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 Story of a Knight In A Ruined Fantasy World RAW novel - Chapter (10)
9화 – 대우
잘 부탁드립니다
지구의 야생동물이라면 도마뱀에 탄 인간이라는, 자기보다 훨씬 큰 동물의 공격에 눌렸겠지만 이 세계의 마수는 달랐다.
새끼 때부터 철저히 교육해 기르지 않는 한, 절대 인간에 대한 증오를 거두지 않는 존재가 바로 마수라.
그르렁거리는 소리와 함께 칼날 표범이 종자들을 향해 돌진했다.
“이게 어딜!”
기세 좋은 도약이 무색하게도, 종자들이 쭉 뻗은 창에 가볍게 찔린 표범은 주춤거리며 물러섰다.
적어도 칼날 표범의 가죽은 창을 무시할 정도로 단단하지는 않은 듯했다.
“제가 앞에서 막을게요!”
둘 중 좀 더 어린 소년 종자가 앞으로 몇 걸음 나선 순간, 칼날 표범은 마치 펀치를 날리듯 앞발을 휘둘렀다.
앞발 발등 부분에 달린 한 뼘 정도 되는 길이의 칼날이야말로 이 마수가 ‘칼날 표범’이라 불리는 가장 큰 이유였다.
칼날 발톱에 걸린 창 두 자루가 모두 잘려 나갔다.
“보라스! 칼!”
아직 어린 소년 종자가 기겁하며 물러서려 하자 옆에 있던 여자 종자가 뾰족한 목소리로 소리치며 검을 뽑아들었다.
그 말을 들은 소년 역시 황급히 칼을 뽑으려 했지만 이미 때는 늦었다.
약한 적을 귀신같이 파악한 칼날 표범이 소년을 향해 도약했다.
제대로 무기도 뽑지 못한 소년은 무력하게 붙들려 도마뱀에서 떨어졌다.
“으아아악!”
“안 돼!”
재빨리 도마뱀을 몰아 달려온 여자가 그 가속도를 그대로 살려 칼날 표범의 머리를 공격했다.
잘못하면 밑에 깔려있던 소년까지 한 번에 공격할 수도 있었지만, 우연인지 실력인지 그 공격은 정확히 칼날 표범의 두 눈을 후벼파는 데 성공했다.
소년을 깔아뭉갠 채 마무리를 지으려던 칼날 표범이 처절한 절규와 함께 몸을 데굴데굴 굴렸다.
“으으윽…”
“죽엇!”
여자 종자는 바닥에 널브러진 소년을 부축하는 대신 악을 쓰며 표범에게 돌격했다.
그 과정 역시 위험하기 짝이 없었다.
칼날 표범은 눈을 잃어 미쳐 날뛰는 와중에도 자신을 찌르는 공격에 예민하게 반응하며 앞발을 휘둘렀다.
자칫 잘못해서 머리나 목을 베였다간 한 방에 죽을 것이다.
“위험한 거 아닙니까?”
“위험하지.”
아르센이 자기도 모르게 염려 섞인 질문을 던졌지만, 그에 대답하는 팔라토의 목소리는 지극히 덤덤했다.
당연한 일이라는 듯이.
“원래 기사는 피를 먹고 성장하는 거라네. 죽음의 위기 속에서 기사가 나오는 법이야.”
팔라토의 말에 아르센은 자신이 각성하던 순간을 떠올렸다.
차가운 우물, 싸늘한 몸, 죽음의 위기라는 말이 딱 맞았다.
“원래 기사는 그렇게 각성하는 겁니까?”
“맞네. 육체를 충실히 단련해 마력을 깃들게 하고 극한의 싸움 속에서 각성하는 것이 정석이지. 뭐, 극히 드물게는 자네처럼 단련 없이 각성하는 이들도 있다네. 내가 어릴 적 우리 영지의 나이 많은 선배 기사 한 분이 그러셨다더군.”
그 말을 듣고서야 아르센은 내심 가지고 있던 의문 하나를 해소할 수 있었다.
아르센이 대련하며 봤던 팔라토 경의 기량을 생각했을 때, 기사와 동행하는 종자들이 죽는 일이 그렇게 많다는 것이 이상하게 느껴졌던 것이다.
아무리 기사들이 강해봐야, 이런 식으로 뒷짐 지고 종자들에게 목숨을 건 싸움을 유도하니 사상자가 많은 것이 당연했다.
“종자가 되려는 사람이 많은 게 신기하군요.”
“당연한 일 아닌가? 기사가 되면 모든 것을 얻을 수 있는데, 목숨을 걸고서라도 도전할만하지.”
팔라토의 이야기를 듣고 나니 어느 정도 기사들의 심리를 이해할 수 있었다.
말하자면 그들은 높은 진입장벽을 가진 게임의 고인물같은 마인드를 가진 것이다.
같은 종류의 고생을 거쳐 넘어온 이들은 친근하게 여기지만, 어차피 진입장벽을 넘지 못하고 고꾸라질 가능성이 높은 뉴비들은 사람 취급도 하지 않는 식으로.
아르센이 그런 폐쇄적인 사회에 쉽게 들어올 수 있었던 것은 이미 진입장벽을 넘어 합류가 확정된 사람이기 때문이리라.
그때 앞에서 처절한 절규가 들려왔다. 사람이 아니라 마수의 것이었다.
가슴에 칼이 박힌 채 드러누운 칼날 표범의 모습이 보였다.
여자 종자는 표범의 몸 위에 올라탄 채 거친 숨을 들이쉬고 있었다.
“끝난 것 같습니다. 팔라토 경.”
“가보도록 하지.”
셋은 각자의 기승수를 끌고 싸움이 끝난 현장으로 걸음을 옮겼다.
꽤 처참한 광경이었다.
칼로 난도질당한 칼날 표범은 거의 걸레짝이 되어 있었으며, 여자 종자도 몸 여기저기를 베였는지 갑옷이 종잇장처럼 찢겨나가 피를 흘리고 있었다.
처음 공격당했던 소년 종자는 기절했는지 죽었는지 아직도 쓰러져 있었다.
팔라토가 소년이 살아있는지 확인하는 수석 종자를 보며 물었다.
“보라스는 살아있나?”
“살아있습니다. 갈비뼈가 부러지고 머리를 좀 다치긴 했지만, 생명에 지장은 없을 거 같습니다.”
“미숙한 녀석이군. 당분간 영지 내부 순찰로 돌리게.”
“알겠습니다.”
전혀 가벼운 부상이 아니었지만 물어보는 이나 대답하는 이나 무거운 기색은 조금도 없었다.
마치 늘 있던 일이라는 것처럼.
약을 바르고 붕대를 둘러 응급처치를 마친 여자 종자가 비틀대며 팔라토에게 걸어왔다.
“올가.”
“사냥…끝마쳤습니다. 팔라토 경.”
“느낌은 왔나?”
“아직 아닌 것 같습니다.”
“유감이군.”
팔라토는 영혼 없이 냉담한 대답을 남기고 돌아섰다.
그런 그의 뒤에서 여자 종자가 분하다는 듯 입술을 질끈 깨물고 있었다.
그때, 저 멀리에서부터 우렁우렁하게 울리는 포효가 들렸다.
■ ■ ■ ■ ■ ■ ■-!
“이 소리는…”
“불원숭이입니다. 팔라토 경!”
“내 뒤로 물러서라.”
무서운 기세로 나무가 무너지는 소리가 들리길 몇 초, 숲에서 요란하게 등장한 것은 3m가 넘는 키의 거대한 마수였다.
이름처럼 두 눈에 불이 붙은 것처럼 빛이 나고 있었고 몸의 근육은 원숭이가 아니라 고릴라에 가까웠다.
가죽은 털이 무성해 쉽게 칼이 박힐 것 같지 않았다.
그런 상대에게 맞서 팔라토는 한 손에 투창을 든 채 온몸을 뒤로 젖혔다.
그와 동시에, 팔라토가 타고 있는 진 역시 그에 맞춰 다리를 구부렸다.
“이거나…”
이후, 팔라토의 진이 마치 튕기듯이 뒷다리를 펴며 앞으로 도약했다.
팔라토 역시 뒤로 젖혔던 몸을 펴며 온 힘을 다해 창을 던졌다.
“먹어라!”
진의 다리에서부터 팔라토의 손끝에 이르기까지, 인수일체(人獸一體)의 기교로 쏘아진 투창이 총알처럼 날아갔다.
투창은 조금의 저항도 받지 않은 채 매끄럽게 불원숭이의 가슴에 꽂혔다.
두꺼운 털가죽과 가슴 근육은 강력한 힘과 마력이 실린 창을 막아내지 못했다.
구르르륵-!
불원숭이는 정확히 폐에 꽂힌 투창에 꼬르륵거리는 소리를 내며 피를 토하더니, 입을 확 벌리며 불을 뿜었다.
보통 사람이라면 받는 순간 폐가 익어버릴 정도의 열기가 몰아쳤다.
하지만 팔라토는 아주 자연스럽게 방패를 꺼내 들어 불을 막아내며 뒤로 물러섰다.
놀랍게도 방패가 조금 그을렸을 뿐, 화염 공격은 팔라토와 그가 탄 진에게 아무 영향도 주지 못했다.
“물러서라! 창이 폐에 꽂혔으니 조급할 필요 없다!”
불원숭이는 폐에 피가 들어차 숨을 쉴 수 없는 상황에도 불구하고 눈부신 투혼을 보였다.
고릴라처럼 팔다리를 이용, 어떻게든 자신을 아프게 한 팔라토를 함께 지옥으로 끌고 가겠다는 듯이 마구 돌진했다.
하지만 진을 타고 있는 팔라토와 비교하면 고양이를 잡으려는 나무늘보의 몸부림과 다름없었다.
민첩하게 발을 놀려 불원숭이의 돌진을 피하면서 반대쪽 폐가 있는 부분에도 창을 꽂아 넣자, 불원숭이는 처절하게 몸부림치더니 생명이 다한 듯 쓰러졌다.
아르센은 숨을 고르고 있는 팔라토에게 다가가 순수한 감탄을 표했다.
“대단하십니다.”
“이 정도는 아무것도 아닐세. 종자들에게나 어렵지, 기사라면 불원숭이 정도는 어려운 상대가 아니니. 덤으로 하나 가르쳐주자면…”
그렇게 팔라토가 아르센을 향해 고개를 돌리며 말하던 순간, 뒤에 쓰러져 있던 불원숭이가 손을 이용해 튕기듯 일어섰다.
불꽃이 튀는 듯하던 두 눈에 증오를 한가득 담은 채 팔라토의 등을 쏘아보았다.
“팔라토 경!”
아르센의 경악 섞인 외침에 대답이라도 하듯이 허리춤에 찬 칼을 뽑은 팔라토가 몸을 돌리며 칼을 휘둘렀다.
팔라토를 향해 손을 뻗던 불원숭이는 허무하게 머리가 날아가며 쓰러졌다.
“대부분의 마수는 생명력이 강하다네. 목을 자르기 전엔 절대 방심하지 말게.”
“…알겠습니다.”
그제야 팔라토는 투구를 벗어 땀에 젖은 머리를 빗어넘기며, 씩 웃음을 지었다.
“방금 그건 꽤 좋은 교훈이 되지 않았나?”
“혹시 살아있는 줄 알고 일부러 그러신 겁니까?”
“신경 쓰고 있긴 했지. 사실 올바른 방법은 쓰러진 상대를 두고 원거리에서 투창 같은 걸로 확인사살하는 거라네.”
팔라토는 그렇게 말하며 안장에 달린 투창을 툭툭 쳤다.
방금 전의 그 멋진 장면이 교훈을 주려고 일부러 연출한 거라는 점은 좀 깨긴 했지만, 팔라토의 무력은 굉장히 깊은 인상을 주었다.
팔라토가 연무장에서 아르센이나 다른 종자들, 혹은 기사들과 대련하며 보여준 실력은 실제의 반도 안 되는 수준이었다.
방금 보여준 전투는 진을 능숙하게 다루는 기사가 어떻게 마수와의 싸움에서 우위를 차지할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교본과도 같았다.
“팔라토 경의 모습을 보니 저도 진을 가지고 싶어집니다.”
“힘내게. 자네가 기사로서 충분한 기량을 갖출 때면 생기지 않겠나? 물론 루덴 경을 닦달해야겠지만.”
이후 팔라토의 지시를 받아 수석 종자가 불원숭이의 아랫배 부분을 갈라 동그란 구슬을 꺼냈다.
팔라토의 말에 따르면 이 구슬에는 강력한 열기가 담겨 있다고 했다.
“우리 영지의 겨울을 책임져 줄 물건이기도 하다네. 겨울에 이 구슬을 담은 난로를 쓰면 후끈후끈하거든. 한 알이면 큰 건물 한 채를 겨울 내내 데울 수 있지.”
“그것도 루덴 경이 만드는 겁니까?”
“당연하지. 마법사가 아니면 누가 그런 걸 만들겠나.”
그렇게 마법사를 두려워하고 꺼리면서도 마법사가 없이는 제대로 살 수 없는 문명을 유지하고 있다니.
아르센은 이런 현실이 굉장히 아이러니하게 여겨졌다.
하지만 마법사도, 기사도 결국 서로에게 어느 정도 의존할 수밖에 없는 것이 이 세계의 사회구조였다.
마법사는 강한 마수나 다른 기사에 맞서 싸울 능력이 없으며, 기사는 전투와 생활을 보조할 마도구를 만들어낼 능력이 없으니까.
그렇게 생각하던 아르센은 문득 궁금해졌다.
루덴은 이 상황에 불만이 없을까? 영주관 구석에 있는 탑에 거의 격리되다시피 한 채로, 끊임없이 영지에 필요한 마도구만을 찍어내야 하는 상황에.
‘나중에 돌아가면 한 번 물어봐야겠군.’
* * *
“자네 바보인가? 이 영지만큼 마법사에 대한 대우가 좋은 곳도 드물어.”
외부 순찰에서 돌아온 다음날, 루덴에게 질문하자마자 들은 대답이었다.
별 멍청한 놈 다 보겠다는 표정으로 한쪽 눈을 찡그리던 루덴이 말을 이었다.
“내가 전에 말했듯이 젊은 시절에 마법을 배운답시고 여기저기를 전전하며 느낀 바이지만, 영주나 성주라는 놈들은 대부분 개자식이라네. 마법사를 탑에 가두는 정도는 예삿일이고, 도망치지 못하게 발목을 자르거나 눈을 뽑는 경우도 흔하지. 머리 나쁜 놈들은 마법사는 나쁜 거니까 사냥해 죽여야 한다고 생각하기도 한다네.”
그리고는 낮은 목소리로 으르렁거리며 덧붙였다.
“내 스승님도 마법사를 도망치지 못 하게 하고 싶었던 영주 때문에 한쪽 발목을 잘리셨지.”
살벌한 루덴의 말에 아르센은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덤으로 난 탑에서 못 나가는 게 아니라 안 나가는 걸세. 영주님은 내가 돌아다니는 걸 막으신 적이 없어. 나가서 다른 사람 만나봐야 좋을 일이 없는데 뭐 하러 나가겠나.”
약간 변명하듯 덧붙여진, 방구석 폐인 같은 변명을 끝으로 고개를 숙인 루덴이 망치를 휘둘렀다.
완전히 우그러졌던 대검이 마법의 힘으로 발갛게 달궈지며 조금씩 펴지기 시작했다.
“하여튼! 위블! 이! 인간은! 무기고! 갑옷이고! 더럽게! 쓴다니까!”
망치질 한 번에 추임새를 넣듯 검의 주인을 욕하는 루덴이었다.
처음 루덴을 만났을 때 ‘왜 마법사가 저렇게 근육질이지?’라는 아르센의 의문은 루덴과 몇 번 더 교류를 가지며 금방 해소되었다.
처음 아르센과 만났을 때 했던 말대로, 루덴은 마도구를 만들어내는 마법사일 뿐만 아니라 영지 기사들의 무구를 손질하는 대장장이였다.
제작과 수리에도 마법의 힘을 이용하며 동시에 무기와 갑옷에 마법을 걸 수 있기 때문에 영지 최고의 대장장이라 할 만했다.
“망치질이나 수리는 마법으로 안 됩니까?”
“그런 마법을 알게 된다면 제발 꼭 좀 알려주게. 안 그래도 엘로이즈에게 망치질을 가르치려니 앞이 깜깜하거든. 그보다 이 계집애는 수리하는 거 배우라니까 어디로 도망갔어?”
푸념하듯 말하던 루덴이 아르센을 향해 손을 휘휘 저었다.
“엘로이즈 좀 찾아오게. 내 착각인지 모르겠는데 자네만 오면 도망가는 거 같거든. 사랑싸움이라도 했으면 좀 풀고.”
“제대로 말도 섞어본 적 없는데 무슨 사랑싸움입니까. 그것도 어린애를 가지고.”
“자기는 어린애가 아니라는 것처럼 말하는구먼? 키만 멀대같이 컸지, 동갑내기면서.”
맞는 말이기에 아르센은 입을 다물었다.
영지에 온 후로 기사로서 대접받는 경우가 많다 보니 가끔 자신의 신체연령을 망각하곤 했다.
최근에 많이 먹고 키가 쑥쑥 크고 있었지만, 그는 아직 열 살이었다.
“됐으니 찾아오기나 하게. 내가 늙어서 망치 못 잡으면 자네 무구를 누가 만들어 주겠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