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 reincarnated genius wants to be an actor RAW novel - Chapter 87
87화
배우들의 요청에 처음에 쑥스러워하던 남연수는 안 한다는 말은 하지 않았다.
“그럼, 이 부분을 한번 해볼까?”
제시카는 바로 대본을 집어 들고 쉬운 대사로 이루어진 조나단의 짧은 장면 하나를 가리켰다.
남연수는 RUN 공연을 본 적은 없지만, 원작도 보았고 연극 대본을 본 적은 있다고 했다.
“어렵지 않겠어?”
영어 대사로만 되어 있는 걸 보고 내가 남연수에게 물었다.
잠시 대본을 들여다보던 남연수는 고개를 가로저으며 옅게 웃었다.
“한번 해볼게!”
그리고 무섭도록 대본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대본 집중력 하면 남연수지.
아무리 어수선한 현장이라도 바로 대본에 몰입할 수 있었다.
저 집중력은 웬만한 성인 배우들도 따라잡기 어려울 것이다.
그나저나 남연수는 쑥스러워하면서 연기해달라는 요청에 빼지는 않는단 말이지.
남연수가 대본에 집중한 사이, 우리는 막간을 이용해 연습을 속행하기로 했다.
“펼친 김에 오늘은 이 장면부터 연습해볼까?”
“좋아요.”
방금 제시카가 남연수에게 보여준 장면을 연기하기 위해 간이 무대에 올랐다.
내 상대역인 고든 역시 몸을 풀며 내 맞은편으로 올랐다.
우리는 제시카의 사인에 맞춰 곧바로 연습에 돌입했다.
한바탕 연기를 마친 후, 남연수가 앉아 있던 곳을 쳐다보았다.
대본은 이미 다 숙지한 듯 덮어놓은 그는 열심히 박수를 치고 있었다.
“우와, 진짜 멋졌어. 시우야.”
“그래? 이제 형 차례야.”
내 말에 남연수가 싱긋 웃으며 일어났다.
홀로 무대에 오른 남연수는 감정을 잡더니 천천히 고개를 들어 올렸다.
“She ran away because of dad….”
방금 전까지 생글거리고 있던 이라고는 전혀 생각되지 않는 원망에 가득 찬 표정.
그리고 두 눈에 가득 담긴 그렁그렁한 눈물이 한 방울 툭, 바닥으로 떨어졌다.
“My mom…….”
그렇게 약 5분간의 남연수의 짧은 연기가 끝났다.
“…….”
“…….”
한동안 넓은 연습실은 적막만이 가득했다.
“브라보!”
그러다 한 배우가 박수를 치자, 모두가 크게 환호하며 박수를 보냈다.
“뭐야, 나 갑자기 한국이 무서워졌어. 한국의 아역들은 다 이런 괴물밖에 없는 거야?”
“시우의 친구라더니 역시 대단하잖아?”
연이은 칭찬에 남연수는 무대에서 내려오면서 머리를 긁적거렸다.
아까는 그렇게 쑥스러워하더니 이럴 때는 또 대담하다.
“헤헤, 다 그런 건 아니고. 저랑 시우가 특별한 편이죠.”
저런 말을 눈 하나 깜빡하지 않고 말하다니 말이다.
“이런, 내가 연수의 연기를 조금 더 일찍 알았다면 B팀에 연수를 넣었을 텐데 말이야.”
이어지는 제시카의 칭찬에 조이수는 깜짝 놀랐다.
나도 제시카가 이렇게까지 그를 칭찬할 줄은 몰랐기 때문에 놀라서 제시카를 바라보았다.
“제시카가 농담으로라도 저런 말 사람이 아닌데…….”
“그러니까요.”
나랑 조이수는 놀라서 둘이서 소곤소곤 주고받았다.
이 정도 반응이라면 남연수가 영어만 완벽하게 됐더라면 정말 B팀에 들어갔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새삼 성지훈이 한국에서 RUN 공연을 올릴 때 나를 보고서 남연수를 찾은 게 이해가 되려고 했다.
정말 RUN 오디션에 남연수가 나왔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흠, 하지만 아쉽게도 A팀에 넣어줄 순 없어. 시우가 있으니 말이야.”
덧붙인 제시카의 말에 남연수가 생긋 웃었다.
역시 어린아이라고 봐주지 않는 제시 다운 언사였다.
“시우 대신 제가 뽑힌다면, 전…… 음, 뭔가 의심하게 될 거예요.”
더듬더듬 영어로 말한 남연수는 자신의 뜻이 제대로 전달되었을까 걱정되었는지 나를 쳐다보았다.
나는 담대한 그의 말에 살짝 놀랐다가 잘 통했다는 뜻으로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그러자 남연수가 눈에 띄게 안심해서 한숨을 휴 내쉬었다.
“맙소사. 당차고 멋진 꼬맹이잖아!”
“와, 다음에는 네가 영국에 와줘 연수. 우리는 너를 환영할 테니.”
“하하, 고맙습니다.”
그의 말에 영국 배우들은 환호하며 남연수에게 엄지를 치켜 올려주었다.
낯선 이들에게 칭찬을 잔뜩 들은 남연수는 들떴는지 볼이 발갛게 물들었다.
흐뭇하게 그 모습을 지켜보던 것도 잠시, 나는 그의 말에 숨겨진 뜻을 읽어버렸다.
저 말의 진의는 제시카의 판단을 의심한다는 걸까?
아니면…… 자신의 아버지가 가한 외압을 의심한다는 걸까.
어린아이들이 아무것도 모른다는 것은 어른들의 속 편한 착각에 불과하다.
게다가 일찍이 어른들이 바글바글한 연예계라는 사회에 내던져진 남연수가 모를 리가 없을 것이다.
자신의 아버지가 어떠한 권력을 가지고 있고, 그걸 방송가에다 어떻게 휘두르고 있는지.
스스로가 떳떳하면 상관없었다.
하지만, 이렇게 어린 나이일 때부터 마음속에 저런 생각을 품고 있다면.
나중에 그가 자라서 자립하려고 할 때, 충분한 자격을 갖췄음에도 저런 의심을 떨쳐낼 수 있을까?
거기까지 생각하자 나도 모르게 혀끝이 써지는 듯했다.
처음으로 과거, 노아였던 내가 스스로 무언가를 성취했을 때.
오스카 극장에 서서 내 신분과 관계없이 관객들의 인정과 환호를 받게 되었을 때의 환희.
바텐베르크 가의 막내아들이라 누릴 수 있는 성취가 아니었다.
스스로의 힘으로 얻어낸 값진 성취감.
그걸 언젠가 남연수가 오롯이 느꼈으면 좋겠다.
과연 그럴 수 있을까?
나는 스스로에게 자문했다.
정말 저 아이가 단순히 나의 과거와 비슷한 일을 겪고 있기 때문이라서 자꾸 이런 우려가 드는 것인지.
그리고 나는 깨달았다.
내가 단순히 과거의 망령에 사로잡힌 것이 아니라고.
진심으로 타인을 돕고 싶어 하는 마음을 알게 된 것뿐이라는 걸.
과거, 좁은 세상에 갇혀 어찌할 줄 몰랐던 어린 노아 바텐베르크가 새로운 세상을 알 수 있게 도와준 오스카 극단의 동료들처럼 말이다.
“시우야, 나 어땠어?”
나에게 환한 얼굴로 묻는 남연수를 보고 있자니 욕심이 났다.
“끝내줬지.”
소중한 동료의 행복한 얼굴을 계속해서 보고 싶다고.
***
“감독님. 이게 진짜 예능이 될까요?”
예능 제작팀이 영국에 모두 들어오고 며칠이 흘렀다.
공연 기간이 끝나지 않은 나는 매일매일 연습과 공연에 매진했다.
남연수는 원래 계획했던 대로 영국 이곳저곳을 다니며 홀로 촬영에 임했다.
“응? 왜 그래, 갑자기.”
“아니, 그냥 이런 게 재미있을까 싶어서요. 걱정도 조금 되는 거 같고…….”
우리 두 사람은 저녁마다 만나서 시시콜콜한 이야기를 나누는 모습을 카메라에 담았다.
어떤 날은 둘 다 피곤해서 조용할 때도 있었지만.
오늘 역시 나는 연습을 마치고 교외로 나간 남연수를 기다리는 중이었다.
“하하, 별걱정을 다 한다.”
“연수 형 말처럼 둘이서 열심히 찍었는데 통편집 당하면 어떡해요.”
“괜찮아. 우리가 싸악- 편집해서 예능처럼 만들어 줄 거니까.”
“아무리 생각해도… 너무 다큐 같은데.”
그러다 보니 드는 걱정이었다.
심심하고, 그냥 일상을 무덤덤하게 담을 뿐인데.
이게 예능 프로그램이라는 상품이 될 수 있을까?
김산호가 생각이 있을 테지만, 제작진들이 괜한 수고를 하고 있는 거라면 어쩌나 싶은 것이다.
다큐 같다는 내 말에 잠시 나를 쳐다보던 김산호가 웃으며 말했다.
놀랍게도 그는 내 옆에 앉아 있던 어머니를 가리켰다.
“시우야, 내가 진짜 다큐 찍으려고 했으면 너희 엄마 앞에서는 못하지.”
“네?”
이건 또 무슨 소린가.
그리고 김산호의 말에 어머니는 황급히 손을 내저으셨다.
“어머, 언제적 이야기를….”
뭐지?
이만큼 당황하는 어머니는 좀처럼 볼 수 없었는데?
“뭐예요? 웅?”
이게 무슨 상황이냐고.
얼른 둘 중 한 명에게 설명을 듣기 위해 내 고개가 바쁘게 움직였다.
내 모습에 합, 입을 다물고 있던 김산호가 어머니를 슬쩍 바라보며 물었다.
“얘기하면 안 되는 건가요?”
그 질문에 어머니가 머쓱한 미소를 지어 보이신다.
타이밍을 놓치지 않으려 부러 크게 뜬 눈으로 어머니를 바라보며 빠르게 다시 물었다.
“말해주세요! 들려주면 안 돼요?”
결국 어머니는 작은 웃음을 터트리며 고개를 끄덕이셨다.
오케이. 허락은 떨어졌다.
이제 당신이 입을 열 차례입니다. 김산호 씨.
“시우는 잘 모르겠지만, 우리 PD들 사이에서 지연화 선배의 이름을 모르는 사람은 없어. 엄청 유명한 다큐멘터리 PD님이시거든.”
오호.
기다렸다는 듯 입을 연 김산호로부터 나온 말은 첫 문장부터 흥미로웠다.
그러니까 김산호가 어머니의 후배렷다?
어머니가 다른 감독님들보다 대하는 게 조금은 편해 보인다 했더니, 이런 사연이 있었구나.
“우아.”
“그 정도는…….”
어머니가 민망한지 괜히 무어라 작게 읊조리셨지만, 김산호의 말은 이제 시작이었다.
“젊은 거장이라는 말까지 들은 사람이야. 이 당시 다큐면서 시청률 20%를 돌파했지 아마? 이 시청률은 그야말로 전무후무 깨지지 않는 기록이 되어 버렸지.”
“다시, 청춘?”
20%?
다큐멘터리가?
듣기만 해도 엄청나다는 걸 알았다.
“그래, ‘저물어야 시작되는’이라는 부제가 붙어있었어.”
“후우…….”
계속되는 설명에 어머니는 말리는 걸 포기하고 의자에 편히 기대앉으셨다.
그 모습을 보고 김산호가 웃으며 어깨를 으쓱거렸다.
“내가 그 다큐를 진짜 열심히 봤거든요, 선배님. 그런데 시우가 아직 모를 줄이야.”
“무슨 내용인데요?”
나는 마음 놓고 아예 김산호 쪽으로 돌아앉아 본격적으로 캐묻기 시작했다.
“아, 스토리는 아이를 다 재우고 저물어야 시작되는 온전한 부모의 하루를 다룬 다큐야. 자식의 청춘이 저물어야 다시 시작되는 부모의 청춘, 이라는 뜻의 이중적인 의미를 담은 부제인 거지.”
“우아.”
“은, 부모와 자식 모두에게 공감을 일으키는 다큐로 그때 엄청난 인기를 끌었어.”
그 정도였다니……!
한국에 돌아가면 당장 찾아봐야겠다.
면전에서 칭찬을 듣게 된 어머니가 꽤나 쑥스러웠는지, 말을 돌리기 위해 갑자기 끼어드셨다.
“그렇게 대단한 일도 아니었는데 무슨……. 시우야, 오늘 아침에 일어나기 힘들어 하던데, 지금은 괜찮니?”
“우웅! 괜차나.”
“흠, 오늘 저녁은 좀 든든한 걸 먹이고 싶은데. 호텔에 문의해봐야겠어.”
“그런데 이제는 안 찍어. 엄마?”
나는 애써 말을 돌리려는 어머니에게 직설적으로 물었다.
김산호가 저렇게 말할 정도면 정말 엄청난 업적을 세운 것이나 마찬가지인데 말이다.
그런데 나는 남의 입으로 듣기 전에는 어머니의 업적을 모르고 있었다니.
“갑자기 돌연 은퇴 선언을 하셨죠……? 그때 방송국이 난리 났던 걸로 기억하는데… 2001년이던가.”
“…….”
2001년.
내가 태어나기 딱 1년 전이었다.
계산을 마친 나는 조용히 입을 다물었다.
듣지 않아도 왜 어머니가 다큐 감독을 그만둔 건지 알아버렸기 때문이다.
어머니도 가타부타 말없이 내 옷매무새를 다시 다듬어주실 뿐이었다.
나를 낳느라 일을 관두신 거구나.
아이를 가지고 태어난 아이를 기르기 위해.
울컥 가슴이 죄어드는 걸 느끼며 나는 와락 어머니를 껴안았다.
“고마워요, 엄마.”
“응? 시우가 웬일이야. 먼저 안아주기도 하고.”
아무렇지 않은 척 대답하는 어머니의 음성에도 물기가 배어 있었다.
이럴 때는 미안하다는 말보다 고맙다는 말이 더 기쁘다는 걸 안다.
자식을 잘 키우는 것이, 어머니가 선택한 길일 테니까.
연민과 동정을 하는 대신 그 시간이 그만큼 값지다는 걸 말해주고 싶었다.
어머니의 용기 있는 선택이 옳았다고 말이다.
그 덕에 당신의 아들이 이렇게 새 삶을 시작하고, 행복하게 자랄 수 있었으니까.
다시 한번 어머니의 목을 꽉 끌어안으며 다짐했다.
반드시, 어머니의 지난 시간에 보답하리라.
“다녀왔습니다!”
그때 우리가 있던 호텔방 문이 열리고 남연수가 등장했다.
두 주연이 모두 모이자 김산호가 박수를 치며 분위기를 환기했다.
“자자, 그럼 과거 이야기는 여기서 그만하고. 오늘 촬영을 시작해볼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