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 Story of a Knight In A Ruined Fantasy World RAW novel - Chapter (131)
“이름.”
[바크란 케도우.]“그게 이름인가? 성은?”
[바크란이 이름이고 케도우가 성이야.]“좋아.”
아르센은 수피지에 이 정보를 기입하며, 고대에는 성씨 개념이 있었다는 새로운 정보를 추가해 넣었다.
그리고 그 외, 바크란 케도우라는 사람의 인적사항을 자세히 캐물었다.
이를 정리하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바크란 케도우, 주립 뮤니크 대학원 사학과 2학년, 26세, 부모님은 건강하시고······.”
[······맞아.]‘대학원이라, 잘못된 선택을 한 친구였군.’
정확히 지구의 대학원에 대응하는 교육기관인지는 모르겠지만, 하급학교와 중급학교, 상급학교를 거쳐 대학교까지 졸업한 후에 가는 곳이라고 하니 얼추 맞는 듯싶었다.
아르센은 상대의 목소리가 여전히 가라앉아 있음을 느꼈다.
사실 지금의 구도는 마치 납치범과 인질의 그것과 같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이는 아르센이 의도한 바이기도 했다.
‘······일단은 이 상태를 유지할까.’
상대를 풀어줬을 때 저 주둥이, 물론 입은 없지만, 말이 통제되지 않는다는 것은 이미 터득했다.
아르센은 계속해서 질문했다.
“그래서, 그 방에 있었던 이유는 뭐지?”
[응? 어, 그게.]망설이는 말투. 아르센은 조금 더 목소리를 깔고 음산한 어조로 을러댔다.
마치 범죄 조직원이라도 된 것처럼.
“뭘 망설이는지 모르겠는데, 당장 죽는 거보다는 말하는 게 낫잖아. 솔직히 말해. 지금 널 도울 수 있는 건 나뿐이니까.”
잠시 침묵이 지나가고, 곧 바크란은 자포자기한 듯 순순히 고백했다.
그 내용은 사뭇 놀라웠다.
[그게, 예리코 교수님이라고 생명공학부 담당 교수님이 ······.]그의 집안은 그다지 경제 형편이 좋지 않다고 했다. 원래도 그리 부유한 집안은 아니었지만, 바크란을 대학원까지 보내느라 집안에 빚이 많이 쌓였다고.
고대에도 대학 등록금은 집안 살림을 거덜 내는 일등 공신이었던 모양이다.
그때, 예리코라는 교수가 그에게 접근해 불법적인 인체 실험 하나를 제안했다.
당연히 수상쩍은 제안이라 거절해야 했지만, 고생하는 부모님의 처지가 떠올라 바크란은 실험 제의를 수락했다.
선금을 받고, 고대 생물 공학 박물관에 몰래 차려진 실험실에서 실험을 받았다······.
“고대 생물 공학 박물관이라고?”
[맞아.]“혹시 그 박물관이라는 게 이런 곳인가?”
아르센은 구슬을 가져왔던 붉은 궁전의 모습을 묘사하여 들려주었다.
지하, 붉은 외벽, 긴 복도를 통해 일자로 길게 늘어선 건물 등······.
[그래. 그 박물관의 도서실에 비밀 실험실이 있었어.]“고대 박물관이라는 건 무슨 말이지? 그곳이 만들어진 게 네 시대를 기준으로도 고대라는 건가?”
[당연하지. 근데 네 시대라니? 그건 무슨······.]아르센은 바크란의 질문을 묵살하고 계속 질문을 던졌다.
그가 진실을 알게 되면 충격을 받아 입을 다물지도 모르니, 이 사실을 알기 전에 많은 정보를 캐낼 생각이었다.
“실험이란 건 뭐지? 알 것 같긴 한데.”
[······사고 이식 실험이야. 인간의 의식을 무기물에 이식하는 건데, 내가 전문가는 아니라서 정확히는 모르겠지만 아마 성공한 거 같아.]“내가 보기에도 그렇긴 하군.”
고개를 끄덕여 동의하는 한편, 아르센은 바크란이 말하는 내용을 끊임없이 적으며 얼굴을 찌푸리고 있었다.
이 고대인이 알려주는 이야기 속에 담긴 의미를 열심히 해석하고자.
‘일단, 이상했던 것 하나는 이유를 알겠군.’
아르센이 유적을 탐사하며 느꼈던 의문 중 하나는, 유적에 있는 물건이나 지식의 수준이 너무 낮다는 것이었다.
물론 고대 유물들은 현대의 기준으로 굉장히 강력한 마법 무구지만, 인공위성을 띄우고 생명을 마음대로 다루던 이들이 사용한 무기라기에는 너무 수준이 낮았다.
고대 유물이란 것의 정체가 유물이란 이름 그대로 중세 박물관에 전시된 수준이었다면 어느 정도 납득할 수 있었다.
‘이건 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던 유물을 좋다고 꺼내 쓰는 현대인들에게서 자괴감을 느껴야 하는 부분인가?’
그렇다면 고대와 현대 사이, 즉 바크란이 살던 가장 발전된 시대의 물건이 전부 어디로 갔느냐가 의문이긴 했다.
“그럼······뮤니크 대학은 어디에 있지? 이 대륙을 기준으로.”
[레만 공화국 서부, 뮤니크 주에 있지.]“레만 공화국이라는 건?”
[뭐? 공화국을 몰라? 그러고 보면, 대학원이나 상급학교 같은 교육체계도 전혀 모르고······.]아르센은 가볍게 혀를 찼다.
상대에게 있어 아주 당연한 지식, 나라 이름이나 사회적인 상식을 묻기 위해서는 그 자신이 이에 무지함을 드러내야 했다.
지금까지는 그냥 강압적으로 협박해서 정보를 캐냈지만, 슬슬 상대도 이상한 점을 깨닫기 시작한 모양이었다.
무시하고 몇 가지를 더 캐내려고 했지만, 바크란은 말을 질질 끌며 원하는 대답을 주지 않기 시작했다.
이번에도 협박해 볼까 했지만, 사실 이 협박은 아르센 쪽에서도 함부로 남용할 수 없는 카드였다.
그가 가진 유일한 카드는 상대가 들어있는 구슬을 깨버리는 것이고, 그 외에 어떤 고통도 줄 수 없으니까.
혹시 구슬이 파손될지도 모르니 겉을 긁어서 고통을 줄 수 있나 테스트하는 것도 불가능했다.
실제로 구슬을 깨는 것 역시 불가능했다.
상대는 이 땅에서 다시는 찾을 수 없을지도 모를, 대화가 가능한 고대인이니.
즉, 아르센으로서도 상대가 배째라고 나오는 순간 할 수 있는 것이 없었다.
결국, 아르센은 지금 상황에 대해 자신이 추론하는 바를 설명했다.
지금은 그가 살던 시대로부터 적어도 수백년, 어쩌면 수천년이 지난 뒤이며 이 세계에는 고대인이 아닌, 아마 전투 인형의 후손들이 살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고.
그리고 아르센 본인은 전투 인형과 고대인의 혼혈인 것 같다고.
그 말에 바크란은 격하게 반발했다.
[무슨 개소리야? 전투 인형은 생김새만 인간 형태일 뿐이지 인간 유전자 자체가 안 들어가는데, 무슨 수로 혼혈이 돼? 거기다 수천 년이 지났다니 갑자기 무슨······.]그럴 리가 없다고, 증거를 보이라고 소리치는 그 모습에서 조금 전까지 생명의 위협에 겁먹던 모습은 오간 데 없었다.
아르센은 그 이유를 짐작할 수 있었다.
아마 불안하기 때문일 것이다. 내심 아르센의 말이 맞음을 본능적으로 직감하고 있기에, 그 사실을 받아들이기를 거부하고자 더더욱 반발하는 것일 터.
아르센은 증거를 보이고자, 바크란이 들어있는 구슬을 진 앞에 단단히 고정한 뒤 숲속을 달렸다.
몇 분쯤 달렸을까, 숲을 나오자 바로 앞에 넓은 평야에 펼쳐졌다.
이곳의 평야는 땅 전체에서 진한 자주색 독기가 흘러나와 그 광경이 사뭇 기괴했다.
이것을 보여주는 것이 아르센의 목적이었다. 그의 예상대로라면, 고대에는 이런 독기가 없었을 테니까.
과연, 바크란은 경악에 찬 목소리로 신음을 토해냈다.
[말도 안 돼······정말로?]그 하나를 속이고자 저 지평선 너머까지, 보이는 모든 곳을 독기로 채웠을 리는 없었다. 일개 대학원생을 속이고자 그런 수고를 감당할 사람이 어디 있을까.
바크란 역시 그것을 깨달았는지, 말도 안 된다고 되뇌는 목소리에는 진한 좌절감이 담겨 있었다.
“이제 믿겠어?”
[······믿을게.]“좋아, 그럼 돌아가지. 여기 오래 있으면 위험하니까.”
그렇게 말한 뒤, 아르센은 곧바로 다시 평야를 벗어나 숲으로 들어갔다.
바크란이 질문이 들려왔다.
[위험하다고? 왜?]“이곳 영주가 마법사들을 납치하려고 군대를 보냈었거든. 한 번 격퇴하긴 했지만 안심할 순 없으니까.”
[영주라니, 농담도······.]아르센은 눈 깜짝한 사이에 현대에서 중세로 떨어진 사람이 얼마나 환경에 적응하기 힘든지, 상식의 괴리가 어떻게 다가오는지 누구보다 잘 아는 사람이었다.
그렇기에 바크란의 말에도 차분히 답해줄 수 있었다.
“마법사들에 의해 세상이 이 꼴이 된 뒤에, 사람들은 영지와 성채에서만 살고 있어. 그걸로 정화되는 구역 외에는 모두 독기가 차 있어서 마력을 쌓은 인간이나 마법사, 기사가 아니면 활동할 수 없지. 영지와 성채를 지배하는 사람을 영주, 혹은 성주라고 부르고.”
아르센의 말에 대답은 들려오지 않았다.
아직도 충격에서 헤어나지 못했나 싶은 순간, 바크란이 경악한 듯이 말했다.
그리고 그 내용은, 오히려 아르센 쪽이 충격을 받을만한 이야기였다.
[마법사들이 정화 마법진을 깨뜨렸다고?!]“정화 마법진?”
[그래, 정화 마법진! 이 땅에 가득한 독기를 정화하는!]잠시, 아르센은 달리던 것을 멈추고 눈을 감았다. 갑자기 들이닥친 정보를 소화하고자.
몇 초 후, 조금 진정한 아르센은 천천히 흑사자를 몰아 야영지 주변으로 돌아가며 물었다.
“정화 마법진이란 건 뭐고, 독기를 정화했다는 건 무슨 이야기지? 이 독기는 마법사들이 만들어낸 거 아닌가?”
[당연히 아니지. 뭔 수로 이런 걸 만들어? 오히려 우리는 이걸 없앴지. 정화 마법진으로.]“그 정화 마법진에 대해 자세히 얘기해 봐.”
[설마 이런 것도 다 잊혔다고?]바크란은 상상도 못했다는 듯한 어조로 말했다.
[전 대륙에 몇백 개더라······학교에서 배웠는데 까먹었네, 어쨌든 대충 백 수십 개 정도 되는 큰 축에, 그거의 열 배 정도 되는 작은 축을 건물의 형상으로 매개체를 만들었어. 땅 밑을 흐르는 지맥(地脈)이 가장 강한 곳에. 그걸 이용해 전 대륙의 독기를 정화하는 마법진을 가동했고.]아르센은 그 이야기를 듣고 곧바로 영주관과 성주관을 떠올렸다. 고대의 건축물, 절대 부서지지 않으며 시대를 초월한 여러 편의시설이 갖춰진 그 건물을.
설마 그 건물들이 그런 매개체로 이용되었을 줄은.
[우리가 이 땅에서 살 수 있었던 이유가 그거지, 지금은 왜인지 몰라도 깨진 거 같지만······.]그때, 아르센은 마침 떠오른 의문을 던졌다.
별부르미에서도 궁금해하고 있던 사실 하나를.
“그러고 보면, 고대에는 마법사에 대한 혐오감이 없었나?”
[혐오감?]아르센이 간략히 설명하자, 바크란은 놀라며 고대에는 그런 현상이 없었다고 주장했다.
마법사는 이 세계의 문명을 지탱하는 핵심 기술자로서 귀족 계급으로 여겨져, 모든 부모는 자식이 마법사로 태어나기를 바라며, 집안에 마법사가 있는 것은 큰 축복이었다고.
[물론 그런 마법사들에 반발하는 마법 혐오자들도 있긴 했는데, 그냥 정신병자 취급이었지. 사람이 마법 없이 어떻게 살아? 이 행성의 환경 자체도 마법으로 살 수 있게 바꾼 건데. 애초에 마법사 자체가 유전으로 태어나는 게 아니니까 계급이 상속되지도 않고.]“그럼 왜 그런 혐오증상이 생겼는지는 모르겠단 거군?”
[전혀.]아쉬움에 잠시 고개를 저은 뒤, 아르센은 다른 것을 질문했다.
“그러면, 마법사나 그 마법 혐오자들 중 누군가가 정화 마법진을 부순 거 아닌가? 축이 수백 개라면 한 개만 부숴도 깨지는 거고?”
[그건 맞는데, 정화 마법진은 못 부숴.]“못 부순다고?”
[응. 이 별에 오기 전, 선조 시대에 만들어진 가장 단단한 물질로 매개체를 세웠으니까. 내가 살던 시대까지도 그걸 부술 방법 따위는 없었어. 가끔 반마법주의자들이 부수겠다고 난리를 피우긴 했는데.]“하지만 지금은 부서진 거 같은데.”
[그건 그렇지만······.]그때, 야영지 쪽에서 불꽃 하나가 올라왔다.
그 모습을 보며, 아르센은 작게 혀를 찼다.
[왜?]“내가 너무 오래 떨어져 있어서 문제가 생긴 줄 아는 모양이야. 돌아가야겠어. 자세한 이야기는 다음에 하지. 물어볼 게 많아.”
엘로이즈와 소통할 때처럼 속으로 이야기를 할 수 있다면 좋겠지만, 안타깝게도 아르센 쪽에서 말할 방법이 없었다.
그가 남들과 떨어져 혼잣말할 기회는 별로 없으니, 뭔가 방안을 마련해야 할 터였다.
야영지를 향해 흑사자를 몰아 달리며, 아르센은 마지막으로 질문을 던졌다.
“그러고 보니, 인간은 여기 오기 전에는 어디에 있었지?”
[응?]“이 별이라며? 그 말은 원래는 다른 곳에서 살았다는 거 아닌가?”
“모른다고?”
[응. 망각 협약이라고 해서, 고향에서 이 별로 넘어오면서 역사적 기록과 기술 대부분을 폐기했거든. 구시대의 원한을 신세계에서는 남기지 않겠다는 의미라나 뭐라나. 선조들이 살던 고향이 어디인지도, 어떻게 거기서 여기로 왔는지도 아무도 몰라. 그래서 우리 역사학자들이나 마법공학자들이 엄청 욕하는 협약이지.]“뭘 잘못했는지 잊어버리면 결국 다시 똑같은 잘못을 반복하게 되는 거 아닌가?”
[그러니까 말이야.]동조하는 목소리가 제법 흥겨웠다. 자기 의견에 동의해주면 쉽게 친근감을 느끼는 타입인 듯했다. 아니, 어쩌면 그저 납치범을 안심시키기 위한 연기일지도.
상대의 모습을 볼 수 없어, 오직 목소리로만 감정을 가늠해야 한다는 점이 꽤 거슬렸다.
그때, 바크란이 작은 목소리로 물었다.
[저, 그런데 말이야.]“음?”
[내 몸은 어떻게 됐어? 아마 이 구슬 바로 옆에 있었을텐데.]난처한 질문에, 아르센은 잠시 침묵했다.
잠시 후, 조용히 말했다.
“거기엔 이 구슬밖에 없었어.”
[그래? 그렇구나. 역시.]들려오는 대답에는 허탈해하는 기색이 담겨 있었다.
그리고 아르센이 야영지로 돌아갈 때까지, 바크란은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
아르센 역시 그에게 말을 걸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