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 Story of a Knight In A Ruined Fantasy World RAW novel - Chapter (111)
리노는 삶이 즐겁다고 느껴본 적이 별로 없었다.
본래 그의 고향은 나르비크라는 곳으로, 폭력과 억압된 규율이 지배하는 야만적인 땅이었다.
그곳의 하층민 계급인 사냥꾼의 자식으로 태어난 그는, 철이 들기 전부터 나이 든 사냥꾼들의 시중을 들며 살아야 했다.
식사를 만들고, 무기를 손질하고, 행여나 실수라도 했다가는 죽도록 얻어맞아야 했기에, 하루하루 살아가기가 두려운 시절이었다.
마침내 몸이 자라 열다섯 살이 되었을 때, 영지의 정화 영역 밖으로 나갈 수 있게 되면서부터 그는 사냥꾼이 되었다.
나르비크에서는 어린아이들조차 목숨을 건 투쟁이 일상이었고, 그 투쟁이 아이들에게 독기를 견딜 마력을 부여한 덕분이었다.
그리고 십 년 정도, 강한 마수들을 피해 약한 마수들을 잡아다 팔며 하루하루 벌어 먹고사는 삶이 계속됐다.
어떠한 희망도 기대도 없이, 운이 좋으면 늙어서 사냥할 힘이 없어져 죽고, 그렇지 않으면 조금 더 일찍 죽을 뿐인 미래가 정해진 삶.
그나마 기적이라면 운 좋게 기사가 되는 정도일까.
그리고 그런 버러지 같은 삶이 끝장날 뻔한 어느 날, 리노는 자신의 구원자를 만났다.
먼 동방에서 온 젊고 강력한 기사, 벨루안의 아르센을.
목숨을 구원받은 리노는, 이내 아르센의 가장 열렬한 추종자가 되었다.
단순히 구원받았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마수에게서 도망치는 것이 아니라 당당히 맞서, 자신감 넘치는 공격으로 마수를 처치하는 그 모습이야말로 리노가 어린 시절 꿈꿨던 이상이었던 탓이었다.
아르센을 따르는 삶은 힘겹고 위험했지만, 찬란했다.
싸움이 있었고, 영광이 있었으며, 무언가 더 나아지고 있다는 확신이 있었다.
그렇기에, 아르센을 따르며 리노는 늘 꿈꿨다.
그 역시 기사가 될 수 있기를, 그래서 자신의 우상, 자신의 대장에게 도움이 될 수 있기를.
“리노!”
“정신 차려! 살아 있어? 리노!”
동료들의 부름이 저 멀리 아스라이 들려오는 가운데, 리노는 흐릿하게 눈을 떴다.
자신이 왜 여기서 이러고 있는 것인지, 무슨 상황이 일어난 것인지 파악하려 애썼다.
하지만 리노의 멍해진 머리로는 그가 동료를 구하려다 대신 강철 거인의 발차기에 얻어맞았음을, 십 미터도 넘게 날아 땅에 처박혔음을 떠올릴 수 없었다.
‘맞아, 미로는? 괜찮나?’
“괜······찮······.”
말을 꺼내려 애쓰는 것을 마지막으로, 리노의 정신이 꺼졌다.
* * *
원래 전투란, 한 번 기세가 기울기 시작하면 걷잡을 수 없는 법이다.
중심을 잡고 서 있는 탑을 한쪽으로 가볍게 밀었을 때, 자신의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넘어지게 되듯이.
이 싸움 역시 마찬가지였다.
우선 아르센은 거인 두 기를 상대로 힘겹게 싸우고 있는 바즈칼에게 달려갔다.
그리고 바즈칼에게 정신이 팔려있는 거인들의 뒤로 접근, 한 방에 목을 도려냈다.
남은 한 마리는 협공해서 어렵지 않게 해치울 수 있었다.
이후로는 그런 방식의 연속이었다.
힘겹게 대치 중이던 동료를 돕고, 그 동료 역시 또 다른 동료를 돕고······.
마침내 최후의 거인이 그 목을 베여 쓰러졌을 때, 그래서 쿵쿵거리는 거인의 발소리가 더 들리지 않게 되었을 때, 누군가가 크게 외쳤다.
“끝났다!”
그 외침이 도화선이 된 것처럼, 여기저기서 앓는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드디어······.”
“이제 때려죽여도 더 못 싸워······.”
기승수 위에 축 늘어져 있는 것은 양반이고, 아예 바닥으로 내려와 자빠진 사람도 있었다.
마침 지샤란이 말한 각성제의 유효 시간이 다 되었음을 생각해 보면, 꽤 아슬아슬한 전투였다.
우선, 아르센은 목청을 돋워 소리쳤다.
“부상자 있나!”
“여기입니다!”
누군가가 대답해 그쪽을 보니, 병사 몇 명이 옹기종기 모여있는 것이 보였다.
아르센은 피로한 기색을 내색하지 않으려 애쓰며 그곳으로 다가갔다.
“누가 다쳤지?”
“리노입니다. 죄송합니다, 대장님. 리노가 절 구하려다가 그만······.”
아르센은 리노의 상태를 보기 위해 가까이 다가갔다.
그리고 쓰러져 있는 리노의 상태를 본 아르센은, 자기도 모르게 탄성을 터트렸다.
“오.”
“일단 응급처치는 했습니다. 다행히 방패로 막으면서 날아간 거라서 크게 다치지는 않았습니다.”
아르센의 옆에서, 리노와 한 조였던 마법사가 설명했다.
그냥 충격에 의식을 잃었을 뿐이라고, 다리가 부러지긴 했지만 맞춰 놨으니 치유 주문만 받으면 금방 회복할 거라고.
설명을 듣던 중, 아르센은 자기도 모르게 엷은 웃음을 지었다.
부하가 부상으로 쓰러진 상황에서 갑자기 웃는 대장이라니.
도대체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알 수 없어, 병사와 마법사는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그런 그들을 보며 아르센은 웃음기 섞인 어조로 말했다.
“일어나면 축하 선물이라도 줘야겠는데.”
병사나 마법사들과 달리, 아르센은 명확히 느낄 수 있었다.
리노에게서 느껴지기 시작한, 약하지만 또렷한 기사 특유의 압박감을.
한계를 넘어 각성한 자의 상징을.
‘축하한다, 리노 경.’
* * *
아르센은 리노를 들것에 태워 옮기라 지시한 후, 주위를 돌며 또 다른 부상자가 없나 확인했다.
마법사 한 명이 팔이 부러진 것이 끝으로, 그에게는 우선 팔에 부목을 대어 두라고 지시했다.
그 외 다른 문제가 없음을 확인한 뒤, 아르센은 목청을 돋워 누워 있는 병사들을 독려했다.
“모두 기상! 안에 들어가서 쉰다! 조금만 더 힘을 내라!”
쓰러져 있던 사람들은 힘겹게 몸을 일으켜 기승수에 올라타기 시작했다.
잠시 후, 그들은 마침내 4층으로 넘어가는 문에 도착했다.
아르센이 먼저 나서서 문에 손을 얹었지만, 돌아오는 대답은 부정적이었다.
-해당 문은 공화국 시민 자격이 있는 이에게만 개방되어 있습니다. 시민 자격자와 동행하시거나, 관리자에게 별도로 문의해 주십시오.-
“역시.”
이미 예상했던 바였다. 출입 권한이 없는 자에게 문을 열어줄 것 같지 않았으니.
하지만 상관없었다.
이 위곤 유적의 문은, 절대 부술 수 없는 소재로 만들어진 것이 아니었던 탓이다.
그런 ‘부술 수 없는 문’은 고대에도 꽤 귀했던 것인지, 그리 흔치 않았다.
애초에 자격이 없으면 절대로 넘어갈 수 없는 문이라면, 새벽 발굴단은 무슨 수로 2층까지 도착했겠는가.
대부분 유적의 문을 여는 방법은 정해져 있었으며, 이 위곤 유적의 문 역시 그렇게 열면 그만이었다.
“자, 모두 힘들겠지만 다시 힘쓸 시간입니다. 부숩시다. 교대로.”
“알겠습니다.”
아르센과 기사들은 순서대로 문을 두들기기 시작했다.
문을 부수기 가장 좋은 무기가 아르센의 도끼였기에, 이것을 네 명이 번갈아 가며 사용했다.
문 옆에서 병사들과 마법사들은 지쳐 늘어진 채 휴식을 취하고, 네 명의 기사들이 번갈아 가며 도끼로 문을 힘차게 찍기를 한참.
그렇게 순번을 몇 번쯤 돌렸을까, 바즈칼이 힘껏 도끼를 휘둘렀을 때, 마침내 문에서 우지끈 소리가 났다.
“부서졌다!”
환희에 찬 외침에 문 앞에서 쉬던 모두의 시선이 돌아갔다.
마침내, 유적의 끝이 보였다.
* * *
“오오······.”
하강기를 타고 내려온 뒤, 유적 4층을 보며 누군가 탄성을 흘렸다..
위곤 유적의 4층은 이전 층과 비슷한 광장 형식으로, 차이점이라면 거인 대신 침대나 책상 같은 가구가 배치된 생활 공간으로 조성되어 있다는 것이었다.
덤으로 곳곳에 거대한 기둥 조각상이 배치되어 있었는데, 다행히 이 조각상이 공격하거나 하는 일은 없었다.
광장 내에는 제법 쓸만한 물건들이 많이 있었다.
이 위곤 유적은 과거 별부르미가 마지막으로 공략한 곳이고, 그렇기에 정말 필요한 물건 몇 개만 빼고는 모두 놓고 가야 했다고 하던가.
“이게 바로 그?”
“맞습니다.”
그들이 보고 있는 것은 검푸른 색상에 칠흑처럼 검은 갈기를 가진 사자로, 정확히는 그러한 형상을 한 진이었다.
“아름다워······.”
엘로이즈가 작게 중얼거렸다.
그 말대로, 이 흑사자는 현대 마법사들이 만든 조악한 진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예술적인 형상을 하고 있었다.
섬세한 근육의 결, 짧은 털은 물론, 갈기까지도 털처럼 부드러운 재질의 금속으로 만들어져 진짜처럼 느껴졌다.
평범한 진이 잘 만든 실사 크기의 로봇 장난감 정도라면, 이것은 금속으로 만들어낸 박제라고 해야 할까.
그 크기 역시 비범하여, 평범한 진과 비교하면 거의 머리 하나쯤 컸다.
아르센은 홀린 듯이 흑사자의 머리 부분을 쓰다듬었다.
“멋지죠?”
그 모습을 보며 마룬이 뻐기듯 말하더니, 공략집에 얼굴을 박고 설명을 시작했다.
“이 유적 도시 사티엔에는 신수(神獸)의 전설이 내려오는 모양입니다. 영지가 위기에 빠졌을 때, 영지를 구원한 거대한 흑사자의 이야기가요.”
“그렇군요.”
대답하는 한편, 아르센은 도시 내의 무력 조직 중 하나인 흑사자를 떠올렸다.
그들의 이름 역시 도시를 구한 흑사자에서 기원한 것은 아닐까.
어쩌면, 이 흑사자 형상의 진을 탄 기사가 영지를 위기에서 구했다는 이야기가 와전된 것일지도 모르고.
“이 진을 가져갔다간 도시의 온갖 관심을 다 끌게 될 거라는 게 당시 간부들의 의견이었던 모양입니다. 그때 저희가 가진 마법 배낭은 변변찮아서 이런 큰 물건을 숨기기도 마땅찮았고요. 덕분에 지금 건질 수 있게 됐습니다만······.”
마룬의 설명에 고개를 끄덕인 뒤, 아르센은 조심스럽게 흑사자의 위에 올라탔다.
그리고 실제 사자라면 견갑골이 있었을 부분에 손을 얹은 뒤, 마력을 불어넣었다.
“······후.”
감각을 연결한 후, 아르센은 그 자리에서 가벼운 움직임을 시험했다.
걷고, 살짝 뛰고, 앞으로, 뒤로, 좌우로 점프.
흑사자는 평범한 진보다 훨씬 큰데도 불구하고, 놀랍도록 날렵하고 유연하게 움직였다.
아르센의 지시를 딜레이 없이 수행하는 것은 물론, 주행 속도 역시 훨씬 빨랐다.
그리고 하나 더.
아르센은 흑사자를 움직여 주위에 사람이 없는 곳으로 향한 뒤, 흑사자의 심장에 감각을 집중했다.
그리고 심장에 마력을 불어넣고 이를 목으로 인도하여, 토해냈다.
아무도 없는 방향을 향해.
그르렁거리는 소리와 함께, 흑사자의 입에서 어마어마한 열기가 쏟아졌다.
그야말로 지옥을 구현한 듯한 악마의 불길은, 유적의 벽에도 흔적을 남길 정도였다.
이 정도면, 기사라도 걸릴 경우 결코 무사할 수 없을 것이 분명했다.
“이거 기사에게도 먹힐지 실험해보고 싶은데. 바즈칼?”
“살려주십쇼, 형님.”
바즈칼이 농담조로 애걸하자, 아르센은 흐릿하게 웃었다.
이런 농담을 던질 정도로, 그는 기분이 좋았다.
아마 이 녀석을 타고 있었다면, 빙결구를 쓰지 않고도 강화 거인 둘을 상대로 이길 수 있었으리라 생각될 정도였으니.
물론 단점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었다.
아무래도 덩치가 큰 만큼 무거워서 나무 같은 것을 타고 움직이기는 조금 불리할 것이고, 움직이는 데 마력도 많이 들어갔다.
브레스 공격의 마력소모는 파멸적인 지경이고.
하지만 그런 단점 따위는 전혀 생각할 필요도 없을 정도로, 이 진의 가치는 어마어마했다.
그 외에도 여러 물건이 있었다.
아쉽게도 액세서리 종류는 들고 가기 편한 탓인지 이미 예전 별부르미가 모두 쓸어간 모양이지만, 대검이나 창 같은 대형 무기류가 꽤 남아 있었다.
바즈칼이 일회용 대검을 소모할 경우를 대비해 예비로 대검 하나를 더 챙겼고, 아눈은 창 하나를 얻었다.
적에게 찌른 상태에서 마력을 불어넣으면 창의 자루 앞쪽 여기저기에 가시가 돋아나 치명적인 상처를 입히는 기능이 있었다.
“거 되게 악랄하네요. 사람한테 쓰면 무조건 죽겠는걸······.”
“뭐, 마수나 마인이랑 싸울 일도 많으니까요.”
그렇게 대답하며 창을 이리저리 휘두르는 아눈은 굉장히 기분이 좋아 보였다.
그 외에도 잡다한 유물은 꽤 많았는데, 아무래도 흑사자라는 보물을 얻은 만큼, 나머지는 모두 별부르미 쪽에 양보했다.
사실 흑사자는 그렇게 해도 아르센 쪽이 이득일 정도로 대단한 물건이었지만, 아르센이 진을 빌려준 은혜도 있으니만큼 마룬 역시 이 분배 방식을 수긍했다.
그리고 대망의 결과물, 두 번째 석판이 나왔다.
“자······.”
거울 납골당 때와 마찬가지로, 마룬이 가열 주문을 걸자 석판에서 무언가가 흘러내리며 글씨가 나타났다.
음각된 글씨 역시 이전과 같은 방식으로 쓰여 있었다.
‘네 번째 단서-’여기에 왔노라‘, 아바테가 씀.’
“네 번째 단서, 여기에 왔노라.”
마룬이 그것을 외우려는 듯 작게 중얼거렸다.
아르센이 혼잣말하듯 물었다.
“전에 본 세 번째 단서가 아마?”
“그게, ‘항해하여’였죠.”
“둘이 합치면······.”
항해하여 여기에 왔노라.
아르센은 그 문장을 입속에서 되뇌었다.
유감스럽게도, 이것만으로는 앞의 두 단서가 무엇일지는 아직 짐작할 수 없었다.
아니, 설령 짐작할 수 있더라도 단서를 확보하기는 해야 할 것이다.
혹시 정확한 단어를 입력해야 하는 것이라면, 의미를 짐작하는 것만으로는 실수할 수 있을 테니.
“됐습니다. 다 외웠으니 파기하죠.”
“알겠습니다······.”
아쉬운 표정으로 쳐다보는 마룬의 시선을 무시하고, 아르센은 석판을 으스러트려 그 안에 든 글귀를 없앴다.
이걸로 네 개의 단서 중 두 개가 모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