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 returner who brought memories of a destroyed world RAW novel - Chapter 83
멸망한 세계의 기억을 담아온 회귀자 83화
퍽.
난 소녀의 뒤통수를 내려쳤다. 죽이진 않았다. 단지 기절시켰을 뿐이다.
“나오세요.”
“…….”
“거기 있는 거 다 알고 있습니다. 강예빈 클랜원.”
그리고 강예빈을 불렀다.
대략 1분 전부터, 저기 나무 뒤에 숨어서 지켜보고 있던 강예빈의 존재를 내가 모를 리는 없다. 그녀가 이곳에 근접할 때부터 이미 눈치채고 있었다.
나무 뒤에서 게이트의 침입자가 모습을 드러내자, 난 차게 물었다.
“왜 왔습니까?”
강예빈은 답한다.
“당신이 왜 이곳에 있는지 아니까요.”
그녀가 손가락으로 저 먼 곳을 가리킨다.
“게이트 밖의 정경 길드.”
다음으로 그녀는 한예리를 가리켰고.
“거기에 속한 전향자.”
마지막으론 나를 가리켰다.
“그리고 각성자 납치 사건.”
난 고개를 끄덕여 인정했다.
“맞습니다. 그런데 왜 경찰서로 가지 않고 이곳에 왔습니까?”
강예빈은 젖은 목소리를 길게 찢었다.
“그게 지금 저한테 할 말이에요-!”
“그럼 뭐 변명이라도 해야 합니까?”
“그렇게라도 해요!”
“살인의 변명이라. 구차하군요.”
“살인……? 납치된 이들을 전부 죽였군요.”
“네.”
강예빈이 다시 한예리를 가리켰다.
어느새 그녀의 눈시울은 붉어져 있었다.
“그럼 이 소녀도 죽일 거예요? 아직 스물도 안 되어 보이는 이 소녀를? 미래에 죄를 지을 거란 이유로?”
반면, 내 목소리는 고저가 없다.
“제가 예전에 히틀러를 예시로 든 적 있죠.”
“그게 왜요?”
“히틀러를 비약해서 우발적 살인범이라 치면, 저 한예리는 아주 비약해서 고의적 연쇄 살인마입니다.”
“그렇게 비약하지 마요.”
“믿거나 말거나.”
그녀에게 자세한 미래를 설명해 줄 생각은 없다.
난 태연하게 어깨를 으쓱했다.
“그럼 그냥 지켜볼까요?”
“뭐를요?”
“이대로 회개의 가능성을 믿으며, 사건이 터질 때까지 기다렸다가, 그때서야 전향자를 처단할까요?”
“……그런 얘기가 아니잖아요. 그렇다고 해도 이렇게 아무것도 모르는 학생을-”
“그렇다면 이건 어떻습니까?”
일단은 한예리의 참작 요소를 배제하고, 사실만을 말한다.
“강예빈 클랜원의 동료, 류성근 박사의 납치에 저 한예리가 관여했다면?”
“지, 지어내지 마요.”
“만약 그랬다면? 사건이 터졌으니 이제 죽여도 됩니까? 아니면 더 큰 사건이 터질 때까지 기다릴까요?”
강예빈이 주먹을 꽉 쥐었다. 겉으로 드러난 피부가 새하얗다.
“……아닐 수도 있잖아요.”
“제 말을 믿지 못하겠다는 뜻입니까?”
“그게 아니라, 당신이 본 미래의 죄인이 한예리가 아니라, 저번 게이트에서 튀어나올 도플갱어일 수도 있잖아요.”
“……당연히 그럴 가능성은 있습니다. 그래서 충분히 고려했습니다.”
진심이었다. 나는 충분히 고려하였다.
“강예빈 클랜원이 진실을 알고 이곳으로 달려왔을 시간보다 훨씬 더 오랜 기간 동안, 더 심사숙고하고.”
미래는 긍정적으로 바뀌었다.
도플갱어가 행했을 미래의 악행들은, 기억을 훔치는 도플갱어의 게이트가 클리어됨과 동시에 사라졌다.
F급 헌터였던 나는 지금 A급 헌터까지 감당할 수 있는 C급 헌터가 되었으며, 유명 클랜의 클랜장으로서 충분한 사회적 영향력이 있다.
돈은 문자 그대로 쓸어 담는 중이다. 도시를 건설하는 데에 처리되는 비용을 홀로 감당할 수 있다.
‘클랜원.’
한때는 약탈자의 편이었던 적이 있었던 이가을은 현재 가장 든든한 아군이 되었다.
세계수가 될 주진헌은 영입했으며 곧 [변환] 각성자 이자벨라와 [빙결] 각성자 엠버도 영입할 예정이다.
‘성과.’
칠악, 최태수의 팔이 잘렸다.
초월급 아티팩트, [공간의 팔찌]와 [아트만의 헌신]이 벌써 내 손에 있다.
[단죄] 퀘스트라는, 시스템이 준 사기적인 특혜를 받는다.그러나.
“그러나 미래는 그렇게 호락호락하지 않습니다.”
장담컨대 고작 이렇게 해서 망하지 않을 세상이라면, 진작에 망하지 않았을 거다.
자연재해에 비할 수 있는 몬스터와 게이트 브레이크는 차치하고서라도.
러시아가 중국에 핵을 쏴 걷잡을 수 없는 몬스터 남하가 이뤄졌다 해도.
[이능]을 동반한 온라인 테러에, 고작 무선기로만 통신을 하게 됐더라도.‘한예리만 없었다면.’
한예리가 죽였던 서울 인구의 절반만 살아 있었더라면, 어쩌면 우리는 서울을 사수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므로.
“전 도플갱어이었을 수도 있다는 미약한 가능성 때문에, 별로 그럴 것 같지도 않을 전향자의 회개 가능성을 바라며, 마냥 손을 놓고 기다릴 수가 없습니다.”
한예리는 여기서 죽어야 한다.
비록 그녀의 기억을 읽었다 한들.
비록 순진무구한 한예리가, 정지석에게 이용만 당하다가 언젠가 인성이 터져 버려서, 그 잔혹한 칠악이 된 것이라 한들.
-치사량만큼 넣지 않아도 됐잖아요? 평소처럼 찬혁이가 버틸 수 있는 만큼만 넣어도 됐잖아요.
그게 순간 내게 어떠한 공감이나 동정을 이끌어냈음은 인정하나.
“그런 가능성은 전부 다 배제할 겁니다.”
강예빈과의 대치를 말미암아, 경각심만 굳게 세워질 뿐이다.
“제, 제발!”
강예빈은 내게 매달린다.
비유가 아니라 실제로 내 바짓가랑이를 붙잡는다.
“놓으세요. 이건 명령입니다.”
“시, 싫어요.”
“하……. 전 분명 경고했습니다.”
이왕 이렇게 된 거 [공간의 팔찌]의 업그레이드는 포기한다.
기다릴 것도 없이, 이 자리에서 즉각 처형할 것이다.
쓰러져 있는 소녀의 머리를, 소생의 여지도 없이 터뜨릴 것이다.
뚜벅.
그래서 그냥 강예빈을 달고서 움직였다.
“안 놓을 거예요! 그러지 마요. 제발.”
“…….”
한예리에게 다가서는 첫 번째 걸음.
강예빈은 내 두 다리를 양손으로 붙잡는다. 난 무시한 채로 걷는다.
“신혁 씨! 우리 내기했던 거 기억나요? 그 부유섬 게이트로 가기 전에 내기했던 거?”
“……기억 안 납니다.”
“거짓말!”
두 번째 걸음.
내 걸음질에 얼굴이 차인 강예빈의 얼굴이 젖혀진다.
퍽, 그 묵직한 충돌음이 내게 왠지 크게 들려서, 보폭을 조금 줄였다.
“그 소원이란 거 여기서 쓸게요. 그러니까 죽이지 말아요.”
“불가.”
세 번째 걸음.
강예빈이 내 몸을 타고 올라온다. 등에 매달려서 내 눈을 가린다.
어둑해진 시야에 난 잠시 걸음을 멈춘다.
그리고 묻는다.
“한예리를 알고 있습니까?”
“아니요.”
“그런데 왜 이리 변호합니까? 단순히 미성년자라서?”
“신혁 씨 때문에요.”
“저 때문이라면, 말리지 마시길.”
뚜벅. 다시 한 걸음 디딘다.
동시에 오른손으로 내 눈을 가리는 강예빈의 양손을 붙잡아, 그녀가 날 방해할 수 없게 공중에 들어 올렸다.
그녀는 내 앞에서 대롱거린다.
주르륵. 붉었던 눈시울에서 결국 눈물 한 방울이 떨어져 내렸다.
“심연을 들여다 보면 심연도 자신을 쳐다본다고 하잖아요.”
“제 멘탈이 그리 약해 보입니까?”
“아니요. 그래서 더욱 걱정돼요. 너무 단단하기에, 조금씩 물들어 버리면 언젠가 돌이킬 수 없게 될까 봐.”
“…….”
“누군가가 신혁 씨를 약탈자라고 부를까 봐.”
“상관없습니다.”
“사람들은 잘 알지도 못하면서 겉으로 드러난 것만 보잖아요. 어쩌면 누구는 신혁 씨를 살인자라 손가락질하겠죠.”
“이런 게 살인이라면, 그렇게 되겠죠. 최악의 살인마.”
“그게 아니라……! 그러지 마요. 제발…….”
현재 강예빈은 날 방해하고 있는 존재다.
솔직히 말하자면, 어떻게든 그녀를 쳐내고 한예리를 죽일 수 있었다.
그런데 그러지 않았다. 아니, 못 했다. 그녀가 다칠까 봐.
지금도 그러하다. 양손이 내게 묶여서 허공에 대롱대롱대는 그녀를, 그냥 저리 휙 던져 버리면 되는데, 난 그러질 못한다.
-강예빈한텐 아빠처럼 챙겨주고.
언젠가 이가을이 내가 했던 말을 지금에서 공감한다. 그리고 깨닫는다. 내가 강예빈에게 퍽 무르다는 것을.
탁.
그녀가 다치지 않게, C급 헌터인 그녀가 다칠 일도 없지만, 안전하게 그녀를 땅 위로 내려주는 것도 아마 그래서겠지.
어쩌면 미래에서 들인 습관이다.
“아, 안 돼요!”
마찬가지다.
내가 놓아주자 저부터 죽이라는 듯이, 한예리를 제 몸으로 감싸는 강예빈을 난 어쩌지 못한다.
강예빈의 가랑이, 넓게 펴진 겨드랑이, 가느다란 목.
그 사이 드러난 빈틈으로 검을 찔러 넣어 한예리를 죽일 수 있는데, 혹여나 강예빈이 움직여 다칠까 봐 그러지 못한다.
22살을 먹은 내 신체 나이만큼, 그만큼의 오랜 시간 동안 지옥 같은 삶을 공유했던 ‘인연’을 난…….
“……좋습니다.”
“!”
“보류 정도는 하겠습니다.”
내 약점이라 인정한다.
반보를 물러난다.
“그러나 보류일 뿐입니다.”
“보류라 하면……?”
그러나 딱 반보(半步)다.
한예리를 살려주겠다는 게 아니라, 죽음을 뒤로 미루겠다는 보류 혹은 연기.
“딱 한 달만 지켜보겠습니다. 한 달 동안 한예리가 살아야 할 무언가를 내가 발견한다면, 소녀를 살려줄 것이고.”
난 한 팔로 강예빈의 손목을 끌어당겨 내 품 안에 넣고, 나머지 손으론 한예리의 뒷목에 [순수의 마석]을 박아 넣었다.
“아니라면 한예리가 언제 어디에 있든 찾아가 죽일 것입니다.”
존재조차 느끼지 못할 만큼 아주 작은 파편이다.
[조건부 스킬, 방향 추적이 활성화됩니다.]그러나 추적 스킬이 활성화되기엔 충분하다. 이로써 한예리는 파편을 회수하기 전까지 내게서 벗어날 수 없다.
“네, 네! 알겠어요. 그러면 일단은 여기서 나가요!”
고목나무에 붙어 있는 매미처럼, 나에게 전신을 밀착한 강예빈을 내려다본다.
이어서 낮은 목소리로 그녀를 불렀다.
“강예빈 부클랜장.”
“네?”
그리고 난 내 약점을 그대로 둘 생각은 없다.
“현 시간부로 당신의 부클랜장의 직위를 해제합니다.”
이는 단순히 치기 어린, 내 뜻대로 되지 않았다는 옹졸한 보복 심리 따위가 아니다. 난 여전히 내 생각이 옳다고 생각한다.
반보를 물러난 것은 정말로 강예빈에 대한 정(情) 때문일 뿐.
난 단순히 그 정을 잘라내려는 것이다.
“네?”
“제대로 들으신 거 맞습니다. 권리도 없는 직위였지만, 이제는 그것을 해제해야겠습니다.”
왜냐하면 지금의 강예빈은 내가 추구하는 클랜의 방향과 맞지 않으므로.
“그리고 앞으로 이번 같은 일이 다시 있다면.”
어쩌면 현재의 강예빈은, 미래의 강예빈이 마음 한편에 바랐던 대로-
“당신을 영구히 퇴출시키겠습니다. 아마 다신 보지 않게 되겠죠.”
평범하게 사는 게 좋겠지.
“우리에겐 그게 옳은 일일 것입니다.”
왜냐하면 나와 엮이면 늘 이런 일을 겪어야 하니까.
미래의 강예빈과는 달리, 현재의 강예빈은 이런 날 이해할 수 없을 테니까.
“…….”
뚝.
보고 싶지 않은 눈물이었다.
그리고 웃기게도 이 순간마저도 나는, 습관적으로 강예빈을 달래준다.
“당신에게 잘못을 묻는 건 결단코 아닙니다.”
“……그럼 왜…….”
“이번 일로 말미암아, 한예리가 나중에 어떠한 끔찍한 일을 벌여도, 절대로 당신을 탓하지 않습니다. 어떤 일이 벌어지건 결국 제가 최종적으로 결정한 것이고, 책임지는 것도 제가 해야 할 일이니까요.
“…….”
“다만 이렇게까지 하는 건-”
고운 얼굴 위에 흐르는 눈물을 나는 닦는다.
“단지 이게 옳다고 생각해서 입니다.”
이 모든 게 그녀를 위한 거라 생각하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