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 returner who brought memories of a destroyed world RAW novel - Chapter 172
멸망한 세계의 기억을 담아온 회귀자 172화
“고생하셨습니다. 그럼 자치구로 돌아가겠습니다.”
악셀을 밟는 내 발길질은 가볍다.
[퀘스트 클리어!] [돌발 퀘스트 원죄의 페널티가 사라집니다.]이제 사망을 강요하는 메시지는 없다.
어떠한 생각과 어떠한 행위 중에서도, 내 발목을 붙잡는 스트레스는 없었다.
홀가분했다.
[보상 : – ]보상이 없다는 게 아쉽다만, 다행히 위안 삼을 만한 점은 있었다.
[반목자 세리자와 야마모토 : 2,000Coin] [보상을 수령하세요.] [반목자 타일러 핸더슨 : 3,000Coin] [보상을 수령하세요.]……
[반목자 올리비아 바이올렛 : 2,500Coin] [보상을 수령하세요.]제주도에 존재했던 반목자 좀비가 Coin으로 치환된 것은 작지 않은 호재였다.
하나씩 찾아갈 필요 없이, 100명가량의 반목자를 정리하는 계기가 됐을뿐더러-
‘엘리 세리아드의 세력이 얼마만큼 될지, 리철만이 어떠한 이능을 흡수했고 얼마만큼 성장했을지.’
예기치 못한 위험을 앞두고, [단죄]의 보상은 변수를 대처할 요령이 될 수 있을 터.
이른바, 든든한 보험이라.
후르릅.
다소 여유로워진 마음에 홀더에 놓인 커피를 한 모금 머금다가-
“외람된 말씀이지만, 박신혁 클랜장은 혹시 결혼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푸흡. 나는 커피를 뿜었다.
-박신혁 사령관님은 혹시 결혼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순간 기억 속 대사가 파문처럼 머릿속에 번진다.
묵혀둔 기억이 수면 위로 떠오른 건 너무나 쉬운 일이었다.
호칭을 제외하면, 목소리와 목소리에 담긴 감정과, 발화의 주체는 같기에.
난 옆자리를 본다.
“아, 서두 없이 물어도 된다 하셨어서…….”
엠버 세리아드.
각성자답게 노화 없이 16년 뒤에도 동일한 외모를 한 엠버.
미래에 그녀가 했던 대사가 왜 현실에서 들리는지 의문이었다.
“갑자기 그건 왜……?”
지긋이 그녀를 마주한다.
그녀에게선 감정적 동요가 엿보였다.
새하얀 귀에는 옅은 홍조가 맺혔으며, 날카로운 코끝이 잔잔하게 경련한다.
나는 놓치지 않았다.
안다. 그녀가 속마음을 끄집어낼 때에 늘 나타나는 징조였다.
“직접 봐주시겠습니까?”
그 이유가 도대체 뭐길래, 나는 그녀가 조심스레 내민 폰을 지체 없이 확인해 본다.
[발신인 : 엘리 세리아드] [엠버에게. 잘 지내는지 궁금하구나.]……
[박신혁과의 결혼 말이야. 가문에도 많이 도움이 될 것 같긴 한데, 네 생각은 어때?]스크롤을 내릴수록 나는 침착해진다.
[너도 생각이 있다면, 한번 셋이 보는 자리를 마련해 보는 건 어떨까? 나도 혁예 클랜장의 얼굴 한번 보고 싶구나.]두 번 볼 것도 없었다.
“놀랍군요…….”
엘리의 실체를 안다면 너무나 적나라한 수작이었고.
또 표면 아래로, 많은 것을 내포한 메시지였다.
[시기는 봄이 다 가시지 않은 오월 즈음이 좋을 것 같구나. 네가 좋다면 그때의 스케줄은 모두 비워두마.]내게 흉수를 드러내겠다는, 나만 아는 선전포고였고.
어느 정도의 준비가 되었다는 유의미한 신호였다.
“잠시만 생각 좀 하겠습니다.”
잠시 번졌던, 미래의 감정은 차갑게 가라앉는다.
나는 핸들을 놓았다. 앞쪽으로 마력이 방출되니 상공을 나아가던 TAV는 허공에 머문다.
“네. 충분히 이해합니다. 너무도 갑작스러운 제안인 것을 압니다.”
엠버의 말처럼 갑작스러웠다.
이것은 갑작스럽게 찾아온 기회였다.
‘괜찮긴 해.’
솔직히 나쁘진 않다. 나는 지금 내가 쓸 수 있는 패 하나를 뺏긴 상황이다.
-원죄 퀘스트 보상 목록(총 3회, 일부 보상 중복 가능)
1. 찢어진 몽마의 저주.
……
17. 순수의 마석
……
19. 19번째 기억
……
이가을이 보여준 보상 목록 중, 저 17번 보상이 내내 신경 쓰였다.
[순수의 마석]은 사람을 구별하지 않는다. 그저 [응집력]에 따라 큰 파편이 작은 파편을 따라갈 뿐.엘리가 저 보상을 택했다면, [순수의 마석]을 익히 알고 있다면, 충분히 교란 신호를 줄 수 있다.
-0.5초 내에.
그러니 한눈에 완벽히 구분할 수 있어야 한다.
[순수의 마석]으로 누가 누군지 가려내려 했다간, 엘리를 향해 내뻗은 검이 교란 신호에 의해 엠버에게 꽂힐 수 있으므로.‘그런데 엘리가 제 발로 찾아온다?’
그러면 위의 과정을 걱정할 필요가 없다.
예상한 시간에, 엘리가 ‘엠버’가 아닌, 양지의 ‘엘리’로서 온다면, 구분할 필요가 애초에 없을 것이다.
단순하다. 엠버는 내 옆에 있을 거고 엘리는 내 앞에 있을 테니까.
수틀리면 김우주를 통해 엠버를 게이트에 보내고, 보이는 세리아드를 족족 죽여도 되고.
‘스스로 한국에?’
그뿐이랴, 본인을 드러낸 채로 안방으로 찾아와 준다면 그보다 좋을 수야.
리철만이 남하할 것을 걱정하면서, 엘리를 찾아 영국 전역을 뒤지는 그 불확실하고도 고된 작업을 생략할 수 있다.
‘물론 뇌가 있다면, 본체가 아닌 복사체만 보내겠다만.’
그런데 그건 그것대로 괜찮지 않나.
정보전에서만큼은, 기억을 복사한 것이 도리어 약점으로 작용하게 마련이다.
모든 복제 인간이 핵심 정보를 가지고 있을 테니까. 누가 오든 아무에게나 핵심 정보를 뽑을 수 있다는 거다.
모든 정황이 기회가 왔음을 뜻한다.
우려할 만한 점은 오직 하나, 엠버만 여기에 안 엮이게-
“박신혁 클랜장님.”
그때 낮게 깔린 목소리가 내 상념을 마무리 지었다.
나는 듣고 있다는 표시로 엠버에게 시선을 두었다.
“영국 왕실이 평민을 왕실 구성원으로 받은 적이 있었습니다.”
엉뚱한 말이지만, 나는 이 서두가 어떠한 결론으로 이어질지는 알고 있다.
이미 한번 들었던 레퍼토리였으므로.
“그리고 그다음 평민을 왕실의 일원으로 받아들이는 데까진 350년의 간극이 있었습니다.”
싑게 말해, 평민이 왕족이 되는 일은 350년에 한 번 있는 일이라는 거다.
그녀는 귀족 사회의 폐쇄성을 들 때 이 예시를 들곤 한다.
엠버가 이어 말했다.
“후작 정도 되는 귀족 가문도 크게 다르진 않습니다. 우리네 결혼은 모두 어떠한 목적을 위해 이뤄집니다. 혈통을 유지하기 위하여, 혹은 가세를 크게 확장시키기 위하여.”
담담한 목소리였다.
“저는 어머니를 압니다. 어머니가 제게 따뜻한 말을 전할 땐 반드시 저의가 있다는 것을.”
나는 이것도 안다.
저 담담한 목소리를 내기까지, 엠버가 얼마나 많은 기대를 포기했는지를.
모정이란 것을 완전히 부정해서야 낼 수 있는 어조란 것을.
가슴 한편이 공연히 욱신거렸다.
“어머니의 성향과 혁예 클랜의 위상과, 박신혁 클랜장님의 영향력을 고려해 봤을 때, 아마 철저한 정략결혼을 제안한 것이겠습니다.”
그렇기에 고개를 끄덕이지 않았다.
그렇게 하지 않더라도 엘리가 어머니란 이름으로 엠버에게 새겨놓은 상처가 지독히 깊은 것을 안다.
“그런데, 정략결혼이란 게 그렇습니다.”
경청의 의미로 상체를 그녀에게 틀었다.
엠버의 두 눈을 마주한다.
“어차피 이익을 위해 만났을 뿐 사랑은 없습니다. 각자의 이득을 취하고선 돌아섭니다. 심지어 저는 제 아버지의 존재도 모릅니다.”
파아란 눈은 겨울의 바다 같았다. 차갑고 공허했으며 비련의 여주처럼 슬퍼 보였다.
그게 아닐지라도, 그녀의 사정을 아는 내겐 그렇게 보였다.
“사실상 같은 집에 사는 남이라 봐도 됩니다. 적당한 시점에선 따로 살아도 됩니다. 자식만 낳고선 대다수가 그리합니다.”
“…….”
“고작 쇼윈도 부부 따위가 아닙니다. 주변의 시선을 의식하지 않고서, 애인을 따로 두셔도 됩니다. 심지어 각자의 애인을 대동하고서, 부부가 같은 파티에 참석하는 경우도 잦습니다.”
엠버는 지금 내게 결혼을 말하면서, 대외적인 불륜도 말한다.
“어머니의 제안은 그런 것입니다. 혹시 그게 부담이 되셨다면…… 알아두셨으면 합니다.”
“…….”
“그리고 전 어머니를 싫어합니다.”
이어서, 나는 그걸 안다고 대답하지 않았다.
“그런데 세리아드 가문은 역사가 유구하며, 저는 그 대가 끊기는 것까지 바라진 않습니다. 현재 후계를 이을 자가 저 하나뿐이라는 책임감 정도는 갖고 있습니다.”
나는 당신이 아니더라도 복제 인간이 잔뜩 존재할 것이기에, 후계를 걱정할 필요가 없다고 말하지 않았다.
“좋든 싫든 제가 세리아드란 이름을 달고 살 거라면, 어차피 이러한 정략결혼이라도 해야 한다면.”
나는 엠버가 길게 늘어놓은-
“저는 그 상대가 박신혁 클랜장이면 나쁜 일은 아닌 것 같습니다.”
“…….”
“대답은 지금 주지 않으셔도 됩니다. 생각해 보시길.”
청혼에 대한 대답을 하지 않았다.
“…….”
한참을 고민한 후에야, 유보할 뿐.
“엘리 세리아드 후작을 만나보고 결정하겠습니다. 약속을 잡아주시죠.”
여전히 엠버의 눈을 마주하며 나는 그렇게 말했다.
* * *
클랜 사옥.
127층.
“고생하셨습니다!”
“응. 고생했어. 가서 쉬어.”
핏!
게이트 클리어 후, 오늘도 김우주를 통해 부랴부랴 집으로 온 강예빈은 예상치 못한 방문자를 확인한다.
“엠버 세리아드 씨?”
방문 앞엔, 웬 금발의 웨이브를 풍성하게 늘어놓은, 할리우드 매거진에서나 볼 만한 근사한 미녀가 서 있다.
“어쩐 일로?”
그녀가 꾸벅 고개를 숙였다.
“긴히 드리고 싶은 말씀이 있습니다.”
“아. 네. 일단 들어오세요.”
미소 지으며 집 안으로 들이지만, 사실 그리 반가운 마음은 아니었다.
공기는 어색하다.
사실 엠버와 같은 층에 살지만 딱히 교류는 없다. 다른 이들과 달리, 미래에서의 교류도 없었으니, 아직까지 데면데면했다.
‘갑자기 왜 온 거지……?’
그러니 갑자기 찾아온 이유를 짐작하는 건 불가능했다.
강예빈은 눈을 게슴츠레하게 떴다.
혹시 엘리? 곤란하다. 엘리와 앰버를 구별할 재간은 없었다.
모종의 마력 작용이 있다면 바로 시간을 멈춰 버릴 생각에, 혹시나 싶어 몰래 마력 회로까지 운용하며-
“잘 끝났어요?”
일부러 낸, 앞뒤를 다 잘라먹은 물음.
“아. 네. 박신혁 클랜장은 세 번연속으로 ‘차져의 영혼석’을 택했습니다.”
비로소 강예빈은 어깨의 힘을 풀었다. 엘리가 알 수 없는 정보이니, 안심이 되는 대답이었다.
엠버에게 자리를 권했다.
“다행이네요. 앉으세요.”
등을 돌려 주방으로 향한다. 찬장을 열어보니, 다행히 대접엔 부족함이 없을 듯싶다.
종종 방문하는 박신혁을 위해 마련해 둔 커피가 남아 있었으니.
“블루마운틴 콜드브루 맞죠?”
엠버가 박신혁과 같은 걸 좋아한다 했었지?
엠버가 칠악일 경우를 대조하고자 나눴던 대화 중, 엠버의 취향에 관해 박신혁이 그랬던 거 같은데.
“역시 예언자님을 찾아오길 잘했습니다.”
엠버가 활짝 웃는다.
방 안이 환해지는 미소였다.
“…….”
강예빈에겐 다소 얼떨떨한 감이 있었다. 좋아하는 커피를 내준 것치고는 과한 반응이지 않나.
“……그나저나 잘 찾아왔다라 하면?”
“미래를 여쭤보러 왔습니다.”
더구나 미래라니?
“네. 정확히는 박신혁 클랜장과 저에 대한 미래를 알고 싶습니다.”
“게이트에서 무슨 일이 있었나 봐요?”
“일이라고 하면 일이긴 합니다만…….”
길게 이어진 말을 하나씩 받아들여 본다.
박신혁이 엠버에 관한 미래 정보 은폐했다고 한다. 박신혁과의 미래 인연에 대해 고심하던 중, 어머니에게 결혼 제안이 왔다고 한다. 정략결혼에 관해 박신혁은 엘리를 직접 보고 결정하겠다고 했다.
툭툭.
강예빈은 테이블을 가볍게 두드렸다.
‘박신혁이 이 시국에 결혼을 할 리는 없어.’
몬스터 남하와 칠악 두 명의 출현을 앞두고 그가 그럴 일은 결단코 없다.
그리고 그와 대부분의 상황을 공유하는바, 박신혁의 의도는 짐작하기 어렵지 않았다.
‘엘리 세리아드를 위한 함정이야.’
상견례의 목적은 필히 엘리 세리아드.
예정된 시간과 예정된 장소에서 이뤄질 칠악과의 조우.
박신혁은 그걸 바란 거다.
그리 생각을 정리한 강예빈은 씨익 웃었다.
“네. 잘 찾아오신 거 맞습니다.”
그러곤 혁예 부클랜장으로서, 박신혁이 차마 내릴 수 없는 명령을 내렸다.
“엠버 씨. 서두 없이, 확인부터 하겠습니다.”
“네.”
엘리는 엠버와 똑 닮았다.
반대로 엠버도 엘리와 똑 닮았다.
“어머니와 오랜 시간 함께했을 테니-”
엠버가 복제 인간이라면, 위장술은 엘리만 할 수 있는 게 아니다.
그래서 말한다.
“혹시 어머니, 엘리 세리아드를 흉내 낼 수 있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