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 reincarnated genius wants to be an actor RAW novel - Chapter 80
80화
이른 오전, 나는 어제 왔던 RUN 영국 공연 팀의 연습실에 도착했다.
오늘은 어제 푹 쉰 삼촌도 함께였다.
아직 렌트카를 알아보지 못해서 우리 두 사람은 택시를 타고 이곳에 왔다.
삼촌은 모두가 영어로 떠드는 이 현장에서 군기가 바짝 잡혀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일일이 인사를 건네고 있었다.
“하, 하이! 나이스 투 미츄.”
“오, 신입의 매니저인가? 반가워요.”
배우들은 어제 나를 경계하던 것보다는 유순하게 삼촌을 맞아주었다.
덕분에 삼촌은 점차 긴장을 풀어가는 중이었다.
손에서 영어 회화책을 놓치진 않았지만.
“시우, 컨디션은 어때?”
“좋아요. 이수가 잡아준 호텔 침대가 아주 훌륭하더라고요.”
단원들의 상태를 점검하던 제시카가 나를 반겼다.
이제 몸이 한결 가뿐하다는 내 말에 제시카가 놀랍다는 듯이 말했다.
“그래? 역시 어린 몸은 적응이 빠른 건가. 열두 시간을 날아왔는데 말이야. 나 같으면 분명 힘들 거야.”
“하하, 전화 올 때마다 다른 국가에 있는 제시카답지 않네요.”
“고마워, 시우. 그렇게 말해줘서.”
옆에서 조이수는 다행이라며 가슴을 쓸어내렸다.
갑작스럽게 나를 부른 터라 준비가 미흡하지는 않을까 걱정되었던 모양이다.
“그럼, 몸 좀 풀고 있어. 우선은 조나단이 없는 장면부터 시작할 거니까.”
“네, 좋아요. 제시카.”
나에게 스트레칭 매트가 있는 쪽을 가리킨 제시카가 단원들을 불러모았다.
“오늘은 닉슨과 벨라의 장면부터 시작해보자고.”
“네!”
연습실 한 켠에는 간이 무대처럼 꾸며진 곳이 있었다.
계단 한 칸 정도의 단차 있는 그곳은 많지는 않지만 조명도 몇 개 들어왔다.
물론 그 주변도 거울이 에워싸고 있어 배우들이 스스로의 몸 상태를 점검할 수 있게끔 되어 있었다.
확실히 서울보다 이런 시설 면에서는 신경을 많이 쓴 게 보이네.
영국을 연극의 성지라 부를 정도라더니.
여러 가지로 세심하게 갖춰진 연습실이 신기하기만 했다.
간이 무대 위로 어제 나와 입씨름을 했던 고든과 중년 여성 배우가 올라갔다.
오, 저 사람이 벨라 역을 맡은 배우인가 보네.
한국에서 내 할머니 역을 맡았던 노영희보다는 훨씬 젊어 보이는 배우였다.
아마 본공연에서는 조금 더 분장을 하겠지 싶었다.
두 사람은 뭐라고 짧게 이야기를 나누더니 바로 연기로 들었다.
“휴, 벨라! 저 왔어요. 조니는 잘 있어요?”
“연락도 없던 놈이, 조니 생각을 하긴 했던 거냐?”
무대 저쪽 구석에서 다급하게 뛰어 들어온 고든, 닉슨의 배역을 맡은 그는 유독 또박또박 발음을 하며 대사를 했다.
그 모습을 보고 있자니 웃음이 나왔다.
원래 닉슨이 연기를 하면 저런 톤인 건지, 아니면 내가 어제 스코틀랜드 출신이라 운운해서 저런 건지 나중에 제시카한테 슬쩍 물어봐야겠다.
“이런, 엄마. 하나뿐인 아들을 반겨주지도 않는 거예요?”
“……엄마는 무슨. 언제부터 그렇게 징그럽게 불렀다고 그러니.”
영국의 벨라는 생각보다 더 무뚝뚝해 보이네.
그나저나 영어로 하니까 확실히 대사가 더 자연스러운 기분이 들긴 했다.
원작이 미국의 작품이라서 그런가.
“하하, 엄마도 참. 그나저나 제 아들 조니는 어디 갔을까요? 안 보이네요?”
“잠깐 심부름 갔다.”
“아하, 그럼 심부름에서 돌아오면 바로 짐을 싸면 되겠네요.”
“…짐이라니?”
갑작스러운 닉슨의 말에 뜨개질을 하는 것처럼 손을 움직이던 벨라 역의 배우가 손을 딱 멈추며 물었다.
표정 연기 좋네.
속내를 완전히 드러내지는 않으면서 자신이 놀랐다는 걸 제대로 표현해냈다.
“이런, 조니를 별로 달가워하지 않던 거 아니었어요? 제가 돌아왔으니 조니를 데려가야죠!”
그러니 닉슨이 저렇게 해맑게 엄마인 벨라의 속도 모르고 내뱉는 대사가 자연스럽게 느껴졌다.
나는 그 뒤로도 이어지는 영국 팀의 연기를 지켜보며 고개를 주억거렸다.
확실히 레벨이 높다는 게 느껴졌다.
본공연은 이보다 더 큰 무대에서 이뤄지겠지만, 지금 연습실의 간이 무대도 결코 작은 크기는 아니었다.
저 간이 무대만 해도 비상철또 777의 무대보다 조금 큰 거 같으니 말 다 했지.
아무 소품도 배경도 없는 그 큰 무대를 단 두 명이 채우고 있는데도 전혀 휑해 보이지 않는다.
절제된 몸짓과 알맞은 발성.
무대를 어떻게 써먹어야 하는지 노련하게 알고 있다.
짧은 장면들을 봤는데도 그 부분이 여실히 느껴졌다.
“……그 애가 떠나가면 이제 정말 아무런 낙이 없는데.”
무대 위 벨라가 마이크 하나 차지 않았는데도 또렷하게 들리도록 대사를 이어간다.
심지어 이 연습실은 소리가 크게 울리도록 설계된 것 같지도 않은데 말이다.
중얼거리는 대사인데도 이렇게 잘 들리다니.
그야말로 잘 벼려진 발성법이었다.
“다시 이 집에 어두워지겠네. ……조니한테 떠나기 전 양초를 더 사다 달라고 해야겠다. 불을 지필 일도 많지 않을 테니.”
씁쓸한 벨라의 대사.
닉슨이 집을 휘젓고 다닐 때와 비슷한 무뚝뚝함이 느껴졌지만, 듣는 이로 하여금 그녀의 서글픈 감정을 느끼게끔 해준다.
나는 이제 나의 할머니가 될 그녀의 연기를 보면서 잊고 있던 조니의 감정을 다시 불러냈다.
두 달 남짓 커다란 무대 위에서 뜨거운 조명을 받으며 연기했던 나의 조니.
대사는 이미 다 외운 후였다.
그때는 한국어로 연기했지만, 이번에는 영어다.
하지만 상관없었다.
예전 내 모국어였던 영어로 연기하는 것쯤은 더욱 수월한 일이었으니.
영국에 오기 전, 집에서나 비행기에서 미리 받은 RUN의 영어 대본은 이미 완벽히 숙지했다.
나는 벨라의 음성을 들으며 살며시 눈을 감았다.
어두컴컴한 벨라의 집 안으로 들어가 그녀의 마음속에 불을 켤 준비를 하면서.
***
“시우, 자는 건 아니지?”
“설마요.”
배우들의 연기가 한 차례 끝나고 제시카가 휴식을 선언했다.
그 사이, 조니의 감정을 복기한 내가 눈을 감고 있자 제시카가 장난스럽게 물었다.
“어때, 영국 팀의 실력은?”
“굉장한데요? 한국 팀하고는 느낌이 조금 다른 거 같지만요.”
닉슨은 조금 더 쾌남의 이미지가 더해졌고, 벨라는 다정다감한 모습이 조금 덜어졌다.
아무래도 한국의 가족 정서와는 다른 정서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겠지.
하지만, RUN이 말하고자 하는 본질은 결코 변하지 않았다.
진정한 가족이 되어가는 과정.
영국의 벨라와도 그 부분을 충분히 잘 그려낼 수 있을 것 같았다.
내가 이런 생각을 조목조목 말하자, 제시카는 흥미롭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며 내 말을 경청했다.
그녀의 연출 포인트를 제대로 짚어낸 모양이다.
“맞아, 같은 극이라도 관객에 따라 연출 포인트가 조금씩 달라져. 한국에서 나와 같이 공연을 올린 출연자가 도착하니 이런 대화가 가능하네. 재밌어.”
“그렇다면 다행이에요. 그런데 이렇게 단기간에 여러 국가의 팀을 컨트롤하려면 골치 아프지 않아요?”
내가 연출적인 측면의 어려움을 짚어내자 제시카가 크게 웃음을 터트렸다.
어린 배우인 내가 이런 말까지 하는 게 웃겼나 보다.
진심으로 걱정한 건데 말이다.
“이런, 내가 시우에게 걱정을 끼치고 말았네. 하지만 괜찮아. 그게 여러 국가에서 공연을 올리는 묘미기도 하지. 바로 들어갈래?”
“네, 상관없어요.”
나는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
오히려 빨리 무대에 올라가고 싶은 참이었다.
오랜만에 RUN의 무대를 지켜봤더니 조니가 되고 싶어서 몸이 근질거리는 것 같았으니까.
“좋아. 그럼 이제 조니와 함께 연습해볼까?”
제시카의 힘찬 외침에 배우들 몇몇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와 함께 옆에서 따가운 눈초리가 느껴졌다.
뭐지?
고개를 돌려보니 거기에는 나를 잡아먹을 듯이 이글이글한 눈빛을 보내고 있는 고든이 있었다.
아직도 어제 내가 한 말을 마음에 두고 있나 보다.
으이구 속 좁은 놈.
그 모습을 보고 나는 어깨를 한번 으쓱해주었다.
“허.”
그러자 고든이 어이가 없다는 듯 헛웃음을 지었다.
뭐, 크게 신경 쓰이진 않는다.
연기 한번 보여주면 고든도 곧 태도가 바뀌게 될 테니까.
아직 연기도 보지 않고서 왈가왈부하는 철없는 아버지를 계속 상대해줄 이유는 없지.
그래도 닉슨을 연기하는 것을 보니, 적어도 연기만큼은 대충하는 이는 아닌 거 같았다.
연기에 꽤나 진심인 것 같은데…… 내 연기를 보면 저 눈빛이 어떻게 바뀔지 내심 기대가 되었다.
***
“오케이. 시우. 잠시 쉬자고.”
제시카의 외침과 함께 막 한 장면을 마무리한 나와 벨라 역의 배우는 숨을 돌렸다.
간이 무대에서 내려오기 전 방금 합을 맞춘 배우에게 말을 건넸다.
“에밀리. 방금 대사 너무 좋았어요.”
“나야말로. 솔직히, 조금 충격 먹었어.”
영국 공연에서 벨라 역을 맡은 에밀리는 한 차례 연습이 끝나고 솔직하게 말했다.
내 연기를 보고 깜짝 놀랐다고 말이다.
혀를 내두르는 그녀의 반응에 내가 짓궂게 물었다.
“에밀리도 제시카의 말을 믿지 않은 건가요?”
“…그녀의 실력을 의심한 건 아니지만. 도망간 아이가 여덟 살이었다고. 제시카의 혹독한 디렉션이 있기는 했지만 말이야. 프로면 이겨내야 했지만 어린 배우에게 가혹했던 모양이야. 그런데 갑자기 등장한 네가 다섯 살이라잖아. 무려 세 살이나 어렸다고. 불안할 수밖에 없지. 우리도 조금 이해해줘.”
“하긴, 제 나이가 항상 문제긴 하죠.”
대수롭지 않게 얼른 자라고 싶다고 받아치자 에밀리가 유쾌하다는 듯이 웃었다.
뒤끝 없이 쿨하게 넘기는 내 태도에 안심한 듯 에밀리가 미소를 지으며 덧붙였다.
“어제 우리의 태도가 무례했던 것 같아. 미안해, 시우.”
“괜찮아요. 저는 곧 이렇게 될 줄 알았거든요.”
이래서 어제 그냥 연기를 보여주려고 했던 건데 말이다.
제시카 역시 내 연기를 보여주면 잠잠해질 거라고 여겼기에 어제는 그냥 나에게 쉬라고 한 거겠지.
“자신감이 엄청난데? …하긴, 그럴만한 실력이긴 했어.”
에밀리는 정말 조니가 원작에서 튀어나온 줄 알았다며 감탄을 그치지 않았다.
그 모습을 보고서 나는 제시카에게 장난스러운 시선을 보냈다.
벨라의 마음은 함락했다고.
제시카는 팔짱을 낀 채로 웃고 있다가 슬쩍 엄지를 치켜세워 주었다.
어디 보자, 이제 남은 건…….
다른 배우들 역시 삼삼오오 모여서 방금 내가 펼친 연기에 대해 평하고 있었다.
표정이 모두 밝은 걸 보니 그들이 가지고 있던 불안이 깨끗이 지워진 것 같았다.
나는 고개를 돌려 쉬이 보이지 않는 고든을 찾았다.
“읏쌰.”
나는 간이 무대에서 폴짝 내려왔다.
아, 저기 있네.
고든은 왼쪽 구석에 우두커니 서서 믿을 수 없다는 듯이 나와 무대를 번갈아 쳐다보고 있었다.
저렇게 놀랄 건 뭐람.
제시카가 그렇게 공언했는데 저 표정을 보아하니 전혀 믿고 있지 않았나 보다.
일단 그에게서 신경을 끄고 한 발자국 앞으로 나아가려는데, 영국 단원들이 내게 우르르 몰려들었다.
“조니, 조니! 오, 아니지. 시우. 방금 뭐야?”
“그야말로 굉장했어. 시우, 정체가 뭐야? 방금 뭘 보여준 거야 대체!”
“하하, 다들 좀 진정해요.”
잔뜩 흥분한 단원들은 정말 끝내줬다며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
“발음도 정말 완벽해. 귀에 쏙쏙 들어온단 말이지. 모국어도 아닌 영어를 어떻게 이렇게까지 구사하는 거지? 그것도 완전한 우리 영국식 발음으로 말이야!”
“연기는 어디서 배운 거야? 응? 비법 좀 알려줘 봐.”
훗, 나는 단원들에게 둘러싸인 채 제시카를 바라보았다.
제시카 역시 한쪽 눈썹을 들썩이며 이럴 줄 알았다며 씨익 웃었다.
영국 단원들의 마음을 사로잡는데, 단 세 시간도 필요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