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 returner who brought memories of a destroyed world RAW novel - Chapter 22
멸망한 세계의 기억을 담아온 회귀자 22화
한남동 사저(私宅).
한쪽 벽을 모조리 차지한 스크린에선 구슬이 격렬히 돌아가고 있다.
-자, 첫 번째 행운의 번호. 과연 몇 번이 나올런지요. 6번! 첫 번째 행운의 숫자는 6번입니다. 이어서 두 번째 번호가 나옵니다!
이가을은 덤덤히 손에 쥐어진 용지의 번호를 보았다.
3, 6, 9, 15, 18, 21, 36.
[세 번째 숫자! 9번! 9번입니다.]……
[1,027회 로또 당첨 번호입니다. 3, 6, 9, 15, 18, 21 그리고 36.]TV 속 사회자가 떠드는 번호와 동일한 숫자들.
“…….”
그러나 이가을에게 당첨의 기쁨은 없었다. 그녀에겐 고작 푼돈에 불과했으니. 다만 이 번호를 준 남자에 대한 기억만은 선명하게 떠오른다.
-방송에 대한 진위를 확인하러 오셨다면, 그 종이가 어느 정도의 답을 대신할 겁니다.
이제 그의 말대로 되었다. 그와 강예빈의 말이 예언이었음은 이제 증명이 되었다.
“미래를 알면 뭐 해.”
근데 어째 이가을의 심기는 여전히 불편하기만 하다.
본래에 방송의 진위 여부를 확인하려고 그들을 찾아갔던바, 지금에선 그게 증명되었는데도 말이다.
이가을은 TV의 채널을 돌렸다.
[브레이크 사태를 유일하게 경고한 예언자. 강예빈. 그녀의 말대로 미공략 게이트에서 브레이크가 터졌는데, 과연 단발성으로 그칠지 의문입니다.] [우리는 무엇을 준비해야 하나. 강예빈의 다음 영상의 공개 예정일은?] [현재 강예빈을 봤다는 사람의 제보를 받아-]뉴스 채널, 공중파, 케이블 할 것 없이 죄다 강예빈 얘기였다.
즉, 자신뿐만 아니라 모두가 강예빈의 말을 믿고 강예빈의 다음 방송만 기다리고 있는 정황.
그녀는 그게 맘에 들지 않았다.
미래 정보 자체가 돈인데 감히. 자신만 알아야 할 것들이 저리 많은 사람들에게 공유된다는 게 가히 역겹다.
“납치라도 해?”
강예빈을 어디다 묶어두고 독점이라도 해볼까. 나쁘진 않을 텐데. 미래에 대한 정보를 돈으로 환산할 수 있는 방법이 고작 로또 번호만 있는 건 아닐 테니까.
[강예빈이 작일 강혁이랑 같이 있었다는 이곳 C-129 게이트 앞에는 현재는 폴리스 라인만-]“수호길드가 데려갔다 했었나…….”
꽤 진지하게 고민하던 중, 똑똑, 누군가 문을 두드렸다.
“들어가도 되겠습니까?”
“들어와.”
문을 열고 들어온 건 고용한 비서였다.
그가 평소처럼 정중히 고개를 숙이고선 먼저 검토를 끝낸 환자의 차트를 건네온다.
“금일 치료 희망 명단입니다.”
이가을은 환자를 확인했다.
[이름 : 최태수.환부 : 오른팔 절단.
치료 강도 : 오른팔 재생.
치료비 : 서초구 대로변 사옥용 빌딩 소유권 이전(시가:260억).]
“이번에도 절단상이네.”
점점 헌터들이 많아지는 요즘, 흔히 볼 수 있는 환자였다.
구태여 다른 치유 각성자나 병원이 아닌 이곳을 찾아온 것을 보면 아마 이자도 게이트에 팔을 두고 나와 근본적인 재생이 필요한 경우겠고.
자신만이 할 수 있는 치료임에 치료비는 부르는 게 값인 케이스였다.
“팔은? 잃어버렸대?”
“네. 팔의 완전 재생을 요구했습니다.”
“그래?”
치료해 줄까, 말까. 팔을 다시 자라나게 하는 데에 빌딩 하나.
그래도 이 정도면 그녀가 정한 커트라인을 간당간당하게 넘기긴 한다.
“삼십 분 뒤에 오라고 해. 또 없어? 오늘은 이게 전부야?”
“아닙니다. 치료비를 제시하지 않아 따로 올리지 않았지만, 혹시 몰라서-”
“줘봐.”
비서가 내미는 또 하나의 차트를 받아본다.
[이름 : 박신혁.환부 : 내상.
치료 강도 : 내상 완치.
치료비 : 미정(未定).]
이가을은 미간을 한껏 찌푸렸다.
치료비. 가장 중요한 항목이 아까와 달리 휑했다.
“……돌았나?”
평소라면 거들떠보지도 않았을 거다.
“그래서 일축하려 했습니다만…….”
그러나 왜 비서가 이 환자를 사전에 거르지 않고 차트까지 준비했는지는 알 것 같다.
[현재 D급 헌터 박신혁에 대한 관심도 덩달아 높아지고 있는데요.]환자가 저기 TV에서 떠들고 있는 박신혁이니.
이전에 그가 했던 말.
-그게 증명된 후에 제가 따로 당신을 찾아가죠.
-당신이 지금 원하는 게 무엇인지 알고 있을뿐더러 저 역시 당신과 할 얘기가 있으니까.
“따로 찾아오겠다더니. 고작 이런 방식이야?”
저 말만 아니었다면, 그가 강예빈의 클랜장만 아니었다면, 고민도 안 했겠지만.
“이번에도 그 말을 증명해야 할 거야.”
“네?”
“아니야. 그 인간도 데려와. 최태수는 한 시간 뒤에 오라고 하고, 박신혁부터 오라고 해.”
그 박신혁이니까 만나볼 필요가 있겠다. 단, 이번에도 고작 로또 번호면 정말 가만히 있지 않을 거다.
이가을은 저번부터 그의 의도대로만 흘러가는 일련의 흐름이, 자신이 그에겐 자꾸 예외를 두는 것이, 몹시도 불쾌했다.
“네. 알겠습니다.”
비서의 다음 보고가 이어졌다.
머릿속에 차 있는 박신혁에 관한 생각을 잠시 지웠다.
“그리고 ALE 총수에게 받은 주식을 매각해 총-”
“결론만.”
“미국에서 A급 마석 물량이 다소 풀려, 주식 매각금으로 시중에 나와 있는 것들은 모두 구매했습니다.”
“그래?”
마석 구매. 이가을이 바라던 소식이었다. 동시에 마석 구매를 위해 그녀가 돈에 미쳤다는 평을 받는 이유였고.
“그래서 여태까지 모은 마석이랑 합치면 몇 개나 돼?”
“총 187개입니다. 아쉽게도 풀린 마석이 얼마 되지 않았습니다.”
“쯧. 알았어. 나가봐.”
비서가 나가자 이가을은 의자를 등 뒤로 한껏 젖혀 몸을 누인다.
그 상태로 책상을 더듬어 시가 한 대를 찾아 입에 물은 다음엔.
스으으으읍.
독하디독한 시가의 연기를 폐에 가득 머금고서 시야의 한구석을 응시했다.
“퀘스트.”
[클리어 조건] : A급 마석 200개, 페리튼의 심장. [제한 시간] : 1년. [난이도] : –이가을은 웬만한 건 믿고 맡기는 저 비서에게도 말하지 않은 비밀이 있다.
게이트 안에서만 볼 수 있는 이 퀘스트란 것이 본인에겐 현실에까지 연장된다는 것.
“17번이나 했으면 이제 좀 끝났으면 하는데.”
그 시작은 5년 전이었다.
정확힌, 게이트가 처음 생겨난 날부터.
-Ich muss mich verlaufen haben? Hilf mir?(길을 잃었나 봐? 도와줘?)
한국에 살던 평범한 여고생이었던 자신이 9년간의 기억을 잃은 채로 27살이 되어 스위스에서 눈을 떴을 때부터.
이 비범한 퀘스트는 그때부터 시작되었고, 16번이나 클리어한 지금까지 계속 반복되었다.
[보상] : 17번째 기억. 스킬 [고속 치유].보상은 잊혔던 기억의 일부. 또는 본인을 성녀로 불리게끔 만든 여러 스킬들과 특별한 속성들.
그러나 이 퀘스트가 비단 좋은 것만은 아니었다.
[실패 시] : 사망. 게이트 침식 가속.게이트 침식 가속이란 것은 뭔지 몰라도, 저 사망이란 단어의 의미는 확실했다.
그래서 그랬다. 죽기 싫어서, 돈에 집착했다.
[클리어 조건] : A급 마석 200개, 페리튼의 심장.예를 들어 저 많은 A급 마석을 구하는 것은, 거의 살다시피 게이트에 죽치고 있어도 안 되는, 물리적으로 아예 불가능한 일이니까.
미친 듯이 벌어서 [조건]을 구매하는 것이 아니면 죽어야 했다.
“A급 마석은 어떻게 될 것 같은데…….”
더구나 최악인 건 구매로도 해결이 안 될 때가 있다는 거다. 아예 팔지 않는 물건이 저 [조건]으로 나오는 경우가 그랬다.
“페리튼의 심장. 저게 문제야.”
이번 [조건]인 [페리튼의 심장]이 이에 해당한다. 온라인을 뒤져봐도, 오프라인을 뒤져봐도 저 물건의 행방은 도통 알 수가 없었으니.
[핏빛 날개, 아리수의 씨앗…… 페리튼의 심장]오롯이 박신혁이 제게 준 쪽지의 중간에서 그 명칭만 볼 수 있을 뿐이었다.
“빌어먹을.”
후우우우우우.
독한 시가를 모조리 속 안에서 태운 뒤, 꽁초만 대충 바닥 어딘가에 던졌을 때였다.
똑똑.
“환자가 도착했답니다. 들여보낼까요?”
그 인간이 왔다. 박신혁. 미래 정보를 내게 넘겨서, 저 나머지 A급 마석을 확보할 자금을 마련해 줄, 어쩌면 쪽지에 적힌 물건에 관한 정보를 알고 있을, 예언가의 책임자.
“들어오라 해.”
곧 문이 열리고 예의 그 박신혁이 들어온다.
이가을은 미간을 좁히며 그의 등장을 바라본다.
저벅. 저벅.
기세는 여전히 전무하지만, 그의 표정과 걸음걸이와 풍기는 분위기가 여일했다.
여유로웠다. 누구나 주눅 드는 자신의 앞에서 한 치의 굽힘도 없다.
저벅. 저벅.
눈빛은 여전히 흔들림 없이 곧았고, 어깨는 한 치의 굽힘도 없이 넓게 펼쳐져 있다.
때문에 그의 안색이 창백하다는 사실은 안 것은 그가 두 걸음 앞까지 다가왔을 때였다.
이가을은 퉁명스럽게 비꼬았다.
“그땐 치료를 안 받겠다고 한사코 거절하더니 이번엔 어째 제 발로 찾아왔네?”
“겸사겸사 와야 해서. 치료도 받을 겸. 부탁도 할 겸. 제안도 할 겸.”
“치료.”
단순히 만날 구실로 치료가 필요하다는 줄 알았는데, 부탁과 제안은 뭔지 모르겠으나, 저 창백한 얼굴을 보아하니 정말로 치료가 필요해 보였다.
“내상이 진짠가 봐?”
하여 입꼬리가 절로 올라갔다.
나쁠 건 없었다. 그렇다면 주도권은 당연히 환자가 아닌 치료자가 쥐게 마련이니.
“남들은 치료 한번 받겠다고 재산을 거덜 내서 오는데, 넌 뭐라고 내게 목적을 세 개씩이나 달고 와? 그럴 깜냥이 돼?”
“원래는 치료까지 받을 생각은 없었는데, 어쩌다 보니. 뭐 안 될 건 없잖습니까?”
“안 될 건 없지. 근데 치료비를 감당할 순 있고?”
이가을은 받을 치료비를 계산해 본다.
말 한마디를 안 지는 저 괘씸한 놈에겐 로또 같은 것과는 비교 불가능한 그 이상의 무언가를 받아야겠지.
필히 오르게 될 주식과 부동산이라든가. 타 직업군과는 비교조차 불가능한 소득을 얻는 헌터들이 무조건 사려고 들 게이트에 관한 정보라든가.
그럴 생각으로 넌지시 떠본 건데.
“그럼 들어보고 결정할게. 애초에 미정이라고 쓴 게 너니까.”
그런데, 박신혁은 여유로운 웃음으로 답한다.
“외상 됩니까?”
“하?”
외상? 어이가 없어서 헛웃음만이 나왔다.
“이거 완전 미친놈이네.”
“빈말은 아닙니다. 저번엔 아니었지만, 이제는 갚을 능력이 충분해서.”
“근데 어쩌라고? 여기가 무슨 구멍가게인 줄 알아!”
이가을의 격한 노성이 넓은 방 안을 쩌렁쩌렁하게 울리는, 그때였다.
촤르르르르르르르-
갑작스레 허공에서 종이 무더기가 폭포수처럼 쏟아져 내렸다.
눈앞에서 어지러이 흩날리는 종이들.
이하늘은 우연히 눈을 스치고 지나가는 종이에 써진 이름을 보았다.
[이름 : 박신혁.환부 : 내상.
치료 강도 : 내상 완치.
치료비 : 미정(未定).]
방금 보았던 저 인간의 차트.
책상 서랍에 고이 넣어두었던.
뒤를 돌아보니 환자 차트를 보관 중이던 책상은 사라져 있다.
“인벤토리?”
대답은 없었다. 탕. 대신 허공에서 원목 책상 하나가 뚝 떨어져 내릴 뿐.
당연하게도, 자신이 늘 써왔던 그 원목 책상이었다.
“뭐 설명은 필요 없을 거라 믿겠습니다.”
“…….”
아예 처음 보는 이능의 작용이다. 이게 그가 미래를 알고서 이끌어낸 결과라면…… 솔직히 놀랍다.
“어째서?”
단순히 허공에서 물건을 꺼냈다는 것에서 그치는 얘기가 아니었다.
주안점은 저 인간의 [인벤토리]에 아티팩트가 아닌 것도 들어간다는 것이다. 종이나 책상 같은.
이는 게이트 안에 있는 것들도 현실로 가지고 나올 수 있다는 일종의 방증이었다.
“…….”
돈이 될 것이다.
생각해 보라. 몬스터의 사체든. 지구엔 없지만 게이트 안엔 존재하는 금속이든.
사막과 숲의 공존, 하늘을 향해 흐르는 바다. 그런 비현실적인 환경을 이루는 구성물들이 현실에서 돈이 될 것은 너무도 자명했다.
연구자, 과학자, 기업가, 호사가, 정부 등등 사줄 사람은 아주 널렸기에.
외상 얘기는 괘씸하지만, 상환 능력은 확실했다.
“마침 이게 여기 있었네요.”
잠시간 멍해 있던 중, 박신혁이 바닥에 떨어진 종이 하나를 줍더니 말을 이었다.
“이왕 이렇게 된 거 ‘부탁’도 같이 말하죠.”
그가 보란 듯 종이를 내밀었다.
[이름 : 최태수.환부 : 오른팔 절단.
치료 강도 : 오른팔 재생.
치료비 : 서초구 대로변 사옥용 빌딩 소유권 이전(시가:260억).]
“마음 같아선 이가을 헌터에게 최태수의 처리를 부탁드릴까 싶지만, 안타깝게도 불가능한 일임을 압니다. 그는 텔레포터 각성자를 늘 곁에 두고 다니거든요.”
“뭐?”
“물론 치료를 해서도 안 되고요. 그래서 제 부탁은 이러합니다. 당신이 치료할 대상을 저도 알았으면 하고, 또 제가 하지 말라면 그 환자를 치료하지 않았으면 합니다.”
“……. 뭐?”
“당신이 엉뚱한 사람을 고치면 제가 곤란해서.”
이가을의 얼굴이 잔뜩 이지러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