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 returner who brought memories of a destroyed world RAW novel - Chapter 85
멸망한 세계의 기억을 담아온 회귀자 85화
한예리는 어젯밤 아주 늦게 잤다.
-그런데 혁예 클랜장에게 우리 예리가 반드시 필요하다는 말씀으로 들립니다?
-네. 부정하지 않겠습니다.
그리고 자기 직전까지 되뇌었던 말을 일어나서도 되뇌어본다.
-네. 부정하지 않겠습니다.
-네. 부정하지 않겠습니다.
-네. 부정하지 않겠습니다.
‘신혁 님에겐 내가 필요해!’
혐오하던 대상과 주고받던 신혁 님의 대사가 어느 로맨스 영화의 대사보다 달콤하게 들렸다.
그때의 분위기가 어쨌든 그 대사가 설레서 잠을 잘 수가 없었다.
그 기분은 지금도 유효하다. 이불을 당겨서 얼굴을 감싼 뒤 펄럭펄럭도 해보고, 기분 좋은 이불킥도 하고 싶다.
그런데 이불은 없다.
근데 그래도 좋다.
“헤헤헤헤.”
오늘 아침 컨디션은 아주 좋다.
잠을 청한 이곳엔 바퀴벌레도 없고, 쥐도 없다. 밤사이에 귓가에서 불쾌한 소리를 내거나 몸 위를 타고 오르는 무언가도 없어서, 짧은 시간이지만 한 번도 깨질 않아 아주 푹 잤다.
일어나자마자 체조를 해도 거뜬하다.
“헛둘. 헛둘.”
어제 옷을 그대로 입고 있어도 상쾌하다.
“헤헤헤헤. 난 신혁 님에게 필요한 사람이니까!”
한예리에게 그 날의 분위기를 신혁 님이 좌지우지한 지는 사실 이미 오래되었다.
애초에 신혁 님의 대사 하나가 제게 날씨보다 더 큰 영향을 끼침을 안다.
비가 와도 그가 웃으면 상쾌한 날이라는 거다. 꼭 지금처럼.
“흠…… 문제는…….”
이제 남은 문제는 하나다.
“X 마려…….”
용변. 어제 신혁 님이 방 안에서 나오지 말라 했으므로, 아직까지 참고 있는 그것.
“화장실 가고 싶다고 문자를 해야 해나? 아니, 그건 좀 창피한데…….”
장운동을 늦추기 위해 다시 자리에 앉았다. 양반다리를 하기엔 신호가 올까 봐, 다리를 끌어안고 쭈그려 앉았다.
아랫배에서 이는 근심을 잊기 위하여 잠자코 생각에 잠긴다.
“신혁 님은 어제 잘 주무셨나? 혹시 내가 막 코를 곤다거나 이를 갈지는 않았겠지? 그럼 안 되는데 말이지~”
그 와중에도 신혁 님만 생각하던 그때였다.
똑똑.
“들어가도 되나?”
“네!”
신혁 님의 목소리였다. 한예리는 크게 대답했다. 이내 신혁 님은 방으로 들어온다.
아무런 말도 없이, 무뚝뚝한 신혁 님의 잘생긴 눈빛이 방 안을 훑는다.
‘오오오.’
그 눈빛은 마치 마법 같았다.
흑요석 같은 눈동자는 충분히 몽환적으로 보였고, 그 기능 또한 실제로 그러했다.
쿵.
신혁 님이 눈빛을 두는 곳엔 뚝딱 무언가가 생긴다.
“치, 침대?”
아마도 [인벤토리]렷다.
그게 한예리에겐 마법 같은 작용이었다.
“이, 이불? 책상? PC? 행거?”
텅 빈 제 방 안을 순식간에 5성급 호텔로 만드는 것은 분명히.
칙칙한 회색빛 공간을 제가 좋아하는 식물(나무)로 채워주는 것은 분명히.
-그런데 혁예 클랜장에게 우리 예리가 반드시 필요하다는 말씀으로 들립니다?
-네. 부정하지 않겠습니다.
신혁 님께서 분명히 저를 챙겨주는 게 틀림없었다. 왜냐하면 내가 필요한 존재니까!
박신혁을 애정하는 한예리에게 용기를 내게 했다.
볼일을 다 봤다는 듯 등을 돌려 나가시려는 신혁 님에게 급하게 외쳤다.
“저 화장실 좀 가고 싶은데요!”
뒤를 돌아본 신혁 님이 눈을 좁게 뜨셨다.
“가면 되지 왜 소리치지?”
“아 그게…… 어제 나오지 말라 하셔서…….”
“……시끄럽다는 거지, 화장실 가지 말란 얘긴 아니었다.”
“아……. 그럼 화장실 좀 써도 될까요?”
“……써라.”
방문 앞에 서 있는 신혁 님이 불편하시지 않게 몸을 구겨서 지나간다.
그런데 신혁 님을 지나치기도 전에 신혁 님이 의외의 음색으로 물으셨다.
“어제 나오지 말라 해서 지금까지 참고 있었나?”
“……네.”
개미 기어가는 소리만치 작은 목소리로 답하였다. 진실이 창피했다.
힐끗.
그래도 꾹 참은 보람은 있었다. 신혁 님을 올려다보니 신혁 님의 얼굴은 어제보다 많이 누그러져 있었으니까.
물론 차가운 얼굴도 잘생겼고 지금도 잘생겼지만서도. 헤헤.
그가 이어 말했다.
“한예리.”
“네, 네?”
“팔 때까진 써도 된다.”
“네? 뭐, 뭘요?”
“방금 네 방에 놓은 물건들.”
“네? 네!”
“이제 가라. 급하다 하지 않았나?”
“네!”
재빨리 이동한 뒤, 조심스레 화장실 문을 닫는다.
“으으으으으.”
근심이 해결되는 순간, 어느 젊은 여성의 말이 머리를 강타한다.
-결혼은 착한 남자랑 하는 거고, 연애는 나쁜 남자랑 하는 거야.
찬혁이와 어머니를 돌보는 수간호사가 했던 말.
30대를 바라보는 언니는, 오랜 세월의 관록이 묻은, 으레 옳은 말만 한다.
“역시 언니는 언니였어.”
이번에도 그랬다.
아니, 어쩌면 결혼도 신혁 님이랑 할 수 있어서 앞의 말은 맞지 않을 수도 있지만-
“어쩌면 그럴 수도 있지…….”
연애는 나쁜 남자라 하는 거라는 뒷말은 분명 맞다.
시종일관 저를 차게 대하는 신혁 님에게서, 아주 가끔, 언뜻 드러나는 따스한 태도는 분명히.
-네. 부정하지 않겠습니다…… 팔 때까진 써도 된다. 네 방에 놓은 물건들…… 이제 가라. 급하다 하지 않았나?
“매, 매력 있어!”
한예리를 많이 설레게 했다.
* * *
한예리가 화장실에 들어가 있는 시간.
띵동.
벨 소리에 나는 인터폰 화면을 확인한다.
“나야.”
이가을의 집에 있던 내 짐을 가져온 이가을의 수행원과, 그들과 함께 등판한 이가을이었다.
바로 문을 열었다.
쿵쾅쿵쾅.
거칠게 이가을은 집으로 들어선다.
“어딨어?”
이가을의 날카로운 눈빛이 집 안을 구석구석 훑더니 곧 문틈으로 빛이 새어 나오는 화장실에 멈춰 선다.
“쟤야? 반목자?”
“네.”
“근데 왜 아직까지 처리 안 했어?”
“사정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집에서 나와야 했고요.”
언제 터질지 모르는 시한폭탄 같은 것을, 가장 든든한 아군의 집에 들일 수는 없으므로.
“이미 말씀드렸잖습니까?”
미리 얘기한 사실이었지만, 집까지 찾아온 것을 보아하니 이가을은 그게 맘에 들지 않았나 보다.
“쟤가 뭔 사고를 치든 내가 처리할 수 있어. 나 못 믿어?”
“이가을 클랜원이 믿을진 모르겠지만, 제가 요새 가장 믿는 사람이 이가을 클랜원입니다.”
“…….”
진심을 다한 말이었다.
강예빈과는 다른, ‘왜 아직 처리 안 했어?’라는 물음은 그 믿음을 더 굳게 한다.
“그럼 그냥 다시 집으로 들어오면 안 돼?”
“네. 안 됩니다.”
그래서 더욱 이 집을 선택한 것이다.
강예빈에게 내가 책임지겠다고 말했듯, 언젠가 칠악이 본색을 드러낸다면 오롯이 나 혼자 감당할 것이므로.
결국엔 내가 선택한 일이기에 난 철저히 소녀를 검증할 것이고, 그에 따른 책임 역시 나 혼자서 질 생각이었다.
“제가 한 결정으로 인한 어떠한 피해라도, 이가을 클랜원에게 가지 않길 바랍니다.”
“그럼 내가 이 집으로 들어오면?”
“장소의 문제가 아니지 않습니까?”
화장실에 시선을 둔 이가을의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해졌다.
“……왜 저런 것 때문에-”
화장실의 문이 열리는 것도 그때였다.
“아, 서, 성녀님?”
한예리의 얼굴을 확인한 이가을에게서 거대한 살의가 몰아친다.
나는 짐짓 앞으로 나와 이가을과 한예리 사이에 위치한다.
이가을이 폭발하기 전에 검은색 카드를 한예리 앞에 내밀었다.
“나갔다 와. 뭐 필요한 게 있다면 구매해도 좋으니, 연락을 줄 때까지 들어오지 말고.”
“……네, 알겠어요.”
그 와중에도 내 신경은 온통 등 뒤에 가 있다. 이가을의 성난 기세 앞에서도 흐물흐물해지는 한예리의 표정 따윈 신경 쓰지 않았다.
띠리링.
이윽고 한예리가 나가자 난 이가을에게 말했다.
“이해합니다. 아마 한동안 게이트만 클리어하게 될 것 같습니다. 또한 이 집에 있을 땐 단죄 퀘스트는 잠시 연기해야겠고요. 그래서 미안합니다.”
“……당신이 뭐가 미안해?”
“알리바이까지 제공해 주셨는데 약속과 달리 진행하기로 했던 원죄와 단죄 퀘스트는 잠시 멈춰야 할듯해서.”
“…….”
사과가 유효했을까, 이어진 이가을의 말이 다소 잔잔해졌다.
“꼭…… 꼭 그래서 그런 건 아니야. 저런 것 때문에 계획이 틀어지는 것도 마음에 안 들고, 또- 또-”
이어서 그녀의 기세마저 다소 누그러진다.
이때다 싶어 나는 이어 말했다.
“어차피 한 달 뒤면 클랜 건물이 세워지지 않습니까?”
“그, 그렇긴 하지. 내가 그땐 꼭대기 층에서 당신 옆집에 살기로 했지. 근데 왜?”
도시 건설은 아직 요원하다지만, 각성자까지 동원한 시공으로 인해 클랜 건물만은 다음 달 완공이 예정되어 있다.
“그 이후에 다시 어제처럼 하죠.”
그 이후에 다시 [단죄 퀘스트]를 진행할 것이다.
이제껏 그랬 듯이 밤사이의 밀행으로 반목자를 죽이는 것은 그 이후로 미룰 것이다.
“어제처럼?”
“네. 어제처럼.”
어제처럼.
이가을도 그 말도 따라 했다.
“그래. 한 달 뒤엔, 어제처럼.”
이가을의 얼굴은 그 말을 되뇌고 나서야 평소처럼 돌아왔다. 그녀가 눈을 곱게 흘겼다.
“이제 보면 당신도 참 고집이 세.”
“특정 부분에 대해서 그러한 건 저도 인지하고 있습니다.”
“그렇지. 내가 져주는 거면 말 다 했지. 안 그래?”
그 뾰로통한 표정이 이제는 새침데기같이 보였다.
“네. 감사히 생각하고 있습니다.”
“알면 더 잘해. 나한테.”
“아무렴.”
날카로운 분위기가 일단락되고, 이가을은 손가락을 빙빙 돌리며 물었다.
“그럼 집 좀 잠깐 둘러봐도 돼?”
“얼마든지요.”
그녀가 오늘 아침에 도착한 냉장고를 열어본다.
“당신이 그러겠다고 하니, 어쩔 수 없다 수긍은 하면서도…… 영 찝찝하단 말이야.”
텅 빈 공간에서 흘러나오는 냉기는 더욱 차게 느껴졌다.
“봐봐. 이게 뭐야, 아무것도 없잖아? 우리 집 사용인도 이것보단 잘 지내겠다.”
“어쩔 수 없죠. 한동안 쓰지 않았던 집이고, 오늘 아침에 들어온 냉장고니.”
“휴. 기다려 봐. 최 비서가 이런 관리는 참 잘하거든. 걔한테 여기 좀 채워 넣으라 해야겠어.”
“괜찮습니다.”
“집들이 선물이라 생각해. 그거까지 거절할 거야?”
“뭐, 그렇다면야.”
이후 그녀는 찬찬히 집을 둘러본다. 한 손으로는 최 비서와 전화 통화를 하는 채였다.
“어어. 그 집무실에 달린 그 해바라기 그림 있잖아. 그것도 가져와. 여기 벽이 너무 휑하다. 그리고 여기 발코니 확장 좀 해야 할 것 같으니 시공사 좀 알아보고. 아참. 여기에 부피가 작은 이중문도 설치되는지 알아봐.”
“…….”
집들이 선물의 스케일은 이가을답게 컸다.
불만족스러운 얼굴로 몇 바퀴나 집을 둘러본 이가을은 이후 어렵게 발을 떼었다.
“그럼 갈게. 오늘 치료 예약이 있거든.”
“네. 곧 브레이크가 터지니 미리미리 해두는 게 좋죠.”
“말은……. 알았어. 그럼 진짜 갈게. 내 도움이 필요하면 언제든 연락하고. 바로 올 테니까.”
그럴 일이 있겠냐 싶지만, 그러하겠다 했다.
“네. 알겠습니다.”
“그럼 갈게.”
알리바이를 위해 이가을의 집에서 그랬듯, 우리는 가벼운 포옹으로 인사를 대신했다.
엘리베이터까지 마중 나간 나는, 부우우우웅, 창문을 통해 이가을의 대형 밴이 출발하는 것을 확인한 뒤에서야 한예리에게 톡을 보냈다.
[이제 들어와도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