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 returner who brought memories of a destroyed world RAW novel - Chapter 94
멸망한 세계의 기억을 담아온 회귀자 94화
‘빌어먹을.’
윤환은 떨어지는 빗줄기를 보며 한탄한다.
‘차라리 좀 더 나서볼걸.’
테러범을 찬양하는 비각성자들이 퍽 우스워서 가만히 있던 게 문제였다.
그때 테러범을 제압했다면 이런 지옥 같은 곳에 들어오지 않았을 텐데.
‘바로 도망칠걸.’
떨어지는 비행기에서 비각성자들이 죽든 말든, [금속 조작] 각성자인 자신은 살 수 있을 거라 자만했던 게 문제였다.
금속이 지천이었던 비행기가 그렇게 일순 사라질 줄은 몰랐다.
그 금속이 근처에 있었더라면, 발밑에 금속을 두어 확장하는 빛무리에서 능히 도망칠 수 있었을 텐데.
하아아아아.
그래도 가까스로 아티팩트와 보호구만은 챙길 수 있어서 다행이었다. 이것들만 있으면 벌레 같은 비각성자가 꿈에서나 그리는 이적을 행할 수 있으니까.
비각성자와 같이 게이트에 들어온 이상, 어쩌면 그게 매우 주요한 일이 될지도 모른다.
인간을 도구로 사용하려면 마땅한 힘이 필요한 법이니.
그렇게 어둠 속에서 사색에 잠겨 있던 중.
어둠의 틈을 비집고 들어온 미약한 빛줄기가 사색을 끊어낸다.
“?”
분명 빛이었다. 아까 어떤 비명이 들렸는데, 뭔 이상이 생겼나 보다.
투두둑. 투두둑.
마침 빗줄기도 줄어들었겠다, 동굴의 입구 쪽으로 나가 동향을 살폈다.
상황 파악은 어렵지 않았다.
“찾았습니다. 다른 곳을 못 찾았으면 저기로 이동하겠습니다.”
저 멀리서 낮게 울리는 목소리는 분명 박신혁의 것이었다.
그리고 그의 말마따나 그가 비추는 손전등 빛의 끝에는 하얀 분비샘이 있었다.
보아하니 아까의 비명을 기회 삼아, 다음 분비샘으로 이동하려는 것 같은데…….
“호오~”
역시나 박신혁 클랜장은 뭘 좀 아는 사람이었다.
-꺄아아아아악.
소리를 내지 말라는 박신혁의 말에도 비명이나 지르는 어느 멍청한 여자는 분명 교육이 덜 된, 진화가 덜 된, 비각성자일 터.
박신혁은 그걸 잘 이용하고 있었다. 그렇지. 우리 우월한 각성자들은 그들이 몸을 바쳐 만들어준 기회를 저렇게 이용하면 그뿐이다.
“나도 빠질 순 없지.”
재빨리 다시 동굴로 들어갔다.
사사사삭.
그곳에 한 아름 쌓인 식량을 빠르게 챙긴다.
다행히 수납공간은 넓었다.
금속이 없는 게이트 환경을 대비해서 자신의 보호구는 수납공간이 따로 마련되어 있었고, 그 공간의 크기는 저 많은 식량을 욱여넣기에 충분했다.
당연히, 하나도 남기지 않았다.
“남겨서 뭐 해.”
식량을 남긴다면, 십중팔구 비각성자가 처먹을 것이고, 그들이 축적한 에너지는 죄다 몬스터의 뱃속으로 옮겨갈 텐데.
오히려 적을 돕는 꼴이랄까. 윤환은 절대 그렇게 둘 수 없었다. 그들은 차라리 굶어 죽는 게 낫다.
곧 자신도 분비샘의 입구로 나왔다.
그제야 이제껏 보지 못했던, 발밑의 상황을 본다.
펑-!
따다다다다다닥. 따다다다다다닥. 따다다다다다닥.
화염이 번쩍일 때마다 [화염] 각성자 김이준이 웬 몬스터들과 벌이는 사투가 불연속적으로 전개된다.
펑, 화염이 이는 순간마다 몬스터는 뒤로 물러났고, 주르륵, 그때마다 그의 상처는 늘어나고 있었다.
“오? 불을 기피하나? 꽤 시간을 버는데?”
아마 그래서 박신혁도 과감하게 움직였나 보다.
저 몬스터 무리의 덩치가 점점 커지고 있음이, 저 아래에서 [화염] 각성자가 몬스터의 시선을 죄다 끌고 있음을 말했다.
결론에 도달하는 건 어렵지 않았다.
“김이준이 죽기 직전에 이동해야 하는 거 같은데?”
그렇다면 시간이 많이 남지 않았다.
일례로 김이준 주변의 몬스터 사체는 없다. 김이준의 공격은 몬스터가 기피하는 것이되, 치명적이지 않다는 실례(實例)였다.
그렇다면 분비샘의 끝자락에 다다른 그는 곧 죽겠지.
“어, 얼마나 이동해야 하지?”
잠시 걸음을 멈췄다.
열 개씩이나 챙긴 손전등 중 하나를 켜, 일단은 가장 가까운 ‘고장 난 분비샘’을 찾는다.
…….
그 시간은 생각보다 오래 소요됐다.
원래 이런 구조인 것일까, 분명 아래쪽엔 고장 난 분비샘이 많은데 위쪽엔 고장 난 분비샘이 드물었다.
그런데 자신은 위로 가야 한다. 소화액이 차오르는 상황에서 아래로 향하는 미친놈이 아니니까.
정리하자면 꽤 멀리 이동해야 했다.
그래서 다시 저 아래의 김이준을 살폈다.
“좀 더 버텨줘야 할 텐데…….”
안력을 돋워 상황을 더 자세히 분석한다.
이윽고 윤환의 시선은, 김이준이 저 와중에도 필사적으로 지키려 하는 소녀에게 닿았다.
“왜 저런 걸 달고 있어?”
윤환은 얼굴을 찌푸렸다.
웬 비각성자 하나 지키자고 뭐 하는 짓인지? 저러니까 힘을 못 쓰지.
* * *
5분 전.
딸깍.
분비샘 입구 쪽으로 나온 나는 손전등을 켰다.
먼저 뒤에 있는 한예리와 주진헌을 비췄다. 손전등을 켜도 된다는 허락의 뜻이었다.
그들이 고개를 끄덕인 것을 본 후, 나는 먼저 주변을 살폈다.
융털에 가려져 시야의 절반만 보였지만, 마력까지 활성화해 각성자의 시력을 돋우니 먼 곳에서나마 이미 죽어버린 하얀 분비샘을 찾을 수 있었다.
다시 뒤를 돌아본다. 주진헌과 한예리는 아직도 손전등을 이리저리 비추고 있다. 저들은 아직 고장 난 분비샘을 못 찾은 거다.
“찾았습니다. 다른 곳을 못 찾았으면 저기로 이동하겠습니다.”
규칙을 어기고 낸 목소리에, 손전등으로 제 얼굴을 비추며 한예리가 물었다.
“소리 내도 돼요?”
“지금은. 우리가 들을 정도의 소란이 있었다면, 필히 몬스터도 들었을 테니까. 이 공간에 있는 모든 몬스터들은 필히 한곳으로 향했을 거다.”
펑.
이를 대변하듯 반대편 아래쪽에서 폭발음이 일었다.
[화염] 각성자 김이준이 저항하고 있는 덕에, 그 불빛에 드러난 그곳의 상황을 살필 수 있었다.따다다다다다다닥. 따다다다다다다닥. 따다다다다다다닥.
불이 번쩍일 때마다 보이는, 잔뜩 몰려 있는 항체의 군집.
번쩍.
문자 그대로 새카맣게 몰려든 그것들은 빛이 명멸할 때마다 시시각각 그 수를 불린다.
“…….”
난 애써 착잡한 감정을 누르며 고개를 돌렸다. 감정이 이성을 앞서는 일은 자제해야 할 터. 미래의 아군을 지원하는 건 일행의 안전이 보장된 이후여야 했다.
다만 일행을 보챘다.
곧바로 다음 분비샘의 위치를 가리켰다.
“예정된 대열로 이동합니다. 지금 바로.”
좁은 공간에서 최대한 몸을 비틀어, 선두에 설 주진헌과 중간에 놓일 한예리를 앞으로 보내고서, 나는 맨 뒤에 위치해 일행을 따라간다.
후방을 자처한 것은 일행이 잘 가고 있는지 한눈에 넣기 위함이다.
융털의 간격은 촘촘하다.
위를 향해 비스듬히 서 있는 융털은 떨어지는 소화액을 받아내어 벽면 쪽으로 인도해 준다.
즉 산성비가 폭우처럼 내리는 게 아니라면, 융털은 우리에게 디딤돌이자 우산의 역할이 되어준다는 것.
간혹 방울져 떨어지는 물방울만 잘 주시하면 충분히 걸을 만하다.
“위, 아래를 모두 살피고 걷습니다. 절대 서두르지 마세요.”
걸을 만한 환경을 조성해 주나, 그렇다고 이게 마냥 안전한 길은 아니다.
문제는 생체 기관이 보통 그러하듯, 어떠한 체액에 꽤나 미끄럽다는 것이다.
지금처럼 공기가 눅눅해져 체액이 증발되지 않는 상황이라면 더 말할 것도 없다. 비유하자면 경사진 빙판이라.
“조심!”
나는 집요하게 경고한다.
넘어지는 건 상관없는데, 넘어지는 과정에서 소화액이 떨어지는 융털 밖으로 머리가 튀어 나가면, 누구든 즉사한다.
그 당사자가 [재생] 각성자인 주진헌이라도.
하여 신경을 날카롭게 가다듬고 언제든 차폐막을 꺼낼 준비를 한다.
끼이이이이익.
꼭 지금 같을 때를 대비해서.
“……!”
바로 앞에서 걸음이 꼬여 넘어지는 한예리.
찰나의 순간 나는 바로 움직였다.
쿵. 미끄러져 넘어지는 한예리의 머리 쪽에 차폐막을 꺼내어 밖으로 튀어 나가게 하지 않게 하고-
동시에 나는 앞으로 나아가며 넘어지는 소녀를 받아내었다.
소녀의 겨드랑이에 양팔을 넣어 내게로 당긴다. 그 이상 미끄러지는 것을 막았다.
아찔한 순간이었다.
치이이이익.
벽면에 살짝 닿은 소녀의 신발이 그사이에 녹아내렸다. 조금만 더 늦었다면 소녀의 발도 녹아내렸겠지. 그 부상은 이가을이 없는 지금 사망과 직결된다 해도 무방할 것이다.
“그, 그, 융털 위에서 소화액이 떨어졌어요. 피하려다가-”
“안다. 얘기 안 해도 돼. 잘 피했다.”
“네…….”
말했듯 융털이 우산 역할을 해준다고 해서 완벽할 순 없다. 해서 주변을 잘 살핀 소녀가 넘어진 건 분명 이해의 영역이었다.
“다시 이동.”
그렇게 우린 앞으로 나아갔다.
걷는 것 하나에도 온 신경을 곤두세우며, 위와 아래를 모두 살핀 후에야 한 발자국 내디딘다.
시작이 있으면 끝도 있는 법.
짧지 않은 시간이 지나서, 우리는 다음 고장 난 분비샘에 안착했다.
“작전을 변경한다.”
도착 즉시 다음 명령을 하달했다.
먼저 인벤토리에서 여분의 식량을 꺼내며 한예리에게 건넸다.
“이번 분비샘 안에 숨겨놔.”
“아까 하시던 대로, 주름 사이에 끼워두면 될까요?”
“그래.”
언젠가 이곳에 합류할 사람들을 위해 식량을 마련해 주고, 주진헌에게는 우리의 다음을 부탁했다.
“주진헌 클랜원은 바로 다음 분비샘을 찾아주세요.”
“지금 바로 이동합니까?”
“네. 타인과 적당한 거리를 유지하려면 움직일 수 있을 때 더 움직여 놔야 합니다.”
“타인과의 거리요? 아…….”
주진헌의 시선이 김이준 쪽으로 향했다.
-꺄아아아아악.
이제 그도 알 것이다. 비명은 분명 성인 여성의 것이었다.
그로 인해 항체가 몰려든 저 아래의 상황은, 김이준의 잘못으로 벌어진 일도 아니고, 그가 필사적으로 지키려는, 등 뒤에 감춘 여자아이의 잘못도 아니다.
‘그저 비명과 가까워서.’
요컨대 먼 소란은 기회가 되지만, 가까운 소란은 화가 된다는 거다.
“네. 다른 이들과 너무 가까우면 저렇게…… 아마 죽을 수도 있겠군요.”
“보통은. 그러나 지금은 괜찮습니다. 다행히 소화샘 분비액이 줄어들고 있으니까요.”
“아……. 이해했습니다. 곧 입이 열리겠군요.”
난 고개를 끄덕였다. 이미 설명한 사실이었다.
소화액 분비가 줄어든다는 것은, 적당한 소화를 끝낸 레비아탄이 곧 또 다른 먹이를 먹는다는 신호였다.
“네. 소강상태가 얼마 남지 않았을 겁니다.”
이는 괴물의 뱃속에 들어 있는 우리의 입장에선, 곧 열릴 레비아탄의 입에서 먹이와 함께 환한 빛이 쏟아진다는 얘기가 될 것이고.
같은 의미로, 빛을 싫어하는 이곳의 몬스터, ‘항체’들이 유일하게 활동을 멈추는 시간이 머지않았다는 의미가 된다.
따라서 김이준은 조금만 버티면 된다.
“네. 그럼 지금 바로 움직여 주세요. 저는 잠시 할 일 좀 하겠습니다.”
각자의 할 일을 분배한 뒤, 나는 활을 꺼내 들었다.
시위를 매기며 크게 외쳤다.
“김이준 헌터! 조금만 더 버티면 됩니다!”
난 화살 하나에 전력을 다한다.
항체가 항체라고 하나, 신화급 몬스터인 레비아탄의 항체이다. 그 수준은 족히 A급 게이트의 몬스터와 견줄 만하다.
적지 않은 시간 예열했다.
화살촉에 마력을 잔뜩 유도한 뒤-
당장에라도 끊어질 듯, 끝까지 긴장된 시위를 놓는다.
쉬이이이이이익.
어둠을 가르는 청색의 빛살.
거리가 멀다 하나, 폭(爆)의 원리로 방출된 화살이었다.
목표로 한 몬스터의 머리에 닿는 것은 진정 찰나였다.
펑-!
튀어나온 분비샘 아래에서 기던 항체가 머리가 터져 소화액에 빠진다. 풍덩. 그 즉시 녹아 없어진다.
다시 시위를 메긴다.
펑-!
곧 쏘아낸 화살에 그의 어깨를 짓씹던 항체의 아가리가 터져 나가고.
펑-!
다시 쏘아낸 화살에 그의 동굴 위쪽에 포진된 항체의 다리가 소멸했다.
“…….”
그러나 그뿐이었다.
전력을 다했으나, 고작 하나씩이었다.
펑-!
전력을 다한 화살마다 고작 하나.
펑-!
쏟아지는 항체의 숫자에 비하면, 내가 줄인 항체의 수는 완벽하게 무의미하리라.
“조금만 더 버티면 됩니다! 곧 빛이 쏟아질 때까지!”
곧 시간이 해결해 주길 기다릴 뿐이다.
그가 [화염] 각성자이기에, 항체들이 싫어하는 빛을 내뿜을 수 있기에, 조금 더 버틸 수 있으리라 기대하며.
이제 레비아탄의 입이 열리면, 거기서 쏟아질 환한 빛으로 인해 이 공간의 모든 활동이 소강상태가 되길 기다릴 뿐이다.
“조금만 더!”
그리 바라던 때였다.
쉬이이이이익.
또 다른 파공음이 일었다.
불길한 예감에 급히 소리의 궤적을 좇는다.
건너편에 있는 어느 분비샘에서 쏘아진, 김이준 쪽으로 향하는 투사체 하나가 허공을 가르고 있었다.
‘안 돼!’
하필 [보유 마력]이 전소된 시간에, 그 투사체는 빠르게 나아간다.
아주 엉뚱한 방향으로.
그 투사체는 김이준의 앞에 득실거리는 항체를 향해 쏘아진 게 결코 아니었다.
이내 한껏 뒤로 밀려나 분비샘 아래로 떨어질 듯한 김이준마저 그냥 지나친다.
쉬이이이익.
이윽고 그의 등 뒤에 닿는다.
퍽-!
김이준이 저 상황에서도 필사적으로 지키려 하는, 딸처럼 보이는 소녀에게.
“…….”
수박 터지는 듯한 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