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 Regressor’s Tale of Cultivation RAW novel - Chapter (441)
내려라. (1)
난 [그녀]의 말에 답하지 않았다.
‘마음을 들여다본 자들… 자살 충동…?’
심족이 가진 자살 충동에 대해서 뭔가 비밀을 알려 주려는 듯한 모양새.
그러나 나는 절대 뒤를 돌아보지도, 답하지도 않았다.
미칠 듯이 궁금한 주제였지만, 함부로 입을 놀리기에는 태산 때 당한 것이 너무 많았다.
조심, 또 조심하며 입을 다물고 있어야 하리라.
“침묵은 금(金)이라는 말도 맞으나, 때에 맞지 않는 침묵은 칼을 불러올 수도 있지요. 포악한 산신령처럼 제가 나쁜 사람도 아니니 궁금한 것은 다 털어놓으셔도 됩니다.”
“….”
싸아아아아-
‘읽혔다….’
나는 어찌해야 할 줄 몰라 식은땀을 흘렸다.
결국 나는 어렵게 어렵게 입을 뗐다.
“뉘신지… 함자를 여쭈어도 괜찮겠나이까?”
“그것은 불가하옵니다. 당신을 위해서이기도 하지요. 제 함자를 감당할 수 있는 건 이 산 안에서 몇 안 되니 말입니다.”
“….”
나는 침을 삼켰다.
순간 뇌가 굳어서 해선 안 되는 질문을 했다.
만약 태산 같은 존재였다면 그대로 진명을 말해 내 전신을 폭발시켰으리라.
“…자비에 감사드립니다. 하면… 제게 어찌 찾아오셨는지 여쭤도 되겠나이까?”
“오해를 하시는군요.”
“예?”
“제가 찾아오는 게 아닙니다. 당신이 저를 부르셨지요.”
‘내가 [그녀]를 불렀다고…?’
뚝, 뚝뚝….
머리에서 흘러나온 식은땀은 어느새 뺨을 지나쳐 턱 끝에서 떨어지고 있었다.
강대한 적을 만나 싸운 것도 아닐진대, 벌써 이만큼이나 식은땀을 흘리고 있는 것이다.
내가 얼마나 긴장했는지를 보여 주는 반증이리라.
“제가 누군지에 대해서는 ‘내려오면’ 잘 아시게 될 겁니다. 그대들에게는 온 우주의 신들이 모두 기대를 크게 걸고 있습니다. 여지껏 일곱 모두가 늙어 죽지 않고 수선로에 들어 비승에 성공한 사례는 손에 꼽을 정도니 말이지요.”
뚝… 뚝뚝뚝뚝….
나는 턱 끝으로 땀방울이 계속 떨어지는 걸 느끼며 질문을 정리했다.
‘정체에 대한 건 더 물어보면 안 된다.’
본능적으로 계속 정체를 캐어물으면, 이 존재가 노할 것이란 것이 느껴졌다.
그렇다고 질문을 하지 않고 가만히 있다면 그것대로 이 존재가 불쾌해할 것이란 게 느껴졌다.
‘너무 욕심을 내진 말자.’
과한 건 묻지 말고, 적당한 수준의 질문만 해 보자.
가령, 방금 이 존재가 알려 줄 듯이 말했던 정보.
“…방금 말씀하셨던… 심족은 어찌 자살에 가까워지는지가 궁금합니다. 지혜를 내려 주소서.”
“이제 조금 제대로 된 답변을 들려 드릴 수 있게 됐군요.”
[그녀]가 웃는 것이 느껴졌다.“존재의 마음이란 ‘왜’ 그리고 ‘어떻게’ 생겨나시는지 아십니까?”
“….”
나는 갑자기 치고 들어온 심오한 질문에 골똘히 머리를 굴려보았다.
“모르겠습니다.”
마음이란 도대체 뭘까.
왜 생겨나는 것일까.
의념을 궁구하면서부터 생각해 보았던 주제였지만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단순히 생물학적인 관점에서 보면 마음이란 유전자의 발현이요, 전기 신호의 총체일 뿐이다.
그러나 이 세계에 오며, 나는 별에도, 무생물에도 ‘어느 정도는’ 마음이랄 게 있단 것을 느꼈다.
그렇다면 도대체 진정한 마음이란 정체가 무엇일까.
그리고 내가 여지껏 고민해 왔던 의문에 대한 답은, [그녀]의 입을 통해 너무나 쉽게 알 수 있었다.
“마음은 곧 죽음입니다.”
스르륵-
누군가의 손이 내 눈을 가렸다.
[그녀]의 손이 분명했다.하지만 나는 그 손을 뿌리친다거나, 저항할 엄두를 낼 수 없었다.
단 하나의 빛도 들어오지 않는 칠흑 같은 어둠이 눈앞에 펼쳐졌다.
나는 ‘내 눈을 가린 행위’로 인해, [그녀]가 내 정신을 어딘가로 끌고 왔단 걸 알아챘다.
파아아앗!
어느 순간, 나는 새하얀 순백(純白)의 땅에 도달해 있었다.
내 등 뒤쪽에서는 여전히 [그녀]가 있다는 게 느껴졌다.
졸졸졸-
내 발 옆으로 뭔가가 흘렀다.
그것들은 염료(染料)였다.
형형색색의 염료들이 내 발밑을 흐른다.
“색(色)은 결국 모두 합쳐지면 흑색이 되지요.”
꿀럭, 꿀럭….
무수한 색상의 염료들이 합쳐지자 흑색이 된다.
“그리고 반대로 의념은 모두 합쳐지면 무색이 됩니다.”
맞는 말이었다.
오기조원을 겪는 이들은 모두가 알게 되는 사실이니까.
“무색과 흑색. 모두가 끝을 상징하는 색입니다. 의념의 극의는 결국 ‘끝’ 그 자체… 결국 마음이 종래에 도달하는 곳은 죽음인 셈입니다.”
움찔!
나는 전신에 소름이 돋는 느낌이었다.
촤라라라락!
내 발밑에 있던 흑색의 염료들이 갑자기 살아 있는 것처럼 발버둥 치기 시작하더니, 급격하게 나를 덮쳐 왔다.
나는 흑색 염료의 강에 빠져 버렸다.
조심스레 눈을 뜨자, 나는 어느새 우주(宇宙)에 도달해 있었다.
흑색의 염료 안쪽.
그곳에는 우주가 끝없이 펼쳐져 있었다.
무수억의 별들이 우주 곳곳을 떠다닌다.
“마음을 들여다보는 이들은 점차 자신의 마음의 본질을 일깨워 가게 됩니다.”
파아아앗!
별들이 빛나기 시작했다.
형형색색의 별들은 점차 우주를 밝히기 시작했다.
우주가 밝아지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 본질이 완전히 일깨워지면… 그 끝은….”
우주가 점차 밝아진다.
그리고 뜨거워지기 시작했다.
오싹!
‘이, 이건….’
나는 이 광경을 본 적이 있었다.
태산의 주인.
그 무지막지한 존재가 보여 주었던, 우주의 끝.
종말!
우주가 수축하기 시작한다.
우주는 빛조차 초월한 속도로 수축하는 듯하더니, 그대로 하나의 점이 되어 소멸하였다.
“이해하시겠습니까. 마음을 깨달아서는 절대 진선이 될 수 없는 이유… 세계 전체가 마음을 수련하는 이들을 혐오하는 이유. 그리고… 마음을 깨달아 가는 이들의 명(命)이 필연적으로 죽음에 가까워지는 이유들….”
“…마음은 곧… 죽음이었기 때문인 겁니까…?”
“그게 끝이 아니지요. 마음을 들여다보아 본질을 아는 이들이 많아지면 많아질수록… 그들의 세계 전체가 점점 빨리 종말에 가까워집니다.”
“…!!!”
“자기 자신을 파멸시킬 뿐이 아니라… 세계 전체를 죽음으로 인도하는 힘… 그것이 마음입니다. 광한(廣寒)에 의해 모든 천역의 종말 조건이 그리 변화하게 되었더랬지요.”
“예…?”
난 머리가 굳는 느낌이었다.
[그녀]가 말하는 광한은 누구인가.너무나 뻔했다.
광한 천원의 주인.
판관단들과 함께 [무언가]에 덤볐다가 흉참한 최후를 맞은 존재.
그 존재에 의해 마음을 깨달을수록 종말이 앞당겨지도록 하는 천역의 법칙이 생겨났단 말인가?
“정말로 흉하고도 불길한 것… 그것이 바로 ‘마음’의 진실입니다.”
[그녀]의 입김이 내 뒤쪽에서 느껴졌다.내가 얼어 있는 새, [그녀]가 내게 제안을 건넸다.
“그러니 한 가지 제안을 드리겠습니다. 오늘 이래로, 더 이상 마음을 들여다보지 마십시오. 그냥 자신의 기분을 파악하고, 그 자체를 느끼는 것에만 집중하십시오. 마음을 수련한다는 것은 그저 모두의 불행을 앞당길 뿐 수선에 아무 도움도 되지 않는 일. 만약 제안을 받아들이신다면, 즉시 당신을 선좌(仙座)에 올려 드리겠습니다.”
“…!!!”
나는 그 파격적인 제안에 화들짝 놀랐다.
선좌라는 말은 내 머릿속을 파고들어 그 단어의 뜻을 주입해 주었다.
진선(眞仙).
[그녀]는 내가 무공을 포기하면 진선으로 나를 만들어 주겠다는 것이었다.과격하다 못해 어안이 벙벙해질 정도의 제안이었다.
그러나 내가 진정 두려운 것은 [그녀]의 권능이었다.
‘즉시 나를 진선으로 만들 수 있을 정도의 존재라면… 내가 이 제안을 거부한다면 나를 어찌하려는 거지?’
눈 앞에서 태산의 주인 당시 악몽이 떠올랐다.
일순간에 우주가 멸망하며 모두가 죽어 나가고, 몸이 갈가리 찢겨 나갔던 기억.
저항 자체가 불가능했다.
이번에도 더하면 더했지, 덜하지는 않을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희망이 보이지 않는다.
아무런 위압도 협박도 하지 않고, 그저 잔잔히 얘기만 하는 것임에도 나는 이성이 마비될 것만 같았다.
두려워서 당장이라도 토하고만 싶었다.
머릿속으로 무수한 해결 방안이 나왔지만 전부 쓸모가 없었다.
주저앉아서 엉엉 울며 제발 나를 내버려둬 달라고 부탁하고만 싶었다.
그래….
여기서 편해지는 것도 나쁘진 않을 터다.
진선이 된다면 더 이상 수명 걱정도 없고, 동료들을 잃을 걱정도 없을 것이다.
내 능력이라면 진선이 된 이후에도 태산의 주인을 상대로 도망은 치면서 살 순 있을 것이다.
그냥 이분의 말을 듣고 선좌를 획득하는 게 좋진 않을까?
….
“…저는….”
내가 입을 열었을 때였다.
그 찰나, 머릿속으로 단 하나의 기억이 스치고 지나갔다.
그것은 어떤 장면이었다.
폭삭 늙어 버린 손이, 누군가의 손을 잡고 있었다.
든든해 보이는 ‘누군가’는 빛을 등지고 착잡한 눈으로 나를 보며 손을 잡아 주고 있었다.
-구주(九疇). 네 이름은… 구주다.
짧은 찰나.
그러나 나는 그 찰나의 순간의 기억에 입을 다물었다.
어쩐지 알 수 없는 감정이 내 안에 깃들어 있었다.
나는 잠시 침묵했다.
그리고 답했다.
“…거절합니다.”
“어째서지요?”
“…사람 몸 얻기 어렵고 도 밝히기도 어려워라(人身難得道難明).”
찌이이잉!
난 대답 대신 눈을 반개하며 입을 열었다.
화혼만천을 통하여, 아주 어렴풋이 기억이 났다.
16회차 당시.
내 벗과 나눴던 말이다.
“사람 마음 따라 도의 뿌리 찾나니(塑此人心訪道根)….”
난 마음속에서 피어오르는 공포를 떨쳐 내며 외쳤다.
“이 몸을 이 생애에 제도하지 못하면(此身不向今生度)!”
[그녀]가 헛숨을 들이쉬는 게 느껴졌다.의념을 읽지는 않았지만 감정이 느껴졌다.
진심으로 놀랐다는 감정이 느껴졌다.
“다시 어느 때를 기다려 이 몸을 제도하리오(再等何時度此身)!”
파아앗!
그와 함께 눈앞이 밝아졌다.
모든 것이 사라진 우주의 형상이 사그라들고, 나는 다시 서악 마을로 돌아와 있었다.
[그녀]가 내 눈에서 손을 떼는 게 보였다.나는 공포를 마주하며 그녀에게 대답하였다.
“죽음이 곧 마음이란 말씀을 이해했습니다. 마음이란 결국… 언젠가 끝나게 되는 삶을 어떻게 받아들이냐는 고민 와중에서 태어난 것이겠지요.”
“….”
“그러나… 마음이란 것의 본질이 흉참할지언정, 나는 이 흉참한 세계에 내 발로 서 있겠습니다.”
그녀는 답하지 않았다.
나는 아랑곳 않고 대답을 이어 갔다.
“나의 몸을 부여받은 것도, 지금의 순간을 부여받은 것도… 죽음 그 자체를 부여받은 것도 다시없을 기회. 마음이 곧 죽음에 가까워지는 것일지라도, 이번 삶에 마음의 뿌리를 찾아갈 기회를 받았다면 나는 포기하지 않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것이….
그와의 [약속]이니까.
나는 화혼만천을 얻고도 온전히 기억할 수 없는 16회차의 마음을 떠올리며 굳게 마음을 먹었다.
“원하신다면 저를 고문하소서. 제발 죽여 달라는 말이 입에서 나올지언정 포기하겠다는 말은 나오지 않을 것입니다…!”
그리고, 뒤에서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맑은 웃음이었다.
“마음을 읽어 갈수록 당신의 명은 죽음에 가까워질 것입니다. 당신의 주변으로 무수한 죽음의 손길이 뻗칠 것입니다. 그 불행 속에서도 정녕 마음을 잃지 않으시겠습니까?”
“노력할 것입니다.”
나는 굳게 다짐했다.
“내 주변에서 죽는 이들이 있더라도, 그들이 죽음 속에서 원하던 것을 얻고 죽을 수 있도록 노력하겠습니다.”
저녁에 내 벗이 죽는다면, 그날 아침에 그가 원하던 것을 가져다주리라.
그렇게 되도록 최선을 다하리라.
죽는다는 건 분명 슬프고 무서운 일이다.
모든 인연과 마음이 다 끊겨 나간다는 건 정말 영혼이 찢겨 나갈 만큼의 두려움이자 고통이었다.
그래도….
죽음은 결국 누구에게나 드리운다.
피할 수 없는 것이 죽음이고 운명이라면, 그 안에서 최선의 행복을 누리리라.
마음을 포기하면 내 인연에게 죽음이 드리우지 않기라도 한단 말인가?
그럴 리 없다.
죽음을 가지고 있지 않은 존재는 없으니까.
그리고, 내 마음은 내 것으로만 이뤄진 것이 아니다.
그럴진대 어찌 내가 감히 함부로 마음을 포기할 수 있단 말인가!
세계를 멸망시킬지라도 내 안에 품은 것을 빼앗아 갈 순 없다.
내가 놓지 않는 것이 아니라, 이건 이미 모두의 것이니까.
나는 내 길고 긴 심상과 결의를 요약해서 등 뒤의 [그녀]에게 소리쳤다.
“선좌가 아니라 상제 자리를 준다 해도 이것을 포기할 순 없습니다. 돌아가 주십시오!”
얼마간 침묵이 맴돌았다.
그리고, 그녀의 웃음이 그친 것이 느껴졌다.
“그렇다면… 자기 말의 무게를 얼마나 실감하는지는 지켜보겠습니다. 본래는 다른 곳에서 뵐 생각이었습니다만, 오늘 이 자리에서 각오를 확인했으니… 다음번의 만남을 기약할 수밖에 없군요.”
저벅, 저벅….
그녀가 내 뒤에서 떠나가는 게 느껴졌다.
“다음에 뵐 때를 고대하나이다. 그때까지 부디… 북(北)을 조심하십시오. 그는 모든 종명자들에게 있어 최악의 상대일지니….”
스르르르-
그와 함께, 내가 눈을 감았다 뜨자 나는 려화의 시체 앞에 서 있었다.
돌아온 것이었다.
나는 황급히 뒤를 돌아보았다.
삼목의 그림자 외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다시 앞을 보자, 그곳에는 홍범이 서 있었다.
‘북을 조심하라고?’
무슨 의미일까.
그녀의 말에는 힘이 있어, 나는 그 말 자체가 [북녘] 자체를 상징한다는 걸 알아챘다.
북쪽에 뭔가가 있기라도 한 것일까.
아니면, 진선 중 북쪽을 상징하는 존재가 우리에게 위험하기라도 한 것일까.
자세한 건 몰랐다.
난 다가오는 홍범을 보며 고개를 흔들고 정신을 차렸다.
“괜찮으십니까, 주인님? 땀이 흥건하십니다.”
그는 내게 물수건을 가져다주었다.
난 땀을 닦고 그를 바라보았다.
합체기에 들어간 후, 그는 조금 더 젊어져 있었다.
완전한 노인이었던 그 얼굴은 이젠 5, 60대 정도의 것으로 변해 있었다.
머리에서 거뭇거뭇한 흑발이 나오고 있었다.
“…홍범.”
나는 그를 보며 말했다.
“무슨 일이십니까?”
“…고맙다.”
“예?”
“내 옆에 있어 줘서 말이다.”
홍범은 허허 웃으며 조금 쑥스럽다는 듯이 말했다.
“저희가 이 하늘 아래에 서 있는 한 저는 언제든 주인님을 극진히 모실 것입니다. 고마워하실 것 없습니다.”
난 빙긋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나 려화의 시체를 들고, 그녀의 시체를 묻어 주었다.
촤라락!
‘부디 잘 가시길….’
무수한 세월을 이어 온, ‘려화’여….
난 홍범과 함께 그날 밤을 새워 려화를 기려 주었다.
20년이 지났다.
* * *
푸콱!
나는 내 검에 죽은 듯 눈을 감은 재후를 보며 쓴 입맛을 다셨다.
“영… 광….”
미원족의 대전사 재후는 내 손에 피를 흘리며 기절하였다.
심검이 그의 심상을 제압했다.
죽지는 않았지만 가사 상태에 빠졌을 것이리라.
지난 20년간, 독영이 끊임없이 내게 도전해 와 그를 상대해 주었다.
결국 약균족의 독영은 내 손에 만신창이가 되어 패퇴했고 사망했다.
그리고 오늘.
나는 미원족의 재후를 상대로 승리하며, 마침내 그를 죽이지 않고 제압하는 데에 성공했다.
“…길었군.”
20년간, 두 어전일보의 고수를 상대하며 나는 어느덧 육신통 중 다섯 개의 신통을 깨우쳤다.
시(時)는 순간과 순간이 만나 형성되는 삶.
풍(風)은 순간이 스러지더라도 세계에 형상을 그리는 바람.
한(寒)은 순간의 고독함.
욱(燠)은 순간의 다정함.
양(陽)은 순간의 선명함!
나는 법력을 쓰지 않고, 심상에 변화를 주는 것만으로 천지조화를 다스렸다.
시의 신통을 쓰자 주변의 천지영기의 유속이 빨라졌다.
풍의 신통을 쓰자 천지영기의 유속이 바람을 일으키며 주변의 대지를 조각하였다.
한의 신통은 조각한 대지를 굳혀 그 형상을 각인시켰고,
욱의 신통은 각인한 형상을 다시 녹여 대지를 원래의 형상으로 돌렸다.
양의 신통은 내가 지금까지 해 온 신통을 모두 선명하게 알아채게 해 주었다.
‘이제 남은 것은 우(雨)의 신통….’
느껴진다.
이제 남은 마지막의 신통을 깨우치면, 나는 합체기 대원만이 될 것이다.
그리고….
‘7할 이상의 확률로, 쇄성기에 오를 수 있다.’
나는 검기를 저 먼 곳까지 날리며 생각했다.
‘빨리 쇄성기에 올라야 해.’
백운은 몇 년만 기다리면 성사직을 되찾을 것이라 했다.
그러나, 몇십 년이 지난 지금도 그녀가 회복할 기미는 보이지 않았다.
‘생각해 보면, 500년 정도를 ‘고작’이라고 표현한 게 백운이었지.’
어쩌면 그녀의 ‘몇 년’은 훨씬 길지도 몰랐다.
그러니….
하루빨리 천, 지의 수행을 쇄성기에 도달하게 하여 광한계 전체를 내 손으로 수호해야 할 터였다.
‘이제 어전일보의 강자들 중, 경지의 극의에 다다른 장익의 수제자들은 전부 죽거나 가사 상태가 되었다.’
재후를 가사 상태에 만든 것으로 이제 나도 어느 정도 허공분쇄에 대한 경지가 익숙해져, 이들을 죽이지 않고 제압할 수 있게 되었다.
덕택인지 이제는 더 이상 내게 도전해 오는 심족도 없었다.
‘잘된 일이지.’
이제는 내게 덤벼 봤자 의미가 없을 정도의 격차가 있으니 말이었다.
하지만, 그 말은 결국 더 이상 경지를 올리기 위해서는 내가 직접 상대를 찾아 나서야 한단 말이었다.
‘강력한 시들을 찾는다면 가서 겨뤄 보는 것도 나쁘지 않겠어….’
그리 생각할 때였다.
타앗!
내가 앉아있는 삼목숲의 가장 높은 나무 위쪽.
그곳에, 김영훈과 김연이 나타났다.
“아, 어쩐 일이십니까?”
난 그들을 보며 물었다.
‘뭐지, 김영훈이 설마 나한테 덤비려는 건 아니겠지?’
이제 삼목총 최고지도회 중 어전일보의 극한에 달한 건 김영훈밖에 없긴 했으니 말이었다.
그러나 내 생각과 달리 김영훈은 피식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무슨 생각하는진 알겠다만, 그런 거 아니다. 자세한 설명은… 김연이 해 주는 게 낫겠지.”
“…?”
내가 의아해할 때였다.
김연이 그의 앞에 나와 씁쓸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당신께 도전자가 나왔어요.”
“…누구지?”
나는 둘 사이의 심상찮은 기류를 읽으며 진지하게 물었다.
그리고, 이어진 다음 질문에 나는 입을 벌릴 수밖에 없었다.
“…향화요.”
북향화가, 뜬금없이 내게 도전장을 내밀어 온 것이었다.
* * *
나는 삼목총의 대련장에 섰다.
주변으로 많은 이들이 몰렸다.
서란과 시호, 김영훈 등 수계 시절부터 북향화와 친했던 이들부터 시작해, 지금의 북향화와 친한 김연과 홍범 등이 우리를 보고 있었다.
나는 주변을 둘러본 후, 대련장에 가까스로 나선 북향화를 바라보았다.
그녀가 간신히 서 있는 게 느껴졌다.
‘빛을 잃었군.’
그녀의 눈은 완전히 흐리멍덩해져 있었으며, 손발은 덜덜 떨리고 있었다.
그녀의 식(識) 자체도 굉장히 흐릿해져, 그녀는 지금 사실상 범인과 다를 바 없는 상태였다.
나는 북향화에게 심어를 통해 물었다.
-왜 나온 겁니까.
내 심어에, 그녀는 빙긋 웃었다.
스륵-
그녀는 비췻빛 노리개를 들어 올렸다.
많은 인연과 시간이 묻은 노리개.
그리고, 그 노리개에는 북향화가 지금껏 연구해 온 듯한 무수한 회로가, 깨알처럼 새겨져 있었다.
-당신께 보여 드리고 싶었습니다.
나는 말없이 무색유리검을 들고 자세를 잡았다.
다음 순간, 나는 그녀를 향해 검을 휘둘렀다.
검 사이로, 비가 잔뜩 내렸던 10회차의 마지막 날이 스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