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 reincarnated genius wants to be an actor RAW novel - Chapter 64
64화
속초에서의 촬영을 한 차례 마치고 서울로 돌아왔다.
꽤나 빡빡한 일정을 소화했기 때문에 오늘부터 이틀간 휴가였다.
휴가가 끝낸 후에도 일주일간 나는 이전보다 촬영 스케줄이 널널했다.
아예 없는 건 아니고 하루에 한두 장면만 촬영하면 됐다.
“후아암.”
오랜만에 맞는 휴가이기에 나는 늘어지게 자고 일어난 참이었다.
그래 봤자 아침 아홉 시였다.
속초에서 새벽에 일어나 스탠바이해야 할 일도 많았기에 일찍 눈이 떠졌다.
“시우야, 잘 잤니?”
“네……. 엄마, 나 스프 먹고 시퍼요.”
비몽사몽한 채로 비척거리며 나오자 어머니가 나를 화장실로 데려다주셨다.
세수를 하고 정신을 차렸다.
거실로 나와 오랜만에 어머니랑 오붓하게 아침식사를 마쳤다.
“오늘은 뭐할 거니 시우야?”
“음…….”
하루종일 소파에 누워서 TV 보고 싶다.
하지만 이렇게 말하면 어머니가 실망하시겠지.
아니면 오랜만에 비상철또 777에 놀러가서 김상철이랑 강용휘를 만나고 싶지만, 제대로 쉬지 않는 다며 어머니가 걱정하실 게 뻔하다.
잠시 머리를 굴린 나는 아주 적절한 대답을 생각해냈다.
“책 읽는 교실에 나갈까?”
“정말? 엄마랑 같이 나가자 그럼.”
역시 정답이었다.
환하게 웃는 어머니의 얼굴을 보고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안 그래도 매일 같이 내가 또래와 교류가 너무 없는 것 같다며 신경 쓰시는 어머니이기에 이런 식으로나마 안심시켜 드리지 않으면 안 된다.
유치원에 가지 않고 연기를 하겠다고 나선 나를 위해 어머니가 신경 써서 찾아준 곳이니까 얼굴 한두 번은 내비쳐야겠다.
오랜만에 어머니의 손을 잡고 도착한 도서관.
간만에 만나는 책 읽는 교실의 선생님은 전보다 나를 더욱 환대해주었다.
“어머나, 시우 왔구나! 요즘 바빠서 못 올 줄 알았는데.”
딱 봐도 의 시청자라는 걸 알 수 있었다.
어머니는 나를 잘 부탁한다며 인사하고는 도서관을 떠나셨다.
아마 장을 보러 가시거나 아버지 치킨집에 가실 것이다.
오늘 책 읽는 교실에는 나를 포함해 여섯 명의 아이들이 모였다.
선생님이 지정해준 동화를 함께 읽고 나서 쉬는 시간을 가지고 이야기를 나누기로 했다.
책을 나눠준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다 읽은 아이들이 어린이 도서관 안에 비치된 놀이터로 가거나 아니면 바깥 휴게실로 향했다.
감상을 나누는 것도 중요하지만, 또래 아이들과 친하게 지내는 것도 목적 중 하나인 교실이기에 선생님도 그런 아이들을 제지하지 않았다.
어차피 시간이 되면 이곳에 둘러앉아 이야기를 나눠야 하니 말이다.
오늘의 책은 .
매일 같이 두꺼운 대본을 읽고 내 대사가 아닌 다른 사람의 대사까지 줄줄 외우는 내게 동화는 너무 짧았다.
그래도 내용만은 참 좋다.
비단 아이들에게만이 아닌, 어른이 읽기에도.
순식간에 다 읽고 딱히 움직이기 귀찮아 앉아 있던 자리에 앉아 있었다.
그랬더니, 선생님이 눈을 반짝이며 접근했다.
“시우야, 촬영하느라 힘들지?”
“생각보다 괜찮아요. 연기하는 것도 재밌어요.”
“그렇구나. 어린 나이인데 벌써 좋아하는 걸 찾았다니 굉장하네.”
“네.”
뭐, 6년 만에 깨달은 건 아니랍니다.
전생에서 깨닫고 계속 좋아했으니까 거진 30년은 되었겠네요.
“어린 나이에 어른들이랑 촬영하는 건 힘들지 않니?”
“우웅, 괜찮아요. 다들 엄청 잘 대해주세요.”
그러자 선생님의 눈이 순간 번쩍였다.
“그래애? 그럼 문희성 씨도 잘해주겠구나.”
아, 선생님.
문희성 팬인가 보다.
아까보다 배는 환하게 밝아진 얼굴을 하고 있는 걸 보니 바로 알 수 있었다.
“네. 되게 잘해주세요. 저한테도 그렇고, 연수 형한테도 그렇고. 스태프들한테도요.”
촬영이 끝나고 매일 밤마다 문희성의 숙소에서 논다는 말은 꺼내지 않았다.
그 말까지 했다가는 분명 쉽게 풀려나지 못할 것이다.
“그래, 시우야. 촬영 파이팅이야! 선생님도 매주 챙겨보고 있어.”
“네, 감사합니다.”
싱글벙글 기분이 좋아 보이는 선생님과의 대화를 마치고 주위를 둘러보자 나 말고도 테이블에 오도카니 앉아 있는 한 여자아이가 보였다.
다른 애들은 일찌감치 책을 다 읽고 놀러 나갔는데 저 아이는 무언가에 열중하고 있었다.
이름이…… ‘이혜인’이라고 했던가?
나보다 한 살 많은 자연 갈색 머리의 여자애였다.
아직 학교도 들어가지 않았는데 아이의 얼굴에는 안경이 걸쳐져 있었다.
벌써부터 안경을 쓰다니.
알만하다.
저렇게 쉬는 시간에도 학습지에 머리를 박고 있으니.
뭘 저렇게 열심히 할까 싶어서 슬쩍 그 아이의 옆으로 이동했다.
“뭐해?”
“……!”
다른 애들은 다 뛰어나갔는데 이 애만 이러고 있으니 유독 눈에 띈 것이다.
설마 누가 말을 걸 줄은 몰랐는지 이혜인은 깜짝 놀라 움찔했다.
이렇게 놀랄 줄은 몰랐는데.
“…수학 문제 풀어.”
“오. 재밌어?”
“재미…? 재미가 있어야 해?”
내 말에 이혜인은 뭘 그런 걸 묻느냐는 듯이 쌀쌀맞게 대꾸했다.
일곱 살밖에 되지 않았으면서 분수의 덧셈 뺄셈을 풀고 있는 아이의 학습지를 내려다보았다.
내 질문에 대답하느라 아이의 연필은 어느새 멈춰져 있었다.
작은 손으로도 연필을 놓치지 않으려고 아이는 온 힘을 다해 연필을 꽉 쥐고 있었다.
으음, 이 문화권의 아이들의 수준이 어느 정도인지는 모르겠네.
그래도 이건 너무 이른 거 아닌가?
“그럼 왜 하는 건데?”
“해야 하니까. 엄마가 하래.”
이혜인은 점점 이상하다는 듯이 인상을 찌푸리며 대답했다.
“엄마가 하라고 하면 무조건 해?”
“안 할 이유가 뭐야?”
“네가 하고 싶은 건 안 해?”
“……몰라. 생각하기 싫어. 엄마가 화내.”
이제 그만하라는 듯이 이혜인은 고개를 팩 돌리더니 다시 문제를 풀기 시작했다.
나는 한참동안 그 아이가 문제를 푸는 모습을 지켜보고 있다가 깨달았다.
아까부터 자꾸 이 아이가 거슬려서 왜 그런가 했는데, 이제야 알겠다.
이상하게 이 아이의 모습에 남연수가 겹쳐 보인다.
남연수와 비슷한 표정과 분위기여서 나도 모르게 눈이 간 모양이다.
뭐라 정확하게 표현할 수는 없지만.
뭔가 답답해 보이고, 자유롭지 않아 보인다.
왜 이렇게 한눈에 이 아이들의 심리를 알 수 있나 곰곰이 생각해보니 답은 간단하게 나왔다.
전생에 내가 이런 얼굴을 하고 있던 적이 있었으니까.
노아 바텐베르크일 시절, 나는 공작가의 막내아들로서의 소양과 교양을 갖추기 위해 어린 시절부터 수많은 가정교사에게 둘러싸여 지냈다.
그중에 내가 정말 배우고 싶어서 배우는 과목은 단 한 가지도 없었다.
아, 가끔 작문 시간은 기다려지긴 했던 것 같다.
평소 갖가지 장르의 수많은 책을 즐겨보는 카프린 선생과의 대화는 아주 유쾌하고 즐거웠으니까.
아는 것이 많은 그녀는 내 작문을 보고서도 훌륭한 평을 내려주었다.
조금 더 생각해보면 좋을 점이랄지, 아니면 이 부분은 이렇게 고치면 좋다든지.
내 상상력이 풍부하게 가미된 부분을 보고서는 아주 흥미롭다며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그래서 그랬던 것 같다.
다른 가정교사들은 가르쳐야 하기에 의무적으로 딱딱하게 가르친 반면, 카프린 선생은 진정 나를 가르치는 게 흥미로워 보였으니까.
뭐, 내가 작문 외에는 흥미를 가지지 않았기에 그들이 그런 태도를 고수했을 수도 있었다.
내가 아홉 살 때 그 극장에 가지 않았더라면 어땠을까.
나도 이들처럼 부모님이 시키는 대로의 인생을 살아갔을지도 몰랐다.
그 시절의 나는 그래도 공자라는 지위가 있어서 나름 행복한 유년 시절을 보냈다.
하고 싶은 것은 다 할 수 있었고, 갖고자 하는 것도 다 얻을 수 있었다.
막내아들이라 다른 형님들보다는 감시가 조금 덜한 것도 있었지만 말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나는 아홉 살 때 본 연극을 마음속에 간직하고 있었다.
그 뒤로 카프린 선생의 수업을 더 열심히 들으면서 홀로 보고 싶은 연극의 극본을 쓰면서 살아갔다.
거기까지 생각한 나는 문득 든 생각에 수학 문제를 푸느라 바빠 보이는 이혜인을 멀거니 쳐다봤다.
혹시 남연수도 같은 처지인 것은 아닐까?
내가 모르는 어떠한 압박이 그 어린아이에게 가해지고 있는 걸까?
***
일주일 동안 서울에서 여유로운 촬영 스케줄을 소화한 뒤, 다시 속초로 내려왔다.
오늘은 원래 바닷가 근처에서 하루종일 야외 촬영이 있기로 한 날인데, 갑작스러운 폭우로 오후 스케줄이 모두 취소되고 말았다.
일찍 촬영을 접은 김에 차일남은 회식을 하자며 모두를 끌고 근처 횟집에 들어왔다.
이번에는 한유주도 속초에 내려온 터라, 거의 모든 스태프들과 배우들이 참석하게 되었다.
“와, 갑자기 막 쏟아지네?”
“이런 날 비 내리는 씬을 딱 찍어야 하는데. 살수차 빌려올 필요 없이.”
예보에도 나오지 않은 폭우건만 스태프들의 표정은 그리 어둡지 않았다.
바닷가가 드라마의 주요 배경인 터라 차일남은 변덕스러운 바닷가 날씨를 고려해 스케줄을 짜는 편이었다.
한번 속초에 내려올 때마다 촬영을 바짝 해놓았기에 이런 여유를 부릴 수 있었다.
이게 다 미리 완결까지 대본이 나왔기에 누릴 수 있는 호사였다.
“비 덕분에 다 같이 회식도 하고 좋은데요?”
환한 얼굴의 한유주가 오늘 회식을 주도했다.
하나로 올려 묶은 머리에 털털하게 입은 편한 옷차림.
다른 드라마 촬영장에서 보여준 모습과 크게 다르지 않은 차림이었지만 표정은 완전히 달랐다.
쪽대본을 넘겨야 해서 항상 다크써클을 달고 살던 그녀인데 이번에는 몰골이 썩 괜찮았다.
게다가 방영하는 족족 반응도 좋겠다, 한유주는 요즘 방송국이건 현장이건 출근할 맛이 났다.
“한 작가 얼굴이 폈네, 폈어!”
“하, 김 감독님. 저 정말 매일이 요즘만 같았으면 더 바랄 게 없겠어요.”
비도 추적추적하게 오기에 모든 테이블에 뜨끈한 매운탕이 올라갔다.
“자, 한잔씩들 합시다!”
차일남의 외침에 스태프들은 너도나도 술잔을 들었다.
나는 삼촌이 따라준 콜라잔을 들고 벌떡 일어났다.
앉아서 건배를 하는 어른들의 키에 맞추기 위해서는 이 방법밖에 없기 때문이었다.
내 잔에 담긴 가득 담긴 콜라가 아슬아슬 넘실댔다.
어머니는 치킨을 먹을 때에만 콜라를 한 모금씩 주셨는데, 삼촌은 둘만 있을 때 이렇게 가득 따라준다.
역시 우리 삼촌. 최고의 매니저다.
“허허? 시우도 같이 하게?”
“당연하죠! 건배는 조은 거예요!”
“뭐? 건배가 좋아? 크하하.”
“얘 대체 여섯 살 맞는 거야? 크큭.”
아빠의 치킨집에서도 손님들이 툭하면 이 ‘건배’라는 걸 하곤 했다.
과거, 노아일 시절 영국에는 이런 게 없었다.
이 문화가 궁금해서 독서 교실에서 책을 찾아본 적이 있다.
상대의 술잔에 독을 타지 않았다는 신뢰를 주기 위해 서로의 술이 넘치도록 잔을 부딪치는 것에서 유래됐단다.
그게 지금까지 이어져 오다니 참으로 낭만 있는 서사가 아닌가.
나는 이런 낭만을 좋아한다.
“건배!!”
콜라를 높이 들고 크게 외치니 주변 스태프들이 웃으며 귀여워했다.
“건배하는 게 그렇게 좋니, 시우야?”
“네!”
그도 그럴 게 나는 이런 회식 자리도 잘 못 나갔는데, 내가 살던 시대에는 이런 문화도 없었던 말이다.
좋은 사람들과 하고 싶은 걸 하는데 당연히 신날 수밖에.
“캬하.”
콜라를 원샷하고 삼촌이 발라주는 생선 살을 열심히 받아먹었다.
그러던 내 시야에 매운탕을 깨작거리는 남연수가 들어왔다.
어린애 입맛에는 매운탕이 별로일 수 있었다.
그나저나 오늘따라 애 얼굴이 왜 저렇게 죽상이야?
나는 눈살을 찌푸리며 남연수를 살펴보았다.
‘책 읽는 교실’에서 떠올랐던 내 전생의 모습 때문일까.
이제 마냥 두고 보기에는 마음이 불편하다.
저 어린아이가 품고 있는 사연이 무엇일까.
내가 생각한 게 맞는지, 우선 확인부터 해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