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 reincarnated genius RAW novel - Chapter 318
318. 외전 – 고통과 위로 (1)
······무대 위를 바라보며 카야 교수는 감탄했다.
저 아이라면 졸업생 대표로서 멋진 연설을 들려줄 거라 예상은 했다.
항상 어린아이처럼 해맑고 실없어 보이는 그녀였지만, 가끔 그 속을 들여다보면 의외로 깊은 생각을 가진 아이라는 걸 모르지 않았기에.
하지만, 그럼에도.
수많은 상황을 겪으며 모든 것에 의연할 자세가 되어 있던 그가 몸을 떨었다.
팔뚝엔 기어이 소름이 돋아났다.
‘어쩌면, 내가 한 해 동안 수업에서 가르친 것보다 저 아이의 짧은 연설이 더 가치 있을지도 모르겠군.’
헛웃음을 지은 카야 교수가 문득 떠오르는 생각에 올라탄다.
‘모든 게 기우였어.’
···누군가 말했다.
지금 우리는 고전과 낭만의 시대와도 비견될만한 클래식의 전성기 속에 살고 있다고.
···또 누군가는 말한다.
그것을 이끈 건 의심의 여지 없이 한서호라고.
그가 현시대의 음악의 아버지고, 신동이며, 악성(樂聖)이라고.
···그렇기에 누군가는 우려한다.
그가 너무 대단해서. 아니, 단순히 그런 칭찬으로 넘어가는 게 민망할 정도로 위대해서.
그의 아래에 생긴 그늘이 너무 넓다고.
그 그늘이 후배들 위에 드리워 다음 세대를 늦출까 걱정된다고.
하지만 한서호의 그늘은 어둡지 않았다.
오히려 그의 그늘은···아니, 영향력은 다음 세대에 영양분을 내려주고 있었다.
특히 그의 옆에 있었던 이들이 현재 두각을 드러내고 있었다.
자신이 만든 바이올린 협주곡을 마법과도 같은 연주로 완성시키는 ‘환상의 바이올리니스트’ 레오 뒤보셸이 그렇고.
섬세한 곡과 연주로 사람의 마음마저 촘촘히 엮어 ‘건반 위의 호수’라 불리는 김세진이 그렇다.
과거 영국의 영광을 재현하듯 웅장하고 화려한 곡을 만드는 ‘파도의 피아니스트’ 벨라 타멜리아 또한 마찬가지.
그리고 지금 저 위에서 수많은 환호를 받으며 내려오는 유채봄 또한 곧 그들과 어깨를 나란히 할 것이 분명했다.
옆에서 지켜본 바, 그녀의 성장 속도는 앞서 말한 천재들에 비하여 전혀 뒤처지지 않으니까.
‘다음 세대.’
두근거리는 말이다.
한서호 한 명의 연주만으로도 음악계가 이렇게나 바뀌었는데.
그들이 모두 빛난다면 대체 어떤 변화가 찾아올까.
그것을 볼 생각에 자신과 같은 수많은 원로 음악가들이 설레하고 있다.
하지만, 오늘 유채봄의 연설을 들으니 그게 부끄러워진다.
‘고작 지켜볼 생각이나 하고 있었다니.’
옆에 앉아있던 교수들 또한 자신과 비슷한 감정을 느낀 걸까.
누군가 웃으며 터놓았다.
“저 얘길 들으니 참 가슴이 간질간질합니다. 뿌듯하면서도 뭐랄까······부끄러운 것 같습니다.”
“그러게요. 우리도 아직 삶을 연주할 수 있는 걸까요?”
이에 카야 교수가 답했다.
“예전처럼 화려하진 않겠죠. 어쩔 땐 추해 보이고 망신스러운 순간도 있겠죠.”
모여드는 교수들의 시선에 그는 덧붙였다.
“그저 아무것도 안 해도, 과거의 영광만 돌이키며 살아도 아무 문제 없었을 텐데. 참 주책맞아 보일 수 있겠죠. 하지만······.”
낡은 악기는 소리를 내고 싶다.
명품처럼 유리관 안에서 우러러 보이는 게 아니라.
소리가 이상해졌다 조롱받고, 울림이 상했다 손가락질 받더라도.
아직 소리를 낼 수 있기에······.
들려주고 싶다.
“적어도 지금, 저희가 ‘낡고 낡아 더는 소리가 나지 않을 때’는 아니잖습니까.”
잠시 멍하니 그를 바라보던 교수들이 이내 웃음을 머금었다.
주름진 얼굴과.
젊은 눈동자로.
#
“너무 멋져요!”
훗. 익숙하다.
“사, 사인 해주실 수 있나요?”
물론. 얼마나 많이 연습한 사인인데, 해드려야지. 암, 못 해 드리면 그게 더 섭하지.
“아실리가 제 인생 영화거든요. 그거 보고 OST에 푹 빠져서 작곡가님 알게 됐어요!”
콩쿠르 때가 아니라? 나 그때부터 꽤 유명해졌었는데?
······만하임에서 가장 큰 음반 가게 안이 갑자기 팬 미팅 현장이 되었다.
그냥 오랜만에 앨범 사려고 들렀는데 말이지.
“흐흐흐···!”
웃음소리가 다소 경박한 감이 있었지만 내 마음대로 컨트롤이 안 된다.
최겨울 말대로 내가 정말 관종이 된 걸까. 그래도 내가 걔보단 낫지. 내가 관종이면 걘 스타병 말기니까.
‘아, 이따 전화 한번 해야겠다. 교수님 안부도 물을 겸······.’
정신없이 이어지는 사인과 사진 요청에 30분은 족히 땅에 박혀 망부석처럼 서 있었다.
그러고 나서야 가게 안을 좀 둘러볼 수 있었다.
가장 먼저 향한 곳은 역시 ‘베스트음반’ 코너.
불과 몇 년 전만 해도 이곳에 클래식 음악이라곤 교수님의 음반 말고는 없었는데, 이젠 다른 이의 클래식 음반도 더러 섞여 있었다. 큰 변화였다. 현재진행형인.
그리고 그중엔······.
“흐흐~.”
내 음반도 두 개나 있었다.
물론 하나는 영화 아실리의 OST였고, 그 앨범엔 딱 한 곡만 내 곡이라 내 음반이라고 할 수는 없겠지만.
“그나저나, 저번에 왔을 때 이쯤에서 본 것 같은······여깄네!”
목표를 포착하고 다가갔다.
고급스럽게 만들어진 앨범을 집어 들고 빙그레 웃었다.
곡이 하나밖에 들어있지 않은 음반.
그 곡마저도 저작권에서 자유로워 지금 당장 인터넷에서 다운 받을 수 있는.
게다가 내 책장에 이미 6개나 꽂혀있는 음반이었다.
그럼에도 다른 구매자들이 그렇듯, 교수님의 음반을 사는데 망설임 따윈 없었다.
얼른 결제하고 발걸음 속도를 높여 기숙사로 향했다. 골목마다 즐비한 맛집의 유혹을 뿌리치고서 힘겹게 도착한 내 방.
상기된 얼굴로 앨범을 개봉한다. 음악이 담긴 CD를 미련 없이 옆으로 치우고서, 작은 책자를 꺼내 들었다.
사실 이게 핵심이다. 이 안에 교수님의 포토카드가 있다. 딱 한 종류만 모으지 못한.
······꼭 퍼즐 하나가 빠진 것 같아서 찜찜하단 말이지.
“이젠 좀 나오자, 쫌.”
주문을 외우며 천천히 책자를 열었다. 드디어 모습을 드러내는 포토카드.
낯선 사진을 보자마자 튕기듯 일어났다.
그리고 손에 들린 책자를 마구 흔들었다.
“뽑, 뽑았다!”
퍼즐이 맞춰지는 순간이었다.
#
-언제 오는데.
무심한 듯 툭 묻는 질문에 핸드폰을 반대로 들며 말했다.
“저교, 이달 말이라고 내가 열 번은 얘기한 것 같은데요? 그르케 내가 보고 싶니?
-심심해.
곧바로 들려오는 최겨울의 대답.
벤치에 슬며시 앉아 만하임의 거리를 둘러보던 내가 콧방귀를 뀌었다.
“허, 쇼팽 콩쿠르 우승자께서? 게다가 무려 한 필하모닉의 피아노 주자신데, 심심?”
-일이 바쁜 건 별개고. 너처럼 특이한 애가 옆에 없으니 심심하단 소리지.
“왜, 한 필하모닉에도 특이한 사람 많잖아. 악장님도 그렇고···.”
-아무리 그래도 너만큼 이상한 사람은 없지.
“헤, 내가 좀 이상하긴 하···가 아니라. 돌아가서 진짜 이상한 게 뭔지 보여줘? 아주 다시 만하임으로 돌아가 달라고 빌게 만들어준다?”
-오, 기대할게.
맞받아치며 피식 웃는 최겨울에 기대하라며 큰소리치고서, 궁금한 것 하나가 떠올라 머뭇거렸다.
“그나저나······.”
-응?
“그······.”
-뭐, 말해.
“그, 뭐, 교수님은 엄청 바쁘신···가? 여전히?”
퍽 어색하게 물었지만, 그런 이상함쯤은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답한다.
-그렇지. 근데 요즘엔 일도 일이지만 다른 이유 때문에 더 바쁘셔.
“다른 이유? 설마 뭐, 연애라도 하시는······!”
-거의 매일 병원에 가셔.
“왜! 어디 아프셔?”
화들짝 놀라 묻자 최겨울이 얼른 덧붙였다.
-회장님이 아프시거든. SJ 그룹 회장님.
“교수님 영국 왕실에서 공연하실 때 우리까지 함께 런던으로 데려가 주셨던, 그 회장님?”
-맞아. 그 회장님.
“그렇구나······.”
말꼬릴 흐렸다.
사실 잘 모르는 분이었다. 대기업 총수. 재벌 회장. 별세상 사람이잖나.
하지만 교수님의 기사에서 몇 차례 언급된 적 있었기에 대강 어떤 분인진 알고 있었다.
클래식을 사랑하고, 교수님과는 정말 가깝게 지내는. 보통 가까운 게 아니라 숨겨둔 손자가 아니냐는 농담을 들을 정도인 교수님의 후원자.
그렇기에 안타까움은 걱정으로 번졌다.
‘교수님은 괜찮으신가······.’
그때 최겨울이 갑자기 다른 주제를 꺼낸다.
-그래서. 요즘 넌 좀 어때?
“뭐가?”
-그 목소리랑 헛거. 이젠 안 보이는 거야?
“어······.”
아마 병원 얘기 때문에 생각이 거기까지 이어진 것 같았다.
그 기묘한 일이 익숙해질수록 최겨울에게 일일이 얘기하는 빈도도 줄었기에 근황이 궁금하겠지.
“그러게. 안 보인지 꽤 오래됐어. 목소리도 마찬가지고.”
-그래? 하긴, 그 목소리도 기운 빠지겠지. 네가 이젠 놀라지도 않으니.
최겨울의 말에 픽 하고 웃는데, 뒤쪽 공터에 드러누운 사람들이 큰 소리로 떠들었다. 독일인들이니 당연히 독일어로.
“근데 아직도 의문인 게······분명 목소리는 한국어였단 말이지. 꿈속 장면들은 전부 외국인 같았는데.”
-그러니 꿈이지. 꿈에선 원래 막 언어도 섞이고 그러잖아.
그래서일까?
그래, 그래서겠지.
아무 의미 없는 말이었겠지.
‘에휴, 찝찝해.’
지금까지 수없이 목소릴 들었지만, 매번 뭐라고 하는지 알 수 없었다.
마치 통화가 잘 안 터지는 곳에서 전화하는 것처럼 끝부분만 잘려서 들려왔으니까.
하지만 마음이 계속 찝찝한 건, 그 때문만은 아니었다.
그 목소리가.
제대로 알아듣기 힘들 정도로 짧게 들려오는 그 목소리가.
어쩐지 점점 힘없이 들려오고.
그럴수록 아이러니하게도 그 안에 담긴 간절함은 점점 더 짙어졌기 때문이었다.
“난 왠지 그 할아버지 목소리가······.”
최겨울에게 지금 느끼는 기분을 말하려던 참이었다.
【······소서】
그 목소리가 정말 오랜만에 다시 들려온 것은.
“······?”
하지만 꿈속 장면으로 이어지진 않았다.
이상하다? 둘이 항상 세트였는데···.
대신.
【······소서】
다시 한번 그 목소리가 들려온다.
어느 때보다 선명하게.
뭐지?
한 번도 없었던 일이기에 당혹스러운 표정으로 최겨울의 부름에 답조차 하지 못하고 있는데, 다음 순간.
【다음 생에도. 그 다다음 생에도, 저는···】
매번 반복하던 목소리가.
【이보다 더한 고통조차 꽃처럼 받을 테니】
처음으로 이어진다.
【다시 한번 제 부탁을 들어주셔서, 제가 떠난 후에도 부디···】
어느 때보다 힘없이. 하지만 어느 때보다 간절하게.
【백작님을 외롭게 하지 마소서】
낮고 거친 목소리는.
【백작님을 외롭게 하지 마소서】
일생의 소원인 양 읊조린다.
【백작님을······】
머리가 지끈거렸다.
심장도 미친 듯이 뛰기 시작했다.
정신이 없었지만, 그 와중에 도리어 무언가 선명해지기 시작한다.
【······소서】
······.
단골 카페에 여느 때처럼 내 음악이 흘러나오던 날.
친구들 앞에 서서 함께 연주하자고, 그렇게 연주하듯 살자고 말하던 날.
수년간의 유학 생활에 쉼표를 그리던 날.
나에겐 그랬던 날에.
누군가는 절규와도 같은 바람을 하늘을 향해 던졌고.
어째선지 나에게로 흘러들어온 그 간절한 울림은······.
내 아주 깊은 곳의 기억을 기적처럼 열어젖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