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 Story of a Knight In A Ruined Fantasy World RAW novel - Chapter (107)
해가 하늘 높이 뜰 무렵, 원정을 위한 준비를 마친 일행은 여관을 나왔다.
그들이 운반해야 할 짐은 그 크기가 꽤 간소해져 있었는데, 이번에 상회에서 구매한 물건 덕분이었다.
이름하여 공간 압축 가방으로, 그 크기는 사람의 상반신 세 개 정도였지만 안에 들어갈 수 있는 물건의 크기는 그보다 훨씬 크고, 무게 역시 줄여 주었다.
기존에 아르센이 사용하던 배낭처럼 간단히 휴대할 수 있는 사이즈는 아니었지만, 그에 비해서도 들어갈 수 있는 내용물은 훨씬 많았다.
이것을 두 개나 구매한 덕분에, 이제 여관에 짐을 남겨놓지 않고도 빠르게 움직이는 것이 가능해졌다.
나가는 길, 동문 경비가 아르센에게 말을 걸었다.
그는 갓 성인이 되었다 싶을 정도로 젊은 청년이었는데, 아르센을 보는 눈에 동경이 한가득 담겨 있었다.
누군가의 과분한 선망은 당사자에게 민망하게 느껴지는 법이라, 나름 얼굴 두꺼운 편이라 생각하는 아르센조차 민망한 느낌이 들어 이를 감춰야 할 지경이었다.
“부디 성공을 기원합니다, 아르센 경!”
“아······고맙다.”
그 떨떠름함을 읽지 못했는지, 아니면 무시한 것인지, 경비는 열렬히 손을 흔들며 그를 배웅했다.
옆에 있던 조금 나이 든 경비가 적당히 하라고 눈치를 줄 때까지 계속.
바즈칼은 다른 사람 하나를 붙들고 놀고 있었는데, 그 대상은 이제 꽤 몸을 회복해 유적 공략에 합류한 아눈이었다.
그가 돌아온 덕에, 이제 일행은 처음 유적 도시로 들어오기 직전의 구성으로 돌아와 있었다.
“아눈 경, 이렇게 같이 떠나는 거 오랜만 아닙니까?”
“그러게 말입니다!”
사이좋게 껄껄 웃던 것도 잠시, 바즈칼이 타고 있는 진을 조작해 좌우로 폴짝폴짝 뛰었다.
신기하다는 듯한 탄성은 덤이었다.
“오오오.”
그가 타고 있는 것은 강도들이 타고 있던 네 기의 진 중 하나로, 맹금류의 얼굴에 늑대의 몸통, 고양이처럼 길고 탄력 있는 꼬리를 가진 기체였다.
“연습은 해봤지만 넓은 데서 이렇게 해보니까 되게 신기하네요. 아눈 경도 한번 해보시죠?”
“어디······.”
그새 죽이 맞아 시끌벅적하게 떠드는 아눈과 바즈칼을 보며, 아르센은 절레절레 고개를 저었다.
그도 잠시, 슬쩍 뒤쪽으로 고개를 돌려 관문을, 그리고 그 너머에 있을 도시를 보았다.
그리고, 라수르와 나눴던 대화를 떠올렸다.
* * *
함께 술을 마신 다음 날 아침, 아르센은 라수르에게 사람을 보내 산책이라도 함께 하지 않겠느냐고 제의했다.
상당히 뜬금없는 제안이었지만, 라수르는 기다렸다는 듯이 이를 수락했다.
이른 아침에 거리를 돌아다니는 사람은 거의 없었고, 그 덕분에 비밀 이야기를 하기에 아주 적합했다.
구두 소리가 적막한 거리를 울리는 가운데, 아르센이 먼저 운을 뗐다.
“지난밤에 꽤 생각을 많이 했습니다.”
“그렇소?”
“네. 솔직히 말씀드리자면, 한밤중에 도시에서 도망치는 것까지 생각했죠.”
아르센의 말은, 사실상 본인이 계승자임을 인정하는 것이었다. 이에 라수르가 난처한 웃음을 지었다.
“행여나 그렇게 생각할까 싶어 말하지 않았던 건데, 이래서 술이 주책이라는 것이지. 젊었을 적에는 그 정도 마신다고 그리 입이 가벼워지지는 않았는데, 세월이라는 게 참.”
사실 지난밤, 아르센의 머릿속에서 세워지고 폐기된 계획은 한두 개가 아니었다. 도망, 뇌물로 설득, 협류 권유, 협박, 마지막으로는 죽여서 입을 막는 것까지. 하지만, 각각 치명적인 문제나 단점이 존재했다.
“그래서, 지금 생각은 어떻소?”
“별 생각 없습니다.”
아르센의 대답에 라수르의 얼굴에 의문이 깃들었다.
“별 생각 없다면?”
“지금까지 제게 쭉 호의를 보여 주셨죠. 크렌 경의 도움을 받는다면 언제든 유적 밖에서 제 뒤를 쳐서 저를 제압하실 수 있는데도요. 그래서 일단 친구라고 생각하기로 했습니다. 제가 혹시 잘못 생각했습니까?”
“아니, 아니지······잘 생각했소, 아주 잘.”
라수르가 빙긋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하나만 물어도 되겠소?”
“말씀하십시오.”
“삼대 유적은 모두 정복될 것 같소?”
지금까지와는 달리, 라수르가 무거운 목소리로 물었다.
아르센은 거기에 단호히 선언했다.
“그렇게 될 겁니다.”
잠시 침묵이 지나고, 라수르가 말했다.
“내가 꽤 젊은 시절의 이야기요. 아마 십 년은 넘었고 이십 년은 안 된 거 같군.”
때마침, 기승수 하나가 끄는 수차(獸車)가 터덜대며 지나갔다. 둘 사이의 말을 누구도 엿들을 수 없도록, 바퀴가 돌을 구르는 소음이 주위를 채웠다.
“큰 규모의 마법사 무리 하나가 이 도시에 들어온 적이 있었지. 서른 명도 넘는. 그들은 자기들을 별부르미라 했지.”
그가 이야기하는 것이 무엇인지 짐작했기에, 아르센은 경악으로 자기도 모르게 눈을 크게 떴다.
라수르는 지금, 15년 전의 별부르미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당시 나는 한창 젊은 기사였지만, 이런저런 일 때문에 한량 신세였소. 집안에서도 나돌고, 동료를 모으기엔 악명이 자자해서 마땅찮고······이런 이야기는 재미없을 것 같군.”
바퀴 소리가 끝나자, 라수르는 주위로 고개를 휙휙 돌렸다.
누군가 훔쳐 듣지 않나 확인하듯이.
“그 마법사들은 꽤 독특한 패거리였소. 서른 명도 넘는 마법사들이 모여 다니는 것부터 특이했고, 그중에 마법사이자 기사인 자가 두 명이나 있어 더더욱 특이했지. 경의 무리에 있는 자처럼 말이오.”
마룬을 말하는 것이 분명했다.
아르센은 묵묵히 고개를 끄덕여 긍정했다.
“하지만 당시 유적 도시는 지금보다 좀 더 마법사에게 배타적인 분위기였소. 그들이 지내기에 그리 좋지 않을 정도로. 그들은 이곳에 대한 제대로 된 정보가 없었고, 누구나 알다시피 마법사란 누군가와 교류하기 퍽 힘든 족속 아니겠소. 그들은 도시 내에서 손과 발이 되어줄 사람을 원했고, 당시 돈이 급했던 나는 고용주를 가릴 처지가 아니었지.”
“그들의 길잡이가 되셨던 겁니까?”
“그렇게 보면 되겠소.”
허허 웃던 라수르가 말을 이었다.
“놀랍게도, 별부르미는 당시 공략하기 힘든 것으로 이름 높던 유적들을 마치 제집처럼 간단히 드나들더이다. 그들 사이에 있던, 유일하게 마법사가 아닌, 계승자라 불리던 남자의 힘인 것으로 보였소. 그와 함께 있기만 하면 모든 함정이 열리고, 열리지 않는 문 역시 열리라고 말만 하면 열리더군.”
“그들이 그걸 그렇게 대놓고 보여줬단 말입니까?”
“그렇소. 어떤 비밀도 없다는 듯이, 그들은 계승자라는 존재에 대해서나, 유적과 도서관의 비밀을 자랑스럽다는 듯이 내 앞에서 이야기했소. 언젠가는 그네들 대장이 말하기를, 이 안에 세계를 구할 열쇠의 비밀을 감춰 놓겠다고, 우리가 실패했을 때 누군가가 도전할 수 있게 한다던가.”
라수르의 말만 들으면, 그는 숫제 별부르미의 일원이 되어 함께 유물을 수집한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마룬이 말하길, 이 도시에 남은 별부르미의 협력자는 없었다.
동료도 아닌 이의 뭘 믿고 이런 비밀들을 노출했단 말인가?
의문도 잠시, 라수르가 그 이유를 알려 주었다.
“유물 수집이 끝날 무렵, 그들이 내게 합류를 제안했소. 자기들은 이 세상을 구원할 계획이 있으며, 내 도움이 필요하다고. 얼굴이 되어줄 수 있는 평범한 기사이면서, 마법사와 협력할 수 있을 정도로 유연한 사고를 하는 사람이 필요하다고.”
“거절하신 겁니까?”
그가 승낙했다면 이 자리에 있을 이유가 없다고 생각했기에, 아르센은 그렇게 물었다.
라수르는 고개를 끄덕였다.
“좋은 제의고, 마음에 들기도 했지만······고향을 떠난다는 결정을 하는 것도 아무나 하는 게 아니지. 하물며 당시 나는 큰 실패를 겪은 뒤라, 자신감이 많이 떨어져 있기도 했소.”
“그러시군요.”
“내가 거절하니 기사 두 명이 날 제압하더군. 그리고······아쉽다고, 우리와 만났던 기억은 전부 잊겠지만, 당신은 좋은 동료였다고, 친구가 되었으면 좋았을 거라고 말해주면서 내게 마법을 걸었소. 엄청난 두통을 일으키는 마법이었지.”
그 말대로라면, 그들은 라수르의 기억을 지우고자 기억 삭제 마법이 사용한 것이 분명했다.
하지만 지금 라수르가 이 사실을 모두 기억하고 있는 것으로 보건대, 그것이 잘 먹혀들지는 않은 듯했다.
“의식을 잃었다가 다시 깨어나 보니 그들은 이미 도시를 떠난 뒤였소. 내가 기억을 잃지 않은 건 아마 이것 때문일 거요. 우리 집안에 내려오는 가보인데, 여러 정신적인 공격으로부터 마음을 방어하는 유물이라 알려졌지.”
라수르는 앞섶에 감춰 두었던 목걸이를 꺼내 흔들었다.
“그렇게 된 후, 본격적으로 무예를 갈고 닦으며 발굴대 일을 시작했소. 규모를 키우고, 지인들을 만들고, 어린 시절 친구였던 크렌이 돌아온 후에는 본격적으로 삼대 금역을 공략하기 시작했지. 그들이 말한 열쇠를 찾고 싶어서.”
이제, 아르센은 새벽 발굴단의 주목표가 아르센이 공략하고자 했던 유적인 것이 우연이 아니었음을 알 수 있었다.
라수르가 자조하듯 말을 이었다.
“그들에게 그리 유감은 없소. 머저리 망나니에 불과했던 나를 좋은 동료였다고 해준 덕분에 오히려 자신감을 가지고 새로 출발할 수 있었지. 사실 죽이려던 것도 아니고, 고작 기억을 지우려던 거잖소. 누가 봐도 죽이는 쪽이 지금 같은 사고를 예방하기 좋을 텐데.”
그렇게 말하더니, 라수르가 씩 웃으며 질문했다.
“아르센 경은, 그 별부르미에 속한 사람이 맞소?”
“속했다고 하기는 어렵지만······협력 중이긴 합니다. 어쨌든 목적이 완수된다면, 세상을 구할 수도 있겠지요.”
그 말에 웃던 것도 잠시, 라수르의 표정이 무겁게 변했다.
“굳이 돌아온 걸로 보아 짐작은 가오만······그때 그들은, 실패했소?”
“네. 저도 들은 이야기입니다만, 십오 년 전에 실패했고, 지금 다시 도전하고 있다더군요.”
“이번에는 성공할 수 있겠소?”
“모르겠습니다. 다만, 최선을 다해야지요.”
이후, 둘은 잠시 말없이 거리를 걸었다.
“마음 같아서는 나 역시 동료들을 끌고 경의 군대에 합류해 세상을 구하는 임무를 돕고 싶지만, 여기서 책임지고 있는 것이 꽤 많소.”
새벽 발굴단의 부단장이자, 실질적인 경영자. 그것이 아르센이 알고 있는 라수르의 모습이었다.
거기다 그들과 연결된 것이 상회와 흑사자임을 고려하면, 그의 역할이 얼마나 클지 짐작하기는 어렵지 않았다.
“그렇죠. 짐작이 갑니다.”
“이해해주니 고맙소. 부디 성공을 비오. 아, 크렌에게는 말하지 않았소. 남을 질투하고 음해할 성품은 아니지만, 워낙 사람이 단순해서 말을 못 가리거든.”
확실히 크렌이 그리 정치적인 성격으로 보이지는 않았지만, 마치 모자란 사람처럼 말하니 묘하게 우스웠다.
크렌의 그 근엄한 얼굴을 떠올리니 더더욱.
“하나 여쭤보고 싶은 게 있습니다.”
“어떤?”
“혹시, 계승자와 마법사들의 사이가 어때 보였습니까?”
“굉장히 좋았소. 듣자 하니 계승자는 마법사들에게 혐오감을 느끼지 않는다던데, 거기다 유적을 열 수 있어서인지 마법사들은 계승자를 거의 자기네 대장 다음으로 모시듯이 대했지.”
아르센은 살짝 고개를 끄덕이며 감사를 표했다.
“대답해주셔서 감사합니다.”
“혹시 또 물어보고 싶은 것 있소?”
“마법 기사들, 조금 바보 같거나 그렇진 않았습니까?”
“글쎄······그런 인상은 받지 못했는데, 둘 중 루반이라는 친구는 가장 유식하고 유능한 마법사이기도 했소. 나보다 열 배는 똑똑해 보였지.”
과장이겠지만, 그런 표현이 나올 정도라면 보통 머리는 아니었던 모양이었다. 마룬과는 딴판으로.
아르센은 마룬의 바보 같은 면이 마법 기사의 부작용이라는 가설을 폐기했다.
그 뒤로도, 아르센은 궁금했던 몇 가지를 질문했다. 별부르미의 구성 방식, 서열, 행동 목적 등.
라수르의 설명에 의하면 그들은 ‘대장’이라 불린 마법사 한 명을 구심점으로 하는 발굴대 같은 조직으로, 구성원 간의 서열은 기본적으로 평등했다.
나이나 마법 기량이 높은 이는 어느 정도 대우받긴 했지만, 명확한 서열까지는 없는 정도로.
물론 지금도 똑같으리라 장담할 수는 없었다.
15년이면 사람이 변하는 것은 물론이고, 조직이 변하기에도 충분한 시간이니.
하지만, 참고 자료 정도로는 나쁘지 않을 터였다.
그다음에는 유적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들이 갔던 위곤 유적 공략에 있어, 계승자를 끼고 유적에 들어가는 것은 라수르가 선배인 것이나 마찬가지였으니.
그가 간접적으로 들었던, 서쪽에 있는 다른 유적에 대한 이야기도 들을 수 있었다.
그렇게 이야기하던 중, 라수르가 불쑥 말했다.
“아쉽긴 하구려.”
“뭐가 말입니까?”
“위곤 유적. 그곳만은 경이 가기 전에 내가 공략하고 싶었소. 오랜 시간 계획을 짰던 만큼, 한 곳만이라도.”
그렇게 이야기하는 라수르의 목소리에는 씁쓸한 감정이 담겨 있었다.
그제야, 아르센은 계승자에 대해 아는 라수르가 굳이 위곤 유적을 공략하려 애쓸 이유가 없었음을 깨달았다.
그런데도 굳이 공략을 시도하고 좌절했던 것은, 어쩌면 긴 시간 목표를 향해 달려온 사람의 마지막 고집이었으리라.
뭐라 위로했다가는 되려 기만으로 들릴까 싶어, 아르센은 조용히 입을 다물었다.
때마침, 눈앞에 여관이 다시 보이기 시작했다.
* * *
아르센은 그렇게 라수르와의 대화에서 얻은 정보를 곱씹느라, 도시를 멍하니 응시하고 있었다.
그런 아르센을 향해 엘로이즈가 물었다.
“센, 안 가고 뭐 해? 다들 기다리는데.”
“아, 미안. 가야지. 그래.”
고개를 저은 뒤, 아르센은 다시 시선을 앞으로 옮겼다.
이번 목적지는 이 유적 도시의 마지막 목표물, 위곤 유적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