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 Story of a Knight In A Ruined Fantasy World RAW novel - Chapter (106)
유적 도시에서 가장 위험하고 많은 사상자를 낸 것으로 알려진 곳, 위곤 유적.
이 역시 거울 납골당과 마찬가지로 꽤 오랜 세월 개척되지 않은 미발굴 유적지로, 그 악명 탓에 지금 와서는 공략을 시도하는 자가 거의 없었다.
새벽 발굴단 같은 괴짜들이 아니라면.
“크아아악!”
“빨리 저 녀석 빼내고 물러서!”
다리가 으스러져 비명 지르는 기사 한 명이 동료의 부축을 받아 뒤로 빠지는 가운데, 라수르는 용맹하게 적을 향해 돌진했다.
그가 돌진하는 적은 인간도, 마수도 아니었다.
다리부터 머리까지, 전신까지 차가운 금속으로 이루어진 영혼 없는 거인들.
흔히 강철 거인이라 불리는 그들이야말로 위곤 유적의 주인이자, 발굴대를 막아서는 주적이었다.
이들의 크기는 보통 3m에서 4m 정도로, 안이 금속으로 꽉 찬 거운 몸뚱이, 그리고 체중에 맞지 않는 민첩성으로 인해 기사조차 방심할 수 없는 강적이었다.
“받아라!”
기합과 함께, 라수르의 검이 적을 향해 휘둘러졌다.
그 체중을 지탱하고자 인간과 달리 두껍게 만들어진 다리. 금속으로 되어 단단하기 그지없는 그 다리를 라수르의 검은 정육점의 고기를 가르듯 가볍게 파고들었다.
라수르의 검에서 흘러나오는 은은한 빛 덕분이었다.
가름칼.
그런 이름으로 불리는 이 유물은 유적 도시에서도 두 개밖에 발굴되지 않은, 가장 강력한 무기 중 하나였다.
특수한 몇몇 유물을 제외한, 거의 모든 물질을 절단할 수 있는 파괴의 빛을 발하는 무기.
가름칼 발굴대의 이름은, 바로 이 유물에서 나왔다.
“잘랐다!”
“죽여 버리십쇼!”
다리가 잘린 거인은 그대로 균형이 무너져 쓰러졌지만, 고통을 호소하지도 비명을 지르지도 않았다.
조금도 동요하지 않고 라수르의 목숨을 끊고자 주먹을 휘둘렀을 뿐.
“크윽······!”
라수르는 재빨리 몸을 틀어 간신히 주먹을 피했다.
스쳐 지나가는 매서운 풍압으로 미루어 짐작건대, 직격으로 맞았다면 그 자리에서 머리가 뭉개져 절명했을 것이다.
“라수르 경! 뒤에서 옵니다!”
누군가의 경고. 뒤를 돌아보니 쿵쿵거리는 소리와 함께, 강철 거인 두 기가 라수르를 포위하듯 다가오는 것이 보였다.
“크흡!”
라수르는 쇄도한 거인들이 자신을 뭉개 버리기 직전, 진을 탄 채 몸을 숙여 미끄러지듯 거인의 다리 사이를 통과했다.
기술과 담력이 모두 필요한, 누가 봐도 감탄할 묘기였다.
하지만 그렇게 빠져나와 봐야 일시적인 모면일 뿐, 근본적인 해결책은 되지 않았다.
다리를 다친 기사와 이를 부축해 물러선 기사 한 명, 이제 남은 것은 라수르와 이를 보조할 전사 두 명, 마법사 한 명뿐.
초조함으로 마른 입술을 적시며 라수르가 눈앞의 거인들을 보고 있던 중, 뒤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뒤로 물러서.”
“크렌!”
그를 도우러 온 새벽 발굴단의 단장, 크렌이 진을 몰아 맹렬한 속도로 달렸다.
마치 무게가 없는 듯한 움직임으로 도약한 크렌은, 라수르를 노리던 거인의 머리 위에 도달했다.
거대한 대도가 휘둘러지고, 거인의 목이 맥없이 떨어졌다.
조금 전까지 보여 주던 투지 넘치는 모습과 달리, 머리 잃은 거인은 맥없이 땅에 쓰러지더니 순식간에 스르륵 녹아 사라졌다.
그 모습을 감상할 새도 없이, 크렌은 다시 몸을 날렸다.
두 번째 거인과 세 번째 거인이 그를 노리기 시작한 탓이었다.
걷어차려는 발길질과 뻗어오는 손.
크렌은 지그재그로 몸을 놀려 두 공격의 사선에서 벗어나더니, 빠르게 진에서 뛰어내리며 손을 뻗어오던 거인의 팔을 박차고 도약해 머리를 잘라냈다.
그리고 그대로 거인의 몸에서 도약, 자신이 뛰어내렸던 진에 다시 탑승했다.
“오오.”
누군가의 감탄사가 멀리서 들려오는 가운데, 두 번째 거인까지 사라지자 이제 남은 것은 한 기.
그렇게 생각하고 있을 때, 바닥에서 그 정체를 알 수 없는 검붉은 액체가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마치 바닥에서 스며들듯 흘러나온 액체는 점점 위로 솟구치더니, 이내 모양이 잡히며 굳어지기 시작했다.
잠시 후, 그것들은 조금 전 크렌이 죽인 것보다 더 큰 거인이 되었다.
붉은 안광을 빛내며 크렌을 노려보는 거인 네 기.
“후우······.”
싸움에 앞서 정신을 집중하고자, 크렌은 가늘게 호흡을 흘려내며 정신을 다졌다.
그때, 그런 크렌을 향해 라수르가 지시했다.
“돌아오게, 크렌. 지금은 승산이 없을 것 같으니.”
* * *
“으으······.”
전투가 끝난 뒤, 유적 외부로 물러선 그들은 부상자를 치유하고 재정비하는 시간을 가졌다.
다행히도 사망자는 없었고, 가장 심한 부상이 조금 전 다리를 걷어차여 으스러진 기사였다.
사실 거인의 체중과 속도를 생각하면, 잘려 나가지 않은 것이 기적이었다.
“어떻게, 치료는 잘 되어 가나?”
“어느 정도는요.”
하지만 짧은 시간 동안 너무 많은 부상이 생긴 만큼, 체력도 떨어지고 환상통 역시 심할 거라고 덧붙였다.
발굴대에 속한 마법사가 그렇게 선언하자, 옆에 있던 동료들이 한숨을 내쉬었다.
그런 그들을 향해, 크렌이 다가와 말했다.
“조금만 더 싸우면 뚫을 수 있을 것 같았는데.”
평상시처럼 무뚝뚝한 어조로 그렇게 투정을 부리자, 라수르가 어린아이를 대하듯 잔잔한 어조로 말했다.
“자네라고 해도 혼자 강화 거인 넷은 힘들잖나. 도와주기엔 우리도 좋지 않은 상황이었고.”
라수르의 말에 크렌은 다소 불만 어린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더니, 그대로 자리에 주저앉았다.
“어렵군, 이 유적은.”
“정말로 그렇다네. 이게 금역(禁域) 중 가장 공략하기 쉬우리라 짐작한 것은 도대체 누구인지.”
라수르가 쓰게 웃으며 말을 받았다.
유적 도시의 발굴꾼 대부분이 꺼리는, 공략 불가능으로 알려진 금역이 몇 군데 존재했다.
그 위치가 명확히 밝혀졌음에도 불구하고 적어도 수십 년, 혹은 수백 년간 공략되지 않은 유적들.
그중에서도 최상위로 알려진 것이 통칭 ‘거울 납골당’이라 불리는 라니아 유적, 마법 함정으로 악명 높은 이레 유적, 그리고 이 위곤 유적이었다.
누군가가 평가하기를, 그저 무력으로 뚫으면 될 뿐인 위곤 유적이야말로 삼대 금역 중 최약체라던가.
크렌의 부하 하나가 어이없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개소리죠, 시발. 그 소리 한 놈은 평생 여기 구경도 안 해봤을 겁니다. 애초에 상대에 맞춰서 거인이 나오는데······.”
“그러게 말일세.”
라수르가 껄껄 웃으며 동의했다.
위곤 유적의 거인들이 고정된 숫자만 나왔다면, 공략되지 않을 이유는 없었을 것이다.
누군가가 작정하고 기사 백여 명을 모아 돌진한다면 거인 몇 기가 나와 봐야 버틸 재간이 있겠는가.
실제로 백오십여 년 전, 위곤 유적이 등장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 그런 방법을 시도한 이가 있었다.
그는 발굴한 유물의 평등한 분배를 조건으로 다른 발굴대 를 설득해 무려 팔십 명이 넘는 기사, 그 몇 배에 달하는 전사들을 모아 유적에 도전했다.
그 결과, 유적 도시는 한동안 쇠퇴기를 맞아야 했다.
덤벼든 인원의 몇 배에 달하는, 천 기 이상의 거인들이 나타나 기사들을 짓이겨 버린 것이다.
조금 전에도, 거인이 나오는 것에 영향을 주지 않고자 크렌과 그 일행은 일부러 전투에서 빠져 있었다.
그리고 그가 참전한 순간, 유적은 크렌의 강함을 측정하여 강화 거인을 네 기나 내놓았다.
“아무튼, 이번에도 소득은 있었네. 거인의 행동 양식 하나를 더 알았어. 2층까지 오기도 했고.”
조금만 더 노력하면 공략에 성공할 수 있을 거라고, 라수르는 설득력 있는 목소리로 동지들을 고무시켰다.
안타깝게도, 분위기는 그리 밝지 않았다.
그 모습을 본 라수르의 얼굴이 조금 흐려졌다.
“아무래도, 돌아가는 게 좋겠나?”
“네······.”
“다들 많이 지쳤습니다, 라수르 경.”
라수르의 부하들만이 아니라, 크렌의 부하들까지도 이만 철수하자는 의견이 대세였다.
옆에서 이를 듣던 크렌이 작게 말했다.
“아쉽군.”
그 역시 원하지는 않지만, 부하들의 상황으로 보아 돌아가는 것이 좋겠다는 의사를 표시한 것이었다.
* * *
도시에 들어오는 길, 새벽 발굴단의 정예들은 썩 주목을 받지는 못했다.
이들 역시 나름대로 명성 있는 집단이긴 하나, 딱히 많은 수확물을 들고 오는 모습을 보이지 못한 탓이었다.
여관의 1층 홀, 아르센은 돌아온 라수르에게 무용담을 청하며 술자리를 제안했다.
라수르는 유적을 공략하느라 쌓인 피로가 남아 있을 것임에도 불구하고, 흔쾌히 이를 수락했다.
“고생이 많으셨던 것 같습니다.”
“그렇소, 매우.”
과연, 이미 씻고 휴식을 취했음에도 불구하고, 술을 받는 라수르의 얼굴에는 진한 피로가 깃들어 있었다.
“내가 이번에 어딜 공략하려 했는지 들으셨소?”
“전에 말씀하셨던 위곤 유적 아닙니까? 강철 거인의 땅.”
“맞소.”
다시 술을 한잔 걸친 후, 라수르는 불콰해진 얼굴로 말했다.
“전에도 말했었지만, 정말 쉽지 않은 곳이오. 이번에는 좀 더 진도가 나갔었는데······.”
라수르는 취한 사람답게 횡설수설하며 말했다.
이번 유적의 성과부터 시작해 그들이 그간 해왔던 일, 지향하는 목표와 그간 마주쳐야 했던 난관 등이 맥락 없이 아무렇게나 흘러나왔다.
어지간히 인내심 있는 사람이라도 참고 들어주기 힘든 장광설이었지만, 아르센은 끈기 있게 엉덩이를 붙인 채 그의 술주정을 받아냈다.
그 와중에 몇몇 중요한 정보를 얻을 수 있었다.
위곤 유적에 대한 이야기들을.
“3층, 설명에 따르면 분명 3층까지만 돌파하면 끝인데 2층조차 정말 어렵단 말이지······과연 거기까지 도달하는 것이 가능한지 확신이 서지 않는단 말아. 정말로.”
“분명히 성공하실 수 있을 겁니다.”
격려와 함께 잠시 소강상태가 되자, 아르센은 그 틈을 타서 미리 준비한 질문을 꺼냈다.
이번에 위곤 유적을 공략하러 떠나기 전, 라수르에게 꼭 물어보고 싶었던 질문을.
그가 일부러 술자리를 제안한 이유이기도 했다.
유적 몇 개를 공략하며, 아르센은 묘한 배덕감을 느꼈다.
목숨을 걸고 발굴을 시도하는 이들 사이에서, 혼자 주머니에 든 물건 꺼내듯이 유적을 뚫는 것은 어쩐지 정당하지 않다고 느껴진 탓이었다.
특히 그중에서도 라수르와 새벽 발굴단은 아르센과 같은 목표를 노리고 있으면서 그에게 큰 호의를 보이고 많은 도움을 주었기에, 아르센은 이들에게 미안한 감정마저 느끼고 있었다.
마지막 유적을 공략하기 전, 아르센은 이 감정을 확실하게 털어내고 싶었다.
“라수르 경과 새벽 발굴단의 목적 있잖습니까.”
“음?”
“세상을 원래대로 되돌린다는 계획이요.”
아르센의 말에 라수르가 웃으며 답했다.
“그랬지, 맞소. 그래서 그건 갑자기 왜?”
“만약 누군가 다른 사람이 그 비원을 이룬다면 어떠실 것 같습니까? 라수르 경도, 크렌 경도 아닌 전혀 상관없는 사람이 고대의 비밀을 밝혀내어 전 세계의 독기를 없앤다면요.”
아르센의 질문에, 술에 취해 헤실거리던 라수르의 얼굴이 진지하게 변했다.
취객의 고민은 생각보다 길어졌다. 몇 분 가까이 침묵이 이어지는 동안 아르센은 묵묵히 대답을 기다렸다.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라수르가 불쑥 대답했다.
“아쉬울 것 같소.”
“아쉽다라······.”
그렇게 라수르의 말을 되뇌며 곱씹은 뒤, 아르센이 다시 질문을 던졌다.
“그게 끝입니까? 그저?”
“그야 뭐, 내가 아니라 누가 하더라도 결국 세상이 좋아지는 거 아니겠소? 기왕이면 내가 해서 모든 영광과 찬사를 받고 싶소. 나도 사람이라 영광을 탐하니. 하지만······누군가 더 뛰어난 사람이 일찍 해결해 준다면 좋은 일이지. 그만큼 더 빨리 모든 사람이 행복해질 테니까.”
대답하는 라수르의 얼굴에 삿된 기색은 보이지 않았다.
그 태연한 얼굴을 보며, 아르센은 끊임없이 상대의 악성(惡性)을 읽어내려 했다.
하지만 아무리 보고 또 봐도, 아무것도 읽을 수 없었다.
그때, 라수르가 불쑥 입을 열었다.
“아르센 경.”
“네.”
“부디 하는 일 잘 풀리길 빌겠소.”
미묘한 어조, 아르센은 허를 찔린 기분에 자기도 모르게 얼굴을 굳혔다.
그런 뒤 자신이 상대의 속내를 읽어내려다 되려 읽혔음을, 그리고 속내를 드러낸 사람 특유의 방어적인 태도를 취했음을 깨닫고 다시 얼굴을 자연스럽게 돌리려 노력했다.
이미 다 보여준 마당에 그런 행위가 의미 없음을 알면서도.
“격려 감사합니다.”
“진심으로 하는 이야기요. 함께 한다면 더 좋겠지만, 나름대로 사정이 있겠지. 이를 캐묻는 것은 예의가 아닐 것이고.”
라수르가 암시하는 바는 명확했다. 그는 조금 전 암시한 ‘성공하는 자’가 아르센 본인일 것임을 명확히 인지하고 있었다.
이제 그의 눈빛은 취한 자라고 볼 수 없을 정도로 맑았다.
“내가 아주 먼 옛날에, 어렴풋이 들은 이야기가 있다오. 그 어떤 유적이라도 자기 마음대로 통과할 수 있는, 특별한 사람에 대한 이야기.”
그것이 계승자에 대한 이야기임을 의심할 필요는 없는바, 아르센은 자기도 모르게 품속에 넣어둔 단검에 신경이 쏠리는 것을 느꼈다.
어쩌다 들킨 것인지는 짐작조차 가지 않았다. 거울 납골당은 아예 입구만 들어갔다가 나온 것처럼 위장했고, 이레 유적에 갔다는 사실을 아는 이는 모두 죽였다.
그런데, 도대체 왜.
“나는 사람을 꽤 잘 본다오.”
라수르가 혼잣말과 함께 술을 한잔 더 마셨다.
그리고, 아르센이 듣든 말든 상관없다는 듯 말을 이었다.
“경과 처음 만났을 때부터 위화감을 느꼈지. 얼핏 보면 마법사들과 거리를 두고 있어 거부감을 느끼는 것처럼 보이지만, 오히려 그게 일부러 꾸며낸 것처럼 보였거든.”
정작 무의식중에 가까이 붙다가 스스로 그것을 깨닫고 떨어지려는 것이 보였노라고, 라수르는 웃으며 말했다.
이제 더 의심할 필요가 없었다. 라수르는 계승자에 대한 정보를 가지고 있었고, 아르센을 의심하고 있었다.
입을 막아야 하나, 아니면 애원해야 하나, 협박해야 하나?
행동 지침을 명확히 정하지 못한 탓에, 아르센은 대답하지 않고 빈 잔에 술을 따르며 시간을 끌었다.
유적 도시의 전통주, 적갈색을 띤 액체 위에 거품이 방울방울 올라왔다.
“확신은 없소. 어차피 내 착각일 수도 있지. 워낙 전설 같은 얘기니까······아마 경이 지금 내가 하는 말의 뜻을 이해하지 못한다면 내 착각일 거요. 하지만 사실이라면 부디 성공하길 바라오. 내가 아니더라도, 누구라도 세상을 더 낫게 바꾸길 바라니까. 크렌도 같은 마음일 거요.”
진지하기 없는 어조로 선언한 뒤, 라수르가 아르센의 잔에 술을 따랐다.
그러더니, 악동 같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혹시 진짜라도 이야기하지는 말아 주시오. 나도 사람이라, 부러워서 질투가 날 것 같거든.”
그 장난스러운 웃음을 마지막으로, 둘은 이 주제에 대해 더 이야기를 나누지 않았다.
이후, 영양가 없는 잡담 몇 마디를 나누다 술자리를 끝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