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 Story of a Knight In A Ruined Fantasy World RAW novel - Chapter (128)
“허억, 헉······.”
마지막 인형이 땅에 그 몸을 눕히는 것을 보며, 아르센은 왼손에 들고 있던 도끼를 내던지며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마지막 순간까지 방심하지 않고 기다려야 한다는 것은 알지만, 도저히 그렇게 하기 힘든 상황이었던 탓이다.
턱 끝까지 차오른 숨, 으스러진 오른팔, 삐기라도 했는지 뼈를 찌르는 듯 쑤셔오는 발목까지.
도저히 전투를 지속하기가 힘든 상황이었다.
잠시 숨을 고르자, 주위를 둘러볼 여유가 생겼다.
주위에는 부서지거나 찢겨 나간 시체가 널려 있었으나, 붉은 피는 찾기 힘들었다.
대부분 시체가 전투 인형, 즉 피를 흘리지 않는 존재들이었던 탓이다.
물론 그들만 희생된 것은 아니었다.
아르센 쪽에서도 사상자가 상당히 나왔다.
벨루안을 떠나 모험을 시작한 이래, 동료 중 첫 사망자가 나온 전투이기도 했다.
멀찍이서, 마룬이 훌쩍이는 소리가 들렸다.
“위토······주람······.”
전투 초반에 목이 뽑혀 나간 한 명, 그리고 중간에 붙들려 그대로 몸이 반으로 찢긴 한 명.
전우의 죽음에 그리 익숙하지 않은 듯, 마법사들은 전우의 시체 곁을 차마 떠나지 못하고 우울해하고 있었다.
그중에서도 마룬은 아예 두 눈에서 눈물을 펑펑 쏟아내고 있었다.
벨루안에서 많은 전투를 겪으며 동료들의 죽음에 익숙해진 아르센이었지만, 그들의 그런 슬픔을 비웃거나 무시하지는 않았다.
소중한 이를 잃는 기분은 무뎌질지언정, 절대 아프지 않게 되는 일은 없음을 알기에.
예의를 차리고자 시선을 돌려, 아르센은 자신의 몸을 내려다보았다.
방호 주문으로 은은히 빛나던 갑옷은 많은 공격을 받은 탓에 그 빛이 거의 다했으며, 여기저기가 우그러져 있었다.
특히 오른팔 부분은, 그 안에 팔이 있는지 의심될 정도로 기괴하게 꺾여 있었다.
당연히 안에 있는 아르센의 팔 역시 꺾인 상태였다.
지금도 찌를 듯한 격통이 솟구치는 것을 이를 악물어 참는 중이었다.
‘치유 주문을 제대로 받기 전까지 오른팔은 못 쓰겠군······.’
치열한 싸움이었던 만큼, 그들 모두 크고 작은 부상을 달고 있었다.
동료의 시체 앞에서 울고 있는 마룬 역시 왼쪽 다리가 부러진 데다가 내장이 상했는지 가끔 입에서 피를 토했다.
마법사들도 온전하지는 않았다.
어떻게든 아르센이나 마룬을 돕고자 무기를 들고 덤볐다가 한 대씩 얻어맞고 날아갔는데, 한 명은 갈비뼈가 부러져 가슴을 감싸고 있었으며 다른 한 명은 광대뼈와 턱이 깨져 피를 줄줄 흘리고 있었다.
사실, 싸움의 내용을 생각해보면 그저 죽지 않고 살아남은 것이 용했다.
아르센이나 다른 마법사들이나, 몇 번이고 죽을 위기를 겪었으니.
‘팔 부러질 때가 제일 아슬아슬했지.’
한 번에 인형 다섯이 덤벼들어 셋을 죽였으나, 나머지 둘에게 붙들려 무기를 놓치며 잡힌 팔이 부러졌다.
고위 기사인 아르센이라 팔이 부러진 것으로 끝났지, 보통 기사였다면 그대로 팔이 뽑히고 연이은 공격에 목숨을 잃었으리라.
유감스럽게도, 마룬을 포함한 세 명의 마법사 중 치유 주문을 제대로 구사할 수 있는 이는 없었다.
다소 상태를 완화할 정도는 되었지만 그뿐, 제대로 치유하려면 위쪽으로 돌아가야 했다.
죽은 두 마법사 중 한 명, 위토가 꽤 능숙한 치유술사였다는 사실이 새삼 뼈아팠다.
이제 위로하기 충분한 시간이 지났다 여겼기에, 그리고 마룬의 상태가 더 나빠지기 전에 돌아가야 한다 여겼기에 아르센은 자리에서 일어섰다.
뻐근한 발목 통증에 잠시 얼굴을 찌푸리다가, 최대한 고통 없는 목소리를 가장하며 마룬을 재촉했다.
“이제 갑시다, 마룬 경. 빨리 이 유적을 조사하고 나갈 방법을 찾아야죠.”
“시체는······.”
“배낭에 담아서 가져가죠. 유적 안에 놔두는 것보다 밖에서 잘 묻어주는 쪽이 나을 겁니다.”
아르센의 말에, 마룬은 마지막으로 눈물을 몇 방울 떨구더니 자리에서 일어섰다.
“······알겠습니다.”
그들은 동료의 시체에서 갑옷과 도구를 회수한 뒤, 담요로 사용하는 녹색 천을 꺼내 시체를 감싸 마법 배낭에 넣었다.
그 전에, 머리카락을 조금 잘라 유품으로 간직하는 것으로 사자에 대한 예의를 다했다.
이 정도가 이곳에서 할 수 있는 가장 정중한 예우였다.
* * *
간단한 장례 절차를 마친 뒤, 아르센은 가장 먼저 이 경기장, 정확히는 경기장으로 보이는 공간을 탐사했다.
가장 먼저 눈에 띈 특이점은, 관람석이라 생각했던 부분에 놓인 석판이었다.
앞서 보았던 것과 같이 이 석판에는 글씨가 새겨져 있었는데, ‘원시 전투 인형’이라고 표기되어 있었다.
그런 석판 수백 개가 관람석에 줄지어 놓여 있었다.
아르센은 그 석판을 보며 그것이 과거 어떤 모습이었을지를 상상했다.
석판 위, 멋진 옷을 입은 전투 인형들이 장식품처럼 서 있는 모습.
아마 그가 경기장이라 생각했던 곳에서, 사람들은 주위에 빙 둘러선 인형을 감상하지 않았을까.
기이하면서도 섬뜩한 사실은, 석판의 개수가 그들을 습격한 인형의 숫자보다 훨씬 많다는 것이었다.
만약 이 석판의 숫자만큼 인형이 있었다면 그들은 여기서 뼈를 묻어야 했으리라.
‘근데 왜?’
왜, 이 실험체들은 여기 풀려 있었을까.
그리고 어째서 맹목적으로 마법사들을 노린 것일까.
십여 마리를 뺀 다른 인형들은 어디에 있을까.
생각이 복잡해지는 것을 꾹 누르며, 아르센은 생각을 전환했다.
‘일단 단서를 더 찾아봐야겠는데.’
일단 가장 중요한 것은, 이 유적에서 나가는 방법을 찾는 것이었다.
당초 공략하기로 했던 유적은 그 끝에 나갈 수 있는 승강기가 있다고 알려져 있었다.
같은 형식의 유적이니 이곳에도 탈출할 수 있는 기관이 있으리라 기대할 수 있었다.
주변을 둘러보던 마룬이 물었다.
“흩어져서 찾아볼까요?”
“아뇨, 혹시 인형이 또 나올지도 모르니 제게서 떨어지지 마십시오.”
아르센은 아직 수백이 넘는 전투 인형이 저 안에 우글거릴지도 모른다고 말하지 않았다.
사실을 알았다가는 아예 겁먹어 나갈 의지를 잃을지도 모르겠다 생각했던 탓이었다.
그렇게, 그들은 조심스럽게 전진했다.
그들이 싸운 방, 통칭 전시실 안쪽에는 또 다른 공간이 마련되어 있었다.
서재, 어쩌면 도서관으로도 보이는 방. 그 안을 채운 수십 개의 나무 책장에서는 묵은 곰팡내가 풍겼다.
“오, 책이 엄청 많······지는 않네요.”
기대에 차 소리치려던 마룬이 실망스럽다는 듯한 목소리로 말을 끝맺었다.
그 말대로, 이 도서관에 꽂혀 있는 책은 적었다.
책장 몇 개에 한 권이나 있는 정도일까, 그 내용물도 대부분이 무슨 요리 서적 같은 것이어서 한숨을 자아냈다.
“썅.”
살아남은 두 마법사 중 누군가가 욕설을 내뱉었다.
단순히 얻은 게 없어서는 아니었다. 동료가 죽었는데, 목숨을 바쳐가면서까지 아무것도 얻지 못했음에 분노한 것이었다.
아르센 역시 그 분노에 어느 정도 공감하는 바여서, 절뚝거리면서 열심히 도서관을 뒤졌다.
책, 책, 책······책을 뒤지던 도중, 그의 예민한 시력에 기묘한 것이 잡혔다.
‘음?’
유난히 책이 네 개나 꽂힌 책장. 아르센은 멀쩡한 손으로 힘겹게 책을 펼쳐 내용을 확인한 뒤 다시 꽂아놓으려다가, 조금 전까지 책이 꽂혀 있던 책장 부분을 조심스럽게 매만졌다.
예민한 감각을 지닌 기사가 아니라면 느끼지 못할, 지극히 미묘한 차이.
그것을 꾹 누르고, 좌우로 밀고, 위로 밀고······.
벽면 일부가 위쪽으로 밀려 올라가고, 작은 구멍이 나타났다.
‘이건?’
작은 구멍 하나. 손가락 하나가 들어갈 정도 크기였다.
아르센은 투구의 마력 감지 능력을 통해 이 구멍에 무언가 마법이 걸려 있음을 간파할 수 있었다.
잠시 고민한 뒤, 아르센은 검지손가락을 집어넣었다. 본인의 마법 저항력을 믿고.
“음······.”
손가락을 넣자, 그 위를 무언가가 훑는 느낌이 들었다. 유물 갑옷의 건틀릿 부분을 뚫고.
마치 투시하는 듯한 기분이 들어 아르센은 자기도 모르게 신음을 흘렸다.
무언가가 지나가는 느낌이 끝나자, 마치 합격했다는 듯 책장이 좌우로 쩍 벌어졌다.
그리고, 안쪽의 비밀스러운 공간을 드러냈다.
주위에 있던 마룬과 다른 마법사들이 그 모습을 보고 깜짝 놀라 다가왔다.
“무슨 일입니까? 이건?”
“비밀방이라도 찾으신 겁니까?”
그들의 말에, 아르센은 고개를 으쓱하고 말했다.
“아마 그런 거 같습니다.”
비밀방 안쪽의 풍경은 황량했다.
길쭉한 직사각형의 방. 벽은 제대로 가공되어 있지 않아 까슬까슬했으며, 흔한 탁자나 의자 같은 가구 하나조차 보이지 않았다.
그 안쪽에, 몇 가지 물건이 나동그라져 있었다.
주먹 두어 개 크기의 붉은 구슬, 사람 얼굴만 한 크기의 원반, 네모난 형태의, 마치 핸드폰처럼 보이는 무언가까지, 하나같이 장난감 같은 물건이었다.
하지만 그들은 그 물건이 무엇인지 의문을 가질 수 없었다.
물건 바로 옆, 가지런히 누운 미라 하나가 있었기에.
“사람······인가?”
마법사 중 누군가가 놀라 중얼거렸다.
아르센은 조심스레 다가가, 그 미라를 조심스럽게 쓸어보았다.
죽은 지 몇 년이 지났을지 짐작도 가지 않는 시체는, 아무것도 걸치지 않은 채 곱게 누워있었다.
이 안의 환경이 자연스럽게 시체를 미라로 만든 것일까, 아니면 마법적인 무언가가 작용한 것일까.
미라의 모습은 평범했다.
머리카락은 바짝 친 듯 짧았으며, 골반의 모양으로 미루어 보아 남성인 것으로 보였다.
아르센은 마법사들을 보며 조심스레 물었다.
“이거, 고대인의 시체 아닙니까?”
“맞는 거 같습니다.”
“세상에.”
마룬뿐만 아니라, 다른 마법사들 역시 경악하여 그 시체를 내려다보았다.
“옛날에 몇 번 발견됐다는 이야기는 들어봤습니다만······직접 보는 건 처음입니다.”
“일단 우리랑 크게 다르게 생기진 않았네요.”
워낙 얼굴이 쭈글쭈글해서 인종이나 인상을 판별하긴 어렵지만, 대충 보았을 때 현대 인류와 크게 달라 보이지는 않았다. 엘프처럼 귀가 삐죽한 것도, 뿔이 달린 것도 아니었으며 체격 역시 평범했다.
바닥에 가지런히 누워있는 시체, 그리고 그 옆, 머리맡에 놓여 있는 물건들.
그 모습을 보며, 아르센은 지구에서 전해 들었던 먼 옛날의 풍습을 떠올렸다.
“어쩌면, 이 물건들이 저 고대인의 소유였을지도 모르겠습니다.”
“네?”
“죽은 이를 묻으면서 함께 물건을 묻었다거나······.”
아르센의 그 가설이 꽤 그럴싸하게 느껴졌는지, 마룬이나 다른 마법사들 역시 고개를 끄덕여 동의했다.
이 미라는 외관상으로 사인(死因)을 판별하기 어려웠는데, 아마 질병 같은 것으로 죽은 모양이었다.
사실 조금 이상한 점은 있었다.
무덤 같은 곳도 아니고, 도서관의 비밀 공간에 시체가 있을 이유가 무엇이란 말인가. 너무 책이 좋아서 책과 함께 죽고 싶었던 사람이라면 모를까?
그게 아니라면, 이곳에 숨어든 범죄자 같은 것이었을지도 모른다.
밖에 나갈 수 없어, 안에 고립된 상태에서 늙거나 병들어 죽었을지도.
‘······알 방법이 없나.’
고개를 저으며, 아르센은 그 옆의 물건을 보았다.
마력이라고는 조금도 느껴지지 않는, 그저 세월의 흔적이 느껴지지 않는 재질 말고는 특이한 점이 없는 잡동사니들.
“건져갈 건······이 고대인의 물건 정도로군요.”
“좀 찜찜한데요. 그리 쓸모 있는 거 같지도 않고.”
마법사 하나가 다소 꺼림칙하다는 듯 말했다.
확실히 이 물건들은 마력이 실려 있지 않아, 겉으로 보기에는 특별한 점을 찾기 어려웠다.
고대인의 물건이라는 점을 어필해 어디에 팔아볼 수도 있지만, 이것이 고대인의 물건임을 어떻게 증명한단 말인가?
유물처럼 특별한 능력이 있는 것도 아닌데.
“일단 챙겨두겠습니다.”
그렇게 말하며, 아르센은 공간 배낭을 열었다.
그런 뒤 사용처가 애매한 물건들을 넣는 잡동사니 칸을 지정하여 고대인의 물건들을 보관했다.
그중에는 과거 유적에서 마수를 죽이고 얻은, 사용처가 애매하여 계속 들고 다니는 마력핵도 있었다.
마력핵이 붉은 구슬과 맞닿으며 달그락 소리를 냈다.
* * *
이후, 그들은 계속해서 나가는 길을 탐사했다.
그러던 도중, 그나마 이 원정의 결실을 얻을 수 있었다.
도서관 바로 다음 방, 석판 위에 널브러진 고대 유물 몇 점.
제법 강한 마력이 담긴 병장기가 몇 개 있었다.
석판을 내려다보며 마룬이 말했다.
“여기 이름이랑 사용법까지 다 쓰여 있네요?”
“친절하기도 하네요. 일단 적어두죠. 확인은 나가서 해보기로 하고.”
그 말대로, 석판 위에는 이 무기가 어떤 이름을 가지고 있으며 어떤 기능을 가졌는지, 어떻게 사용하는지까지 쓰여 있었다.
일단 무기 테스트를 하기에는 다들 다치고 지친 상태라, 전부 배낭에 쓸어 담은 뒤 그 이름과 기능을 간단히 메모했다.
그리고 조금 더 나아가기를 몇 분.
“아······.”
“좋아, 나갈 수 있다!”
“살았어!”
마침내, 그들은 탈출구를 발견했다.
검푸른 장식이 제법 화려한 승강기가 있었다.
위곤 유적에 설치되어 있던 것과는 조금 다른 양식이나, 전체적인 형태는 비슷해 그 기능을 짐작할 수 있었다.
차이점이라면 비밀번호를 눌러야 하는 형식이 아닌, 손바닥을 올려 인증하는 방식이라는 것 정도일까.
아르센이 다가가 왼쪽 손바닥을 올리자, 녹색 빛이 번쩍이며 인증되었다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됐습니다. 올라가죠.”
유적의 정복자들, 고통과 피로로 실신할 것 같은 환자들을 태운 승강기가 천천히 상승했다.
그렇게, 그들을 지상으로 인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