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 reincarnated genius wants to be an actor RAW novel - Chapter 29
29화
첫 대본 리딩이 끝난 뒤 어느새 2주가 흘렀다.
팔랑.
나는 익숙한 자리에 앉아 RUN의 대본을 넘겨보았다.
이미 수도 없이 많이 넘겨본 대본이었다.
그 덕에 대본의 낱장들은 이미 빳빳함을 잃고 힘없이 넘어갈 정도였다.
팔랑팔랑.
페이지가 빨리 넘어가든 아니든, 지금의 내게는 별 의미는 없었다.
대본은 통째로 외운 상태였으니까.
처음 대본을 건네받고 나서 대본 리딩 현장에 가기 전에 이미 다 외웠다.
그리고 대본 리딩 현장에서 각각의 배우들이 내가 외운 대사를 어떤 식으로 소화해내는지 확인했다.
그 부분을 체크하는 것 역시 내가 어떤 손자 역할을 완성해 나갈 것인지에 대한 자양분이 되어줄 테니까.
오랜만에 다수와 함께한 대본 리딩은 재미있었다.
예전 오스카 극단에서 단원들과 함께 맞춰보던 그때 그 방식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원래 이런 큰 공연은 대본 리딩 현장에 기자들도 와 있는다는데, 제시카가 공연 당일까지 비밀리에 진행하고 싶다고 해서 기자들은 입장이 제한되었다.
덕분에 첫 대본 리딩을 쾌적하게 마칠 수 있었지.
나중에 조이수에게 들어보니 나를 비롯한 아역 배우들이 꽤나 많이 참석하는 공연이다 보니 제시카가 미리 손을 써준 것이라고 했다.
그래. 대본 리딩까지는 아무 문제도 없었다.
탁.
다 외우고 해석까지 마친 대본을 덮었다.
글자를 보려고 읽고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생각을 정리하기 위해 한 장씩 넘기고 있던 거지.
“아휴.”
절로 나오는 한숨을 푹 내쉬며 다리를 동당거렸다.
지금 내가 앉아 있는 이곳은 광화문 문화센터가 아니다.
제집처럼 드나들던 비상철또 777의 극단장실이다.
비상철또 777과는 다르게 레인보우 픽처스는 아동 배우 보호라는 철칙을 철저하게 지켰다.
배우들이 말하는 걸 들었는데, 원래 미국이 아동의 노동에 대해 엄격하게 관리를 한다나?
그래서 그런지 RUN 연습 중에는 아역 배우들의 연습 시간에 제한이 있었다.
아무리 일찍 나가도 몇 시간이 지나면 오늘은 여기까지만 해야 한다고 집으로 나를 돌려보내는 것이다.
그렇다고 오후에 나가면 이른 시간에 집에 가야 한다고 해서, 죽어라 오전 중에 연습실로 나가는 편이었다.
그런데도 내가 원하는 만큼 연습을 못 하게 되었다.
물론 비상철또 777에서 있을 때도 김상철의 배려로 나는 연습하고 싶을 때 하고 쉬고 싶을 때는 쉴 수 있었다.
공연을 올릴 때는 다같이 연습하는 시간이 정해져 있기에 그 시간만은 철저하게 지켰지만 말이다.
이것도 나는 비중이 그리 크지 않아서 공식 연습 시간이 그리 길지 않았다.
나는 아쉬운 마음에 항상 다른 이들의 연습을 구경하거나 혼자서 그들의 연기를 따라 하며 연습실에서 놀았다.
가끔 궁금한 게 있으면 삼촌이나 강용휘를 붙잡고 물어볼 수도 있고 말이다.
그러다가 삼촌의 연습이 너무 늦게 끝나면 극단장실에 와서 한숨 자기도 하고 그랬다.
생각해보면 전부 삼촌이 함께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런데 광화문 문화센터에 가서는 몇 시간이 지나면 칼같이 쫓겨나야 했다.
처음 며칠은 얼떨떨했다.
내가 더 하고 싶고, 체력이 남아서 괜찮다고 말해보았지만, 제시카에게는 통하지 않았다.
“시우, 어릴 때는 많이 먹고 많이 놀고 많이 자야 해. 그래야 쑥쑥 커서 브로드웨이까지 진출하지?”
열심히 하는 건 조금 더 자란 후에 해도 충분하다는 소리였다.
총책임자인 제시카까지 안 된다고 하는 판에, 광화문 문화센터에 더 남아 있을 수가 없었다.
억울하기 그지없었다.
나도 주연인데.
그리고 저기 저렇게 많은 배우들이 늦게까지 연습을 하는데 나는 집에 가야 한다니.
결국, 그런 날이 며칠이 지나자, 나는 어머니에게 부탁했다.
연습을 마치고 그날도 어김없이 광화문 문화센터에서 쫓겨난 뒤, 운전 중이신 어머니에게 말했다.
“엄마, 나 삼쭌 극단 갈래.”
“응? 비상철또 데려다줄까?”
“······웅. 나 그래도 대?”
어머니에게 괜히 여기저기 왔다 갔다 하게끔 하는 것 같아 마음이 불편했다.
내가 우물쭈물하자 어머니는 시원하게 웃으시며 말했다.
“미안해하지 않아도 돼. 엄마야말로 맨날 집에 있는 것보다 이렇게 시우랑 같이 밖에 이리저리 움직이는 게 좋은데?”
“······덩말?”
“그럼. 엄마가 바로 데려다줄게. 집 근처잖아.”
그 뒤로부터 나는 연습이 끝나면 언제나처럼 비상철또 777에 출근 도장을 찍고 있었다.
조금 피곤한 날이면 어머니가 사주신 핸드폰으로 연락을 해 어머니가 날 데리러 오셨다.
아니면 삼촌이 퇴근할 시간에 맞춰서 삼촌과 함께 집에 오기도 했다.
이번에 새롭게 올리는 공연에서도 아주 작은 단역을 맡게 된 삼촌은 이번에도 신이 나서 아주 열심이었다.
나는 삼촌의 연기를 봐주기도 하고, 강용휘랑 얘기도 하면서 이렇게 극단장실에 앉아서 대본을 읽는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흐음.”
그런데 오늘따라 더더욱 집중이 안 된다.
“에휴.”
벌써 몇 번째인지 모를 한숨이 내 입에서 터져 나왔다.
매일 같이 손에 들려 있던 대본도 오늘만큼은 얼른 손이 가질 않았다.
“그러다가 내 사무실 바닥 다 꺼지겠네. 시우야. 다섯 살이 뭐가 그렇게 근심 많은 표정이냐.”
때마침 극단장실로 들어온 김상철이 나를 보고 웃으며 다가왔다.
“아유, 그래도 귀엽네.”
불퉁하게 내민 입술 때문일까.
통통하게 살이 오른 내 양 볼을 김상철이 귀엽다는 듯이 살짝 꼬집었다.
그리고 어김없이 나는 격렬하게 도리질을 쳤다.
“이익! 하디마요!”
“오늘 진짜로 걱정이 한가득인가 보네?”
평소보다 더욱 격한 도리질에 김상철이 아주 귀신같이 눈치채고 물어왔다.
나는 그 말에 대본을 한 번 더 내려다보고 한숨을 푹푹 내쉬었다.
“아이고, 대본 너덜너덜한 거 봐라. 또 몇 번이나 본 거야?”
“백 번.”
“백 번······?”
뭔, 애가 연습량이······.
그렇게 중얼거리는 김상철에게 사실 백 번보다 더 봤다고 할 수 없어 조용히 삼켰다.
아니, 주연인데 그럼 백 번은 봐야지.
그보다도 조금 보고 연습에 참여한 주연한테 주어질 무대는 없을 것이다.
셰익스피어 같았으면 당장에 나가라고 소리쳤을지도 몰랐다.
그는 당일까지 준비되어 있지 않은 배우에게 가차 없는 이였으니.
어라?
그러고 보니 김상철도 예전에 배우 일을 했다고 들었다.
게다가 이곳, 비상철또 777의 극단장까지 하고 있으니 지금까지 많은 배우들을 봤을 터다.
이것 봐라?
어쩌면 지금 내 상황에 가장 적절한 고민 상담 상대가 되어줄 수도 있을 것 같았다.
나는 흥, 고개를 돌렸던 것도 잠시 반짝이는 눈으로 김상철을 올려다보았다.
“극단장님.”
“응? 왜 그러냐.”
“휴, 제가 고민이 있눈데요. 잠깐 시간 이써요?”
“으응? 허허, 그래. 나야 널널하지. 차라도 한 잔 줄까?”
“네에. 평소에 먹던걸루요.”
나는 힘없이 고개를 끄덕거리며 김상철에게 부탁했다.
김상철은 흔쾌히 알겠다며 극단장실 바깥으로 나갔다.
“휴, 오눌 오전에 이떤 일인데요······.”
김상철이 후딱 가져온 찻잔 두 개를 앞에 두고 우리는 마주 앉았다.
커피를 후후 불며 김상철이 말하라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제가 연습실에서······.”
천천히 이야기를 시작했다.
오늘 오전에 있던 일이다.
나는 여느 때처럼 큰 소리로 인사를 한 뒤 연습실에 들어갔다.
대본 리딩을 마치고 본격적으로 연습을 시작한 지 2주가 되어가고 있었다.
“오늘은 무대 위랑 똑같이 마이크를 차보고 연습해볼 겁니다.”
제시카의 공지와 함께 모든 배우들이 헤드마이크를 착용했다.
나도 스태프의 도움으로 헤드마이크라는 걸 처음 차보았다.
“아아. 우아!”
“하하, 신기하지? 이걸 차고 대사를 하면 큰 극장에서도 잘 들릴 수 있어.”
내가 마이크를 차고 신기해하고 있자, 제시카가 와서 먼저 말을 걸었다.
“놀라워요. 이런 기술이 있다니······. 놀라운 세상인 것 같아요.”
“이런, 시우. 너 방금 몇십 년은 산 할아버지 같았어.”
속에 400년 된 영혼이 있는 나는 뜨끔해서 말을 슬며시 돌렸다.
“이런 마이크를 생전 처음 차 봐서 그렇다구요. 생각보다 가볍네요.”
허리에 달린 수신기를 만지작거리며 신기해하고 있자니 제시카가 흡족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앞으로 매일 같이 이걸 허리에 매달고 연습해야 한다고 했다.
“음, 다행이네. 최대한 가벼운 걸로 준비해달라고는 했는데. 시우 너는 너무 작으니까.”
“앞으로 쑥쑥 클 거라고요.”
“그러니까. 집에 일찍 가서 일찍 자라고.”
“휴, 제시카를 어떻게 이기겠어요.”
철옹성 같은 제시카의 고집에 알았다며 고개를 끄덕이려는데, 옆에서 묘한 쑥덕거림이 들려왔다.
“아, 쟤 또 제시카랑 영어로 이야기한다.”
“한국인이면 한국말로 이야기할 것이지. 쟤 때문에 요즘 우리 엄마도 영어 공부하라고 난리야.”
“아, 나도. 집에 가면 피곤해 죽겠는데 영어 공부를 어떻게 하냐고.”
앳된 목소리.
단역으로 출연하는 아역 배우들의 수군거림이었다.
제시카는 유독 내게 친근하게 굴었다.
이건 어쩔 수가 없었다.
주연 배우들 중 내가 제일 능숙하게 영어를 사용할 수 있었던 것이다.
문제는 이런 내 모습을 보고 아역배우들의 엄마들이 아이들을 채근한 모양이었다.
휴, 내가 사실은 영국 사람이었다고 말할 수도 없고.
어쩔 수 없지.
나는 제시카에게 손짓하고서 나보다 1살에서 3살은 많은 아역 배우들 무리에 다가갔다.
“형아들, 마이크 차본 적 이써요?”
“어, 어?”
“다, 당연하지! 우리는 이렇게 긴 봉마이크 밑에서 촬영한 적도 있다고!”
봉마이크는 뭔지 모르겠지만 어쨌든 다들 경험이 있다는 소리였다.
“우아, 저는 이번이 처음이에요. 그래서 말인데······.”
아무리 적대적으로 구는 아이들이라지만, 내가 먼저 친근하게 다가가니 쭈뼛거리면서 내 말에 귀를 기울이는 게 느껴졌다.
다 넘어왔네, 다 넘어왔어.
조금 더 조잘거리려던 찰나, 한 아이가 성큼 다가왔다.
“뭐야? 저리 가. 남연수도 아닌 주제에······. 친한 척하지 마. 짜증 나니까.”
더블 캐스팅으로 나와 같은 손자역에 캐스팅된 아역 배우가 등장해서 나와 단역들 사이를 가로막았다.
아씨, 얜 또 뭐야.
이름이 성지훈이라고 했던가.
요 며칠 이런 식으로 계속 훼방을 놓고 있었다.
“어어, 지훈아.”
“우리는 가만히 있었는데 쟤가 먼저 다가와서······.”
그런데 희한하게도 다른 아이들이 성지훈의 눈치를 살살 보며 나에게서 멀어지는 것이 아닌가!
결국 이번에도 다른 아이들과 가까워지는 것에 실패했다.
그나저나 남연수?
걘 또 누구지.
처음 들어보는 이름인데, 어쨌든 이 애들 사이에서는 꽤 유명한 아이인가 보다.
나는 모르는 이름이지만, 그 이름이 나오자 다들 찔끔해서 저렇게 멀어지는 걸 보니.
하지만, 그 애가 왔어도 붙는 건 나였을 텐데.
나는 고개를 갸웃거리면서 한숨을 폭 내쉬었다.
답답한 마음을 조금이라도 가라앉혀 보려고 한 행동이었다.
“하하! 시우야, 지금 한숨 쉰 거야?”
“아, 너무 귀엽다 진짜.”
기가 막힌 타이밍에 켜진 스피커를 타고 내 한숨 소리가 연습실에 크게 울렸다.
그렇게 한바탕 귀엽다는 소란과 함께 성지훈의 오늘 자 시비는 일단락됐다.
그런데,
툭-
너무 대수롭지 않게 넘긴 게 화근이었을까.
성지훈이 쉬는 시간에 내 어깨를 툭 치고 지나갔다.
쿵-
“아야.”
나와 성지훈의 나이 차이는 무려 세 살.
이 나이 때 아이들의 발육은 엄청나게 차이가 났다.
여덟 살에게 치인 다섯 살의 나는 생각보다 세게 넘어졌고, 연습실 분위기는 순식간에 험악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