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 Story of a Knight In A Ruined Fantasy World RAW novel - Chapter (110)
유적이 도전자의 무력을 판단하는 방법은, 생각 외로 조악했다.
기사인지, 일반 병사인지를 판단하고. 같은 기사의 경우 정수를 흡수한 기사는 특유의 강력한 마력을 감지하여 따로 판정하지만, 그 정도가 고작.
심지어 마법사는, 일반 병사로 취급할 뿐이었다.
그렇기에, 유적은 아르센의 부대를 그리 강한 적이 아니라고 판단했다.
기껏해야 스물여섯 명, 그중 기사는 넷. 넷 중에서도 특이하게 마력이 강한 기사가 하나.
이에 맞춰, 유적은 일반 거인 두 기를 추가했을 뿐이다.
아르센 일행에게는 호재였다.
“밀어붙여!”
“으아아아아!”
각성제를 먹은 병사와 마법사들은 세 명이 한 조가 되어 일반 거인을 상대했다.
마법사들의 마법은 거인을 상대로는 큰 쓸모가 없기에, 그들은 지팡이를 내려놓고 빈손에 방패나 무기를 하나 더 들어 병사로서 싸움에 임했다.
평소 후방 지원에 주력하기에 잊힐 수 있는 사실이지만, 별부르미의 마법사들은 혹독하게 훈련된 전사이기도 했다.
개개인의 무술 실력 자체는, 오히려 사냥꾼 출신인 아르센의 병사들보다도 뛰어났다.
거기다 각성제가 반사신경 역시 날카롭게 만들어준 덕인지, 그들은 거인의 움직임을 제법 잘 간파하고 피해낼 수 있었다.
뒤에서 전투를 돕는 존재도 있었고.
“후우······.”
가느다란 한숨과 함께, 엘로이즈의 손 아래에서부터 덩굴이 뻗어 나가기 시작했다.
그녀의 식물 마법은 마법 저항과 충돌할 경우 그 힘이 감소할지언정, 실체 자체가 사라지지는 않았다.
평범한 마법사라면 몰라도, 엘로이즈는 이 세계의 기준으로 대마법사라고 해도 좋을 강력한 마력의 소유자였던 탓이다.
거인의 마법 저항력은 기사보다는 낮은 편이었고, 엘로이즈의 마법에까지 완전히 저항할 수는 없었다.
“크하압!”
병사 한 명이 옆을 지나치며 거인의 옆구리를 살짝 갈랐다.
그 힘도, 위치도 치명적이지 못한 공격.
당연히 거인은 그대로 반격하고자 정해진 패턴대로 발을 들었고, 그대로 쓰려졌다.
그 모습을 눈여겨보고 있던 엘로이즈가 덩굴을 굵게 뭉쳐 디딤발을 얽은 뒤, 넘어지도록 비튼 덕분이었다.
“지금이다!”
“팔만 잘라내고 빠져!”
그 틈을 노려 덤벼든 병사들은, 넘어진 거인의 팔 한쪽을 토막 내고 물러섰다.
완전히 끝장낼 수 있다면 좋으련만, 거인의 목숨을 끊으려 했다가는 반격당할 위험이 있었다.
과연, 거인은 그대로 잘리지 않은 팔을 휘둘러 파리라도 내쫓듯 병사들을 내쫓더니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만약 거인을 죽이려 접근했다면 저 팔에 누구 하나가 걸려 박살이 났으리라.
일어선 거인의 팔 부분에 잿빛 액체가 스며들더니. 팔이 자라나기 시작했다.
그 모습에 병사들이 질린다는 듯 탄식했다.
병사들의 탄식과 별개로, 전황은 그리 나쁘지 않게 돌아가고 있었다.
라수르는 거인 한 명을 기사 한 명에 비유했지만, 거인은 기사보다 훨씬 크고 강한 대신 느렸다.
물론 그 덩치에 사람처럼 매끄럽게 움직이는 만큼 결코 만만한 속도는 아니었지만, 기사에 비하면 확실히 둔했다.
그렇기에 거인을 죽이는 것은 기사를 죽이는 것보다 더 힘들지언정, 거인에게서 살아남기는 기사에게서 살아남기보다 더 쉬웠다.
거인을 죽이려고 모험을 하지만 않는다면.
“으헉! 우홋! 으학!”
광장 한쪽, 마룬은 기괴한 비명을 지르며 두 거인 사이를 이리저리 누비고 있었다.
본래 근접전에 능하지 않은 그로서는 거인 둘을 동시에 상대할 엄두가 나지 않는 탓이었다.
평상시 아르센이 무기술이라도 좀 연습하라고 하던 때에 궁술 연습을 고집하던 대가라고 해야 할까.
손에 든 미늘창이 장식품으로 보일 지경이지만, 그나마 진을 조종하는 데 능숙한 편인 탓에 위기에 빠지지는 않았다.
“제에에기랄!”
기사 중 두 번째로 상황이 나쁜 것은 바즈칼로, 무술 실력도 진을 타는 실력도 어정쩡했기 때문이었다.
차라리 마룬처럼 아예 싸움을 포기하다시피 하고 주의만 끈다면 모를까, 특유의 호전성으로 싸움을 걸다가 몇 번 위기를 자초했다.
그나마, 그때마다 엘로이즈가 끼어든 덕에 목숨을 잃지는 않았다.
아눈은 셋 중 가장 실력이 뛰어났지만, 대신 상대해야 할 거인이 무려 세 기였다.
애초에 하나를 공격하다가는 협공당해 위기에 빠질 것을 잘 알았기에, 그는 빙빙 돌며 가볍게 찌르기만을 반복하는 것으로 거인들의 주의를 끄는 데 집중했다.
그 모습을 본 엘로이즈 역시 아눈 쪽에는 거의 신경을 쓰지 않았다.
사실, 그녀의 신경은 온통 한쪽에 쏠려 있었다.
지금, 이 전장에서 가장 위태롭게 싸우고 있는 아르센에게.
* * *
“큭!”
머리 위로 맹렬히 내려꽂히는 일격. 이미 공격을 한 번 피하느라 진의 자세가 무너진 상황이라, 달리 피하기는 여의치 않았다.
아르센은 그대로 도끼를 들어 공격을 옆으로 비틀어 쳐냈다.
이어지는 굉음과 충격. 얼얼한 통증이 어깨를 두드리는 것을 느끼며, 그제야 타고 있던 진이 다시 네 발로 굳건히 섰음을 확인한 아르센은 다시 도약했다.
즉시 서 있던 자리로 붉은 다리가 지나가고, 다시 달리는 소리가 들렸다.
놀랍게도, 붉은 거인 두 기가 달리는 속도는 아르센의 진보다도 조금 더 빨랐다.
그때, 펑 하는 소리와 함께 한 거인의 머리가 폭발했다.
엘로이즈가 견제의 의미로 폭발 주문을 날린 것이다.
안타깝게도, 조금도 속도가 줄어들지 않은 채 달려오는 거인들의 모습으로 보아 그것이 큰 의미가 있었던 것 같지는 않았다.
대부분 충격은 마법 저항력으로 날아가 버리고, 그나마 남은 충격은 강인한 금속 몸뚱이에 별 영향을 주지 않았던 탓이었다.
불필요한 마력 낭비를 막고자, 아르센은 귀걸이로 신호를 보냈다.
[괜찮아, 엘리. 저쪽에 집중해줘.]‘이거 어려운데······.’
위기의 연속, 가속된 반사신경으로도 주위를 관찰하기 어려울 정도로 아찔한 상황이 계속됐다.
이 막강한 거인 둘의 공격을 혼자 이겨내자니 머리가 빙빙 돌 지경이었다.
아마 바즈칼이나 아눈 같은, 비교적 평범한 기사들이 아르센의 자리를 대신했다면 십 초 안에 으깨져 죽었으리라.
누군가의 도움을 기대하기는 어려웠다.
혼자 거인을 두세 기씩 맡은 기사들은 말할 것도 없고, 일반 병사들 역시 거인을 죽여 그 수를 줄이기에는 공격력이 부족했다.
이 거인들은 마법 저항력 역시 일반 거인을 웃돌기에, 엘로이즈에게서 도움을 받기도 어려웠고.
즉 아르센은 가장 위태로운 상황에서, 어떠한 도움도 없이 긍정적인 결과를 만들어내야 했다.
‘저걸 끊을 수 있었다면······.’
아르센의 투구가 가진, 마력의 흐름을 보는 힘은 거인들이 유적에서 그 힘의 근원을 얻고 있음을, 바닥에서 흘러나오는 힘이 그 몸을 움직이게 하고 있음을 보여주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것을 어떻게 할 수는 없었다.
일부러 옆을 지나치며 마력이 이어지는 선을 베어 보았지만, 선은 마치 허상을 벤 것처럼 허무하게 지나칠 뿐.
결국, 아르센은 아껴두었던 물건을 품에서 꺼냈다.
그 물건을 처음 본 사람이라면, 파란색에 이리저리 비틀린 것이 꽤 못생긴 수정구라고 평가할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어떤 힘을 품고 있는지 알게 된다면 기겁하며 구체에서 손을 떼게 될 것이고.
이는 빙결구라 불리는 물건으로, 그 효능을 아주 쉽게 표현하자면 일종의 냉기 수류탄이었다.
그 위력은 뛰어난 항마력을 가진 기사조차 잠시 움직이지 못하게 봉쇄할 수 있을 정도이며, 일반 병사들 사이에 던져 넣으면 순식간에 열 명 이상을 얼려 죽일 수 있다고 하던가.
뛰어난 위력답게 가격도 끔찍하게 비싸서, 일회용 유물 주제에 어지간한 고대 유물보다도 그 가격이 비쌌다.
그 유용성에도 불구하고 단 한 개밖에 사지 못했을 정도로.
‘이걸 여기서 쓰게 될 줄은 몰랐는데.’
사용법은 지극히 간단했다. 그저 구체에 적당한 양의 마력을 불어넣어 예열한 뒤, 던져서 충격을 주면 된다.
아르센은 눈앞의 거인을 노리고 빙결구를 던졌다.
‘닿아라!’
빠르게 날아간 빙결구는 역장에 걸려 느려지는가 싶더니, 그대로 달려오던 거인의 무릎에 부딪혔다. 아르센이 노린 부위에, 정확히.
그리고 이어지는 폭발.
무시무시한 냉기의 폭발이 일어나고, 거인의 붉은 다리가 얼어붙어 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거대하고 강력한 이 붉은 거인조차 잠시 활동할 수 없게 될 정도로, 묵직한 얼음덩이가 확실하게 두 다리를 묶고 있었다.
상인의 말에 의하면, 기사에게 사용했을 경우 3초에서 5초 정도는 움직임을 봉쇄할 수 있는 것이 빙결구였다.
거인이 기사보다 크고 강하며, 그 대신 마법 저항력이 떨어짐을 고려했을 때 크게 차이가 날 것 같지는 않았다.
즉, 아르센은 3초에서 5초 안에 거인 하나를 죽여야 했다.
거리가 조금 있으니 그보다는 조금 더 걸려도 되겠지만.
“덤벼!”
자기암시를 위한 기합과 함께, 아르센은 남은 거인 하나를 향해 돌진했다.
거인은 말이 아닌 행동으로 이에 답했다. 구체적으로는, 오른쪽 주먹을 내지르는 방식이었다.
뻔한 패턴에, 뻔하지 않은 속도로.
일반 거인에게 그러듯 팔을 타고 올라가는 묘기 따위는 상상도 할 수 없었다. 실제 기사에게 그럴 수 없듯이.
몸을 격하게 트는 것과 동시에 두 팔을 들자, 주먹은 아르센의 가슴팍을 아슬아슬하게 스쳐 지나갔다.
느릿하게 주먹이 지나가는 그 모습에, 아르센은 자기도 모르게 숨을 들이쉬었다.
“흐읍······.”
위기는 곧 기회인 법.
풍압에 시린 눈을 가늘게 뜬 채, 아르센은 두 손과 함께 들어 올린 도끼를 내려찍어 팔을 잘라냈다.
뛰어난 무기, 힘과 속도, 마력의 조화 덕에 붉은 팔은 맥없이 잘려 나가 땅바닥을 굴렀다.
‘됐다!’
오른팔을 잃은 거인은 차선책으로 왼팔을 써 공격하려 했지만, 아르센은 이를 허용하지 않았다.
재빨리 진을 몰아 거인의 오른쪽으로 돌아간 것이다.
그 상태에서 순간 시선을 돌려 다리가 얼어붙은 거인을 보자, 생각보다 빙결구의 효과가 좋았는지 아직 빠져나오지 못하고 있었다.
여유가 조금 더 있었다.
‘안전하게 가는 게 낫겠어.’
바로 머리 위로 뛰어오르려던 계획을 취소하고, 아르센은 도끼를 낮게 휘둘러 다리 한쪽을 잘라내려 했다.
다만, 다리가 팔보다 두꺼웠던 탓인지 완전히 잘라낼 수는 없었다. 3/4 정도를 가르는 것이 고작이었다.
물론, 다리가 제 기능을 하지 못하게 하는 데는 그거면 충분했다.
그때, 푸쉭 하고 거인의 입에서 증기 비슷한 무언가가 뿜어졌다.
움직이느라 달아오른 열을 식히는 것인지, 그 원리가 무엇인지는 알 수 없었다. 알 필요도 없었고.
아르센이 해야 할 일은 하나였다.
거인의 약점을 공략해, 그 숨통을 끊는 것.
‘거인의 약점은······.’
한쪽 다리가 제 기능을 하지 못하자 무릎 꿇은 거인의 등 도약해, 아르센은 자신의 체중까지 실어 힘껏 도끼를 내려찍었다.
노리는 부위는, 짤막하여 거의 드러나지 않는 목이었다.
‘머리와 몸을 떼어놓으면 죽는다!’
“우오오옷!”
기합과 함께, 목이 날아간 거인의 몸이 허물어지는 것이 보였다.
이제 남은 상대는 한 기.
때마침, 다리를 묶고 있던 얼음을 바스러트린 거인이 맹렬한 기세로 달려왔다.
동료를 죽인 것에 대해 분노하기라도 하는 것처럼.
‘덤벼!’
두 기를 동시에 상대하느라 위기에 빠졌던 것이지, 한 기 정도는 자신 있었다.
아르센은 사선으로 움직이다가, 달려온 거인의 발차기 타이밍에 맞춰 몸을 날렸다.
이번에는 조급하지 않게, 디딤발 부분을 도끼의 무형 칼날로 가볍게 그었다.
그렇게 대여섯 번, 거인의 공격을 피해며 오른쪽 다리를 집요하게 노리자, 마침내 공격을 견디기 어려워진 강화 거인이 다리를 질질 끌며 물러서기 시작했다.
재생을 위해서인지, 밑에서 붉은 액체가 올라오고 있었다.
그 틈을 노려, 아르센은 상대를 향해 돌진했다.
현재 거인은 다리를 제대로 쓸 수 없는 상황.
아쉬운 대로 길고 둥그런 주먹을 뻗었으나, 디딤발 때문인지 그 기세는 어설펐다. 아르센이 노리던 바였다.
“흡!”
다소 느릿한 공격을 피해, 아르센은 몸을 옆으로 슬라이딩하듯 날리며 거인의 다리 쪽으로 접근했다.
그리고 아직 재생 중이어서 꿈틀거리고 있는 부분을 향해 도끼를 휘둘러, 조금 전과 달리 완벽하게 잘라냈다.
쿵 소리와 함께 무게 중심을 잃은 거인이 쓰러졌다.
그 빈틈을 봐줘야 할 이유는 없었다.
아르센은 진을 몰아, 무너진 자세를 수습하지 못하고 있던 거인의 머리를 갈랐다.
“후우······.”
무너져 사라지는 거인의 모습을 보며, 아르센은 탈진할 것 같은 피로를 한숨으로 토해냈다.
체력과 정신력 소모는 물론이고, 무형 칼날을 짧은 시간에 몇 번이고 뽑았더니 마력 역시 꽤 손실이 있었다.
하지만 쉴 틈은 없었기에, 다시 힘을 내어 진에 마력을 불어넣었다.
이제 싸움을 끝낼 때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