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 returner who brought memories of a destroyed world RAW novel - Chapter 39
멸망한 세계의 기억을 담아온 회귀자 39화
아직은 겨울이다.
사람들은 대개 패딩을 입고 있다.
그러나 우린 아니다.
겨울의 한강을 따라 걷는 우리의 옷차림은, 특히나 하얀 팔다리가 훤히 드러난 원피스를 입고 있는 이가을은 추운 겨울날 눈에 띌 수밖에 없었다.
“저기 이가을 아니야?”
사람들은 우리에게 눈길을 준 이후부터 각자의 길을 가지 않았다. 우리의 얼굴을 알아본 이 중 열에 아홉은 그대로 우리를 따라 걷는다.
점점 우리 주변에 사람들이 쌓이기 시작했다.
“사람들이 좀 많아지네.”
난 다시 마력의 장막을 쳤다. 그 밖에서 오는 소음은 전부 뭉개진다. 우리가 이곳에서 하는 얘기도 밖에선 그렇게 들릴 터.
“레스토랑에서도 겪으셨겠지만, 이러면 밖에서 우리가 하는 말을 알아들을 순 없을 겁니다. 편하게 말해도 돼요.”
“그래? 뭐 당신이 그렇다면야 그렇겠지.”
우리는 이전처럼 주변을 의식하지 않고 서로에게 집중할 수 있었다.
“내가 정부에 압력 좀 넣어볼까? 대공 미사일 몇 개쯤 그 부유도시에 달면 좋을 것 같은데?”
“나쁘지 않네요. 그럼 부탁드리겠습니다.”
“뭘 부탁까지야. 사실 우리 클랜 부지의 가치는 시간이 가면 갈수록 올라갈 거 아니야? 거기 로열층을 반이나 쓰는데 이 정도는 당연하지.”
미래에 대한 기대감에, 대화는 한순간도 끊기지 않았고.
“부유석 위에서 살려면 교통수단 좀 바꿔야 하지 않을까? 헬기 좀 추가로 구매하면 어떨까 싶은데, 사는 김에 당신 것도 사 줄까?”
“소개만 해줘도 충분합니다. 저도 이제 돈이 부족한 사람은 아니라서.”
“하긴. 이번에 사체 판 대금도 꽤 나왔을 거 아냐. 얼마 정도야?”
“계약 사항에 비밀 유지도 있어 정확히 말씀드릴 수는 없지만, 백억은 가뿐히 넘습니다.”
그녀가 새침히 눈을 흘겼다.
“참나~ 누군 마석이나 팔아서 겨우 몇억 벌었는데 너무 불공평한 거 아니야?”
“치유 하나로 걸어다니는 기업이라 평가받는 이가 할 말은 아닌 것 같습니다만?”
“…….”
우리는 동시에 웃음을 터뜨렸다. 어느덧 가벼운 농담 섞인 대화가 자연스러워졌다.
“신기하단 말이야.”
“뭐가요?”
그녀가 고갯짓으로 주변을 가리켰다. 그곳엔 사람들이 북적거렸다.
“난 이런 거 익숙해지는 데 꽤 걸렸거든. 근데 당신은 아닐 거 아니야? 얼마 전까지 평범한 헌터였잖아.”
그녀의 고갯짓을 따라, 난 주변을 휘둘러 보았다.
사람들이 몰리기 시작한 지 얼마 되지도 않았다. 그러나 벌써, 불과 몇 미터만 떨어져도 공기는 사뭇 달랐다.
웅웅웅.
조명이 없는 것만 빼면 이 주변은 영화 촬영장을 방불케 했다. 마력의 장막으로 인해 저들이 뭐라는지 들리진 않았지만, 저 많은 카메라가 전부 정확히 우리를 향해 있다는 건 확연했다.
“혹시라도 불편하면 말해. 당신 불편하게 하면서까지 억지로 걸을 필요는 없으니까.”
난 그런 배경을 깔고서 이가을의 하는 말이, 그 배려가 고마웠다.
“배려해 주지 않아도 괜찮습니다.”
그래서 나도 진심을 담아 말했다.
난 정말 이 상황이 나쁘지 않았다.
“저한테 이 상황이 나쁜 게 아니라서.”
난 클랜의 홍보를 위해 걷는 것도 아니고 이가을을 위해 걷는 것도 아니다.
“저도 이렇게 걷는 게 좋습니다.”
다시 말하지만 난 지금 세상 이목을 끌어야 하는 일이 필요했다.
애당초 레스토랑에서부터 우리를 찍는 이들이 있다는 것도 알고 있었지만, 제지하지 않았던 것도 세상 모든 이들이 우릴 보길 바라서였다.
이 순간만큼은 관종이라 해도 좋다.
“저쪽으로 걸을까요?”
“난 어디로 걷든 상관없어.”
그래서 CCTV가 많은 곳을 골라 걷는 것도.
촬영 중인 사람들이 돌아갈까 봐, 어두운 곳도 피하는 것도.
앞에 좁은 길이 있다면, 사람들이 흩어질까 봐 크게 돌아가는 것도.
“해가 저뭅니다. 슬슬 돌아갈까요? 저번에 헬기로 데려다주셨으니, 이번엔 제가 데려다 드리죠.”
이가을의 저택으로 향하는 걸음은 더디게 한 것도.
저 많은 사람들이 우리를 놓치지 않게 걸음의 속도를 조절한 것도.
“다음에도 이렇게 걸을까? 아니면 조용한 곳도 좋고.”
“전 지금도 좋습니다.”
전부 같은 이유였다. 사람들이 나와 이가을을 계속 보길 바라는 마음에.
“재밌었어.”
집 앞 대문에서 그녀가 하는 말.
으레 연인이 헤어질 때 하는 말을 연상케 하지만, 그래서 난 그녀와 헤어질 생각이 없었다.
“차 한잔 마실 수 있겠습니까?”
많은 이들이 보는 앞에서 그녀의 집에 들어가고 싶었다.
“차?”
“네. 이가을 클랜원 집에서 차 한잔 마실 수 있을까 싶어서요.”
“어어? 아무리 그래도 너무 빠른데? 아, 아니, 너무 시간이 너무 늦은데?”
괜한 오해가 생기기 전에 난 바로 이유를 대었다.
“다름이 아니라-”
웅웅웅- 여전히 마력의 장막이 소리를 차단하고 있었다.
“실제로 차 마시고 갈 생각은 아닙니다.”
“어, 어? 그게 무슨 말이야? 차를 안 마실 건데 차를 마시고 가겠다니?”
내가 지금 그녀에게 부탁하려는 건 일종의 알리바이다.
“제가 알리바이가 필요해서요. 그걸 도와주셨으면 합니다.”
“아…….”
말마따나 알리바이를 만들기엔 지금이 적기였다.
내가 이곳에 들어가는 순간, 그 어떤 이도 감히 이가을의 저택에 발을 들일 수 없을 테니까.
조금 떨어진 곳에서 즐비하게 늘어진 사람들은 더 이상 내 종적을 쫓을 수 없을 테니까.
내가 몰래 여기서 벗어날 수 있다면, 모두가 박신혁은 이가을의 저택 안에 있는 줄 알 테니까.
난 지금 그런 알리바이가 필요했다.
“웬 알리바이?”
“반드시 해야 하는, 떳떳지 못한 일이 있어서요.”
[박주현, 서울시 용산구 ㅇㅇㅇ로]살생부를 처리함에 있어서, 클랜의 명성에 흠이 잡히면 안 되므로.
내가 리크루팅에 지원한 이들을 죽이고 다녀도, 세상 사람들이 그 범인이 나인 줄 모르는 게 좋을 듯하여.
“그래서 그런데. 들어가도 괜찮겠습니까?”
요컨대 저 일을 처리하기엔, 우릴 둘러싼 사람들이 이렇게 지천인 지금이 더할 나위 없이 좋아 보였다.
* * *
탁.
난 밤하늘을 거닌다.
부유섬 게이트에서처럼, 차폐막을 딛고서 허공을 달린다.
탁.
대략 지면에서 1㎞ 이상 떨어진 상공이니 누군가 보는 일은 없을 거다.
이가을이 준비해 준 검은 정장과 검은 마스크까지 쓰고 있는 이유와 더불어, 이 길을 택한 이유 역시 누군가에게 노출이 되지 않기 위함이었다.
폰에서 나온 네비게이션의 알림음에 따라 허공의 한점 위에 멈춰 섰다.
[현재 위치 : 서울시 용산구 ㅇㅇㅇ로 ㅇㅇㅇ-ㅇㅇㅇㅇ]현 위치를 뜻하는 빨간색 점이 주소와 겹치는 것을 확인한 뒤, 나는 서서히 고도를 낮췄다.
탁. 탁. 탁. 탁.
회전 계단을 내려가듯, 발아래 차폐막을 꺼내는 즉시 밟고 내려가, 어느 오피스텔의 옥상에 착지했다.
“1201호.”
옥상 문을 열기보다는, 그냥 문 자체를 인벤토리에 넣어버렸다. 혹시 몰라서, CCTV는 보이는 족족 인벤토리에 넣음으로써 미연의 상황마저 방지한다.
중립물 수납은 게이트 밖에서도 효용이 좋았다. 아니, 편의성 방면에선 오히려 게이트 안에서보다 밖에서가 더 좋을지도.
“여긴가?”
약탈자, 박주현이 살고 있다고 주장한 주소는 옥상과 멀지 않았다.
3층을 내려가 1201호를 확인해 보니 집 앞에 쌓인 택배가 눈에 띄었다. 박주현이 진짜 이곳에 사는지 모르는 상황에서 택배는 분명 열어볼 만한 가치가 있다.
난 단검을 꺼내어 택배를 갈라보았다.
“?”
배달 온 물품들은 물감, 캔버스, 판넬, 유화, 수채화 용품 등등.
“박주현이 미술을?”
헌터가 다룰 만한 물건이 아니었다. 성도착증과 망상증 환자인 박주현이 주문할 법한 물건이라 하기에도 퍽 고상했다.
물론 그라고 해서 미술을 하지 말란 법은 없지만서도…….
난 마지막 택배까지 열어봤다. 생리대와 화장품과 속옷을 비롯한 여러 여성용품들이 가득 담겨 있었다.
이것 역시 남자가 사용할 만한 물건은 아니리라.
“…….”
모르겠다.
“설마 이렇게까지…….”
아무리 그가 성도착증이 있다고 해도 이것들까지 주문한다는 건 좀 과한 추측이 아닐까.
그냥 그가 주소를 속인 거고, 실제론 이곳에 여자가 살고 있다고 생각하는 게 합리적이지 않나.
“아닌가……?
다만 혹시 몰라서 수취인의 이름을 확인한다.
고은빈.
일단은 모르는 이름이었다.
* * *
미대생, 고은빈은 근래에 이상한 일을 자주 겪는다.
“내가 이걸 여기 뒀던가?”
칫솔은 항상 규조토 칫솔꽂이에 두는 게 자취 5년 차의 습관인데, 어째 오늘도 칫솔은 거울 밑에 그냥 널브러져 있다.
탁.
처음엔 술을 마시고 아무 데나 내팽개쳐 놓은 줄 알았다.
그런데 문제는 칫솔뿐만이 아니라는 거다.
요새 자고 일어나면 매번 미묘하게 사물의 배치가 달라져 있다.
“책을…… 이렇게 꽂아놨던가?”
예를 들면 책꽂이에 높낮이를 맞춰놨던 책의 배열이 뒤죽박죽이 되어 있다든가.
차곡차곡 개어놨던 속옷이 없어지거나 흐트러져 있다든가.
소파의 각도가 미묘하게 틀어져 있다든가.
“착각이겠지…….”
그러나 이렇게밖에 해석할 수 없는 이유는 일어나 보면 분명 문은 항상 굳게 잠겨 있었고, 막상 집을 둘러봐도 긴가민가한 미묘한 차이 외에는 아무런 이상도 없다는 거다.
무슨 귀신이라도 왔다 간 것처럼.
아마 그래서일 거다.
“선배~ 오늘 선배 집에서 자고 가면 안 돼요~?”
지금 눈앞에 있는 새파랗게 어린 남자는 이번에 입학한 새내기.
“차 아직 안 끊겼잖아.”
“아. 그렇지. 근데 저 지금 너무 힘들어서 가다가 토할 것 같은데에에에~”
본인 주량도 모르고 술을 잔뜩 들이붓다가 저렇게 취할 만큼 어린놈이 여자 혼자 사는 곳에 재워달라는 무례한 부탁을 하는데-
“……알았어.”
그걸 결국 승낙한 이유는 그래서일 거다.
요새 집이 뒤숭숭하니 덩치라도 큰 남자애 하나 있으면 조금 나을까 봐.
“술만 깨고 새벽에 나가. 알았어?”
“네~ 선배님!”
괜히 이성인 후배를 집에 들였다가 학과에서 무슨 소문이라도 날까 걱정도 됐지만, 그래도 소문보다는 안전이 우선이었다.
“어! 강아지다! 월월!”
“안 닥치면 두고 간다.”
“월월!”
물론 진짜 곤란할 정도로 취해 보인다는 것도 한몫했고.
“야씨. 똑바로 안 걸어?”
“월!”
비틀거리는 놈을 부축해 거주하는 오피스텔에 다다랐다.
띠띠띠띠, 띠리링.
“아씨. 개무겁네.”
문을 열고 녀석을 구석 어딘가에 널어놓고서, 바로 이른 취침을 준비한다.
“그냥 옷 다 입고 자.”
녀석을 위해 준비한 이불은 당연히 없었다.
대충 여름에 쓰던 얇은 이불만 바닥에 깔아주고, 그냥 보일러만 적당히 올려놨다. 어차피 취했는데 추운지도 모르겠지. 입만 안 돌아가면 된다.
촤아아악. 대충 세안만 하고 나왔다.
바닥에 널브러진 녀석을 타 넘고 침대 위에 누웠다.
“선배~ 자요?”
“닥쳐라. 자라.”
“선배~ 뭔 재밌는 얘기 없-”
부스럭. 침대 밑에 누워 있던 후배가 몸을 내 쪽으로 돌리며 듣기 싫게 말을 늘이던 때였다.
그때였다.
“서, 서, 서, 선배. 선배!”
술에 취한 놈이 벌떡 일어나 호들갑을 떤다.
“저 지금, 아, 아이스크림이 먹고 싶어요.”
“아, 무슨 이 시간에 아이스크림이야. 그냥 자.”
녀석이 덥석 내 팔을 붙잡았다.
“저, 저, 저, 저 진짜로 아이스크림 먹고 싶어요. 다, 다, 다 당장.”
팔로 전해지는 녀석의 손이, 내뱉은 말처럼 사시나무처럼 떨려온다.
얼굴은 또한 창백하다. 잔뜩 겁에 질려 보였다.
“아. 진짜. 적당히 마셔야지, 진짜 이 새끼 술버릇 고약하네.”
취해서 그런가 했다.
그런데-
“같이 가요. 지금 바로.”
녀석의 동공만은 의외로 또렷하다.
적어도 눈빛만은 진심으로 보였다.
“아씨. 진짜 귀찮게.”
“제발. 제발요.”
단순한 취기나 장난은 아닌 거 같아, 일단은 제안에 응했다.
“하…… 그래. 가자, 가. 아이스크림 너가 사라.”
“네. 얼른 나와요 빨리.”
“…….”
어째 갑작스레 술이 깬 것 같은 후배가 이상해서 잠시 노려보다가.
다시 패딩을 입고 후배를 따라 방문 밖을 나가려는데-
“어디 가?”
처음 듣는 목소리가 뒷덜미를 붙잡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