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 Story of a Knight In A Ruined Fantasy World RAW novel - Chapter (114)
이덴 영지는 ‘안개의 땅’이라고 불리기도 한다.
영지는 물론, 주변 성채 구역 전체에 언제나 짙은 안개가 잔뜩 껴 있는 탓이다.
안개라고 해서 흔히 생각하는 습하고 축축한, 얼굴을 젖게 만드는 그런 물안개를 상상한다면 당황하게 될 것이다.
이곳에 낀 안개는 마치 스모그나 매연을 연상시키는, 건조하고 매캐한 것이기에.
좋지 않은 공기 탓인가, 쿨럭 하고 누군가가 기침하는 소리가 들렸다.
주위의 시선이 몰리자, 기침했던 마법사가 겸연쩍은 표정으로 고개를 숙였다.
“아, 염병할 놈의 안개가 진짜.”
바즈칼의 투덜거림대로, 주변에 깔린 안개는 어마어마하게 짙었다.
빛은 물론, 소리조차 잡아먹을 듯한 안개 탓인지 다들 신경이 예민해진 상태였다.
갑자기 무엇이 다가와서 공격할지 알 수 없는 곳을 며칠 내내 걷다 보면 누구나 이렇게 되는 것이 정상이긴 했다.
침묵 속에서 걷다 적적해졌는지, 마룬이 먼저 입을 열었다.
“노래라도 좀 부를까요? 영 적적한데.”
“노래라면 찬미가밖에 모르는데.”
“영웅시가 노래 비슷한 거던가?”
왁자지껄하게 떠드는 세 기사의 말을 듣던 중, 아르센은 리노를 향해 고개를 저으며 손을 내저었다.
그러자 리노가 흠흠 헛기침한 뒤 말했다.
“조용히 해야 할 것 같습니다. 주변이 잘 안 보이니 소리에 집중해야죠.”
그 말에 기사들은 일제히 입을 다물었다.
기사가 된 지 몇 주, 리노는 이미 2미터가 넘게 키가 자란 상태였다.
아직 전투 기술이 다소 미흡해 아르센이 직접 전수해 주고 있지만, 신체 능력 자체는 평범한 기사 수준에 도달한 상태였다.
그런 만큼, 그의 발언권 역시 다른 기사들과 동등했다.
아니, 오히려 병사들을 통솔하는 역할을 맡은 만큼 기사들 사이에서도 어느 정도 우위를 갖게 되었다.
“자, 자, 조용.”
아눈이 장난스럽게 말하며 입을 꾹 다물었다.
그렇게 침묵이 지나가고, 그들은 계속해서 걸음을 멈추지 않으며 전진했다.
아르센을 중심으로, 네 명의 기사가 진영을 사각형으로 둘러싼 모양새였다.
어느 방향에서 공격이 들어오든 대처할 수 있도록.
그렇게 얼마나 갔을까, 마침내 안개가 걷히기 시작했다.
이 안개 역시 독기(毒氣)의 일종이었기에, 정화 영역 안에 들어오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안개가 걷혀 펼쳐진 넓은 시야에 비친 것은, 영지의 외벽이었다.
“이런······.”
누군가의 한탄하는 듯한 중얼거림이 꽤 크게 들려왔다.
왜 그런 목소리가 나왔는지는 외벽의 모습을 보면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었다.
덩굴이 둘러 있고 관리되지 않아 여기저기 깨져 나간 방벽에, 그 위에는 허름한 가죽 갑옷 차림의 병사들 두어 명이 서서 하품하고 있었다.
얼마 전 보았던 위풍당당한 유적 도시의 성벽과는 비교할 수 없는 초라한 풍경이어서. 저 모습만으로도 영지의 수준을 짐작할 만했다.
그때, 병사 중 누군가가 아르센 일행을 보았는지 성벽 위가 시끌벅적해지기 시작했다.
이것도 이제 꽤 익숙한 일이었기에, 그들은 위협적으로 보이지 않고자 조금 떨어진 곳에서 가만히 서서 누군가 다가오기를 기다렸다.
다행히 얼마 지나지 않아, 방벽 위에서 기사 한 명이 뛰어내린 뒤 아르센 일행을 향해 다가왔다.
그 기사는 은회색 소 같은 형상의, 두툼하고 묵직한 느낌을 주는 진을 타고 있었다.
기사는 내려오자마자 엉뚱한 질문을 먼저 던졌다.
“실례지만, 어느 영지에서 오신 분들이시오? 미리 기별을 주셨으면 좋았을 텐데.”
그런 질문을 할 만한 것이, 아르센의 일행에는 기사가 무려 다섯 명이나 있었다.
아르센, 마룬, 바즈칼, 리노, 아눈까지.
거기다 수두룩한 마법사들, 딱 봐도 범상치 않은 유물로 무장한 병사들까지.
누가 봐도 어딘가의 영주가 파견한 정예군이지, 방랑 기사 집단의 모습으로는 보이지 않았다.
“저 먼 동쪽, 벨루안에서 온 아르센이라고 합니다. 서쪽으로 가는 길입니다만, 잠시 영지에서 머물기를 청하려고 합니다.”
아르센의 말에 기사가 당혹스럽다는 듯한 태도를 취했다.
몇 가지 이야기를 더 나눈 뒤에야 아르센은 그들이 인근 영지에서 온 기사가 아님을, 먼 곳에서 온 여행자들이며 잠시 머물기를 청하는 것임을 이해시킬 수 있었다.
이 영지에서 머물 수 있겠냐는 요청에 기사는 자신이 정할 수 없는 일이라고, 잠시 기다려 달라고 한 뒤 떠났다.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돌아온 기사는 동료 네 명과 많은 수의 병사들을 동반하고 있었다.
아르센은 그것이 대화 중 기세에서 밀리지 않고자 그런 것임을, 즉 아르센이 듣기에 그리 좋지 않은 대답을 가져왔음을 짐작할 수 있었다.
“영주님께서 그대들이 정화 영역 내에 머무는 것을 허락하셨소. 다만, 영지의 방벽 내부로는 들여보내 줄 수 없소.”
“멀쩡한 성벽을 옆에 두고 길바닥에서 지내라고?”
바즈칼이 거의 윽박지르듯이 말하며 성을 냈다.
그 기세가 자못 사나웠기에, 이덴 측 기사들이 바짝 긴장하는 기색을 보였다.
뒤에 있던 병사 중 몇몇은 은근슬쩍 활과 투창에 손을 가져가기까지 했다.
아르센은 즉시 오른손을 들어 바즈칼을 제지했다.
“바즈칼, 그만.”
“넵.”
바즈칼은 잘 훈련된 개처럼 물러섰다.
얼핏 보니, 기사들은 비교적 어린 아르센이 바즈칼을 완벽하게 통제하는 모습에 꽤 깊은 인상을 받은 듯 보였다.
아르센은 조곤조곤한 목소리로, 설득하듯 말했다.
“일단 밖에서 머물라는 말에는 따르겠습니다. 다만, 저희 일행 중 일부가 안에 들어가서 식량과 물을 거래하는 정도는 허락해주시죠. 그 정도도 어렵진 않잖습니까.”
애초에 아르센으로서도 영주의 요구를 이해하지 못하는 바는 아니었다.
입장 바꿔 그가 영주더라도 기사 다섯 명과 마법사 열 명, 잘 무장된 십여 명의 병사들이 마음대로 영지 내를 돌아다니게 두지는 않았을 테니까.
평범한 영지의 기사가 많아야 스무 명이 넘지 않으며 영지 여기저기를 방어하느라 퍼져있음을 생각하면, 이 정도 병력이 곧장 영주관을 기습하는 것만으로도 치명적인 타격을 줄 수 있었다.
그것을 방지하려면 적어도 여섯 명에서 여덟 명 이상의 기사와 수십 명의 병사를 동원해 아르센 일행을 감시해야 하는데, 그런 불편과 위험을 감수하느니 차라리 방벽 내로 들여보내지 않는 쪽이 속 편할 터였다.
물론 그로 인해 생길 원한을 생각한다면, 이 또한 마냥 마음 편할 수는 없겠지만 말이다.
“좋소. 기사 한 명, 병사 다섯 명. 무조건 여기까지요. 당연하지만 마법사들은 절대 들어와선 안 되오. 영지 안에 들어가서도 우리의 통제 아래에서만 움직여야 하고.”
그렇게 말하며 마법사들을 째려보는 기사의 눈빛이 퍽 매서웠다.
아무래도 이 영지 역시 마법사들에게 그리 온건한 곳은 아닌 듯했다.
“알겠습니다.”
아주 무리한 요구는 아니었기에, 아르센은 수긍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내심 아르센이 반발하리라 생각했던 것인지, 바짝 긴장해 굳어 있던 기사의 얼굴이 풀렸다.
중얼거리는 목소리에는 당황과 안도가 섞여 있었다.
“말이 통하는 이들이라 기쁘군.”
* * *
비록 방벽 안쪽에는 들어가지 못했지만, 오랜만에 정화 영역 안에서 쉴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큰 의미가 있었다.
유적 도시에서 그들이 머문 여관 역시 정화 영역 밖에 있었기에, 그들은 도시에서 머무는 내내 독기에 노출되어 있었다.
내부 구역으로 물건을 살 때는 잠시 독기에서 해방될 수 있었지만, 이때 따라오지 않은 이들은 한 달이 넘게 계속 독기에 노출되어 있어야 했다.
야영지를 꾸리던 도중, 아눈이 만족스럽다는 듯한 얼굴로 휘파람을 불며 외곽 쪽에 막대기를 꽂고 있었다.
“마음에 드시나 봅니다.”
“물론이죠! 이게 여행에서 얼마나 마음을 편하게 해주는지, 나중에 엘타에 꼭 하나 가져갔으면 싶을 정도입니다.”
그가 설치하고 있는 것은 과거 유적 도시에서 구매했던 파수꾼의 등롱을 걸기 위한 막대였다.
이 마법적인 알람은 방향을 지정하고 활성화할 경우, 일정 크기 이상의 생물이 다가오면 강한 빛을 뿜으며 큰 소리를 내어 무언가의 접근을 알렸다.
물론 이것만 믿고 불침번을 서지 않는 것은 안 될 일이지만, 이곳처럼 안개가 낀 탓에 가시거리가 짧아지는 곳에서는 엄청난 효용이 있었다.
사람이 직접 눈으로 간파하지 못한 상태에서도, 이 마법적 알람의 감지를 피해갈 수는 없기에.
“그럼 잘 부탁합니다. 저는 안에 들어가서 볼일 좀 보고 나오겠습니다.”
“물론이죠.”
영지 안에 들어갈 수 있는 기사는 한 명뿐, 처음에 거래를 맡겠다고 자청한 것은 리노였다.
행여나 아르센이나 다른 기사들이 들어갔다가 저들이 갑자기 공격할 수 있으니, 자신이 위험을 감수하겠다는 것이다.
그 태도를 갸륵히 여기면서도 아르센은 자신이 직접 갈 것을 선언했다.
대외적으로는 가장 강해서 몸을 빼기 쉬운 것이 그였기 때문이며, 숨겨진 이유로는 라티스 장로의 부탁을 수행하기 위해서였다.
“몸조심하십시오, 이런 말 하는 것도 우습지만. 문제가 생긴다면 위험한 건 저들이겠죠.”
아눈이 재밌는 농담이라도 한 것처럼 웃었다.
* * *
공간 확장 가방 두 개를 짊어진 병사들과 함께, 아르센은 영지 안으로 들어왔다.
신비롭게 빛나는 유물 갑주 탓인지, 아니면 진짜 마수 같으면서도 묘하게 무기질적인 인상을 풍기는 흑사자 때문인지, 그도 아니면 그냥 낯선 이방인 기사여서인지.
주변 사람들의 시선이 모두 아르센에게 쏠렸다.
“함부로 움직이지 않기를 바라겠소. 서로를 위해서.”
달갑지 않은 시선을 무시하고 동행하던 도중, 기사 한 명이 을러대듯이 그렇게 말했다.
그 말에 병사들은 조금 긴장하는 기색을 보였지만, 아르센은 웃으며 그러겠노라 답할 정도로 여유를 보일 수 있었다.
체력 문제가 있으니만큼 혼자 영지 전체를 휩쓸지는 못할지언정, 제 몸 하나 뺄 자신은 있었기 때문이었다.
광장으로 보이는 곳에 도착하자, 연락을 받아 미리 쌓아둔 물과 식량이 보였다.
필기판 같은 것을 들고 있는, 행정관으로 보이는 인물이 아르센을 보더니 꾸벅 고개를 숙였다.
“반갑습니다, 거래 담당자 로일입니다.”
“벨루안의 아르센입니다. 거래 조건은?”
“듣기로는 유적 도시 쪽에서 오셨다던데······.”
로일은 유적 도시에서 사용되는 금화로 거래하기를 원했다.
이곳 이덴 영지에는 유적 도시 쪽 상인들이 가끔 들르는 만큼, 그쪽 화폐가 거래하기 용이하다는 이유에서였다.
아르센 역시 남은 금화를 정리할 수 있는 만큼 반대할 이유가 없어, 거래는 순조롭게 진행됐다.
아르센은 병사들을 시켜 식량과 물의 질을 잘 확인한 뒤, 로일이 원하는 만큼의 금화를 지급했다.
별 탈 없이 거래가 끝난 것에 양쪽이 모두 만족하는 가운데, 아르센이 기사를 보며 물었다.
“잠시 들르고 싶은 곳이 있습니다만.”
“어디를 가시려고?”
그렇게 대답하는 기사의 얼굴에는 영 마뜩잖은 기색이 한가득 어려 있었다.
그로서는 그냥 아르센이 거래를 마치고 순조롭게 떠나는 쪽이 마음 편하지, 괜히 문제라도 생겼다가는 책잡힐 거리가 생기는 것이니 당연할 터였다.
그렇기에, 아르센은 덤덤히 품속에서 보석 몇 개를 꺼내 건넸다.
“이건?”
“딱히 성가실 만한 용무는 아닙니다. 이곳 영지 출신인 지인이 있어서, 가족들에게 안부 좀 전해 달라더군요. 저 혼자 갈 겁니다. 여기 이 친구들은 바로 물건 가지고 야영지로 돌아갈 거고요.”
그 제안에 잠시 머리를 벅벅 긁으며 고민하던 기사는, 동료와 속삭이며 상의하는가 싶더니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단, 자신과 옆에 있는 동료가 따라가야 한다는 단서를 붙였다.
그런 단서를 붙인 것으로 보아, 아무래도 이들은 둘이서 힘을 합치면 아르센을 어렵지 않게 제압할 수 있으리라 믿고 있는 모양이었다.
벨루안 같은 영지의 기사에게 보석 몇 개를 주며 뒷거래를 제안한다면 코웃음을 쳤겠지만, 밖에서 보았던 대로 이 영지의 살림살이는 그리 풍족하지 않은 모양이었다.
아르센의 병사들이 이곳 영지의 병사들을 따라 야영지 쪽으로 돌아가는 모습을 보며, 기사가 물었다.
“그래서, 어디로 가실 계획이오?”
“영지 남쪽, 니데아라는 늙은 여자를 찾으라고 하던데요.”
“니데아? 음, 나도 남부 출신이긴 한데.”
잠시 이름을 되뇌던 기사가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니데아, 니데아, 흔한 이름인데······늙었다면 누군지 알 것 같군. 어디 사는지도 대충 기억나고. 그런데 그 집안에 외부로 떠난 이가 있었던가?”
“글쎄요, 그것까지는 저도 잘.”
아르센이 얼버무리자 기사는 고개를 잠시 갸웃하더니, 아무렴 어떻냐는 듯이 고개를 돌렸다.
“뭐, 잘 아는 사이는 아니니까. 따라오시오. 안내해줄 테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