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 Regressor’s Tale of Cultivation RAW novel - Chapter (468)
찾았다.
우리는 서쪽으로의 여정을 시작했다.
벽라국에서부터 시작해, 연국, 성제국을 돌아보았다.
세상은 전란(戰亂)에 빠져 있었다.
“삼십 년 전부터 세상이 갑자기 이렇게 됐지. 예전에도 문파 간의 분쟁이나 수도가문 간의 분쟁은 종종 보아 왔다만… 이렇게 세상 사람들의 인심 자체가 뒤틀린 건 삼십 년 전부터다.”
나는 오현석의 설명을 들으며, 서쪽 나라.
봉래국으로 향하는 배를 기다리며 생각했다.
‘삼십 년 전이라….’
청문령의 본래 수명이 다했을 때였다.
‘뭔가 둘 사이에 연관이 있는건가.’
선술이라면 그럴 수도 있지 않을까, 그런 생각을 했다.
며칠이 지나, 우리는 봉래국으로 향하는 배편에 몸을 띄웠다.
오현석은 배 안에서도 여유롭거나 형편이 되는 부자들을 찾아다니며 멸망한 마을의 생존자라는 여자아이를 맡기기 위해 발 벗고 뛰어다녔다.
하지만 그의 말대로 인심이 각박해져서일까.
누구도 오현석의 제안을 수락하려 하지 않았다.
“왜 그렇게 그 애를 맡기려 하시는 겁니까. 형님 정도면 이제 본인이 키울 수도 있지 않습니까.”
“음… 그렇긴 하다만 말이다.”
오현석은 씁쓸하게 웃었다.
“나는 애를 키우는 방식은 잘 몰라.”
“엇… 어린아이 좋아한다 하지 않으셨습니까?”
흘러가는 배 위에서 그와 한담을 나누며, 나는 수십만 년 만에 오현석의 집안에 얽힌 일을 들을 수 있었다.
“너 그거 아냐? 우리 큰형님이 고아원 운영하는 거.”
“어 예.”
“혜서가 거기 출신이잖냐.”
“예… 예?”
이건 또 처음듣는 얘기였다.
‘오혜서가 고아였다고?’
나는 당황해서 말을 잇지 못했다.
회사를 이끄는 세 파벌, ‘이씨’, ‘오씨’, ‘전씨’.
그중에서 오혜서는 오현석과 같은 오씨에다, 진급도 승승장구였고 오현석과 친한 모습을 보여줬기에, 당연히 오씨 혈족인 줄 알았다.
‘오씨세가의 일원이 아니었단 말인가.’
꽤나 충격적인 사실이었다.
그는 멋쩍은 듯 머리를 긁었다.
“내 큰형님이, 혜서에게는 ‘아버지’라서 우리 오씨 성을 딴 거긴 해. 하지만 난 그래도 그 애한테 굉장히 잘해 줬다고 생각한다. 비록 피는 나누지 않았지만, 성은 나눴으니까. 난 그 애를 진짜 내 친조카처럼 대했어. 어렸을 때부터 고아원에 봉사하러 갔을 때부터 말이지. 그때는 그렇게 날 따르고, 고아원에서 가장 머리도 좋길래… 내 딸한테도 혜서 이름을 줄려 했던 거고.”
“아… 몰랐군요.”
아무래도 오혜서가 오현석을 ‘계부’라 불렀던 건 그런 이유에서인 듯했다.
“그래 뭐. 굳이 말하고 다니진 않았지. 자랑하듯 떠벌릴 일은 아니니까. 어쨌든, 내가 하고 싶은 말이지… 나는 그렇게 좋은 아버지는 될 수 없단 거다.”
그가 머리를 긁었다.
“진짜 좋은 ‘아버지’는 내 큰형이지. 나는 오히려 고아원 애들 앞에서 골목대장 노릇밖에 못 하던 놈이야. 아니, 큰형 옆에서 고아원을 보고 자란 만큼… 저 애한테도 고아원의 고아들 대하듯이 계속 대할 수밖에 없지.”
그가 씁쓸하게 웃었다.
“난 저 애에게, 고아로서의 보호자가 될 수는 있다. 하지만 나는 큰형처럼 ‘아버지’가 될 수는 없어. 그게 내 한계다. 그러니까… 나는 저 애한테 좋은 부모를 찾아 줄 거다. 나보다 좋은 부모를 말이지.”
“….”
‘이 전란의 시대에 당신보다 좋은 부모가 어디 있겠습니까….’
그런 말이 턱끝까지 치솟았지만, 내뱉지는 않았다.
그렇게, 나는 오현석의 고민을 듣고, 동료들과 함께 또 다른 이런저런 얘기를 들으며 봉래국에 도착했다.
봉래국에 도착한 우리는 세상 곳곳을 구경했다.
전명훈은 여행을 다니며 점차 기억이 뚜렷해지는 것 같았고, 서란은 어쩐지 불쾌한 기색이었다.
봉래국은 이전과 달라진 것이 없었다.
아니, 아예 우리가 저번에 들어왔었던 시간대의 역사를 공유하는 듯, ‘요괴왕 서은현’이 봉래국 왕실에 쳐들어가 패악질을 부렸던 일화도 널리 알려져 있었다.
오현석은 계속해서 봉래국 귀족들을 찾아가 아이의 입양을 시도했지만 번번이 실패했고, 김영훈은 점차 ‘감각’이란 걸 예리하게 키운다고 하였다.
그리고 그렇게 봉래국에서 머물기를 삼 개월째.
“잠시 같이 가 주셔야겠습니다.”
“무슨 일이오?”
“봉래의 높으신 분께서 귀하들을 보고 싶어 하십니다.”
우리는, 갑작스레 조정에서 파견된 관병들에게 이끌려 어딘가로 초청되었다.
그리고 그곳은 익숙한 곳이었다.
봉래국의 도성.
거대한 소금산 아래쪽에 있는 도시.
“우리를 보고 싶어 하는 자가 누구요?”
나는 그들에게 질문했지만 그들은 딱히 대답을 해 주지 않았고, 말없이 우리를 태운 가마를 이끌고 소금산을 올라갈 뿐이었다.
그러나 나는 어쩐지 우리를 보고 싶어 하는 자가 누군지 알 것 같았다.
얼마 후, 우리는 마침내 봉래국 소금산의 위쪽.
봉래국 왕실의 궁전에 도달해, 위병들과 함께 어딘가에 도착했다.
‘…익숙한 곳이군.’
“여왕 폐하 납시오!”
우리는 궁전의 객실로 옮겨져, 그곳의 여왕을 맞이했다.
“국서 전하도 납시오!”
봉래국의 여왕과, 국서라는 자가 우리가 있는 객실로 들어왔다.
“모두 예를 취하….”
“그만, 그만. 나가 보게. 이들은 내 벗일세. 오늘만큼은 잠시 겉치레에서 벗어나고 싶군.”
“예, 폐하!”
말을 마친 위병들은 객실에서 나갔고, 나는 수백 년 만에 마주한 내 벗을 바라보았다.
“오랜만이군, 육요. 잘 지냈느냐.”
“예. 교주께서 보내 주신 덕에 말이지요.”
“백린도 잘 지내는 것 같군.”
“하하, 그렇습니다. 제 벗들은 잘 지내고 있습니까?”
“그 둘도 나름 잘 지내는 중이다.”
육요와 백린.
일전의 내 수하였던 자이자, 꿈속 세계 출신이었던 잉어 요괴였다.
“90년 만에 뵙다니, 정말 사람 일은 모르는 것이로군요.”
육요와 백린은, 백란과도 같이 늙어 있었다.
둘 다 백발이 성성했고, 피부는 쪼그라들었으며 얼굴엔 검버섯이 피었다.
하지만 둘 모두 기품이 있었고, 눈빛에는 두려움이 없었다.
‘…?’
서란은 왠지 육요를 보며 안절부절못하는 모양이었다.
육요와 나는 모두 그의 그런 기색을 눈치챘지만, 잠시 모른 척을 하고 담소를 나눴다.
그동안 무슨 일이 있었는지.
봉래국은 그동안 어땠는지, 우리쪽 세계는 그동안 어땠는지 등….
“말을 들어 보니, 역시 이 세계로 오길 잘 했군요. 혈음계가 광한계를 침식하고, 대혼란이 일어나고 있다니….”
“글쎄… 내가 보기엔 이 세계도 점차 전란의 조짐이 생겨나는 것 같다만.”
“예 그렇지요. 점차 인심이 흔들리고 있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녀의 안색이 어두워졌다.
“‘숨겨진 빛’의 색이 변하기 시작했습니다.”
“음…!?”
나는 그 말에 흠칫 놀랐다.
숨겨진 빛.
소금산의 주인이 빛의 영역에서 가져왔다는, 소금산의 주만의 빛!
그 빛의 색이 변하기 시작했다는 것이었다.
“이전에는 백색이었습니다만, 점차 붉은 빛이 돌고 있지요.”
“…괜찮은 거냐?”
“괜찮긴 합니다. 어머니의 말씀에 따르면, 그 빛이 하얀색으로 변한 건 최근의 일이고, 사실 수천, 수만 년의 역사 동안 그 빛은 원래부터 불길한 검붉은 빛이었다고 합니다. 오히려 최근에야 맑은 소금색이 되었다, 이제야 원래대로 돌아오는 거지요.”
‘소금산의 빛이 원래는 불길한 검붉은 빛이었다고?’
기이한 일이었다.
“너무 걱정하실 필요는 없습니다. 제 후대 국왕이 될 왕태자도, 무슨 짓을 해서라도 봉래국이 전화에 휩쓸리는 건 막겠다고 했으니까요. 그 아이의 실력이라면 믿을 만하답니다.”
“…그런가. 그리 말하니 일단 알겠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화제를 돌렸다.
“그나저나, 혹시 저 애를 조금 돌봐 줄 수 있는가?”
나는 오현석이 데려온 아이를 가리키며 말했고, 육요는 흔쾌히 수락했다.
“마침 시동이 필요했는데 잘됐지요. 잘 돌봐 드리겠습니다.”
그녀는 친절한 할머니 같은 모습으로 아이에게 손을 뻗었다.
오현석 역시 얼굴이 밝아졌지만, 문제가 생겼다.
아이가 그에게서 떨어지려 하지 않았다.
“음… 이거 어쩐다….”
육요는 빙긋 웃었다.
“그럼 이리하지요. 현석 공. 귀공께서 아이와 함께 왕실에 남아서, 아이가 몇 년간 이곳에 적응할 수 있게 도와주시지요. 그리하면 아이도 편안히 떨어질 수 있지 않겠습니까.”
“흐음….”
오현석은 나와 육요를 번갈아 바라보고, 아이를 다시 쳐다보았다.
“…하아 …은현아. 나는 여기 조금 더 머물러야겠다만….”
“괜찮습니다. 편하신대로 하시지요. 다만 저는 서쪽으로 조금 더 여정을 떠나야 하니, 아무래도 재회는 조금 오래 걸리겠지만요.”
“으음….”
결국, 고민하던 오현석은 봉래국 왕실에 남기로 했다.
아이를 떼어 내기 위해, 아이와 다시 몇 년을 함께하기로 한 것이었다.
우리는 그곳에서 나와 다시 서쪽으로 향했다.
“그나저나 서란.”
“…예 선배님.”
나는 그녀에게 질문했다.
“아까 육요 앞에서는 왜 그랬던 거냐.”
서란이 육요를 좋아했던 건 알고 있었다.
그렇기에 처음에는 좋아했던 여성이 눈앞에 있던 상황에서 당황한 것일까 생각했다.
하지만 다시 생각해 보니, 그녀의 눈빛은 이상했었다.
나는 김영훈과 전명훈과 잠시 떨어져 그녀에게 질문했다.
서란은 몸을 떨며 입을 열었다.
“…제 자신이 추해서 그랬습니다.”
“음?”
그리고 이어진 그녀의 말에 나는 흠칫 놀랐다.
“그녀가 불행하기를 바랐습니다.”
“뭐…?”
“그녀와 처음 봤을 때… 저는 왠지 육요에게 끌렸습니다. 알 수 없는 동질감이 있었지요. 마치 이 세계 전체와 완전히 동떨어져 있는 외딴섬 같은 기질을 가진 여인. 해룡진혈을 가지고 있기 이전에, 그러한 특유의 기질 자체가 저를 이끌었던 거지요.”
서란의 설명이 이어졌다.
“그러나 차후, 그녀를 다시 만나, 그녀가 사실 ‘고향’으로 돌아가길 원한다는 걸 알게 되었습니다. 그 순간부터… 저는 왠지 모르게 육요를 미워했던 것 같습니다.”
그는 얼굴을 감싸쥐며 말했다.
“그녀가 자신의 고향으로 돌아가지 못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아비란 작자에게 붙잡혀서 감옥에 갇혀 있다 했을때, 저는 왠지 기뻤습니다. 그녀가 고향으로 돌아가지 못할 테니까요. 하지만 마침내… 그 [산의 신]이란 존재에게 우리의 동료들이 모두 죽은 그날. 그녀는 백린과 함께 이곳으로 돌아왔지요. 저는 그날부터….”
그의 손가락 사이로 보이는 눈은 시뻘겋게 충혈되어 있었다.
알 수 없는 증오감이 그의 눈에 깃들어 있었다.
“육요가, 반드시 불행했으면 좋겠다 생각했습니다. 사실 그녀가 진짜 세상이라 믿어 왔던 이 세계가 진짜 꿈이고, 꿈속에 평생 갇혀서 헛것이나 보고 살아간다는 것을… 언젠가 깨달아서 불행해졌으면 했습니다. 하지만… 오늘 이리 보고 알았습니다. 육요는, 그녀는… 지난 평생 동안 이 세상에서 한평생을 행복하게 살아왔구나, 하는 것을 말이지요.”
“….”
“저는 제 자신이 추해서 견딜 수가 없습니다. 도대체 왜 이런지 모르겠습니다. 좋아하는 이가 행복한 게… 도대체 왜 이렇게 혐오감이 들고, 미운지 모르겠습니다. 왜 그녀가 불행했으면 좋겠는지… 저의 이 마음 자체가, 너무나 추하고 추해서… 목을 매고 죽어 버리고 싶은 심정입니다.”
서란의 이런 속내를 들은 것은 처음이었다.
내게 있어서 서란은, 벗인 나를 위해 자신의 목숨을 희생하고,
스승인 송진을 극진히 모시며, 어머니를 그리워하는 연약한 반인반룡일 뿐이었다.
그런 서란이, 누군가를 이렇게 질투하고 혐오하며, 동시에 자책하는 모습은 거의 처음 보다시피 한 모습이었다.
‘무슨 말을 해 줘야 할까….’
나는 잠시 생각하다, 말없이 그를 안아 주었다.
“…그럴 수 있다.”
“….”
“누군가가 밉고 싫을 수 있어. 나에게도 굉장히 혐오하고 싫은 자가 있어.”
예를 들어 원립, 서휼, 산의 신 등의 존재들.
그 셋만은 내 마음속에서 도저히 용서가 되지 않는 이들이었다.
“그래도 괜찮다. 네 잘못이 아니야.”
서란은 눈물을 흘리기 시작했다.
“자책해도 괜찮다. 혐오해도 괜찮다. 하지만 그 이전에… 네 곁엔… 내가 있단 걸 잊지 마라.”
“선배님께서… 제게 뭔데 그러십니까.”
“뭐기는, 네 벗이 아니겠느냐.”
나는 서란의 어깨를 두들겨 주며 웃었다.
그는 눈물을 닦으며 조금은 기분이 풀린 얼굴로 말했다.
“그리 말씀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벗에게는 얼마든지 할 수 있는 말이 아니냐. 얼마든지 너를 위로해 줄 순 있으니, 걱정 마라.”
어째서 나는 매 생마다 달라지는 청문령과 서란 등을 다시 만나, 그들과의 관계를 이어 가려 할까.
간단하다.
청문령의 밑에서 참오하며 되새긴 진실.
한 번 주고받은 마음은 내 안에 있다.
그리고, 다시 만나는 인물이 다른 사람일지라도, 나와 아무런 인연이 맺어지지 않은 사람일지라도.
그자가 나와 마음을 주고받을 만한 자라면 다시 인연을 맺을 뿐이다.
그리고 다시 만난 다음 생의 인물들은, 전혀 모르는 인물이 되었더라도 내가 마음을 주고받을 만한 인물일 뿐인 것이었다.
나는 그렇게, 서란의 숨겨진 속마음을 들으며 계속해서 서쪽으로 향했다.
그리고, 약 2년의 시간이 흘렀다.
“흠!”
이 세계에 온 지 92년이 된 날.
나는 머나먼 동쪽을 바라보았다.
청문령이, 갈 때가 되었다.
“…잠시, 스승님께 일이 생겨 다녀오겠습니다.”
나는 봉래국 서쪽에 있는 나라에서 동료들과 마작을 즐기던 중, 저 먼 곳에서 나를 부르는 청문령의 의지를 듣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래, 다녀와라.”
나는 동료들에게 허락을 구한 후, 바로 선술로 축지법을 써서 순식간에 봉래국과 성제국, 연국, 벽라국, 그리고 답천사막을 주파했다.
파아앗!
답천사막의 중앙.
등선향이 있던 자리, 비승림이라도 불리우는 곳.
그 중심.
원래의 수계에는 ‘승천문’이 열리는 곳으로 가자, 커다란 사당이 하나 지어져 있었다.
그리고 사당 앞에선 곽암이 가부좌를 틀고 있었다.
“사형, 스승님이 가실 때가 된 것입니까? 스승님께서 안에 계시는 겁니까?”
내가 다급하게 사당 안으로 들어가려 할 때였다.
척!
곽암은 그 거구를 움직여, 내가 사당 안에 들어가는 것을 막았다.
“…사형?”
“…사형이라 부르지 말라 했다.”
“…일단 스승님을 만나게 해 주십시오.”
그리고, 곽암은 나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안 된다.”
“예…?”
“아직도 선술에 대한 가닥도 못 잡은 것 같군. 안 그런가?”
“…부끄럽지만 그렇습니다.”
“스승님께서는 선술에 대한 감을 잡으라고 여정을 보낸 게지. 그런데 아직까지도 그 편린조차 감을 잡지 못했다면… 이 안으론 들어갈 수 없다.”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사형! 어찌 그래도 스승님의 마지막 모습조차 보지 못하게 하시는 겁니까?”
나는 황당함에 차 소리를 질렀고, 곽암은 내게 으르렁거렸다.
“스승님의 말씀조차 제대로 못 따르는 너는 스승님의 마지막을 뵐 자격조차 없다. 정 스승님의 마지막 모습을 보고 싶다면, 스승님이 말씀하신 대로 너만의 선술을 가져와라. 아니, 네 선술에 도달할 단초를 잡기만 해도 좋다. 거기까지만이라도 한다면 들어가게 해 주마.”
“그 무슨 억지가…!”
나는 이를 악물며 선술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계속 막으신다면, 힘을 써서라도 들어가겠습니다.”
“하… 너 따위가?”
우드득!
나는 선술을 조작했다.
선술 계의의 구결을 통해, 이 세계의 법칙을 흐릿하게 재배치하기 시작했다.
우, 제, 몽, 역, 극 중 ‘역’의 선술!
키이잉!
세계의 법칙이 흐릿해지고, 내가 원래 세계에서 가지고 있던 권능과 법리가 돌아오기 시작한다.
우드득!
‘합체기까지는 안 되겠지만… 사축기 정도 힘이라면….’
그리고, 내가 사축기의 인력으로 곽암을 치우려 했을 때였다.
콰드드드드득!
“…!?”
다음 순간, 곽암은 내 어깨를 잡고 그대로 짓눌렀다.
그와 동시에 나는 땅 속으로 무릎이 파묻혀 버리며, 내 모든 권능이 쭈그러들어 버리는 것을 경험했다.
“까불지 마라. 왜, 그게 네가 가진 본래 힘이라고 주장하고 싶느냐? 억울하느냐? 너는 약해 빠졌다. 네가 바깥 세계에서 키워 온 힘을 전부 이 세계에 반입해서 나를 상대해도, 나는 너를 언제든 곤죽처럼 짓이겨 버릴 수 있다.”
곽암이 으르렁거리며 나를 내려다본다.
“너와 나의 실력 차이는 네가 무엇을 상상하든 그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심대하다. 나는 이미 진즉에 스승님을 뛰어넘은 지 오래고, 단지 그분을 숭상하기에 지금껏 그분에게 고개를 조아렸을 뿐. 제발 나대지 말아라. 제발 내 심기를 건드리지 말아라. 제발 내가 네놈을 이 자리에서 죽여 버리고 싶게 만들지 말아라.”
쿠드드드득!
그가 팔에 힘을 더욱더 거세게 주었다.
“약한 건 악(惡)이다. 네가 멍청하고 아둔하고 약해 빠졌기에, 너는 스승님의 마지막을 볼 자격조차 없는 거다. 당장 꺼져라! 그리고 선술에 대한 단초를 잡고 와라! 그전까지, 너는 이 안으로 단 한 발짝조차 들어갈 수 없다!”
쿠구구구국!
나는 곽암이 숨겨 두었던 아득한 힘을 확인하며 목소리를 떨었다.
“개열기라도… 되었던 겁니까…!?”
그 정도가 아니면 설명할 수조차 없을 정도로 막대한 거력!
그러나 곽암은 피식 웃을 뿐이었다.
“하! 혹시 나를 웃겨 주려는 거냐. 꺼져라.”
퍼억!
그가 나를 발로 걷어찼다.
“커억!”
나는 내장이 뒤틀리는 느낌을 받으며 피를 토했다.
곽암은 마치 태산(太山)과 같이 사당으로 들어가는 입구를 막고 있었다.
‘아득하다….’
도대체 이자의 정체는 무엇인가.
얼마나 힘을 숨기고 있는 것일까….
나는 아득한 곽암의 힘 앞에서 이를 악물며 말했다.
“반드시… 반드시 선술의 단초를 가져오겠습니다. 그러니, 오늘만이라도 들어가게 해 주시면 아니되겠습니까?”
그리고, 곽암은 냉엄하게 나를 내려다볼 뿐이었다.
“안 된다.”
“….”
빠드드득….
너뮤 이를 거세게 악물어, 잇몸에서 피가 흘렀다.
나는 잇몸에 고인 피를 뱉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오늘은 돌아가겠습니다.”
“오늘이 아니라, 네가 네 선술의 단초를 잡지 않는 이상 영원히 너는 이곳에 도달할 수 없다!”
파앗!
곽암이 팔을 휘두르자 나는 어느새 비승림 바깥으로 옮겨져 있었다.
뿌드득…!
나는 비승림 한쪽으로 다시 진입하려 했다.
그러나 비승림 안으로 들어온 순간, 나는 몇 걸음을 더 가자 비승림 바깥으로 나온 걸 깨달았다.
“…!”
다시금 비승림 바깥으로 들어가 봤으나 마찬가지였다.
곽암이 자신의 선술로 내가 진입하지 못하도록 막아 버린 것이었다.
나는 한참을 비승림 밖에서 안을 노려보다 뒤를 돌았다.
“반드시… 돌아오겠소. 사형…!”
나만의 선술.
반드시 그 단초를 잡아낼 것이다!
* * *
청문령의 선술의 기척이, 더 이상 이 세계에서 느껴지지 않았다.
나는 동료들에게로 돌아와, 힘없이 말했다.
“…여정을 계속하지요.”
청문령은 날더러 서쪽으로 여정을 떠나 선술의 단초를 잡으라 했다.
저 머나먼 서방에 선술의 단초가 있단 말이었다.
그의 시신을 보기 위해서라도, 나는 계속해서 나아가야 했다.
나와 동료들은 계속해서 서쪽으로 갔다.
그리고 다시 3년이 지났다.
이 세계에 온 지 95년째.
휘이이이-
나는 동방 만리국을 다시 밟았다.
세계를 한 바퀴 돈 것이었다.
우리는 만리국 곳곳을 유람하고, 절규영롱검 역시 원 부족에 돌려주었다.
그리고 다시금 서방으로 향했다.
다만 이번에는 답천사막을 질주하지 않고, 대초원으로 향했다.
답천사막을 질주하면, 결국 다시 비승림을 만날 테니까.
그리고 대초원에서, 나는 익숙한 인물을 만날 수 있었다.
“반갑구려, 함해자의 제자. 그리고… 서 선배.”
그것은 기억을 찾은 창호자 청문선우.
이 세계에서는 창운자라 불리는 대륙 삼강 중 하나였다.
“기억을 찾으셨군요.”
하기사 그는 아무래도 창천개벽문의 문도들이 바깥에도 존재하니만큼 기억을 빨리 찾을 수 있던 것이리라.
‘인족 육대종문이 된 만큼 문도 수도 수계 때와는 비교할 수 없을만치 늘었으니 말이지….’
“반갑습니다, 창호자.”
나는 빙긋 웃으며 창호자에게도 인사를 했다.
“하하, 선배께서 말 높일 필요 없습니다. 인족 출신 심족 존자라니 제가 말을 높여야지.”
“됐습니다. 그건 제가 거절하지요. 선배라 부르시지 마시지요.”
나는 창호자에게도 딱히 선배라 불리고 싶진 않았기에 그의 제안을 거절한 후, 그와 대화를 나눴다.
“뭐 이 세계에서야 제가 조금 더 경지가 높긴 합니다만, 원 세계에서는 선배가 맞잖습니까. 어차피 원 세계로 돌아가야 하기도 하고 말이지요.”
“정 그러면… 도우나 수사로 부르시지요.”
그는 나와 차를 마시며 물었다.
“정 그렇다면… 서 수사께서는, 혹시 원 세계로 돌아갈 방법이 있습니까?”
“…일단 방법을 찾고 있습니다. 하지만 희망이 없진 않습니다.”
선술을 배우면 이 세계의 법칙을 뒤틀 수 있단 걸 알았다.
거기에 몇 년 전엔 세계의 법칙을 뒤틀어, 본체의 힘을 끌어와 곽암에게 대항하기도 했었다.
선술을 통하면 바깥으로 향하는 문을 열 수 있을 것이란 기대감도 있었다.
‘물론… 아예 나가려면 내 선술을 ‘완전히’ 익혀야겠지만.’
“하하, 희망이 있다니 다행입니다. 그나저나… 제 제자는 잘 지냅니까?”
“그렇습니다. 그는 현재… 딸 같은 아이가 생겼지요.”
그 말에 창호자는 빙긋 웃었다.
그리고 어쩐지 호탕한 윳음만이 터져나올 것 같던 그 얼귤에서, 따스한 미소가 뿜어졌다.
“…다행이군요.”
“다행이라… 어째서입니까?”
“제가 현석이의 스승으로서, 그 아이를 지켜본 바. 그 아이는 늘 마음 한 켠에 짐을 지고 사는 것 같았습니다.”
“짐이라….”
“예. 그리고 저는, 소싯적에 조씨세가라는 세가와 싸우며, 제 자식들도 몇몇을 잃어 봤기에 잘 알고 있지요. 그건 자식을 잃어 본 슬픔이었습니다.”
“….”
“녀석은 늘상, 자식을 잃은 슬픔을, 그 마음의 짐을 잊어버리기 위해 늘상 수련에 박차를 가했지요. 그리고 항상 저를 따라 웃더군요.”
나는 쓰게 웃었다.
오현석은, 생각해보면 꽤 자주 웃는다.
그것도 늘 창호자를 따라 호탕하게 웃었다.
하지만 그는 한 번도 진정으로 즐겁게 웃었던 적은 없었던 것 같았다.
즐거움을 흉내 내기 위해, 마음의 짐을 떠안고 웃는 억지웃음.
그것이 오현석이란 사람인 것이었다.
“그 아이가… 자신의 아이는 아닐지언정, 다른 아이와 함께하면, 자신의 마음의 짐을 조금이나마 내려놓을 수 있겠지요.”
창호자는 껄껄 웃으며 차를 쭉 들이켰다.
여태까지 만나보지 못한 창호자의 모습이었다.
‘제 3자와 함께 자기 제자에 대해 논할 때는, 사뭇 진지해지는 사람이었던가….’
나는 그러한 창호자의 모습 역시 마음 속에 담으며, 이후 그와 다시 헤어졌다.
우리는 계속해서 다시 서쪽으로 향했다.
그리고 마침내… 우리는 여정이 시작되었던 성제국 청하현에 도착할 수 있었다.
이 세계에 떨어진 지, 딱 98년 차에 벌어진 일이었다.
* * *
끼이익-
나는 백란의 집 대문을 열고 조심스레 들어갔다.
그리고 들어가자마자 살짝 놀랐다.
백란이 나무 의자에 앉아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오셨습니까, 서 선사님.”
“…다녀왔소.”
“어머….”
그리고 부엌에서 김연이 나와 우리를 맞아 주었다.
그렇게, 우리는 수 년 만에 다시 재회하였다.
“매일같이 내가 오는 걸 기다리고 있었다고?”
“네, 계속해서 꼭 해 줄 말이 있다 하더라고요.”
나는 김연을 보고, 다시 백란을 쳐다보았다.
백란은 빙긋 웃으며 말했다.
“예. 선사님께 꼭 전해야 할 말이 있었기에 기다렸습니다. 다만 그 전에… 선사님의 이야기를 좀 듣도록 하지요. 세계여행은 어떠셨는지요?”
“…그래, 알려 드리지.”
나는 얼마간 백란의 옆에 앉아, 그녀에게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이 세계 곳곳에 대한 이야기였다.
동시에 내 앞으로 그때의 추억이 스쳐 지나갔다.
북향화와 함께 수계의 서쪽 끝을 구경했던 그날의 추억….
그러나 이 세계는 서쪽 너머로도 넘어갈 수 있는 세계였다.
나는 마치, 10회차의 북향화에게 서쪽 너머를 말해 주는 기분이 들었다.
서쪽 너머, 세계순력에 갇혀서 그 너머로는 넘어가지 못했던 그녀가 바로 옆에서 이야기를 들어 주는 듯했다.
몇 년간의 여정에 대한 이야기가 끝나고, 나는 마침내 이 세상을 한 바퀴 돌아 다시 이곳에 도달한 것을 마지막으로 얘기를 마쳤다.
“…그렇습니까. 세상은 결국 다시 이어지는군요.”
“그렇소. 꽤나 재밌는 세계지.”
서란도, 김영훈도, 전명훈도 이 자리에 있었다.
나는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천기를 볼 수 없는 세상일지언정 느껴졌다.
그녀는, 우리가 도착한 오늘 갈 것이다.
백란의 숨결이 가빠졌다.
“할 얘기는… 그게 끝입니까?”
“…이 이상, 딱히 할 얘기는… 없는 것 같소.”
“후… 후… 선사님.”
그녀는 내 손을 잡으며 말했다.
“꿈을 꿨습니다. 아주 깊은 꿈을요. 꿈속에서도, 선사님을 만난 기억이 납니다. 선사님은 저를… 백란이 아닌 다른 이름으로 불러 주셨지요.”
“….”
“그에 대해서, 아시는 바가 있으십니까?”
나는 그녀가 내게 뭘 원하는지 알아챘다.
“조금 긴 이야기가 될 거요.”
“괜찮습니다. 아직 그 정도는 기다릴 수 있습니다.”
“…그런가.”
나는 다시 또 다른 이야기를 시작했다.
이건 서쪽으로 향하는 여정이 아니었다.
등선향에서부터 시작해서, 지금까지에 이르기까지.
내 회귀를 빼고, 지금까지 ‘우리’와 그녀가 겪었던 모든 일이었다.
이야기를 들을수록 전명훈의 눈이 떨려 왔고, 김영훈 역시 뭔가가 생각나기 시작하는 듯 머리를 부여잡았다.
이야기는 길었다.
그야, 내게는 짧다지만 그래도 천 년에 가까운 시간의 일이었다.
오늘 하루 안에 다 말해야 한다기엔 지나치게 많은 세월 동안의 일이었으니 이야기는 쉬이 끝나지 않았다.
우리는 새벽에 이 집에 돌아왔지만, 이야기를 마치는 데엔 저녁이 되어야 했다.
“…그렇게, 우리가 혈음이란 존재를 피해 이 세계에 도달한 것이, 그 꿈속 세계의 이야기의 끝이오.”
“그렇군요… 감사합니다.”
백란은 두 눈을 감으며 미소 지었다.
“그 세계는, 실존하는 세계였던 거군요?”
“그런 셈이지.”
“그렇다면… 역시 이 말은 드려야겠습니다.”
그녀는 다시 눈을 떴다.
그녀의 눈빛은 지금까지 보아 왔던 그 어떤 때보다 밝게 빛나고 있었다.
“그 꿈속 세계에서, ‘북향화’라 불렸던 저는… 소금으로 변하기 전에 선사님께 전하려던 말이 있었습니다.”
“전하려던 말?”
“비록 직접 전하는 것보단 부족할 테지만, 제 입을 통해서나마 꿈속의 그녀가 선사님께 전하는 말입니다. 들어 주소서.”
나는 진지하게 그녀의 말에 귀를 기울이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수계라는 곳의 별자리를 탐구하고, 노리개를 연구하며, 현고지라는 것과 고력계라는 것 등의 상관관계를 조사하던 중 고(古)라는 것의 실체에 대해 알게 되었습니다.”
“고의 실체?”
“예. 고(古)란 바로, ‘끝나버린 꿈’을 뜻하옵니다.”
백란의 입에서, 북향화가 알아낸 진실이 흘러나왔다.
“사람은 꿈을 꾸는 동물이지요. 특히나 상단전이 진화한 인간은, 다른 동물들보다도 더더욱 꿈을 많이 꾼다고 합니다.”
‘그렇군.’
인간형 선수의 이름에 고가 들어가는 이유.
그것은, 인간이란 꿈을 꾸는 동물이기 때문인 것이었다.
“그러나 모든 꿈은 결국 빛이 밝으면 깨어나게 되는 법. 모든 꿈은 끝날 수밖에 없고, 그렇게 끝나 버린 꿈의 힘들이 바로 고(古)의 힘(力)이라 불리우는 것이지요.”
그랬다.
일전 내가 이 세계에서 느낀, 고력계와 비슷한 느낌은 이 세계 역시 고력계의 차원바다 속 차원들과 사실상 동일한 차원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녀의 설명이 이어졌다.
“그리고 그녀는 고력에 대해 알게 되고, 자신의 노리개에 어마어마한 크기의 꿈이 연결되어 있단 걸 눈치챘습니다. 그리고… 그 꿈속 세계에 접속하기 위해 노력했지요. 눈치채셨겠지만, 그녀가 발견한 거대한 꿈은 바로… 이 세상을 뜻합니다.”
“…그런가.”
진선의 꿈이란, 끝나고 나서도 이토록 어마어마한 차원을 남기는 모양이었다.
“그렇다면, 이 세계는 실존하는 세계인가.”
서란이 그 말에 귀를 기울였다.
백란이 웃었다.
“…실존합니다.”
“어째서 그렇지?”
“그녀가 발견해 온 고력계라는 곳의 차원들은, 완전히 끝난 꿈입니다. 하지만… 이 세계의 꿈은, 누군가가 ‘계승’하고 있습니다.”
“계승?”
“예. 꿈의 원주인이, 다른 누군가에게 자신의 꿈을 전한 것이지요. 누군가에게 전승되었기에, 이 세계는 실존합니다. 이제는 단순한 꿈이 아닌 ‘전승되는 의지’로 실존하는 것이지요. 전승되는 이상, 의미 없는 세계가 아니라는 의미입니다.”
“…그런가.”
내가 나름대로 고력계와 고의 의미, 그리고 소금산의 세계를 계승한 존재에 대해 생각할 때, 백란의 말이 이어졌다.
“그리고, 당신도 마찬가지입니다.”
“뭐?”
그녀가 내 손을 잡았다.
“제가 꿈에서 본 것이 사실이라면… 당신께서는 이 세상 그 누구보다 큰 자책감과 고통을 가슴에 얹고 계실 겁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
나는 침묵했다.
그렇다.
태산의 주인에게 당해, 모두가 몰살당했다.
괴로웠다.
그때의 고통과 자책감이 너무 심해, 내 업화가 꺼질 정도였으니까.
“자책하지 마십시오.”
“…뭐?”
“그들의 마음은, 당신 안에 남아 있지 않습니까.”
그녀의 손길이 내 가슴을 쓸었다.
“이제 그만, 스스로를 벌주시지요. 마음의 짐을 내려놓으셔도 됩니다.”
나는 그 말에 몸을 파르르 떨었다.
“…하지만, 누군가는 기억해야 한다.”
덜덜 떨리는 몸으로 그녀에게 대답했다.
“누군가는, 이 고통을, 이 아픔을 기억해서… 반드시….”
“죽은 그들은 당신께서 아프기를 바라더이까?”
사락-
백란의 손이 내 뺨을 쓸었다.
나는 그 말에 그녀를 쳐다보았다.
그녀의 얼굴과 태도에서, 10회차의 마지막, 그녀의 모습이 스쳤다.
“아….”
그랬다.
10회차의 그녀는, 내가 원립의 모가지를 잘라 온 것에 기뻐하지 않았다.
다만 그저… 내가 아픔을 이기고 살아가기를 바랐을 뿐이었다.
“그들의 죽음은 필히 고통스러운 것이 사실입니다. 하나… 이제는 스스로를 용서해 주십시오. 왜냐하면 그들은 당신을 원망하지 않고, 자신들로 인해 당신이 고통받기를 원하지 않습니다.”
“하, 하지만… 난, 나는….”
“이미 그 마음은, 당신에게 전승되었기에… 의미가 없지 않답니다. 실존하는 이 세계와도 같이요.”
백란의 숨이 더 가빠졌다.
“그러니… 자신을 용서하는 법을… 배워… 주소서… 그것이….”
그녀는 나무 등걸에 몸을 뉘이며 눈을 감았다.
“그녀가… 당신에게 전하려던… 말…입….”
“….”
“….”
그리고, 백란은 잠들었다.
툭, 투둑, 투두두둑!
빗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하늘이 먹구름으로 물들었다.
김연이 떨리는 목소리로 백란의 맥을 짚고, 고개를 저었다.
북향화는, 백란은… 그렇게 간 것이었다.
“…일단 안으로 옮겨 놓….”
김영훈이 말을 꺼냈고, 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잠시… 다녀올 곳이 있습니다.”
“음?”
“그녀의 시신을… 수습해 주시지요.”
말을 마친 나는 바로 뒤를 돌아 걸음을 디뎠다.
파아앗!
축지법을 통해 성제국, 연국, 벽라국을 건넌 나는 답천사막 한복판에 도착했다.
나는 그곳에서, 내 가슴을 움켜쥐었다.
“사형, 들리십니까.”
툭, 투둑….
사막에도 먹장구름이 일며 빗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오늘은 들어가게 해 주셔야겠습니다.”
우웅-
저벅.
나는 한 걸음을 디뎠다.
원래대로라면 몇 걸음을 디디면 다시 바깥으로 나오게 된다.
그러나 나는 어쩐지 곽암이 펼친 왜곡의 이치를 알 것 같았다.
저벅, 저벅, 저벅….
선술의 이치를 꿰어 내며, 나는 계속해서 비승림 안쪽으로 들어갔다.
[감히 네 따위가 이곳에 들어오겠단 거냐.]“예. 이제는 들어갈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하, 이곳을 건너오려면 지옥을 마주해야 할 거다.]화르르륵!
주변에 불꽃이 타오르기 시작했다.
뜨거운 겁화(劫火)는 숲 전체를 태우며 나를 압박했다.
곧이어 주변은 연기가 피어오르는 불지옥으로 변했다.
곳곳이 숯으로 변했고, 잿더미가 되었다.
나는 불지옥을 계속해서 건넜다.
파사사사-
어느 순간 비승림은 전부 불타고, 인근이 사막으로 변했다.
그리고 나는 그 순간 깨달았다.
‘이 사막은….’
단순한 사막이 아니었다.
익숙한 사막이다.
하나 답천사막은 아니다.
이곳은….
그래.
아직 이름도 없는 나의 합도영역.
대막사해성이 구현된, 끝없는 사막의 세계였다.
곽암의 선술이 나를 나 자신의 사막에 집어넣은 것이었다.
화르르륵!
나는 뜨거운 겁화를 어루만졌다.
이 겁화는, 내 자신의 죄책감의 산물.
곳곳에서 숯덩이로 이뤄진 괴물들이 울부짖는다.
저 괴물들은, 내 자신의 고통.
저벅, 저벅….
“들어 주소서. 사제가 선술의 단초를 잡았습니다.”
나는 그 모든 것을 아랑곳하지 않고 사막을 걷기 시작했다.
“스승님께서는, 선술이란 마음으로 세계를 뒤트는 것이라 하였습니다. 그리고 저는 지금껏 기본 선술을 배우며 선술에 대해 이해를 다져 왔지요.”
화르르륵!
겁화는 점차 더 뜨거워졌다.
“그리고 더욱더 강력한 선술은 어떤 것일까, 내게 잘 맞는 선술은 어떤 것일까를 고민하며 지금껏 세계를 유랑했습니다.”
화르르르륵!
겁화의 뜨거움이 절정에 달했고, 세계가 일순간 백화(白化)하는 듯하였다.
동시에, 사막이 녹아내리기 시작했다.
숯의 괴물들이 응축하기 시작했다.
“어지하면 앞으로 더 잃지 않을지, 어찌하면 앞으로 제 소중한 것을 지킬 수 있을지를 고민했습니다. 하지만… 오늘에서야 이해가 되는군요.”
북향화가 백란의 입을 통해 내게 전한 말.
-자신을 용서하소서.
창호자가 오현석에게 하는 듯하며, 내게도 은근슬쩍 전했던 말.
-마음의 짐을 내려놓으라.
청문령이 내게 주었던 단서.
-노력만으론 아니 된다.
툭, 투둑… 투두두두-
쏴아아아아아!
빗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끝없는 사막에 비가 오며 사막의 열기가 식어 갔다.
쿵, 쿵, 쿵, 쿵!
내 몸은 점차 커져 갔다.
선술이 세계의 이치를 뒤틀며, 내 본체의 형상이 만연하게 드러난다.
21개의 머리를 가진 괴물.
그리고, 그 괴물의 22갈래로 갈라졌다.
그것은 스물한 개의 시체와, ‘나 자신’이었다.
0회차의 시체가 빙긋 웃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시체에 살이 붙고, 혈색이 돌았다.
0회차의 내가 나를 향해 걸어왔다.
스르륵!
0회차의 나와 지금의 내가 합쳐진다.
이어서, 1회차의 내가 다시 살아나며 나와 겹쳐진다.
이후의 회차의 나들 역시 내게 걸어와 합쳐졌다.
21개의 삶의 흔적이, 내 품 안으로 돌아오고 있었다.
분명 괴물의 모습이었던 나의 몸이, ‘인간 서은현’의 모습으로 돌아오고 있었다.
동시에, 빗물에 사막이 식어 가며, 또 다른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그것은 끝없는 유리(琉璃)의 산과 바다였다.
숯덩이의 괴물들은 응축되어 금강(金剛)이 되었고, 사막의 모래들은 녹았다 식으며 유리의 수해(樹海)를 이뤘다.
불타오르던 사막이, 유리의 숲으로 변한다.
그리고, 21개의 ‘나’의 시체가, 다시 살아나며 나 자신과 겹쳐졌다.
“결국, 자신만의 선술을 얻는단 것은… 노력도 중요하나, 자신의 마음을 들여다보는 것 또한 필요한 것이 아니었습니까?”
유리의 숲이 완성된 순간.
나는 다시금 유리의 숲을 지나, 비승림의 정가운데.
함해자의 사당 앞에 도달할 수 있었다.
“제 선술에 대한 단초는 잡았습니다. 제가 만들어 낸 이 공법을 갈고닦으면, 진선경에 이르렀을 때 저는 반드시 저만의 선술을 얻을 것입니다.”
오월입도경.
음혼귀주문.
백란축성문.
흑색혈루화.
오행혈주번.
흑색귀주번.
멸계요주번.
규토장성공.
기묘성심전.
태극진뢰신.
광한결.
군마용갱권.
귀선규마결.
육극음뢰신.
호풍응룡변.
창령성광오채대법.
태산열제공.
기괴고, 봉령휴, 용형둔갑술, 은식술, 화혼만천….
멸신겁천….
그리고 만상인연도.
천린수해성.
대막사해성.
지금까지 익히고 보아 온 ‘모든’ 공법을 전부 녹여 넣어 만들어 낸, 나만의 선술의 가능성.
“파려도해성(玻瓈蹈海成).”
서은현류 본명공법.
파려도해성.
이것이, 내가 내놓은 나만의 선술에 대한 대답이다.
“이제 됐지요. 들어가겠습니다.”
나는 누구도 지키고 있지 않은 사당을 향해 바로 걸어 들어갔다.
곽암은 딱히 나를 제지하지 않았다.
사당 안쪽.
나는 마침내, 청문령의 마지막 모습을 볼 수 있었다.
그는 가부좌를 튼 채 눈을 감고 있었다.
그의 시체는 방금 막 죽은 것처럼 아직도 깨끗했다.
생기가 느껴지지 않았다면 아직도 살아 있다고 생각했으리라.
“…스승님….”
나는 청문령을 잠시 멍하니 보았다.
그리고… 절을 올렸다.
한 번.
두 번.
세 번….
아홉 번….
그리고, 마지막 열 번째 절을 올렸을 때였다.
파아아앗!
청문령의 몸에서 새하얀 빛무리가 솟아올랐다.
“헛….”
나는 헛숨을 들이켰다.
그것은, 청문령의 혼(魂)이었다.
청문령의 혼은 빛무리 속에서 나를 따스하게 바라보다, 하늘로 올라가 흩어졌다.
마치 소금 가루 같은 작은 빛무리가 바닥으로 떨어졌다.
“…기다려 주셨던 겁니까.”
그리고, 저 앞에서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둔한 놈.”
“…사형?”
“스승님께서는, 숨이 다하시고 그 명이 끊어지셨음에도… 네놈이 선술의 단초를 완성하는 것을 기어이 보고 가겠다 하시며, 끝끝내 그릇 속에서 너를 기다리다 가셨다.”
나는 저 앞쪽.
사당의 어둠 속을 바라보았다.
그곳에는 곽암이 있었다.
나는 눈을 깜빡였다.
곽암의 모습은 처음 보는 모습이었다.
그는 여태껏 입고 있던 누더기와 붕대가 아닌, 짙은 검붉은 빛 장포를 입고 있었다.
그 장포에는 비명을 지르는 수많은 인간의 얼굴이 그려져 있었다.
그는 허리까지 닿는 생머리를 하고 있었으며, 머리칼은 짙은 군청 빛을 지니고 있었다.
얼굴은 반대편을 본 채, 어떠한 위패를 향해 무릎을 꿇고 있는 관계로 볼 수 없었다.
위패에는 함해상제(鹹海上帝)라는 글자가 음각되어 있었다.
“네놈에게 이전에 말한 것도 있고, 스승님의 잔념이 부탁한 것도 있으니… 너를 죽이는 것은 먼 훗날이다.”
“예? 그게 무슨….”
“[위에서 보자]고 했지 않았느냐. 아둔한 놈.”
“…!”
나는 그 말에 두 눈을 크게 부릅떴다.
내게 그런 말을 한 자는 하나밖에 없었다.
“…당신… 설마…!”
나는 곽암의 정체를 알아채고, 눈에 핏발이 붉어지는 걸 느꼈다.
“당신이 왜 여기에…!”
“왜라니. 당연하잖느냐. 나는 묘지기다.”
그는 음울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함해상제, 소금산의 주인이시자 나의 스승의 영전(靈前)을 지키는 묘지기가 바로 나다. 이곳에 함부로 뱀 같은 것이나 들여놓는 놈 따위보다는… 내가 더더욱 제자로서 지극하거늘… 당신께서는 어찌 새로운 제자를 들이시려 하시나이까… 제게 마지막에 하셨던 말씀과 어찌 상반된 태도를 보여 주시나이까….”
콰드득!
“…!”
나는 한쪽 팔이 뽑혀 나간 걸 느꼈다.
홍범이 준 팔찌가 팔과 함께 바닥을 뒹굴더니, 그대로 붉은 소금으로 변해 버렸다.
“이제 썩 꺼져라. 배울 건 다 배웠으니, 다음에 영전을 찾아올 때는 유물을 통한 편법이 아니라 네 힘으로 직접 찾아와라. 그때에 상대해 줄 것이다.”
츠츠츠츳!
주변의 공간이 일그러지기 시작했다.
‘이건….’
세계 전체가 흐릿해진다.
동시에 이 세계 전체와 나 사이에 이질감이 생기는 게 느껴졌다.
봉래의 세상이 나를 배출하는 것이었다.
아니, 나뿐이 아니었다.
김영훈, 전명훈, 오현석, 김연, 창호자… 그리고 기타 등등 모든 인물들이 배출되는 게 느껴졌다.
나는 첫날 내게 말을 했던 존재가 누군지 알 수 있었다.
봉래의 관리자.
묘지기.
소금산의 주인의 후계자.
태산상제(太山上帝)가 바로 곽암이자, 이 세계를 전승받은 관리자인 것이었다.
‘…그런가.’
느껴진다.
그는 나와 ‘위에서’ 겨루고 싶어 한다.
그리고, 그를 위해 지금 당장 나를 언제라도 죽일 수 있었음에도 죽이지 않고, 내가 청문령.
즉, 소금산의 주인의 잔념에게 선술을 배울 때까지 기다린 것이리라.
나는 그 태도에서, 그가 나를 혐오하지만 동시에 인정하고 있단 걸 이해했다.
“반드시, 찾아가겠소. 찾아가서… 당신에게 나의 은원을 갚을 것이오. 사형.”
“…사형이라 부르지 마라.”
말은 그리 할지언정, 그는 나를 사제로서 인정하기에 살려 둔다는 것이 느껴졌다.
피이이잇!
세계 전체가 멀어지는 느낌이다.
또렷한 것은 오로지 함해상제의 위패 앞에 무릎 꿇고 있는 태산상제의 뒷모습뿐.
나는 내 사형의 뒷모습을 노려보며, 멀어지는 세계 속에서, 청문령이자, 동시에 함해상제였던 이를 향해 마지막으로 절을 올렸다.
그런 나를 향해, 태산상제가 무언가 말을 해 주었다.
[스승께 받은 선물로 인해, 어마어마한 거흉(巨凶)이 네 앞에 도사린다. 같은 스승을 둔 자로서, 네게 천명(天命)을 능멸(凌蔑)하는 법을 알려 주마. 잘 듣고, 살아남아라.]그가 내게 귓가로 지식을 속삭인다.
나는 그 지식을 들으며, 나의 사형을 향해서도 예를 취했다.
분할지언정, 그는 나의 사형이었으니까.
그렇게, 나는 내가 일생을 바쳐 이뤄 내야 할 선술과, 일생을 바쳐 도달해야 할 존재.
그리고, 이 세계에서의 모든 시간을 바쳐 도달한, 세계를 나가는 법을 마침내.
모두 찾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