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 reincarnated genius wants to be an actor RAW novel - Chapter 78
78화
“으으…….”
장장 열두 시간이 넘는 비행시간을 견디고 드디어 런던 히드로 공항에 도착했다.
바라마지 않던 고향인 런던에 도착했건만 나에겐 감격할 겨를이 없었다.
“시우야, 괜찮아?”
“우웅…….”
히드로 공항이 영국의 공항 중 가장 규모가 큰 공항인 데다가 세계에서는 3번째로 번잡한 공항이라더니…….
사람이 정말로 많았다.
여러 인종이 뒤섞인 인파 속에서 나는 비틀거리는 걸음을 겨우 내디뎠다.
“멀미약을 먹었는데 소용이 없나 보네……. 하나 더 사서 먹을까?”
“숙소까지 얼마나 걸린다고 했더라.”
“괜, 차나…. 아까보다 훨씬 나아.”
“진짜 괜찮겠니?”
나는 걱정스러운 얼굴로 재차 묻는 어머니에게 손을 내저으며 잠시 저기 앉아 있다가 가자고 했다.
내 말에 얼른 고개를 끄덕인 두 사람과 벤치에 잠시 앉았다.
삼촌이 비행기를 처음 탔으면 창가에 앉아서 구름을 봐야 한다는 말에 신나서 탄 게 문제였다.
차를 탈 때는 몰랐는데 비행기가 워낙 많이 흔들리다 보니 급격하게 멀미가 찾아온 것이다.
게다가 땅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까마득하게 지면과 멀어지는 비행기.
그걸 지켜보던 나는 현기증을 느끼고 픽 좌석에 쓰러지고 말았다.
몰랐는데, 나는 고소공포증이 있었던 모양이었다.
결국 열두 시간 동안 제대로 먹지도 못하고 졸리지 않아도 억지로 눈을 감고 버텨야 했다.
덕분에 오랜만에 땅을 디딘 영국이건만, 제대로 감상을 느낄 새도 없었다.
지면에 발을 디디자 조금 나은 것 같기는 한데…….
바닥이 울렁거리는 느낌이었다.
“이제 갈까? 이수 형이 기다릴 거야.”
“괜찮겠니?”
“내가 업어줄까?”
삼촌의 말에 조금 흔들렸지만, 곧 고개를 저었다.
오랜만에 조이수와 다시 조우할 텐데 그에게 그런 모습을 보일 수는 없지.
벤치에 잠시 앉아 있었더니 인파가 조금 줄어든 것 같았다.
아직 키가 작아서 이렇게 많은 인파들 사이에 있으면 시야 확보가 되지 않아 답답한 면도 있었다.
서둘러 입국심사를 끝내고 우리 셋은 게이트를 빠져나왔다.
“시우!”
“어! 이수!”
영국에 와서 그런가 자연스럽게 영어를 하듯 이수를 불렀다.
조이수는 구세주라도 본 듯이 아주 환하게 웃으며 나를 맞았다.
“와줘서 고마워요, 이수 형.”
이 자리에 아직 제시카는 없었다.
나는 삼촌과 어머니가 함께 있다는 걸 깨닫고 한국어로 말했다.
“이런, 시우야. 그건 오히려 내가 할 소리야. 하필 잠수를 타 버릴 게 뭐람. 안 그래도 제시카가 너 때문에 눈이 높아져서 캐스팅하기 힘들었는데 말이야.”
“제가 시간이 되어서 다행이네요.”
갑작스럽게 제시카가 나를 영국으로 부른 이유였다.
일본 공연에 이어 제시카가 영국에서 RUN을 올리게 되었는데 주연을 맡은 아역 배우가 적응을 못 하더니 결국 잠수를 타 버렸다는 것이다.
본 공연까지는 한 달 남짓 남은 상황이라 제시카가 급하게 내게 전화를 한 것이다.
“그러게나 말이야. 가실까요? 제가 숙소까지 모시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우리 세 사람은 조이수를 따라 공항을 벗어났다.
게이트가 엄청 길더니만, 히드로 공항은 유난히 길을 찾기가 쉽지 않았다.
우리는 조이수가 마중 나와서 정말 다행이라는 말을 몇 번이나 하며 그의 뒤를 따랐다.
“당장 믿을 만한 배우가 필요한데… 영국에 그런 배우가 있을 리가 있나. 미국에서 공연 올리고 있는 주연 배우를 빼 올 수도 없고 말이야.”
“제시카랑 이수 형이 고생이 많았겠어요.”
“맞아. 하지만 괜찮아. 시우가 영국까지 와줬으니까.”
통화할 때 제시카의 목소리에서 절박함이 느껴졌던 게 착각이 아니었나 보다.
애써 태연한 척 너무 부담가지지 말라는 말과 함께 조심스레 부탁해왔지만 그녀의 조급함이 전해졌으니 말이다.
하지만, 뭐 결과적으로는 잘 해결되어서 다행이었다.
제시카의 부탁이기도 하고.
또 어차피 예능 때문에 영국 가게 된 김에 그곳에서 공연 한번 해보는 것도 재밌겠다 싶었다.
예전 내 고향에서 다시 연극을 하는 것도 감회가 새롭고 말이다.
“으쌰, 짐은 이게 다인가요?”
“네. 어어, 제가 들겠습니다.”
“아닙니다. 시우가 이 먼 곳까지 와줬는걸요. 제가 트렁크에 실을 테니 먼저 타계세요.”
삼촌이 도와주려고 했지만 조이수는 강경했다.
우리 식구들의 짐을 다 실은 조이수는 운전석에 타면서 다음 일정에 대해 설명했다.
“이미 들으셔서 알겠지만, 저희 쪽 일정이 좀 타이트해서요. 오늘 늦었지만 우선 극단원들에게 시우를 소개만 하고 내일 바로 연습에 들어가야 할 것 같아요.”
“괜찮아요!”
어조에 미안함이 묻은 조이수의 말에 내가 손을 번쩍 들며 말했다.
쾌활한 내 말에 삼촌과 어머니도 웃었다.
멀미로 시들시들했던 내가 살아난 것 같아 다행이라고 여기시는 듯했다.
“시우가 괜찮다면 저희야 상관없습니다.”
“네, 두 분은 먼저 저희가 잡아 놓은 호텔에 내려드리겠습니다. 인사가 끝나면 시우도 제가 호텔로 다시 데려다주고요.”
“감사합니다, 이렇게 신경 써주셔서…….”
어머니는 세심한 조이수의 배려에 진심을 담아 말했다.
그러자 조이수는 격하게 고개를 저었다.
“아닙니다. 저희가 시우한테 부탁한 입장인걸요. 미안하다, 시우야. 비행기도 오래 타서 힘들 텐데 말이야.”
“저도 얼른 연습하는 게 좋은걸요. 영국팀은 어떤 배우들이 있을지 궁금해요.”
“하하, 시우 너 답네. 그럼 출발하겠습니다.”
우리는 조이수의 차를 타고 연습실로 향했다.
나는 지이잉, 창문을 내려 영국의 바람을 맞았다.
창밖으로 불어오는 바람이 눅눅하다.
여전하구나, 영국의 시월은.
***
어머니와 삼촌을 호텔에 먼저 내려주고 우리 둘은 바로 연습실이 있는 커다란 건물에 도착했다.
연습실에 들어가면서 시계를 들여다본 조이수가 난감하다는 듯이 이마를 긁적였다.
“음, 제시카는 아직 회의 중인가 봐. 요즘 영국 제작사 측이랑 이런저런 할 얘기가 많거든.”
“그래요?”
“응, 그래도 얼추 끝날 시간이야. 회의실에 들어간 지 두 시간이 다 되어 가거든. 아무리 제시카라도 이 이상 그들을 괴롭힐 수는 없을 테니.”
제시카의 성격 알지 않느냐며 엄살을 부리는 조이수의 모습을 보고 나는 큭큭 새어 나오는 웃음을 삼켰다.
“히힛. 그럼 저희 먼저 들어가요?”
“그러자. 극단 사람들하고 먼저 인사를 나누고 있으면 제시카가 올 거 같아.”
나는 조이수를 따라 길게 뻗은 복도를 가로질렀다.
이제 앞으로 여기가 내가 수도 없이 오게 될 연습실이구나.
연습실로 향하는 길에 있는 휴게실과 카페테리아, 정수기 같은 시설을 둘러보며 그의 뒤를 따랐다.
“여기가 연습실이야.”
조이수는 소개와 함께 문을 열어젖혔다.
그러자 한국 광화문 문화센터에 있던 연습실과 비슷한 구조의 커다란 공간이 나타났다.
다른 점이라면…… 공간 자체가 조금 더 넓다는 것과, 안에 있는 사람들이 모두 외국인이라는 점?
대부분 백인으로 이뤄진 극단원들은 우리가 들어서자 모두 일제히 이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다들 얘기 들었죠? 우리의 주연 배우가 먼 한국에서 도착했습니다. 이름은 시우 한. 올해로 여섯 살, 아 영국 나이로는 다섯 살이군요. 아무튼, 여러분들을 실망시키지 않을 겁니다. 어린 나이지만 경험도 실력도 있는 친구거든요.”
조이수가 내 소개를 마쳤지만, 돌아오는 반응은 그저 그랬다.
모두 들어서 알고는 있었는지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이는 분위기랄까.
“하하, 다섯 살이라니……. 더 어리네. 반가워.”
“생각보다 애 피부가 희네. 그래도 너무 작은 거 아니야? 그보다 영어는 되는 걸까?”
이 분위기는 뭐지?
나는 상당히 실례되는 사람들이라고 생각하면서도 방긋 미소를 지으며 스스로 소개를 하려고 했다.
갑자기 끼어든 어떤 사람의 음성이 아니라면 말이다.
“다섯 살? 아무리 그래도 다섯 살은 심한 거 아니야? 그것도 영국 공연에 동양인 꼬마를 올린다니. 피부만 조금 하얗다고 다 백인이냐고. 레인보우 픽처스라고 해도 별수가 없었나 보지?”
“고든! 그게 무슨 소리야. 애 앞에서. 당장 사과해.”
조이수는 같은 책임자로서 분개하며 고든에게 사과를 요청했다.
하지만, 그 사람은 어깨를 한번 으쓱할 뿐 사과할 생각이 없어 보였다.
“내가 아빠인데 내 아들이 동양인이라니 말이 안 되잖아, 안 그래? 영어는 할 줄 아는 거야? 이거, 원. 제시카가 애 한 명 울려서 쫓아 버리고 이번에는 폭언을 퍼부어도 못 알아듣게끔 동양인을 데려온 거 아니냐고.”
비아냥거리는 고든의 말에 몇몇 배우들이 킥킥거리면서 웃기 바빴다.
아무래도… 내가 합류하는 것에 불만을 가진 이가 고든 한 사람만이 아닌 듯했다.
“고든……! 자꾸 그런 식으로,”
“괜찮아요. 이수 형.”
나는 일부러 한국어로 말하며 그를 제지했다.
그 모습을 보고 고든은 휘파람을 불며 나를 쳐다보았고, 낄낄거리던 이들은 저게 무슨 언어냐고 쑥덕거렸다.
이제 저 입 좀 다물게 해줘 볼까.
저 입을 다물게 하는 건 조이수의 몫이 아닌 내 몫이다.
가만히 그들을 지켜보던 나는 고든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You came from a cold place.”
완벽한 영국식 영어 발음.
그것도 귀족들이나 쓸법한 악센트를 일부러 살려서 말했다.
제시카나 레인보우 픽처스에서 온 루카스 앞에서 이 발음을 사용할 때 그들이 놀랐던 걸 생각해보면, 요즘 영국에서는 특히나 이런 식으로 말하는 사람이 적을 것이다.
“그, 어… 어떻게?”
역시나.
내가 내뱉은 말에 고든을 포함한 모든 배우들이 전부 놀랐다.
“글쎄요. 제가 그거까지 설명할 필요는 없을 것 같은데요.”
이어서 내가 술술 영어로 잘만 말하자, 연습실에 있던 모두가 꿀 먹은 벙어리가 되었다.
얼추 상황이 정리되자 조이수가 서둘러 내게 말했다.
“미안해, 시우. 내가 미리미리 이런 상황을 미연에 방지해놨어야 하는데…. 네게 안 좋은 경험을 하게 한 것 같아. 내가 준비를 못 했어.”
“괜찮아요. 이수가 사과할 필요는 없으니까요.”
나는 일부러 내게 막말을 퍼부었던 고든을 힐긋 바라보며 조이수에게 답했다.
그리고 당황해서 그가 자랑스러워 마지않던 흰 얼굴이 시뻘게진 고든을 보면서 말했다.
“그런데 이수……. 우리 아빠인 닉슨이 스코틀랜드 출신은 아닐 텐데요. 이대로 괜찮겠어요?”
RUN에서 내가 맡은 역할인 조나단의 아빠 닉슨.
원작에서 미국 로커가 되길 꿈꾸는 그의 설정을 꼬집어 말한 것이다.
짐짓 정말 걱정스럽다는 듯이 말하는 내 말투에 고든의 얼굴이 더할 나위 없이 더 달아올랐다.
“푸하하!”
“어이, 고든! 크게 한 방 먹었는데?”
그리고 내 말에 고든을 제외한 모든 배우들이 크게 웃음을 터트렸다.
아무래도 출신이 스코틀랜드인지 억양에 스코틀랜드 특유의 사투리가 묻어있던 고든은 내 말에 아무런 반박도 하지 못하고 입을 앙 다물었다.
뭐라고 말을 할 수 없겠지.
지금 입을 열면 스코틀랜드 억양이 그대로 튀어나올 테니 말이다.
“제시카가 오면 진지하게 물어봐야겠어요. 그렇죠, 이수?”
조이수는 마지막으로 덧붙인 내 말에 웃음을 참으며 고개를 외로 돌렸다.
시간이 지날수록 내 앞에 나선 고든의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하게 변했다.
당장 무슨 말이라도 쏘아댈 기세인데.
오케이. 컴온. 들어와 봐.
그때,
“시우!!”
연습실이 문이 활짝 열리면서, 그보다 활짝 웃고 있는 제시카가 나타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