명훈이 있는 쪽을 바라보았다.
그는 금소해의 동부 앞에서 그녀의 손이 든 목함을 소중히 쓰다듬으며 감상에 빠진 얼굴로 하늘을 바라보고 있었다.
“홍범.”
“예, 주인님.”
나는 대기하고 있던 홍범에게 말했다.
“잠시 천인도에 다녀오겠다. 전명훈에겐 내가 천인도에 가서 태수 자격을 따러 갔다 전하고, 이 공법서를 전해 줘라.”
“예, 알겠습니다.”
나는 저물도에서 옥간을 하나 꺼내, 육극음뢰신의 구결을 기록해서 홍범에게 전달했다.
“며칠 후면 돌아올 테니까, 그 전까지 대성해 놓으라고 해라.”
“음, 꽤 고명한 공법 같아 보이는데….”
“뇌도공법이면 지금의 전명훈이 익히지 못할 린 없다.”
어차피 전명훈이 육극음뢰신을 반드시 익혀야 할 수 있는 일도 있으니까 미리 익혀 두게 하는 게 좋을 터였다.
그런 후 홍범에게 몇 가지를 지시한 나는 천인도로 향하려 했다.
싸아아아―
그때, 나는 다시금 전신이 오싹해지는 느낌을 느꼈다.
‘뭐지?’
하늘을 바라보니 순간 저녁 노을빛과 저 멀리서 떠오르는 달빛이 밝아지는 듯했다.
빛이 밝아지자 그 느낌은 사그라들었다.
분명 서휼을 만나기 전에도 들었던 느낌.
‘또 서휼이 뭔가를 하는 건가? 아니면 다른 건가….’
나는 경계심을 늦추지 않고 천인도로 향했다.
* * *
지족 진룡맹.
현음의 동부.
그곳에서 본체로 변해 명상을 하고 있던 현음이 두 눈을 부릅떴다.
현음의 두 눈에서 은은한 혈광(血光)이 뿜어졌다.
[본체가 교신을…? 무슨 일이지…?]우우웅―
현음은 잠시 어딘가를 바라보는 듯했다.
그리고, 아득한 곳에서부터 뿜어진 신호를 인식한 현음의 두 눈이 바싹 졸아들었다.
[뭣…! 그들이 전쟁을 벌인다고…? 그, 그가 일월천역에 강림하는 걸 막기 위해…?]현음의 두 눈에 공포가 차올랐다.
촤라라락―
순식간에 용의 몸체에서 인간형으로 화한 현음이 손을 덜덜 떨며 주먹을 쥐었다.
어느새 그의 양손에는 식은땀이 흥건하게 돋아나 있었다.
“그 흉(凶)한 존재들이 서로 싸우다니… 잘된 일이군. 하, 한쪽이 이겨도 한쪽은 한동안은 힘을 쓰지 못할 테니… 좋은 일이다.”
그는 두려움을 이겨 내려는 듯 떨리는 목소리를 진정시키며 억지로라도 좋은 미래를 상상하는 듯했다.
그때, 아득한 곳 어딘가와 교신을 하는 듯하던 현음이 문득 허공을 보며 흠칫 몸을 떨었다.
“잠깐, 본체여, 그게 무슨 말인가! 한동안 숨을 죽이겠다니 그게 무슨…. 권능의 흔적을 찾았다 하지 않았나!? 잠깐, 연락을 끊지 마라! 본체여! 뭔가 지령이라도 내게….”
그러나 현음은 허공을 향해 손을 휘젓다가 동작을 멈췄다.
얼마 후 현음은 두 주먹을 꽈악 쥐었다.
“이런 빌어먹을…! 권능의 흔적을 찾았다면서 이대로 납작 엎드려 불똥을 피하겠다고…?”
분노한 것 같던 현음은 문득, 밤이 깊어 가며 그의 동부로 달빛이 들어오자 빛에 닿지 않으려는 듯 흠칫 뒷걸음질을 쳤다.
그의 손은 사시나무 떨리듯이 떨리고 있었다.
현음은 무언가 안 좋은 기억을 떠올린 듯 이를 악물었다.
“…그, 그래. 조금 숨을 죽이는 것도 생각해 보니 좋은 생각인 것 같군. 후, 후후….”
그는 어둠 속으로 몸을 피하며 숨을 몰아쉬었다.
* * *
천련대산.
그 정상에 있는 백옥의 누각 위쪽.
새하얀 빛으로 둘러싸인 백운 성사가 하늘을 보며 아연한 눈빛을 하고 있었다.
[이런 미친… 그들이 경계에서 겨루고 있다고…? 하, 차라리 성사가 된 게 다행이군. 지금쯤 성계의 진인들은 비명을 지르고 있겠어….]손을 떨던 백운 성사는 숨을 몰아쉬며 쓴웃음을 지었다.
[안도할 때는 아닌가. 그 포학한 분이 강림하면 이 천역 전체가 수라도가 될 텐데…. 그분이 승리하기를 빌어야겠군.]현음 및 백운 성사.
그리고 다른 중경계의 성반기 성사들.
성계의 진인들.
진정한 신화를 알고 있는 이들은 모두 천기를 읽으며, 상상하기조차 힘든 거대한 존재들의 움직임을 느끼고 공포에 떨었다.
* * *
얼마간 비둔술을 써서 천인도로 가던 나는 문득, 천인도 바로 아래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저 아래에 태열사가 있었지.’
나는 태수회에 들어가고 그녀를 볼까 고민하다가 우선 태열사부터 들리기로 했다.
‘일단 그녀와 합을 겨뤄서 어전 일 보의 가르침을 받고, 그런 후에 경지를 안정시키고 제대로 태수로 인정받는 게 좋겠지?’
안 그래도 서휼의 자폭을 막아 내느라 천족의 경지도 깎여 내려서, 천족으로서의 내 경지는 천인기 중기 수준이었다.
이왕이면 서립이 새로 얻은 천인기 구결로 천인기 대원만에 드는 것도 나쁘지 않은 것 같았다.
‘서휼에게 벗어나니 이제야 알 것 같군.’
양수진은 인연을 축복하면 최강의 종명자의 축복을 받는다 했는데, 왜 나는 지금껏 몰랐다가 서립의 몸을 통해 그 축복인 ‘천원(天圓)의 구결’이 드러났을까.
이유는 간단했다.
최강의 종명자란 존재는 ‘서은현’에게 축복을 준 것이지, ‘서휼’에게 축복을 준 게 아니기 때문이었다.
그 당시 서립은 나보다 한참 서휼의 침식이 더딘 상황이었고, 구결을 얻을 당시만 해도 완전히 서립으로 분화되지 않고 스스로를 ‘서은현’이라 인식했기에 그 구결을 얻을 수 있었던 것이었다.
모든 게 다 서휼 때문이다.
‘이렇게 생각하니 다시금 화가 나는군.’
하지만 상관은 없다.
서휼도 어차피 나 때문에 오복축을 분실해서 분통이 터질 테니까.
나는 태열사가 있는 계곡에 도착했다.
그녀를 존중하는 차원에서 태열사에 바로 들어가기보단, 계곡 입구에 내려앉아서 걸어가기로 했다.
혹여나 의식으로 미리 둘러보는 게 불쾌할까 싶어 의식 영역도 체내로 돌렸다.
경지에 달한 무인인 그녀에 대한 존중의 일환이었다.
나는 쭉 이어진 계곡을 걷던 중 뭔가 기이함을 느꼈다.
‘…탱화도가… 왜 없지?’
이전에 태열전은 분명 계곡 전체에 탱화를 그려 놓았었다.
그런데 지금의 계곡은 깨끗해 보였다.
나는 기묘함을 느끼며 계곡을 걸어갔다.
그리고, 태열사가 있던 자리에 도착했을 때.
나는 등골이 싸해지는 걸 느꼈다.
태열사는 존재했다.
하지만, 태열사는 전혀 관리가 되지 않은 듯 낡은 모습이었고, 곳곳이 무너져 있었다.
가시덤불이 사방에서 사라나고 있었고, 태열사의 정문은 낡아서 쓰러지기 일보 직전이었다.
마치 귀신의 집 같았다.
‘이, 이게 어찌 된….’
나는 황망함을 감추지 못하고 태열사로 들어가 보았다.
태열사의 대웅전인 태열전은 하나도 관리가 되지 않아 무너지기 직전이었고, 곳곳에는 쓰레기 더미가 굴러다니고 있었다.
나는 태열전에 들어가 보았다.
예불을 드리는 대전 안쪽은 다 썩어 있었고, 지붕은 관리가 안 되어 무너져 있었다.
그녀가 나와 김연에게 차를 타 줬던 방 안은 완전히 무너져 폐허가 되어 있었다.
곳곳에 가득했던 예술적인 탱화들도 흔적을 찾을 수 없었다.
그때, 나는 문득 어디선가 인기척이 들리는 걸 알아챘다.
태열전을 나가자, 요사채 안쪽에서 누군가 하품하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빠른 걸음으로 요사채에 걸어갔다.
자세히 보니, 그래도 요사채만큼은 그럭저럭 관리가 되고 있었고 사람이 사는 흔적이 보였다.
“…거기 누구 계시오?”
나는 요사채로 들어가기 전 안쪽에서 느껴지는 인기척을 향해 물었다.
벌컥!
그리고, 요사채의 문이 열렸다.
흠칫!
요사채의 안에서는 새카만 흑발의 여인이 배를 벅벅 긁으며 눈을 비비고 있었다.
그녀의 머리는 산발이었고, 어딘가 이상한 냄새가 나는 게 씻지 않은 지 꽤 된 것 같았다.
체내에서 원영의 기운이 느껴지는 것이, 원영 중기 수사쯤 되어 보였다.
“으음, 누구십니까?”
그녀는 나를 뚱한 얼굴로 쳐다보는 듯하더니 흠칫 몸을 떨었다.
“엇, 선배님이시군요. 흠, 흠. 후배가 추한 모습을 보며 부끄럽습니다.”
그녀는 내 경지를 가늠하는 듯하더니, 천인기 수준의 내 영력을 느끼자 조금 당황한 얼굴로 산발이 된 머리를 정리하고 대충이나마 옷매무새를 정돈했다.
“이, 일단 이 안으로…. 아니, 이 방은 조금 그런데…. 객실로 모시겠습니다.”
그녀는 당황한 듯이 허둥지둥 움직이며 요사채의 옆방으로 나를 안내했다.
나는 딱딱한 얼굴로 그녀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슬쩍 그녀가 나온 방을 바라보자, 엄청난 난장판이 보였다.
정갈한 태열전이 지내던 곳과는 정반대의 난장판이었다.
심지어 그녀가 나를 안내한다던 객실도 상당히 어지러운지 안에서 한참을 치우는 소리가 들렸다.
얼마 후 그녀가 나를 안으로 초대했다.
“서, 선배님. 준비가 다 되었습니다. 들어오시지요.”
나는 굳은 얼굴로 그녀의 얼굴을 유심히 살피며 들어갔다.
그녀는 내 표정을 보고 두려운 듯이 눈을 깔았다.
평소라면 저계 수사를 배려해 줬겠지만, 나는 지금 그럴 기분이 아니었다.
나는 자리에 앉아서 주변을 둘러보았다.
“…차는 안 내오나?”
“예, 예? 아… 용서해 주십시오, 선배님. 예전에 스승님이 끓이던 차가 있긴 한데… 관리를 안 하다 보니까 500년 전쯤에 다 썩어 버려서….”
“…방에 탱화 같은 게 없군.”
“아… 죄송합니다. 스승님한테 전수를 못 받아서…. 아… 아니, 생각해 보니 전수받았던 거 같긴 한데… 한 번도 연습을 안 하다 보니 까먹었습니다…. 하하.”
“….”
나는 딱딱한 얼굴로 ‘태열전과 똑같은 얼굴을 가진 이 여자’를 보며 물었다.
얼굴은 같지만 모든 게 그녀와 다른 이 자.
“네 이름은 뭐지?”
“예? 아… 저는 딱히 이름이 없습니다. 어릴 때 이 태열사에 버려졌던 저를 태열사의 주지승이셨던 스승님이 주워서 키워 주셨고, 그분께서는 원영기에 들어서 부모를 찾으라고 법명을 안 주셨어서…. 그런데 막상 원영기에 들어서 주마등을 보고 나니깐 제 부모님도 저한테 이름을 안 붙이고 버리셨더군요. 하하… 스승님은 ‘망나니 같은 것’이나 ‘더러운 것’… ‘게으른 것’ 정도로 부르셨습니다만….”
“….”
“어… 선배님께서는 그냥 편하실 대로 부르십시오.”
그녀는 머쓱하게 머리를 긁으며 말했다.
나는 딱딱하게 굳은 얼굴을 필 수 없었고, 그녀는 내 얼굴을 보며 더더욱 쭈그러들었다.
“이 한 수를 받아 봐라.”
부웅―
나는 총천검을 꺼내서 혼의 계위에 걸친 공격을 그녀에게 날렸다.
그러나 그녀는 총천검을 인지하지조차 못하고 멀뚱멀뚱 나를 바라보았다.
스륵―
총천검의 검격은 그녀를 그냥 투과해서 날아가 버렸다.
아마 그녀가 태열전이었다면 즐겁게 받아쳤을 일격.
하지만 이 여자는 인지하지조차 못했다.
“…너, 뭐냐.”
나는 그녀를 노려보며 물었다.
아까 전 달빛이 밝아질 때 갑자기 싸했던 이유가, 혹시 이것 때문일까.
그녀는 내가 노려보자 질겁하며 머리를 땅에 박고 떨었다.
“히, 히익… 살려 주십시오, 선배님. 살아봤자 의미도 없긴 한데… 그렇다고 아직 죽긴 싫습니다…! 죽으면 너무 아플 것 같은데… 조금만 용서해 주시면 안 되겠습니까?”
“….”
그녀의 과거는, 내가 태열전에게 들었던 것과 똑같다.
그런데 왜 눈앞의 이 여자는 어전 일 보의 태수가 아니며, 탱화에는 관심도 없고 비구니로서 삭발조차 하지 않은 것이며, 그녀가 가지고 있던 긍지 높은 모습과 검소하고 절제된 마음은 어디로 간 것인가.
눈앞의 그녀가 이상한 것인가.
아니면 지난 회차의 태열전이란 존재가, 뭔가에 ‘씌어 있던’ 존재인 것인가.
나는 이 여자에 대한 한심함보다는, 알 수 없는 공포에 휩싸여 경계심을 최대한 끌어올린 채, 언제든 자살할 준비를 하고 눈앞의 여자를 노려보았다.
“묻고 싶은 게 있다. 네가 익힌 공법은… 어떤 공법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