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 reincarnated genius wants to be an actor RAW novel - Chapter 33
33화
“읏차.”
나는 객석에서부터 올라가는 계단을 올라 텅 빈 무대 위에 올랐다.
RUN의 공연이 시작될 광화문 문화센터 대극장 홀이었다.
오늘은 왜인지 무대에서 객석을 바라보는 느낌이 새로웠다.
아무도 없이 은은한 조명만 켜진 곳에 홀로 서서 비어있는 객석을 올려다보았다.
3층까지 있는 객석은 이렇게만 봐도 위용이 대단했다.
오늘은 첫 공연 하루 전이라 마지막 연습을 일찍 마무리하고 모두가 집에 가서 공연장이 비어있다.
나는 텅 빈 객석을 바라보며 숨을 들이쉬었다 천천히 내쉬어 보았다.
벌써 올해의 마지막이 다가오는 12월 23일.
실내지만, 공기의 냄새가 바뀌어 있었다.
탑에 갇혀 보낸 10년의 겨울.
그 시리고 고독한 겨울의 냄새가 아닌, 열기가 남아있는 겨울 냄새다.
3층으로 된 대극장은 홀은 내가 노아일 적에 리처드 3세를 처음 봤던 그 글로브 극장과 비슷한 구조다.
내일이면 내가 여기에 서는구나.
혼자서 감회에 젖어있는데, 등 뒤에서 나직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집에 안 가고 뭐 하니, 시우야.”
돌아보자, 우리 할머니.
노영희 배우였다.
아직 집에 안 가셨던 모양이다.
나는 싱긋 웃으면서 대답했다.
“빨리 무대에 서고 시퍼서 떨려요.”
노영희는 내 대답에 놀라서 눈을 크게 떴다.
그리고 잠시 말없이 나를 바라보다가 말했다.
“환갑 넘은 나보다 네가 낫구나. 나는 아직도 무대에 오르기 전에 긴장돼서 떨리는데 말이다.”
그렇게 말하는 노영희의 눈에는 열정이 가득했다.
꿈을 꾸는 것에 나이는 상관이 없다.
노영희와 마주 서서 연기를 하다 보면 그걸 절실하게 느낀다.
“할모니.”
“응?”
“내가 있잖아요.”
나는 평소 안 하던 짓을 하며 노영희의 손을 꼭 쥐었다.
내 눈웃음을 보고 노영희 배우가 다정하게 미소 지었다.
“그래, 혼자가 아니니 한결 낫네.”
우리 두 사람은 말없이 서서 텅 빈 객석을 바라보았다.
내일, 이곳은 수많은 사람으로 가득 찰 것이다.
지난 몇 달, 백여 명의 땀과 눈물이 서린 극.
마침내, 극의 서막이 오를 시간이 되었다.
***
12월 24일.
크리스마스 이브의 날이 밝았다.
“메리 크리스마수!”
나는 대기실 문을 열고 들어가며 큰소리로 외쳤다.
한국의 크리스마스에는 이런 인사를 주고받는다.
내가 살던 시절 영국에서는 크리스마스는 허락되지 않았었는데.
참 좋은 인사말이다.
“오! 시우 아침부터 엄청 씩씩하네. 잘 잤니?”
“우리 시우도 메리 크리스마스.”
나와 같은 대기실을 쓰게 된 노영희와 스태프들이 밝게 웃으며 인사를 돌려주었다.
“우웅. 꿈도 안 꾸고 엄청 잘 자써요.”
소파에 매고 온 샛노란 가방을 내려두면서 조잘조잘 이야기를 했다.
RUN의 첫 공연이 올라가는 오늘, 부모님은 나와 함께 와서 지금 바깥에 있었다.
아버지는 오늘 큰맘 먹고 치킨집을 직원에게 맡기기로 했다.
“시우야 이제 옷 갈아입고 분장할까?”
“녜!”
얼른 씩씩하게 대답하고서 스태프에게 다가갔다.
최종 리허설 때와 프레스콜 때에도 입었던 손자 역의 의상을 스태프가 건네주었다.
내 나이가 다섯 살이라 처음에는 스태프가 갈아 입혀주려고 했다.
당연히 나는 펄쩍 뛰었다.
외간 여성에게 내 속옷 차림을 보여줄 수는 없지!
어머니 정도만 내 알몸을 보았단 말이다!
“혼자 입을 고에요. 할 수 있어요.”
나는 아주 단호한 말투로 그렇게 말했다.
의상 스태프는 당황해서 눈을 깜빡이다가 알았다며 나에게 옷을 들려주었다.
“저, 시우야. 얼른 입고 나와야 해······?”
하지만, 나에게 옷을 주고도 영 마음이 놓이지 않는지 재차 그렇게 말했다.
아무래도 내가 너무 굼뜰까 봐 걱정이 된 모양이었다.
하지만 나는 스태프들의 걱정이 무색하게 호다닥 옷을 갈아입고 나오는 묘기를 보여주었다.
집에서도 이제 내가 알아서 옷을 입는데 이 정도쯤이야.
무대 의상이 일반 옷보다 입기 까다로운 경우가 많지만, 다행히 내가 맡은 손자 ‘조나단’의 의상은 그렇게 어렵지 않았다.
체크무늬 셔츠에 밝은 청색의 멜빵.
“후우, 다 갈아입었어요.”
오늘도 역시 혼자서 의상을 갈아입고 나온 난 스태프들의 지시에 따라 분장실 의자에 폴짝 올라가 앉았다.
혼자서 빠르게 옷을 입느라 머리가 헝클어져 있었다.
아직 어린 나이이기에 과한 분장은 하지 않는다.
결 좋은 머리칼에 윙윙 드라이 몇 번 가볍게 하고 아주 살짝 헤어 제품을 발라 고정시킨다.
그게 끝이었다.
“아유, 시우는 분을 칠하는 게 오히려 별로일 거야.”
“그러니까. 애기라서 그런지 어쩜 이렇게 볼이 뽀얄까.”
스태프들은 나를 분장해줄 때면 맨날 하는 말을 오늘도 어김없이 했다.
원체 하얀 볼따구는 여기저기 돌아다니느라 열이 올라 발그레했다.
거기에 원색의 체크무늬와 청 소재 멜빵은 아주 잘 어울렸다.
음, 완벽하군.
혼자서 거울을 보면서 체크하는데 스태프 손길이 더해졌다.
마지막으로 셔츠의 깃이나 소매 같은 디테일을 잡아주자 금세 분장이 다 끝나버렸다.
“시우는 엄청 금방 끝나는데 왜 이렇게 빨리 왔어.”
한편, 무대 화장을 위해 아직도 분장 중인 노영희가 눈을 감은 채 물었다.
나보다 먼저 분장을 시작한 노영희지만, 아직 분장을 마치려면 먼 듯했다.
멀리서 노인처럼 보이기 위해서 화장을 하고 그 위에 약간 노인 분장을 또 해야 한단다.
원래 자신의 나이보다 젊어 보이는 노영희이기에, 진짜 제 나이처럼 보이기 위해 화장을 또 받아야 하는 아이러니한 상황이었다.
“우웅, 할모니 혼자 있으면 심심하자나요.”
나는 노영희 옆 의자에 털썩 앉아 다리를 동당거렸다.
“너무 귀여워······.”
“나도 저런 아들 있으면 진짜 소원이 없겠다.”
“맞아. 시우네 어머니 본 적 있어? 나 그분 보고 납득했잖아. 시우 미모.”
“어, 나도 멀리서 한번 본 적 있어. 데뷔는 그분이 하셔야겠던데.”
옆에서 스태프들이 호들갑을 떨며 좋아라 했다.
오호라.
저런 생각들을 했단 말이지?
나는 오늘 집에 가서 어머니에게 전해드려야겠다고 생각했다.
역시 내 생각이 틀리지 않았다.
우리 어머니 아버지도 한 미모 하신다니까.
신이 나서 노영희가 분장하는 걸 지켜보며 조잘거리고 있는데 누군가 문을 두드렸다.
똑똑-
“응? 누구지?”
“아직 리허설 시간 한참 남았는데?”
의아한 말을 흘리는 스태프들.
노영희는 눈을 뜨고 대답했다.
“들어와요.”
설마 무언가 일이 터진 건가 싶어서 나도 문 쪽을 바라보았다.
첫 공연인데 벌써 사고가 일어난 것은 아니겠지.
“응?”
“헉, 설마······?”
“대박!”
문을 열고 들어온 장신의 남자를 보고 스텝들이 하나같이 놀란 얼굴이 되었다.
검은 긴 코트에 깔끔한 슬랙스와 셔츠를 받쳐 입은 그는 커다란 꽃다발 두 개를 든 채였다.
작은 얼굴을 거의 가리는 커다란 선글라스에 마스크까지 쓴 모습이었지만, 보자마자 알았다.
“희성 아조씨!”
선글라스를 쓰면 뭐 하나 이렇게 다 티가 나는데.
저 기다란 기럭지에 저 작은 얼굴.
고작 선글라스로 가려질 거라고 생각한 건지.
나는 그의 정체를 알아보자마자 의자에서 내려와 그에게로 달려갔다.
그의 한쪽 다리에 매달리자, 그가 선글라스를 빼며 나를 내려다봤다.
역시 문희성이었다.
“시우야, 메리 크리스마스.”
“우웅. 그거 아까 했자나요.”
답장은 안 했지만 말이다.
사실 아까는 너무 졸렸고, 또 눈을 뜨자마자 오늘 공연을 한다는 생각에만 사로잡혀 답장을 하지 못했다.
그럼에도 나는 대수롭지 않게 대꾸했다.
문희성이라면 당연히 이해해줄 거란 걸 알았기에.
역시 이런 내 태도에도 그러려니 하는 문희성이 웃으면서 말했다.
“직접 한 적은 없잖니. 분장 벌써 다 했네?”
“녜. 나는 별로 안 걸려요.”
고개를 끄덕이며 그의 말에 대답했다.
아이고, 내 목이야.
맨날 앉아서 이야기하다가 이렇게 서서 이야기하려니까 내 목이 꺾일 것 같았다.
이 양반은 왜 이렇게 키가 큰 거야.
문희성은 내 목이 젖혀져 있는 걸 보고 얼른 걸음을 옮겼다.
“안녕하세요, 선배님.”
“희성 씨가 여긴 웬일로······?”
“오늘 큰 공연 시작하시잖아요. 축하드릴 겸 와봤습니다. 제가 너무 방해된 건 아니죠?”
그가 향한 곳은 분장실 의자에 앉아 있는 노영희였다.
붉은빛의 꽃다발을 내밀며 하는 말에 노영희는 희미하게 미소 지었다.
“이거, 시우랑 친분이 있나 보네? 연극 쪽에서 만난 건가?”
“네. 제가 시우 데뷔작을 보러 간 적이 있거든요. 그때 친해졌습니다. 제가 대쉬해서요.”
“이런. 그거 참 부러운 일이네. 나도 시우 첫 작품 보고 싶은데.”
초면이라고 하기엔 제법 친근하게 인사를 주고받았다.
아마 두 사람은 연기를 하면서 만난 적이 있는 모양이었다.
나는 노영희의 말에 불쑥 두 사람 사이에 끼어들어 물었다.
“할모니. 제가 비디오 가져다 드려요?”
“하하, 그래그래. 다음에 꼭 좀 부탁하마.”
노영희의 말을 듣고 나는 김상철을 졸라야겠다고 마음먹었다.
“오늘 공연 힘내세요. 저는 즐겁게 감상하겠습니다, 선배님.”
“그래요. 이거 너무 고맙네. 여기까지 와주고.”
“아닙니다. 자, 그리고 이건 시우 거.”
“우아.”
문희성은 잊지 않고 반대편 손에 들려 있던 노란빛의 꽃다발을 내게 내밀었다.
내 품에 가득 들어오는 꽃다발에 얼굴을 묻고 킁킁 향기를 맡았다.
히야, 역시 아무리 향수를 만들어도 생화의 향은 이길 수가 없구나.
나는 오랜만에 느껴보는 향긋한 꽃 향에 심취했다.
“잘 어울리네. 시우야, 나는 객석에서 응원하고 있을게. 이따 보자. 잘하고, 파이팅!”
“우웅! 이따 봐요 아조씨.”
응원을 건네는 문희성에게 팔랑팔랑 손을 흔들었다.
웃으면서 대기실을 나간 문희성을 확인하고 나는 뒤를 돌았다.
집에 가져가기 전에 이 꽃다발은 대기실 어디에 둬야겠다고 생각하면서.
그런데,
“시우야! 문희성이랑 아는 사이니?!”
“어떻게 아는 거야? 왜 이렇게 친해 보여?”
나는 소파로 가지 못하고 스태프들의 질문 공세에 발걸음이 막혀버렸다.
문희성이 대기실에 들어와 있을 때는 엄청나게 굳어있더니 그가 나가고 나서야 정신이 돌아온 모양이었다.
천하의 나도 그들의 기세에 압도되어 주춤하게 될 정도였다.
“어, 어······. 우리 극단장님이랑 아조씨랑 친해서요.”
“아저씨래, 아저씨.”
“와······. 시우한테는 아저씨 맞네. 그래도, 문희성을 동네 아저씨 부르듯이 부르다니.”
스태프들은 그 뒤로 한참동안 부럽다고 합창을 해댔다.
***
광화문 문화센터 로비는 화려하게 꾸며져 있었다.
바로 다음 날이 성탄절이니만큼, 로비 한가운데에는 천장까지 닿을 것만 같은 높다란 트리가 꾸며져 있었다.
트리를 두르고 있는 화려한 조명들과 벽 곳곳을 장식한 화사한 장식들.
연말 분위기가 물씬 나는 대극장 로비는 사람들로 가득 붐볐다.
카운터에서부터 은은한 캐롤이 흐르고, 공연을 보러 방문한 관객들 얼굴은 설렘을 머금은 채 밝게 빛났다.
복도에는 노영희와 한시우가 분장하고서 찍은 등신대가 놓여져 있었다.
사람들은 등신대와 복도 곳곳에 놓인 포스터 앞에서 사진을 찍었다.
많은 인원들이 몰려 공연 시작 30분 전부터 객석 입장이 가능했다.
연말이라서 그런지 가족 단위, 커플 단위의 관객이 압도적이었다.
관객들은 오늘 있을 RUN 첫 공연에 기대를 잔뜩 품고 있었다.
웅성이는 관객들 주위로 잔잔하고 따듯한 하우스 음악이 깔렸다.
이번 RUN 공연의 메인 테마 곡을 캐럴 분위기가 나도록 편곡한 음악이었다.
원래 테마곡의 따듯한 느낌을 그대로 살렸기에, 듣는 이로 하여금 마음이 편안해지게 만드는 효과가 있었다.
크리스마스 이브가 첫 공연 일인 만큼 극장 내부도 크리스마스 분위기가 나도록 꾸며져 있었다.
RUN 로고가 박힌 빨강, 초록 풍선들이 객석 벽에 붙어 있고, 무대 위와 티켓에는 ‘레인보우 픽처스’의 애니메이션 원작 캐릭터가 그려져 있었다.
애니메이션을 원작으로 하는 공연이라, 긴 공연 시간에 비해 어린이 관람객의 수도 비교적 많았다.
“엄마, 이제 들어가?”
“응. 오늘 공연에 지석이만 한 친구도 나온대.”
“에이. 이렇게 커다란 무대에?”
“그렇다니까. 한번 같이 봐볼까?”
그리고 이 수군거림을 고스란히 듣고 있는 한 남녀가 있었으니.
“후우. 왜 이렇게 긴장되는 건지.”
“우리 조그마한 시우가 저 커다란 무대에 선다는 거지······.”
바로 오늘 이 무대에서 처음으로 주연을 맡게 된 한시우의 부모님이었다.
다들 들떠서 입장한 것과는 대조적인 그들의 표정은 사뭇 비장하기까지 했다.
누가 보면 전쟁이라도 나가는 줄 알았을 것이다.
설렘과 긴장이 공존하는 가운데 공연 시간은 빠르게 다가왔다.
관객들이 모두 입장하고 곧 객석의 조명이 모두 꺼졌다.
짹짹-짹-
은은한 새소리가 어두운 극장 내부에 울려 퍼졌다.
모두가 숨죽인 가운데, 그 새소리와 함께 조명이 서서히 들어오면.
솨아악-
무대에 홀로선 노영희가 화단에 물을 주고 있는 모습이 보인다.
극이 시작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