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 Story of a Knight In A Ruined Fantasy World RAW novel - Chapter (104)
엉망이 된 시체에서 무기와 갑옷을 수거하는 병사들. 아르센과 마룬은 그런 그들과 조금 떨어진 곳에서 이야기를 나누기로 했다.
충분히 떨어졌다고 생각하자마자, 마룬이 다급히 물었다.
“혹시, 유적을 조종하는 법을 찾으신 겁니까?”
“비슷합니다.”
“비슷하다고 하면?”
아르센은 사실대로 솔직하게 말할 생각이 없었다.
모든 것을 털어놓는다는 것은, 처음부터 그가 별부르미를 의심하고 믿지 않고 있었음을 뜻하니까.
그렇기에, 아르센은 미리 준비한 변명을 늘어놓았다.
“이 유적에 들어오면서부터 환청 같은 게 들리더군요.”
아르센은 과거 들렀던 유적 두 곳에서부터 이상한 목소리가 어렴풋이 들려오기 시작했고, 이 유적에 들어오고서부터 제대로 된 언어가 들리기 시작했다고 설명했다.
정체불명의 목소리, 아마 유적이 말하기를 아르센은 마음만 먹으면 이 유적의 함정을 끄고 켤 수 있다고 주장했고, 혹시나 해서 일단 함정을 꺼 두었다는 이야기도 덧붙였다.
“유적의 소리를 들은 게 자의식 과잉으로 인한 환청인지, 아니면 정말 유적이 말하고 있는 건지 확신이 서지 않더군요. 괜히 정신병자 취급을 받을 순 없잖습니까.”
아르센의 말에, 마룬은 미심쩍은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 반응을 확인하고서, 아르센은 조금 전부터 미리 준비해 놓았던 반격을 꺼내 들었다.
“거기다 별부르미에서도 이에 대해 따로 이야기해 준 적이 없었으니까, 정상적인 현상이 아니라고 생각했습니다. 이전 계승자는 목소리를 들은 적 있습니까?”
아르센이 역으로 묻자, 마룬은 당황한 표정으로 특유의 이방 수염을 쓰다듬었다.
“따로 들어본 바가 없긴 한데, 잘 모르겠습니다. 아마 아닐 거 같은데요.”
“왜 그렇게 생각하십니까?”
“그게, 어렸을 때 어른들이 문을 여는 방법을 알게 된 계기를 말해 줬었거든요. 문 앞에서 온갖 방법을 다 시도하다가 제발 좀 열리라고 한탄하니 열렸다고요. 설마 그냥 열리라고 하면 열리는 줄은 아무도 몰랐다고······.”
저 말이 사실이라면, 확실히 이전 계승자는 목소리를 듣지 못했거나 듣고도 모른 척한 모양이었다.
고개를 끄덕여 긍정한 후, 아르센은 설명을 계속했다.
처음에는 그냥 환청인가 싶었지만, 안쪽에 있는 문을 열 때도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기에 슬슬 이것이 단순한 환청이 아니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당장은 물건을 수거하느라 바쁜 만큼, 유적에서 나간 뒤에 목소리를 들었음을 설명하고, 조언을 들어보려고 했다.
하지만 유적을 나가려다가 습격을 당했고, 모두가 위험한 순간 최선의 방책을 택했다······.
청산유수로 이어지는 설명은 분명 어느 정도 빈틈이 있었지만, 아르센은 그 모자란 부분을 라수르의 웅변에서 배운 호소력으로 채웠다.
상대를 또렷이 주시하는 눈빛, 그리고 단호한 어조.
모름지기 거짓말에 있어 가장 중요한 것은 말의 설득력이 아닌, 말하는 사람의 태도였다.
진실조차 어정쩡한 태도로 말하면 거짓처럼 들리고, 거짓이라도 확고한 믿음을 담아 말하면 진실처럼 들리기에.
“그랬군요······.”
고개를 끄덕이며 추임새를 넣는 마룬의 얼굴에는, 이제 배신감이 아니라 잠시나마 함께 싸운 전우를 의심한 것에 대한 죄책감이 깃들어 있었다.
그 표정을 보며, 아르센은 자신의 변명이 훌륭하게 먹혀들어 갔음을 깨달았다.
“아, 유적이 우리를 전투 인형이라고 하던데. 혹시 이거에 대해서 뭐 아시는 것 있습니까?”
“전투 인형 말입니까?”
마룬은 놀란 듯 눈을 크게 떴다.
“그······.”
뭔가 말하려던 것도 잠시, 마룬은 갑자기 입을 닫고 슬쩍 눈치를 보았다.
익숙한 패턴이었다. 뭔가 알고 있지만, 말해서는 안 되는 비밀임을 깨달았을 때의 반응.
이를 관찰하던 아르센의 눈이 슬쩍 가늘어졌다.
“뭔가 아시는 게 있는 거 같은데요.”
이미 대화의 분위기는 완전히 바뀌어 있었다.
잔뜩 무언가를 추궁할 기세였던 마룬은 오히려 반대로 비밀을 말해야 할 것 같은 상황에 위축되어 있었고, 아르센은 여유롭게 이를 몰아세우는 상황이었다.
마룬이 식은땀이라도 흘릴 것 같은 태도로 말했다.
“그게, 저는 잘.”
추궁할 만한 멘트는 여럿 있었다.
이쪽에 대한 것은 마음대로 물어봤으면서 정작 본인은 제대로 된 대답 하나 없느냐고 하거나, 이런 식으로 나오면 서로의 신뢰를 깨는 것은 네 쪽이 된다고 하거나.
하지만 아르센은 추궁하지 않았다.
“좋습니다. 말씀하시기 힘든 부분을 캐묻는 건 서로를 곤란하게 만들 뿐이겠죠.”
마룬이 미안하면서도 감사해하는, 묘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아르센이 깊게 추궁하지 않은 이유는 간단했다.
이미 그는 전투 인형이란 게 대충 뭔지 알고 있었고, 마룬이 이에 대해 언급하길 꺼리는 이유 역시 짐작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가 원한 것은 마룬의 반응뿐이었다.
이에 대해 무언가를 알고 있느냐, 모르느냐.
‘돌겠네.’
아르센의 의식은 몇 달 전, 벨루안에서 투구를 받았을 때로 돌아가 있었다.
모름지기 머리에 뭔가 씌우는 것은 누군가를 조종하는 상징적인 도구로 애용되는 법이다. 긴고아만 봐도 그렇지 않던가.
‘그때 그 투구······단순히 계승자 여부를 테스트하기 위함이었나? 아니면 그 자리에서 날 제압하려고?’
지나친 비약일 수도 있지만, 아르센은 그 투구가 기사를 통제하는 데 사용하는 고대 유물이 아닌가 하는 가설을 세웠다.
그리고 투구가 통하지 않음으로서, 아르센이 계승자임을 알아내게 된 것이고.
의혹을 속으로 삼키며, 아르센은 짐짓 쾌활하게 말했다.
“일단 나가죠. 저쪽도 정리가 다 끝난 거 같은데. 자세한 내용은 나간 뒤에 장로님들이랑 다시 얘기해 보는 걸로.”
“알겠습니다!”
무거운 대화를 피할 수 있어 마음이 편해졌는지, 마룬의 표정이 밝아졌다.
* * *
마법사들은 적 병사들이 타고 있던 기승수 중 그나마 크게 다치지 않은 몇 마리를 골라내어, 치유 주문을 걸어 활동할 수 있게 만들었다.
병사들은 무기와 진, 갑옷을 정리하여 기승수에 실었다.
유적 내부를 돌며 생존자를 찾는 과정은 퍽 지루한 것이었고, 또한 비위 상하는 일이었다.
‘곱게 죽었다’라고 표현할 만한 이는 거의 없고, 대부분 온몸이 불타거나 녹거나 으스러지거나 찢겨 있었던 탓이다.
“으······.”
병사 한 명이 역겹다는 듯한 표정으로 무기를 땅에 탁탁 두드려 털었다.
무기를 취급하는 방법으로서는 심히 무례한 방식이지만, 이에 항의할 주인은 이미 온몸이 녹아내려 바닥의 얼룩이 되어 있었다.
그렇게 수거한 무기와 갑옷의 수량은 상당했다.
물론 그것들 대부분은, 특히 갑옷은 그 상태가 불량하기 짝이 없었다.
그을리거나 녹아 비틀린 정도면 가장 양호한 것이고, 몇 조각으로 잘려 나갔거나 아예 중간 부분이 쇳물이 되어 없어진 부분도 있었으니 말 다 한 것 아니겠는가.
방 하나를 지나 다음 방으로 도착했을 때, 아르센 일행을 가장 먼저 반긴 것은 열 조각도 넘게 토막이 난 기사의 시체였다.
딱 봐도 유물 갑옷이라, 갑옷 안에 찬 살을 긁어내야 한다는 사실에 병사들은 좌절 섞인 한숨을 내쉬었다.
그때, 누군가가 앞을 보고 말했다.
“저기 저 사람, 살아있는 거 아닌가?”
“어디?”
방 중앙에서 조금 더 뒤쪽, 작은 신음이 들려왔다.
가까이 다가가 보니, 온몸에 커다란 구멍이 숭숭 뚫려 죽은 시체 사이에 기사 하나가 간신히 숨이 붙어 있었다.
기사는 아르센 일행을 보고 놀란 듯 눈을 크게 뜨더니, 이내 체념한 듯한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떨궜다.
다가가서 목을 짚어 본 병사 하나가 말했다.
“죽었습니다.”
그 기사의 이름이 라티임을, 동료들을 잃어 절망하다 반쯤 미쳐 함정을 뚫고자 달려들었음을, 그러다가 죽어가는 도중 마지막으로 구원자가 오길 기대했음을 아는 이는 없었다.
알고 싶어 하는 이도 없었고.
쓸쓸히 최후를 맞이한 그 시체 앞에서, 병사들은 덤덤히 다른 시체의 숫자를 헤아릴 뿐이었다.
“다 헤아렸나?”
“총 48구입니다. 이제 둘 남았습니다.”
“저거 아냐?”
바즈칼이 바닥에 흩어진 잿더미 두 개를 지목했다.
바로 옆의 그을린 흔적, 그리고 재의 양으로 보아 그것이 본래 사람이었음을 짐작할 수 있었다.
이를 내려다보며 병사 두 명이 혀를 내둘렀다.
“도대체 뭘 당했길래 아예 이렇게 재만 남은 거지?”
“글쎄······.”
두 명을 추가해 헤아린 뒤, 아르센은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전부 다 확인했군.”
정확히 오십 명. 그 많은 숫자가 이 유적에 뼈를 묻는 데 걸린 시간이 얼마던가.
아르센은 생명의 덧없음에 내심 허탈해하는 한편, 또한 안도했다. 이걸로 이 유적에서 아르센이 유적을 조작할 수 있음을 아는 적은 모두 죽었기에.
* * *
돌아오는 길, 기승수와 짐이 한가득 늘어, 그들은 발굴대가 아닌 상단처럼 보였다.
엘로이즈가 귀걸이로 슬쩍 말을 걸었다.
[마룬이랑은 얘기가 잘 됐어?] [응. 확실하진 않지만, 저쪽도 아무것도 모르는 거 같더라. 유적의 목소리에 대해서는.]물론 마룬이 모를 뿐, 별부르미에서도 모른다는 확신은 없었다.
사실 마룬은 비밀을 맡기기에 적합한 성격이 아니니까.
하지만 설령 별부르미가 목소리에 대해 알고 있더라도 아르센 이전의 계승자는 고작 한 명, 목소리라는 것이 늘 명확히 들리는지, 아르센이 말하는 것처럼 ‘발달 과정’이 필요한 것인지는 그들도 확신할 수 없을 것이다.
고개를 저어 생각을 털어낸 뒤, 아르센은 주제를 돌렸다.
그들이 수거한 진은 총 네 개로, 본래 상대가 타고 온 것은 일곱 개이나 그중 세 개는 도저히 수리가 불가능한 상태였던 탓에 사실상 고철이나 다름없었다.
벽에 깔려 뭉개지고, 정체불명의 용액으로 녹아 버리고, 마지막 하나는 이리저리 잘려 나가 아예 그 형체를 알아볼 수 없을 지경이 되었으니.
셋의 공통점은, 진의 핵심이라 할 수 있는 심장과 내부기관이 만신창이가 됐다는 것이었다.
외부라면 모를까, 그렇게 된 것은 다시 고쳐 살리느니 차라리 새로 만드는 것이 더 나았다.
이야기하던 중, 슬슬 도시 외곽의 방벽이 보이기 시작했다.
도시로 들어오는 길, 주위에 있는 모든 사람이 아르센의 군대를 주목했다.
뒤에 엄청난 양의 무기와 갑옷, 진까지 쌓아놓고 들어오는 것은 누가 봐도 유적 공략에 성공한 이들의 모습이었으니.
다른 발굴단은 과연 저들이 어느 유적을 공략했는지, 이제 아무 것도 남지 않았을 그곳이 어디인지를 알고 싶어 했다.
험난한 과정을 거쳐 발굴에 성공했는데, 이미 누가 다 파헤치고 나서 찌꺼기만 남은 곳이었다면 기분 좋을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하지만 감히 그 유명한 ‘목 꺾는 기사’를 멈춰 세우고 이를 물어볼 정도로 용기 있는 사람이 없었기에, 그들은 어떠한 방해 없이 여관에 돌아올 수 있었다.
“돌아왔다-!”
“내 고향!”
바즈칼과 마룬, 두 사람이 함께 문을 박차고 여관 안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두 사람은 놀랍도록 용맹한 여주인에게 제발 문 좀 작작 걷어차라는 잔소리를 들으며 시무룩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또 그러면 진짜 쫓아낼 줄 알아요!”
일개 여관 주인이 기사와 마법 기사를 압도하는 그 장엄한 광경에, 홀에 있던 사람들은 모두 감탄하며 손뼉을 쳤다.
* * *
도착한 후, 그들은 유적에서 얻은 물건을 분배했다.
우선 유적 내부에서 얻은 전리품은 모두 팔아 그 수익을 절반으로 나누는 데 합의했지만, 그들을 공격했던 적에게서 나온 전리품을 어떻게 분배하느냐가 문제가 되었다.
유적에서 싸웠다고 해서, 그것을 유적에서 나온 전리품으로 친다는 것은 누가 봐도 과잉 해석이었다.
그렇다고 일단 함께 위험을 감수하고 싸운 마당에 아예 배당을 챙겨주지 않는 것도 분열의 여지가 있었고.
하지만 이 부분에서, 마룬은 덤덤하게 선언했다.
“전리품은 모두 아르센 경의 몫이죠, 저희는 손대지 않겠습니다.”
실상 적 대부분을 아르센이 직접 물리친 것이나 다름없는데, 여기서 분배를 받기에는 양심에 꺼려진다고 말하며 마룬은 물러섰다.
아마 이 결정에는 마룬의 개인적인 감정이 상당히 깃들어 있으리라 짐작할 수 있었다.
정중히 감사를 표하는 한편, 아르센은 진 한 기를 바즈칼에게 배분한 뒤 남는 진 모두를 마법사들이 탈 수 있도록 빌려주겠노라고 말했다.
“어쨌든, 지금의 우리는 공동운명체나 다름없지 않습니까. 일행 전체의 전력을 올리는 게 중요하죠.”
아르센으로서는 말 그대로 실용주의적 측면에서, 멀쩡한 진을 놀리느니 이를 조종할 수 있는 마법사들이 타는 쪽이 이득이라는 판단 아래 내려진 결정이었다.
부하 중 기사가 탄생한다면 효율 문제상 기사 쪽으로 진을 돌리겠다는 이야기도 했고.
하지만 이 말을 어떻게 받아들였는지, 마룬과 마법사들은 꽤 감동한 것으로 보였다.
그렇게 이익 분배라는, 세상에서 가장 분쟁과 불화가 많은 과정을 놀랍도록 순조롭게 끝낸 그들에게 남은 것은 시장 판매였다.
아르센 일행이 이번에 얻은 물건은 내부 구역에 있는, 말 그대로 도떼기시장 같은 곳에서 가볍게 판매할 만한 양이 아니었다.
적어도 상회나 그에 준하는 다른 조직에 정식으로 대량 판매를 하지 않는다면, 이만한 물량을 모두 처리하기 위해 꽤 오랜 시간 고생해야 할 터.
그리고 큰 거래에는 언제나 인맥이 필요한 법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