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 reincarnated genius RAW novel - Chapter 316
316. 외전 – 누구세요, 당신 (8)
다음날.
한서호는 호텔 로비에 있는 카페에서 홍차를 마시고 있었다. 그의 옆에는 작은 캐리어 하나가 함께였다.
이제 가야 할 시간이었다. 시간을 낸다고 최대한 냈지만, 그래 봐야 원래 당일에 돌아갔어야 하는 걸 하루 늦췄을 뿐이었다.
게다가 학생들은 남아서 며칠 더 여행한다고 하니, 괜히 시간 뺏지 않고 일찍 출발할 생각이었다.
그나저나······.
호록.
‘회장님 서재에 있는 차가 훨씬 낫네.’
입안에 풍기는 향을 비교하며 감상을 남긴다. 그러다 문득 고개를 돌리는 한서호.
분수대 너머에서 홱홱 주변을 훑으며 달려오는 유채봄이 눈에 들어왔다.
이내 그녀도 한서호를 보곤 한달음에 다가선다.
“교수님!”
해맑은 표정으로 다가온 그녀가 앞머릴 툭툭 건드려 정리한 뒤, 의자를 끌어 자리에 앉았다. 그리고 연신 미소를 날려대며 묻는다.
“부르셨어요?”
빙그레 웃은 한서호가 되물었다.
“잠은 잘 잤어요?”
“물론이죠. 완전 꿀잠.”
엄지를 치켜드는 유채봄에 그가 픽 하고 웃었다.
“뭐 마실래요? 홍차? 커피?”
“아뇨, 아뇨! 저 조식을 너무 먹어서 더 이상 뭐가 안 들어갈 거 같아요. 헤헤.”
손을 휘적거리는 유채봄을 보며 한서호가 또다시 웃음을 터트렸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그가 찻잔을 내려놓으며 유채봄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잠시 멈칫하던 유채봄이 짐작 가는 바가 있는지 입을 열었다.
“정연이가 얘기했다면서요. 제가 곡 하나 더 만든 거.”
이에 한서호가 말없이 끄덕였다.
······어제, 그는 전화 통화를 마친 유채봄에게 또 다른 곡에 대해서 묻지 않았다.
최성령이 무척 궁금한 눈치였지만, 그것에 대한 질문은 스승인 한서호가 먼저 해야 한다며 첫 순서를 넘겨주었지.
그리고 지금이 그 순서였다.
한동안 머뭇거리던 유채봄이 천천히 입을 열려는데, 한서호가 혹시 모를 당부를 한다.
“이유가 있을 거라고 생각해요.”
“······아.”
“남들이 다 이게 더 좋다고 해도, 설령 나조차도 그렇더라도. 작곡가는 그 선택을 할 수 없는 경우가 있거든요.”
멍하니 그를 바라보던 유채봄이 빠르게 끄덕였다. 좀처럼 공감받지 못하던 것을 이해받은 사람처럼.
“맞아요. 제가 그때 그랬어요. 제 곡이 아닌 것 같았거든요.”
“본인 곡이 아닌 것 같았다고요?”
“네. 아무리 생각해도 그 사람 곡이라······.”
“그 사람?”
“아아, 꿈에서 영감을 받았거든요.”
그게 끝? 이라고 묻는 듯한 한서호의 표정에 유채봄은 아무 말도 덧붙이지 않았다.
이에 한서호가 주억였다.
“꿈이라··· 그쵸. 그렇게 영감을 얻기도 하죠.”
“그래서 후회는 없어요. 여전히······.”
사락——.
말끝을 늘리며 그녀가 품에 안고 온 종이를 내밀었다.
“이걸 보면 제 곡이란 생각이 안 들거든요.”
무언가 빼곡히 적혀있는 오선지를 한서호는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리고 물었다.
“봐도 될까요?”
“그럼요! 보여드리려고 가져왔는걸요.”
허락이 떨어지고, 그가 악보를 손에 들었다.
그의 눈이 아주 빠르게, 하지만 어느 한 부분도 놓치지 않고 훑어나갔다.
동시에.
————!
그의 머릿속에선 이미 수십의 악기가 해당 음표들을 거침없이 연주하고 있었다.
“······.”
그렇게 끝까지 보았고, 들었다.
하지만 그는 악보를 내려놓지 못했다.
고개를 들어 유채봄을 보지도, 그렇다고 악보를 다시 읽지도 않는다.
다만 무언가 떠올랐는지 시선은 마침표에 고정한 채.
계속. 그렇게 계속 어떤 생각을 이어나갔다.
#
유럽 여행을 마치고 귀국한 우리들에겐 출국 때와는 전혀 다른 반응이 기다리고 있었다.
공항에 기자들이 기다리고 있는 건 물론이고, 팬들까지 나와 인산인해를 이뤘다.
그중에서도 내 팬이 가장 많았는데, 사실 내가 준우승이라는 결과를 얻어와서는 아니었다.
[외모는 압도적 우승!] [꽃 같은 유채봄!] [유채꽃! 유채봄!]다 내가 예뻐서 그렇지. 흐—!
피켓들을 보며 헤벌쭉 웃었다.
그러고 있자, 동기 언니가 어깨동무를 하며 웃었다.
“채봄이가 예쁘긴 하지.”
과대 오빠도 끄덕이며 칭찬을 얹······.
“그건 인정. 항상 겨울이랑 같이 다녀서 좀 묻히지만.”
“걘 뭐 어렸을 때부터 아이돌 하라고 그랬다잖아.”
“저도 그런 소리 많이 들었거든요?”
콧방귀를 뀌며 승질을 냈다. 옆에서 정연이가 토닥토닥 위로해주었고, 그 뒤로는 승질을 낼 타이밍을 놓쳐버렸다. 몰려드는 기자들 덕에.
정신없이 인터뷰가 이어졌다. 교수님의 요청으로 더 클래식에서 직원분이 안 왔더라면 밤을 새웠어야 했을 정도로 반응은 뜨거웠다.
그리고 그 열기는 집에 도착해서도, 다음날 마트에 장 보러 가서도, 그렇게 몇 주가 지나서도 식을 줄을 몰랐다.
그래서였다. 모자를 푹 눌러쓰고, 안경에 마스크까지 들고서 밖으로 나섰다. 1층에서 익숙한 차를 발견하고 얼른 달려가 조수석에 탔다. 운전석에 앉아있던 최겨울이 어처구니없는 목소리로 나를 반겼다.
“······연예인 납셨네.”
“네가 몰라서 그래. 며칠 전에도 카페에서 마스크 벗었다가 난리였다니까?”
“하긴, 동창들이 네 번호 뭐냐고 나한테까지 연락이 오는 거 보면 그럴 법도 한데···.”
“그치? 이 몸의 인기가 실감 나지? 헤, 그러니 최 기사. 드라이브 좀 합시다!”
피식 웃은 최겨울이 악셀을 밟는다. 미끄러지듯 도로를 달리기 시작하는 차.
나는 창문 반쯤 열어놓고서 양팔을 걸치고 그 위에 머릴 얹었다.
“좋다~.”
바깥 공기를 들이쉬며 헤죽 웃는데, 최겨울이 조심스레 물어왔다.
“아쉽진 않아?”
주어가 빠졌어도 뻔한 질문이었기에 척하고 알아들었다.
검지를 펴서 메트로놈처럼 좌우로 흔들었다.
“저언~혀. 사실 처음엔 조금 아쉽기도 했는데, 지금은 완전 괜찮아.”
“그래도. 1점만 아니었어도 우승이었을 텐데···.”
“혹은 다른 분들한테 점수를 더 받았으면 우승이었겠지. 아니면 날 싫어해도 제대로 점수를 줄 수밖에 없도록 더 좋게 만들었어도 우승이었을 거고.”
방긋 웃으며 말했다. 말하면서도 내가 많이 초연해진 것을 느낀다. 이미 지나간 일이기도 하거니와 세상일이 언제나 공정할 수는 없다는 것도 알기에.
그리고 애초에 우승을 목표로 나간 게 아니었잖나.
‘아닌가? 맞나?’
내 유학······.
우승자에게 걸려있던 조건이 아른거린다.
“그럼 처음에 쓴 곡 낼 걸, 뭐 그런 생각도 안 했어?”
“오히려 그건 더 안 아쉽더라. 내 곡이 아니었다니까, 그거.”
“네가 써놓고?”
“내가 내가 아니었어.”
“대체 어떤 곡이었길래··· 교수님께도 보여드렸다며. 뭐라셔?”
뭐라고 하셨더라······.
기억을 되짚어보았지만, 딱히 최겨울에게 말해줄 만한 게 없었다.
“별말씀 없으셨어.”
“그래? 교수님껜 별로였나? 그럼 막 헛거가 보인다는 얘기도 했어?”
“헛거 아니라니까. 꿈이 보인 거라구.”
“그게 헛거지.”
“아니래두. 진짜 선명하게······.”
답답한 마음을 표출하며 내가 본 것들에 대해 다시 한번 설명하려던 참이었다.
때마침 품에 있던 핸드폰이 울려댔다.
이게 웬걸. 교수님이었다.
#
“···엄청 빨리 왔네요?”
멍하니 날 보며 묻는 교수님에게 씨익 웃으며 답했다.
“마침 제 기사가 바로 핸들 꺾어주더라고요.”
기사? 라고 되물으며 머릴 기울이는 교수님.
“있어요. 제가 못한 우승 대신해줄 애.”
“하핫.”
내 부연설명에 누군지 알겠다는 듯 웃음을 터트린 교수님이 따뜻한 찻잔을 건넸다.
향긋한 차를 받아들고 한 모금 머금는 사이, 교수님이 말한다.
“벌써 한 달이나 지났네요.”
“맞아요. 시간 진짜 빨라요. 근데······.”
맞장구치다가 문득 책상 위로 시선이 떨어졌다. 자연스레 그곳에 가득한 오선지들이 보였고, 고뇌의 흔적이 가득한 광경을 보며 노파심에 물었다.
“괜히 제가 바로 찾아온 거 아녜요? 엄청 바빠 보이시는데······.”
“아녜요. 오히려 빨리 와줘서 다행이에요. 늦어지면 전화로 얘기해야 하나 고민 중이었거든요.”
“어떤 얘기요?”
내 질문에 교수님이 책상을 두어 번 톡톡 두드린다.
“이번에 영화 OST를 만들고 있어요.”
“엇! 교수님이요?! OST는 엄청 오랜만 아닌가요? 광대 이후로 처음이죠? 아니, 아니지. 발터 슈몰저 마에스트로의 다큐멘터리가 있었지! 아니, 이게 중요한 게 아니라 어떤 영화예요? 언제 개봉해요?”
격한 반응에 연달아 웃음 짓는 교수님.
그 미소를 보는 건 은혜로운 일이었지만, 한편으론 답답하기도 했다.
그만큼 교수님의 OST는 귀했다.
“아실리 로라렌스. 누군지 기억해요?”
“어! 교수님이 가장 영향을 많이 받았다고 하셨던···.”
“기억하네요?”
“에이, 당연하죠.”
내가 그걸 어떻게 잊겠나.
내가 가장 영향을 많이 받은 음악가가 교수님이고, 그런 교수님이 가장 영향을 많이 받았다고 한 음악가가 바로 그녀인데!
200년 전에 실존했던 여성 하피스트, 아실리 로라렌스 말이다!
가만······.
‘하프?’
순간 미간을 찌푸리는데 교수님이 이야길 이어간다.
얼른 잡생각을 뒤로 내던지고 교수님의 말에 집중했다.
“그녀의 일대기를 그린 영화에요.”
“와··· 너무 기대되는데요!?”
양손을 말아쥐며 잔뜩 흥분한 채로 말했다.
그러다 문득 의아해졌다.
그런데 갑자기 왜 이 얘길 나한테 해주시는 거지?
영화 OST 만드는 게 나랑 무슨 상관이 있어서?
의문 투성인 내 표정이 그대로 드러났을까.
교수님이 이어서 덧붙였다.
“아직 촬영도 시작되지 않았지만 이번엔 조금 독특하게 OST를 먼저 작업하고 있어요. 뮤지컬 영화도 아닌데 말이죠.”
“어째서요?”
“음악을 위한 영화가 될 테니까.”
그 말에 나는 더욱 기대할 수밖에 없었다.
영화를 위한 음악이 아닌, 그 반대라니!
“······멋져요.”
“멋지다니 다행이네요. 꼭 같이 작업하고 싶었는데.”
“흐흐흐! 저도 같이 작업하고······응? 네? 뭐, 뭐라고요?”
어안이 벙벙해진 나에게 교수님이 입꼬릴 올리며 말한다.
“그때, 바덴바덴에서 들었던 채봄 학생의 곡을 이번 OST에 수록하고 싶어요.”
그러니까, 지금 뭐라고 하신 거냐면···.
교수님 곡들 사이에 내 곡이 들어간다는 거지?
내가 제대로 이해한 게 맞지?
헐.
그대로 멍하니 교수님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한동안 얼어있다가 가장 궁금한 질문 하나를 힘겹게 뱉어냈다.
“······왜요?”
제 곡을 대체 왜?
“어울려서요.”
“어디에 어울려요? 영화 촬영도 아직 안 들어갔다고······.”
“영화 말고요.”
고개를 내저은 교수님이 말했다.
“‘그 사람’과 어울려요. 채봄 학생의 곡이.”
어떤 표정을 지으며.
나는 저 표정을 어째선가 본 적이 있는 것만 같다.
저 슬픈 눈망울을 어디선가 담았던 적이 있는 것 같다.
아마 교수님이 말한 ‘그 사람’은 아실리 로라렌스를 말하는 것일 텐데.
그러니 더욱 이상하다.
그저 200년 전의 사람.
그런 사람을 얘기하는데 교수님은 왜 줄곧 저런 표정이신 걸까.
마치······.
실제로 만났던 사람이라도 되는 것처럼.
······.
시간이 널뛰듯 빠르게 앞으로 나아갔다.
교수님의 제안은 나로서는 꿈만 같은 일이었고, 당연히 받아들여야만 하는 행운이었다.
교수님과 함께 이름을 올리다니!
그게 설사 동요집이었더라도 나는 무조건 했을 거다. 무조건!
그렇게 나는 교수님과 함께 ‘아실리’라는 영화의 OST를 완성했다.
수많은 트랙 중 내 곡은 고작 하나일 뿐이었다.
‘그 하나가 타이틀이라서 문제지.’
이해할 수 없었다. 아마 관계자들도 그랬겠지. 하지만 교수님이 그렇게 되도록 밀고 나가셨다. 이 영화 제작에서 교수님의 영향력이 대단했기에 결국 내 곡이 진짜 타이틀이 되어버렸다.
‘감히···교수님 곡들 사이에서···미칠 노릇이었지.’
우여곡절 끝에 영화는 전 세계 수많은 상영관에 걸리게 되었다. 그리고 예상했던 대로 큰 성공을 거두었다. 왜 아니겠나. 음악 영화와 교수님의 OST가 만났는데!
동시에 나는 졸지에 세계적으로 성공한 영화의 타이틀곡을 만든 작곡가가 되어버렸다.
브리너 콩쿠르 이후로 점차 잊혀져가던 내 이름이 다시 세상에 알려지는 계기였다.
······아무튼. 그 사이 몇 번이고 머릿속을 울리는 목소릴 들었고, 그때마다 꿈속 장면도 보았다. 하지만 매번 같은 장면들뿐. 추가로 보이는 것은 없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이 기묘한 일들은 나에게도 익숙한 것이 되어갔다.
잊을만하면 가끔 나타나는.
그리고 금세 잊혀지는.
그렇게.
······5년이 흘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