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 Story of a Knight In A Ruined Fantasy World RAW novel - Chapter (113)
도시로 돌아오는 길은 순조로웠다.
대형 마수 하나가 나타나 아르센이 흑사자를 시험할 겸 단독으로 사냥했다는 것, 그리고 매일 성장통 때문에 리노가 끙끙 앓았다는 것 정도가 특별한 점일까.
리노는 슬슬 키가 크기 시작해서, 조만간 새 갑옷을 맞출 수 있도록 해줘야 할 것 같았다.
돌아온 뒤, 아르센은 제일 먼저 라수르를 찾았다.
“고생하셨소, 여기 한 잔.”
“감사합니다.”
라수르가 주전자를 기울이자, 쪼르륵 소리를 내며 차가 따라지는 것과 함께 김이 올라왔다.
“그래서, 유적 공략은 잘 됐소?”
“네. 끝났습니다.”
아르센은 유적 공략에 대한 이야기를 설명했다.
‘공화국’에 관한 내용까지는 말하지 않고, 3층의 거인들이 공격해왔다는 이야기만을 했다.
거인들의 숫자와 종류, 싸움의 결과를 들은 라수르가 크게 감탄하며 말했다.
“그 조합을 이겨냈단 말이오? 아무 피해 없이?”
“네. 운이 좋았습니다.”
정확히 말하면 몇 명 다치긴 했지만, 영구적인 부상이 없는 시점에서 피해가 없다고 봐도 무방할 터였다.
라수르가 가장 놀란 것은 아르센이 강화 거인 두 기를 제압했다는 것이었다.
“크렌도 두 기를 빠르게 제압하지는 못했는데. 버티는 정도야 충분했지만.”
물론 그렇다고 해서 아르센의 실력이 크렌보다 뛰어나다는 것은 아니었다.
일회용 유물을 사용해 잠시 일대일 구도를 만들어 제압했으며, 그 와중에도 목숨을 건 도박수를 걸어 성공한 것이니.
크렌이 이런 방법을 사용할 수 없었던 건, 그저 그가 더 올라가야 할 층이 많아 함부로 소모품을 사용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실제로, 아르센은 도박수를 쓰지 않고서는 강화 거인 두 기를 상대로 버티기조차 힘들어했고.
“어쨌든······이제 삼대 금역도 옛말이구려. 가도 남은 게 없을 테니, 우리 발굴단의 목표는 끝났군.”
라수르는 씁쓸한 표정으로 고개를 젓더니, 뭔가 생각났다는 듯 물었다.
“그러고 보면 그것도 찾았겠구려?”
“어떤 것 말씀이신지?”
“흑사자.”
“아······.”
하기야, 라수르 역시 길잡이로서 함께 위곤 유적을 공략했던 당사자이니 흑사자의 존재를 모를 리 없었다.
독특한 생김새 탓에 괜히 분란을 만들 것 같아, 흑사자는 도착하기 전에 미리 마법 가방에 넣어 숨겨둔 상태였다.
“잘 있었소?”
“네.”
“그렇군.”
허허 웃던 라수르가 자조하듯 말했다.
“정말 탐이 났지만, 길잡이 역할을 했다고 달라기에는 너무 귀한 물건이었지. 유적을 공략하던 친구들은 다들 괜찮은 진이 있었고 말이오.”
“그들 모두가 흑사자보다 뛰어난 진을 가졌단 말입니까?”
“그건 아니오만.”
고개를 절레절레 저은 라수르가 설명했다.
“나도 잠깐 타보긴 했지만, 그게 마력 소모가 만만찮은 편이잖소. 그들은 흑사자가 먼 길을 가기에는 적합하지 않다고 판단했던 모양이오. 실제로, 그들 중 기사 두 명의 진은 흑사자에 뒤처지지 않을 정도로 뛰어난 물건이었고.”
도대체 어떤 물건이기에 흑사자와 비견된다는 평가를 받는지 상상할 새도 없이, 라수르가 아쉽다는 듯 말했다.
“사실 기왕 가져가기 힘들다면 내게 주지 않을까 잠시 기대하긴 했소만, 그들은 흑사자를 그냥 남겨놓는 편이 좋겠다고 생각하더군. 뭐, 만약 내가 가져갔더라도 누군가에게 뺏기고 죽었을 것 같긴 하오만.”
잠시 후대를 위해 이 멋진 진을 남겨준 별부르미의 전대 수장에게 감사의 기도를 올린 뒤, 아르센은 다시 질문했다.
“그러면, 이제 어쩌실 생각입니까?”
“평범한 유적 발굴대로 돌아가야겠지. 사실 이미 위치가 확인된 미공략 유적을 들이받는 우리가 특이한 거지, 대부분 발굴대들은 다 발견되지 않은 유적을 찾아 헤매지 않소.”
그 말대로, 이 유적 도시에도 그 위치가 완전히 공개된 유적의 숫자는 극히 드물었다.
상식적으로, 공략 불가능에 가까운 난이도가 아니고서야 위치가 노출된 유적이 털리지 않고 남아있을 이유가 없지 않은가.
평범한 유적은 땅을 파고, 바위를 깨고, 숲을 헤치는 온갖 역경과 고난 끝에 발견되며 그 발견자가 아무에게도 알리지 않고 독식하는 형식이었다.
그리고 유적을 찾는 데, 아르센이 가진 계승자의 재능은 전혀 쓸모가 없었다.
삼대 금역 수준은 아니지만 발굴에 난항을 겪고 있어 그 위치가 밝혀진 유적은 기껏해야 여섯 개 정도.
일일이 발굴하자니 시간도 오래 걸리고, 그 보상 역시 장담할 수 없었다.
“그걸 묻는 걸 보니, 슬슬 떠날 계획인가 보오.”
“네. 혹시 합류할 의향이 있으신지 여쭤보려 합니다.”
이미 한번 거절 의사를 밝히긴 했지만, 라수르는 그냥 놓치기에는 아쉬운 인재였다.
경험과 지식이 풍부하며, 신기하고 강력한 유물도 많이 가지고 있는 데다 기사로서의 기량도 낮지 않았다.
짐작건대, 비무장 기준으로도 아눈과 비슷하거나 조금 더 강한 정도이며 완전 무장 기준으로는 아르센도 신경 써서 상대해야 할 정도의 실력자였으니.
거기다, 만약 그의 친구이자 아르센이 본 가장 강력한 기사인 크렌까지 끌어들일 수 있다면?
“아무래도 책임져야 할 사람들이 좀 많아서 말이오. 나 역시 아쉽게 생각하오만, 이래 봬도 결혼도 했고 자식도 있으니.”
“결혼하셨습니까?”
설마 도시 외곽 여관에서 머물고 있는 사람이 가정이 있을 줄은 몰랐기에, 아르센은 조금 당황했다.
그 기색을 읽었는지 라수르가 씩 웃으며 말했다.
“아들이 이제 여섯 살이라오. 떼어놓고 가기엔 너무 어린 나이지. 가끔 찾아가서 봐야 제 아비 얼굴을 잊어버리지 않을 거 아니겠소? 뭐, 여기서 새로 발굴하는 유적 중에 본래 목적을 이루는 데 도움이 될 물건이 있을 수도 있고.”
“그러시다면, 알겠습니다.”
이야기는 그것으로 끝이었다.
설득될 사람이었다면 애초에 반대하지 않았을 터.
아르센은 깔끔히 그를 끌어들이기를 포기하고 고개 숙여 인사했다.
라수르 역시 흐릿하게 웃음지으며 작별을 고했다.
* * *
그다음으로 한 일은 유적에서 얻은 유물들, 대부분이 대형 무기인 그 유물들을 처분하는 일이었다.
지난번 거래에서 무기류를 잘 쳐준 흑사자 소속의 겨울눈 상회를 찾아갔는데, 그는 아르센의 얼굴을 기억하고 있었는지 반색하며 그를 맞이했다.
“어서 오십시오.”
그는 이렇게 짧은 시간 내에 여러 유적을 발굴하여 처분하러 오는 사람은 처음이라며 호들갑을 떨었다.
그 말대로, 아르센 일행이 이 도시에 와서 유적을 공략하고 유물을 처분하는 사이클은 다른 발굴대에 비해 어마어마하게 빨랐다.
거의 일주일 단위로 공략을 마치고 팔아치우고 있었으니.
“좋은 가격을 매겨 주신다면 또 오겠습니다. 아직 공략할 유적은 많으니까요.”
“아무렴, 여부가 있겠습니까. 지난번에 맞춰 드린 가격도 이쪽 업계에서 파격적인 수준이었는걸요. 저희는 언제나 아르센 경에게 최고의 대우를 해드릴 자신이 있습니다.”
이제 이 도시에서 떠날 예정이지만 굳이 그런 말을 해서 입장을 불리하게 할 이유는 없었기에, 아르센은 짐짓 너스레를 떨며 가격을 높였다.
이렇게 높은 사람들이 고아하게 앉아 칼날 숨긴 대화를 나누는 동안, 리노는 지난번과 마찬가지로 물건 하나하나의 질을 따지며 하수인끼리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상단 쪽 하수인은 지난번까지만 해도 같은 일반인에 불과했던 리노가 갑자기 기사가 되어 나타났다는 사실에 조금 당황한 듯 보였다.
“그러니까, 이 흠집은 오히려 이 무기가 얼마나 위대한 싸움을 거친 것인지, 그 역사를 증명하는 거란 말입니다! 흠집이 물건의 값어치를 떨어트린다는 건 그냥 예술품으로 볼 때의 발상이고, 자고로 무기란······.”
“아, 그건 그렇지만······.”
설득, 윽박, 애원이 이어지는 사투.
그것이 끝날 무렵, 흘깃 보니 의기양양하게 웃고 있는 리노의 얼굴이 보였다.
아무래도 싸움은 이쪽의 판정승으로 끝난 모양이었다.
하수인들끼리 상의해 나온 가격을 논의한 후 아르센이 상점을 나왔을 때, 그 옆에는 금화가 가득 든 상자를 든 리노가 있었다.
당연히 유적에서 얻은 물건을 처분한 이 돈은 모두 마룬에게, 정확하게는 별부르미에게 돌아가는 몫이었다.
밖에서 기다리던 마룬과 마법사들을 보며, 아르센은 리노에게 손짓하여 돈을 전달할 것을 지시했다.
“여기 있습니다, 마룬 경.”
“세상에, 이 정도나 됩니까?”
금화 백수십 장이 쌓인 더미를 보며 마룬이 감탄했다.
“네. 아무래도 무기 종류는 비싸게 쳐주더군요. 이런 세상이기도 하고, 요즘 분위기가 좀 그렇다고도 하고.”
최근, 도시 내부 구역의 분위기가 심상치 않다는 이야기가 얼핏 들려왔다.
술집에서 나도는 일종의 가십일 뿐이지만, 본래 그런 곳에서 진실이 나오는 법.
그리고 모름지기 혼란, 위험과 같이 싸움이 예견된 곳에서는 무기가 더 비싸게 팔리는 법이다.
“내일 바로 떠날 예정이니까, 돈을 쓰실 거면 오늘 중에 바로 쓰시기를 권하겠습니다.”
그들은 더 얻을 것도 없는데 머물러 있다가 괜한 사건에 휘말리느니, 바로 다음 목적지로 이동하기로 했다.
그리고 대부분 문명사회에서는 다른 지역에서 나온 금화에 제값을 쳐주지 않는 경우가 많은 만큼, 여기서 얻은 금화는 바로 사용하는 편이 유리했다.
아르센의 말에 고개를 끄덕인 마룬이, 갑자기 기묘한 제안을 했다.
“그럼 아르센 경이 물건을 대신 사주실 수 있으십니까?”
“네?”
“기왕이면 여행에 도움이 될 만한 물건을 사려고요. 아무래도 대장인 아르센 경의 판단을 믿고 싶은데······.”
“그렇게 돈을 마음대로 사용하셔도 되겠습니까?”
이건 지난번, 유적에서 리노에게 무기 하나를 선물하는 것과는 전혀 다른 수준의 문제였다.
마룬이 쥐고 있는 돈은 유물 무기 수십 개를 팔아 얻은 것인 만큼, 정말 돈 주고도 못 사는 유물이 아니라면 어지간한 것은 모두 살 수 있을 정도의 거금이었다.
그런 돈을 그저 여정에 도움이 되고자, 아르센의 판단에 맡겨 버린다니.
“장로님도 동의하셨습니다! 저희도 이 여정을 성공적으로 끝마치는 걸 가장 우선하고 있으니까요.”
“그렇습니까?”
어쩌면, 지난번 라티스의 부탁을 들어주기로 한 효과가 벌써 나타난 것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잠시 고민한 뒤, 아르센은 일행을 데리고 다른 상회를 몇 군데 돌며 여러 유물을 구매했다.
지난번에는 돈이 모자라서 사지 못했던 것들이 그 대상이었다.
첫째로 고른 것은, 물건이 아닌 주문이었다.
정확히는 아르센이 입고 있는 유물 갑옷에 걸린 보호 주문을 새로 충전했다.
충전 마법사를 고용함으로서.
“더럽게 비싸네요.”
바즈칼의 투덜거림대로, 보호 주문을 충전해 줄 수 있는 마법사는 어마어마하게 비싼 값을 불렀다.
과거 수소문한 바에 의하면, 갑옷에 보호 주문을 충전할 수 있는 수준의 마법사들이 일종의 카르텔을 형성해 담합을 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심지어 이에 따르지 않는 마법사는 몰래 암살한다는 소문마저 돌았다.
“어쩔 수 없지.”
다시 전신에 은은한 빛이 흐르는 갑옷을 보며, 아르센은 뿌듯함에 미소를 지었다.
하찮은 공격을 허용해서 헛되이 보호 효과를 낭비하는 일이 없도록 주의해야 한다는 성가신 점이 있지만, 이 갑옷의 보호 효과가 얼마나 탁월한지는 아르센이 직접 경험한 바였기에.
두 번째로 구매한 물건은 마룬과 별부르미를 위한 것으로, 마법사들을 위한 유물이었다.
얼굴 위를 가리는 하얀 가면 같은 물건으로, 마법사 특유의 거부감을 줄여주는 ‘검은 로브’의 강화판이라고 할 수 있는 물건이었다.
두 달 전 어떤 유적에서 발굴된 물건이라는데, 이것을 세 개 구매하느라 금화 수십 장이 날아갔다.
“정말 유적은 신비하네요. 설마 이런 게 나올 줄은?”
가면을 썼다 벗었다 하던 마룬이 놀라워하며 말했다.
일반인이 마법사를 보통 사람 대하듯 대할 수 있는 기적의 물건은 아니었지만, 이것을 쓴 마법사는 훨씬 마주 대하기가 편해진다고 했다.
이를 전혀 실감할 수 없는 아르센을 위해, 옆에 있던 바즈칼이 적절히 비유해서 설명했다.
“예전에 누가 똥 묻은 바퀴벌레 같다고 비유했는데, 이제는 그냥 바퀴벌레 정도는 되는 거 같은데요.”
여전히 꺼림칙하긴 하지만 그래도 훨씬 낫다고, 그렇게 말하면서 바즈칼과 아눈은 마룬을 또렷이 직시했다.
과거, 두 사람은 마룬과 어울렸을 때도 항상 그에게서 시선을 돌리고 있었다.
“마음 같아서는 수십 개 사고 싶네요.”
마룬이 안타깝다는 듯이 말했다.
어쨌든, 이 물건이 있으면 필요할 때 마법사 몇 명을 데리고 다니기가 수월해질 듯했다.
물론 마법사에 익숙하지 않은 사람들이 보기에는 이 가면을 쓴 마법사 역시 충분히 고역이라는 모양이지만 말이다.
마지막으로 구매한 것은 아눈과 리노를 위한 유물 갑옷이었다.
특히 리노는 키가 얼마나 클지 아직 알 수 없는 만큼, 사이즈 조절 기능이 있는 유물 갑옷을 구매해야 했다.
리노는 감동하여 눈물을 쏟으며 영원히, 아르센의 자손의 자손에게까지 충성하겠노라 맹세했다.
* * *
물건을 모두 산 뒤, 아르센은 유적 도시에서 만났던 다른 사람들을 찾아 작별 인사를 전했다.
상점 소개를 도왔던 호랑이 발톱의 요훈은 자기 고향의 특산물이라며 밀봉된 벌꿀술 몇 병을 나눠 주었다.
그러면서 말하길, 새벽 발굴단이 다시 평범한 발굴단으로 돌아가는 만큼 그들 역시 고향에 돌아갈 예정이라고 했다.
“마지막으로 한탕하고 싶었는데, 잘 안됐습니다. 뭐 어쩔 수 없죠······.”
아쉬워하는 그를 보낸 뒤, 다음으로는 새벽 발굴단의 단장인 크렌을 찾아갔다.
떠난다는 이야기를 들은 크렌은 헤어지기 전에 아쉬우니 대련이나 한 번 더 하자면서 아르센을 닦달했다.
당연하게도, 대련은 한 번으로 끝나지 않았다.
“허억, 헉······.”
“전보다 솜씨가 많이 늘었군. 역시 재능이 있어.”
네 번이 넘게 겨룬 후, 크렌이 남긴 말이었다.
확실히 지난 대련에서 배운 것을 꽤 많이 소화한 덕분인지, 이번에는 훨씬 오랜 시간을 버텨낼 수 있었다.
우습게도, 그것이 아르센이 본 크렌의 마지막 모습이었다.
그 말을 남기고 떠난 크렌이 다시 돌아오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크렌의 부하가 말하기를, 헤어지며 작별 인사하는 것 따위는 너무 낯간지러운 일이라면서 도망쳤다는 것이다.
정말 여러모로 기인이라고 생각하며, 아르센은 크렌이 머무는 여관을 나섰다.
다음날, 그들은 모든 짐을 싸든 채 여관 앞의 홀에 모였다.
“적어도 몇 달은 머무를 줄 알았는데. 그 사이 유적을 그렇게 빠르게 찾아댔으니 원.”
여주인은 아쉽다는 듯 투덜대며 보증금을 돌려주었다.
그 모습을 보던 바즈칼이 웃으며 말했다.
“이제 문 걷어차는 놈이 없으니 소리 지를 일 없겠수다.”
“설마! 아무렴 세상에 넘치는 게 댁 같은 사람인데?”
댁 같은 사람이 뭐냐고 물어보기 겸연쩍었는지, 바즈칼은 머쓱하게 웃으며 답하지 않았다.
모든 준비를 마친 뒤, 그들은 여관에서 나서 동문으로 나왔다.
이미 몇 번이고 지나온 길이지만, 아예 이 도시에서 떠나게 된다고 생각하니 감회가 새로웠다.
고작 한 달 정도를 지냈을 뿐이건만, 아르센은 자신이 유적 도시의 주민으로 정착했던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
도시, 수많은 사람이 모여 사는 이 도시에는 그가 과거 꿈꾸던 문명의 향수가 깃들어 있었다.
비록 그가 기억하는 21세기보다는 훨씬 원시적일지언정.
아르센은 자신이 도시에, 그리고 문명에 젖어 유적 도시를 그리워하고 있음을 새삼 깨달았다.
언제부터인가, 그는 이곳을 떠나야 한다는 사실을 아쉽게 여기고 있었다.
비록 독기에 찬 외부 구역일지언정 안전하고 깔끔한 숙소에 질 좋은 음식, 차디찬 술을 언제든 먹고 마실 수 있는 이곳을.
사실 그런 감정을 느끼는 것이 아르센 한 명뿐인 것은 아니었다.
이제 그들을 기다리는 것은 땅을 침대로, 별빛 내리는 하늘을 이불로 삼아 잠드는 여정이었으니.
때마침, 바로 옆에서 마룬이 투덜거리는 소리가 그것을 증명했다.
“아, 말잎 차 마시고 싶다.”
그 투덜거림을 마지막으로, 그들은 서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뜨겁게 내리쬐는 햇빛이 그들을 배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