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 reincarnated genius wants to be an actor RAW novel - Chapter 35
35화
“히야.”
맑은 겨울 하늘의 찬란한 햇살 아래에는 진풍경이 펼쳐져 있었다.
밤새 소복이 내린 흰 눈이 온 동네를 뒤덮고 있었던 것이다.
크리스마스 이브였던 어젯밤부터 내린 눈은 모든 이들을 들뜨게 했다.
눈 내리는 크리스마스를 화이트 크리스마스라고 한다며, 함께 공연을 마치고 나온 단원들이 나에게 일러주었다.
휴, 이래 봬도 벌써 크리스마스가 다섯 번째라고.
그 정도 용어는 TV에서 들어 알고 있었지만, 격하게 반응해주었다.
RUN 공연 팀들은 모두 성공적인 첫 공연을 끝내고 나와 아주 고양되어 있었으니까.
거기에 대고 산통을 깰 수는 없지.
어제 저녁 있었던 ‘RUN’의 첫 공연은 예상만큼, 아니 예상보다 더 훌륭하게 끝났다.
배우 한 명 한 명이 무대 위에서 빛났고 그 빛을 받은 관객들의 반응 역시 대단했다.
제시카 역시 만족감을 드러낼 정도였으니, 극의 퀄리티는 더 말할 필요 없겠지.
공연이 끝나고 늦은 밤, 집에 와 삼촌의 도움으로 내 이름이 실린 새로운 기사도 확인했다.
전문가들의 평은 하나같이 호평 일색이었다.
여전히 나를 비뚤어진 시선으로 보는 댓글들도 있었지만, 상관하지 않았다.
적어도 어제 연극을 직접 보고 나가는 관객들의 얼굴에는 만족감이 가득했으니까.
그 얼굴들이 아직도 머릿속에 남아, 기분이 좋다.
“이뿌다.”
어제 그렇게 펑펑 내리던 눈이 안 녹고 고스란히 쌓인 모양이었다.
잠에서 깬 나는 어머니와 함께 창가에 서서 하얗게 변한 세상을 구경했다.
“시우 나가서 눈놀이하고 싶어?”
어머니가 내 반짝이는 눈을 보고서 물었다.
눈놀이!
그거 참 달콤한 어감이다.
나가서 눈을 뭉쳐 커다란 눈사람도 만들고 어머니와 함께 눈싸움도 하면 얼마나 재미있을까.
이상하게 어린 몸이 되고 나서는 저 하얀 눈만 보면 가슴이 뜨겁게 달아오르는 기분이 들었다.
당장이라도 나가서 저 눈에 폭 파묻히고만 싶은 기분이랄까.
마치 내가 노아일 적 바텐베르크 성에서 키웠던 우리 세바스찬이 생각났다.
어린 강아지였을 때부터 나와 올리버가 소중하게 키운 녀석.
그 당시 귀족가라면 으레 한 마리씩 키운다는 파피용이었다.
세바스찬은 평소에는 온순하고 영리했지만, 눈만 보면 그렇게 환장을 하며 뛰쳐나갔다.
덕분에 나도 함께 눈밭에 뒹굴어야 했지.
내가 탑에 갇히게 되고, 올리버가 쫓겨난 다음에 세바스찬은 잘 지냈을까.
나와 함께 버려지진 않았을까.
아니, 아니다.
세바스찬에게는 미안하지만 더 이상 우울한 생각은 하지 않기로 했다.
지금도 벌써 어머니가 나를 의아하게 쳐다보시고 있질 않나.
“우웅. 아니. 눈노리는 다음에 할 거야. 공연 중에 감기라도 걸리면 큰일이야.”
이왕 표정이 굳어진 김에 짐짓 진지한 어투로 그렇게 말했다.
이제 막 첫공이 끝났을 뿐이었다.
크리스마스인 오늘은 월요일이라 공연을 쉰다지만, 이럴 때일수록 컨디션 관리를 제대로 해야 했다.
주연인 내가 감기라도 걸리는 날에는 모두에게 폐를 끼치게 될 테니까.
의젓한 내 말에 어머니는 살짝 놀라서 눈을 크게 뜨셨다.
“아유, 우리 시우도 이제 다 컸네?”
“그러엄!”
나는 위풍당당하게 허리에 두 손을 얹고 척 자세를 잡았다.
역시나 어머니는 아주 멋지다며 나를 안아주셨다.
그런데 아까부터 자꾸 저쪽 방을 힐긋거리시는데······ 무슨 일 있나?
나는 궁금한 마음에 어머니의 시선이 향하는 곳으로 고개를 돌렸다.
“아, 앗! 시우야. 우리 아침 먹을까?”
“웅? 우웅. 근데 아빠눈?”
치킨집은 낮 즈음에 문을 열기 때문에 항상 가족들 모두가 모여서 아침밥을 먹곤 했다.
아주 늦게 자고 늦게 일어나는 삼촌은 빼고.
“어? 아······. 아빠는 오늘 일이 좀 있어서 어디 갔어. 우리끼리 먼저 밥 먹자. 시우 세수 먼저 할까?”
“웅? 우웅.”
나는 어머니를 따라 화장실로 들어갔다.
어푸어푸 열심히 세수를 하고 나와 식탁에 앉았다.
언제나처럼 바삭한 토스트와 우유로 아침을 먹고 있는데 갑자기 대문이 벌컥 열렸다.
“웅?”
입안에 토스트를 가득 문 채로 시선을 들었다.
그러자······.
“허, 허, 허. 메리 크리스마스!”
거기에는 호탕한 웃음을 터트리는 산타가 서 있었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산타 복장을 하고서 어색하게 서 있는 아버지가 서 있었다.
하나도 안 어울리는 하얗고 북실거리는 수염을 붙이고서 새빨간 산타 모자를 쓴 아버지.
제법 연구를 많이 하시긴 했는지, 산타복을 입고 배에는 빵빵하게 솜인지 뭔지를 넣기까지 했다.
등 뒤에 선물 보따리를 둘러멘 아버지, 아니 산타가 호탕하게 말했다.
“산타할아버지가 왔어요. 허허허!”
“와아. 시우야! 산타 할아버지가 우리 집에 오셨네!”
어머니는 갑자기 자리에서 일어나 박수를 짝짝 치면서 좋아라 하셨다.
오호라.
이 반응을 보아하니 아무래도 나를 위해 두 분이서 미리 준비를 하신 것 같았다.
“오호호! 이 집에 아주 착한 아이가 있다고 하던데? 착한 아이한테는 내가 선물을 줘야지.”
어색하기 짝이 없는 대사를 내뱉는 산타는 등에 짊어지고 있던 보따리를 내려놓았다.
그 안을 뒤적이던 산타가 커다란 상자를 하나 꺼내주셨다.
저 어색한 대사를 들으면서 어떻게 아버지인 것을 몰라볼 수 있단 말인가.
휴, 아버지.
연기는 그렇게 하는 게 아니라니까요.
하지만, 두 분의 성의를 무시할 수는 없는 노릇.
부러 눈을 동그랗게 뜨고 의자에서 구르듯 내려가 산타에게 달려갔다.
“우아아! 산타 하라부지! 시우 선물 주러 온 고에요?”
특별히 평소보다 더욱 신나 하는 목소리로 산타를 반겼다.
휴, 이렇게 노력하셨는데 아들 된 도리로 속아주는 척은 해 드려야 하지 않겠는가?
나는 브로드웨이의 거장 제시카 브라운이 홀딱 빠진 연기력으로, 오늘만큼은 아버지를 속이기로 했다.
“허, 허, 허! 그럼그럼. 당연하지. 시우가 올 한해 엄마아빠 말을 아주 잘 들었다고 산타 마을까지 소문이 났단다! 어서 이거 받으렴.”
“와아, 풀어봐야지.”
아버지는 제법 흥이 오르셨는지 자신감에 가득 차 대사를 뱉으셨다.
아까보다 자연스러운 대사.
나는 속으로 웃으면서 아버지가 건네는 상자를 받았다.
와, 생각보다 상자가 크다.
일어나자마자 선물을 받는 건 생각보다 훨씬 기쁜 일이었다.
나는 이것만큼은 연기가 아니라 정말 신이 나서 선물 포장을 벗겨냈다.
“우와아······.”
상자의 뚜껑을 열자 나온 것은 가지런히 놓인 손인형 두 개였다.
귀여운 개구리와 호랑이 인형이었다.
나는 얼른 양손에 인형을 껴보았다.
손을 접었다 폈다 하니 인형이 마치 말하는 것처럼 입이 뻐끔거렸다.
“우와아아! 이고 봐요. 엄마, 호랑이가 말을 한다?”
“후후, 시우 엄청 좋겠네?”
“웅! 산타 하라부지 감쨥니다!”
나는 벌떡 일어나서 아버지, 아니 산타에게 꾸벅 인사를 했다.
“허, 허, 허. 선물은 마음에 드니?”
“녜! 산타 하라부지 짱! 자, 감쨥니다. 감쨥니다.”
나는 양손에 낀 인형들을 이용해 산타에게 감사를 표했다.
엄지와 새끼손가락을 이용해 팔도 움직일 수 있는 인형이었다.
공손하게 배꼽인사를 하는 인형들.
산타는 그 모습을 보고 아주 흐뭇하게 허허허 하고 웃었다.
과연 선물로 뭘 준비하셨을까 했는데 이런 선물이 나올 줄은 몰랐다.
손에 끼고 연극을 하는, 손인형놀이 세트라니.
이제 곧 여섯 살이 되는, 연기를 좋아하는 아들에게 주려고 고심한 흔적이 보이는 선물이었다.
솔직히 아주 감동이었다.
나는 신이 나서 인형을 가지고 어머니 아버지에게 막간극을 선보였다.
떠들썩하게 거실이 울리자 작은 방에서 자던 삼촌도 비척거리며 나왔다.
“어? 매형, 아, 아니. 산타 할아버지가 벌써 오셨네?”
“으이구, 너 또 어제 몇 시에 잔 거야?”
“아, 일어났잖아. 그보다 시우야! 삼촌도 시우 크리스마스 선물 준비했지!”
“징쨔? 우아!”
나는 손인형을 낀 채로 삼촌에게 다가갔다.
음, 천이 아주 부드러운 것이 하루 종일 끼고 있을 수 있겠군.
도로 방에 들어가 부시럭거린 삼촌이 커다란 상자를 들고 다시 나왔다.
“짠! 시우 이거 좋아하지?”
“우아아!”
나는 털썩 앉아서 삼촌이 준비한 상자를 초롱초롱한 눈으로 내려다보았다.
삼촌이 내민 박스는 미니카 조립 세트.
작은 미니카가 두 개 들어 있고, 이 장난감들이 달릴 수 있는 트랙을 만들 수 있는 세트였다.
“고마어요, 삼촌!”
나는 역시 손인형으로 삼촌에게 고마움을 표했다.
그러자 삼촌이 몰래 나에게 스윽 다가와서 속닥거렸다.
“크흠, 그리고 이따 작은 방으로 와. 삼촌이 마이어 초콜릿 박스로 사 왔어.”
“마이······! 웅, 고마어. 삼쭌.”
마이어 초콜릿은 극단에서 누가 간식으로 줬을 때 내가 맛들린 초콜릿이었다.
다른 초콜릿보다 더더욱 달고, 부드럽고, 살살 녹는 그 맛!
가격도 그리 싸진 않았지만, 내가 너무 많이 먹어서 이가 썩을 수 있다며 어머니가 잘 주지 않는 간식이었다.
이거이거, 삼촌.
근래 들어 한 일 중에 제일 마음에 든다.
너무 기쁜 마음에 삼촌의 목을 와락 끌어안았다.
“뭐야? 무슨 말을 했길래 시우가 저렇게 좋아해?”
어머니 말고는 내가 이렇게 누구에게 안기는 적이 거의 없기에 어머니가 의심의 눈초리를 하고서 물었다.
뜨끔한 나와 삼촌은 그 모습 그대로 굳었다.
“아이 참. 누나도! 같은 극단 동료끼리 비밀 얘기 좀 할 수도 있지~”
“흐음······.”
어머니는 계속해서 우리를 의심하긴 했지만, 곧 그만두었다.
아직 이벤트가 남아 있었으니까.
“그래. 그럼 우리 케이크 자를까?”
“아침부터?”
“오늘은 크리스마스잖아. 산타 할아버지 가시기 전에 같이 먹어야지.”
“허, 허, 허.”
이토록 왁자한 분위기가 믿겨지지 않았다.
과거, 내가 노아였을 17세기 영국에서는 크리스마스에 이런 식으로 축하하는 것이 허락되질 않았다.
관습적으로 이런 비슷한 시기에 크리스마스를 축하하기도 했다는데, 우리 성에서는 한 번도 대대적으로 축하한 적이 없었다.
영국 의회에서 이 기간에 크리스마스를 기념하거나, 캐럴을 부르는 걸 금지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몰래몰래 하인들끼리 잔치를 벌이거나 귀족가들도 다른 명분을 내세워 연회를 열고는 했다.
나는 그 축제의 행렬에 포함될 수 없었다.
성에서 구석진 탑에 갇힌 뒤로는 다른 이들이 떠드는 소리와 음식 냄새를 나 홀로 탑에서 맡아야 했다.
함께하고 싶은 사람들은 옆에 없었기에, 갇혀있지 않더라도 딱히 나가지 않았을 것 같긴 하지만.
이제는 그때와 확연히 달랐다.
아기 때부터 들린 캐럴과 크리스마스 분위기는 나를 절로 들뜨게 했다.
내게 있어서 일 년 중 가장 행복한 날 중 하나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였다.
비록 과거와는 다르게 거위 대신 치킨이 있고, 또 진짜 산타 대신 가짜 산타가 있지만.
“자, 촛불 불자!”
“메리 크리스마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랑하는 사람들과 함께하는 이 크리스마스가 훨씬 좋다.
“후우!”
내가 케이크 위에 꽂힌 촛불을 한 번에 끄자 모두가 박수를 치며 좋아했다.
이제 케이크를 자르려는데 어머니가 등 뒤에서 봉투를 하나 꺼내 내게 건넸다.
“이건 엄마가 주는 크리스마스 선물.”
“우웅?”
얼른 봉투를 열어보면 안에는 셰익스피어의 ‘한여름 밤의 꿈’ 뮤지컬 티켓이 들어 있었다.
티켓팅 오픈과 함께 순식간에 전석 매진이 돼 구할 수 없던 티켓!
나는 티켓을 확인하고는 눈을 휘둥그레하게 떴다.
“엄마! 고마어요!”
당장 어머니에게 와락 안겼다.
어머니의 품 안을 만끽하는데 뒤에서 떨리는 목소리가 들렸다.
“당신··· 나 몰래 혼자 그걸 준비한 거야?”
약간의 배신감이 섞인 말투였다.
이런, 아버지.
연기를 중간에 그렇게 포기하시면 어떡합니까.
선배 된 도리로서 아버지에게 긴장감을 주기로 했다.
“산타 하아부지. 우리 엄마랑 아는 사이예요?”
나는 그 소리를 듣고 산타를 돌아보며 물었다.
그러자 산타는 크게 당황해서 뭐라 말을 잇지 못했다.
“시우야, 산타 할아버지는 모르는 게 없단다.”
“우웅, 신기하네!”
“허, 허, 허. 그렇지! 나는 모르는 게 하나도 없단다!”
어색하게 웃는 아버지를 향해 활짝 웃어주었다.
휴, 우리 아버지의 연기는 마지막까지 내가 지켜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