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 Story of a Knight In A Ruined Fantasy World RAW novel - Chapter (132)
아르센이 돌아갔을 때, 야영지에는 이미 불이 환히 밝혀져 있었다.
잠들어 있던 다른 기사나 병사, 마법사까지 모두 일어나 있었으며 그들은 수색을 위해 각성석으로 기승수를 깨우고 있었다.
아르센은 이 모든 과정을 중지시킨 뒤, 오는 도중 미리 준비한 대로 변명했다.
남쪽에 정체불명의 무리 하나가 있어, 잠시 접근하여 확인한 뒤 그들과 대화를 하고 왔다고.
“그냥 내버려 둬도 괜찮겠습니까?”
아눈의 질문에 아르센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저들도 마법사가 있어서 몰래 지나가는 거 같더군요. 세력도 우리보다 훨씬 약하고, 걱정할 필요는 없을 것 같습니다.”
“그럼 합류하자고 하면 어떨까요? 수가 많은 쪽이 안전을 도모하기는 더 좋을 텐데.”
“일단 그쪽을 그 정도로 믿지도 않고······그들도 우리를 별로 안 믿는 거 같더군요. 이미 야영지를 옮겼을지도 모릅니다. 위치를 들켰으니까요.”
그 말이 그럴싸하게 들렸는지, 정체불명의 무리에 관한 이야기는 더 나오지 않았다.
혹시 모르니 병사들 몇 명을 추가로 깨어있도록 지시한 뒤, 아르센은 아눈과 교대하여 개인 천막으로 들어왔다.
그리고, 곧바로 바크란이 든 구슬을 꺼냈다.
“이봐.”
혹시 밖에 있는 아눈이나 리노가 들을까 싶어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지만, 대답은 들려오지 않았다.
작게 말해서일까 싶어 조금 더 크게 부르자, 그제야 대답이 들려왔다.
[미안, 지금은 좀 혼자 생각하고 싶어. 조금만, 조금만 더 시간을 줘.]‘이제야 자기 상황이 자각됐나.’
자기 몸이 없어졌다는 말을 듣고서야, 새삼스럽게 현 상황이 실감이 난 모양이었다.
갑자기 수백 수천 년 뒤로 와버리고 원래 몸은 오간 데 없이 구슬에 갇힌 상태라면, 이런 식으로 혼란에 빠지는 것이 정상이긴 했다.
조금 전까지는 이 상황이 실감 나지 않아 의연하게 대처할 수 있었던 것이리라.
을러대봐야 좋지 않을 듯싶어, 아르센은 조용히 구슬을 수건에 싸서 배낭에 넣었다.
‘며칠 있으면 극복하겠지.’
* * *
아르센의 예상은 긍정적인 의미에서 빗나갔다.
다음 날 아침, 해가 뜰 무렵 바크란 케도우는 자신이 담겨 있는 구슬을 꺼내 달라고 요구했다. 바깥을 볼 수 있도록.
아르센은 그 요구에 따라, 그가 들어있는 구슬을 꺼낸 뒤 끈 몇 개로 매달아, 배낭에 달린 장식처럼 보이도록 했다.
그렇게 온종일, 바크란은 주변 경치를 보고 놀라거나 감탄하기를 반복하며 아르센의 귀를 어지럽혔다.
조용히 좀 하라고 소리치고 싶은 것을 몇 번이나 참았는지.
마침내 그날 저녁, 취침 시간이 되어서야 아르센은 다시 바크란과 대화할 기회를 잡을 수 있었다.
“마음 정리는 좀 됐나?”
[응. 오늘 구경하면서 고민 좀 했는데, 일단 나랑 대화할 수 있는 사람은 너뿐인 거 같더라.]“그렇지.”
[거래하자. 내 시대의 지식을 전해주는 대신, 내가 다시 몸을 얻을 수 있게 도와줘.]바크란의 제안에 아르센은 비뚜름하게 고개를 숙였다.
“일단 네 지식은 도움이 되겠다만······오늘 봤듯이 우리 시대의 마법이란 건 너희가 박물관에 걸어둔 전시품만도 못한 수준이다. 널 원래 몸으로 돌려줄 수 있다는 보장은 없어.”
물론 도서관의 지식을 이용한다면 방법이 있을 수도 있지만, 아르센은 그 생각을 속으로 삼켰다.
그런 그를 향해, 바크란이 자신 있게 말했다.
[네가 안된다면 네 후손, 그리고 후손의 후손에게라도 물려주면 되지. 어차피 이 구슬은 루카루트로 만들어졌다고 들었으니 마력만 채워주면 망가질 일도 없을 거고, 언젠가, 마공학 기술이 현대 수준으로 돌아오기만 한다면······.]기왕 이런 몸이 된 거, 길게 생각하자는 것일까.
나름 고등 교육을 받은 사람다운, 이성적인 대처였다.
물론 다소 지나치게 낙관적인 면이 있기는 했지만, 아르센으로서는 그런 태도가 기꺼웠기에 굳이 트집 잡지 않았다.
“좋아. 그러면 잘 부탁한다. 바크란. 네가 충실히 날 돕는다면, 나도 네가 원래 몸으로 돌아갈 수 있게 돕지.”
[좋았어!]쾌활하게 외치는 모습에서 어제의 우울한 기색은 찾아볼 수 있었다.
천성이 그런 것일 수도 있고, 어쩌면 암울한 현실에서 도피하고자 과장되게 유쾌한 척하는 것일 수도 있다.
그때, 바크란이 아차 하고 말했다.
[아, 그러고 보니 네 후손이 영언(靈言)을 못 듣는다면 좀 곤란해지는데.]“영언?”
[지금 내가 말하는 거 말이야.]“마법으로 말하는 거 아니었나?”
아르센의 질문에 바크란은 어이없다는 듯이 답했다.
[난 마법사도 아니거든? 세상에 어떤 미친 마법사가 사학과를······아, 이렇게 말해봐야 모르겠구나. 어쨌든, 영언은 마법이랑 별개야. 일종의 영적인 재능 같은 건데, 이거 때문에 내가 사학과를 갔지. 고대 유적 대부분이 발성(發聲)기능이 망가져서 영언으로만 안내를 받을 수 있거든.]“그 유적이 직접 기능을 설명해주거나 그런 거 말인가?”
[맞아. 내가 실험 대상이 된 이유도 영언 사용자라서였어. 이 상태에서 대화하려면 영언을 써야 한다더라고.]이 이야기를 듣고서야, 아르센은 전대 계승자가 유적의 목소리를 듣지 못한 이유를 깨달을 수 있었다.
설마 이것이 마법과는 다른, 또 다른 능력일 줄이야.
감탄하기를 잠시, 아르센은 다시 질문했다.
“혹시 내가 영언으로 말할 수는 없나? 밖에서 구슬에 대고 혼잣말할 수는 없으니.”
[그냥 다른 사람들에게 밝히면 안 돼?]“안 돼. 네 존재는 상당히 특이한 거라서.”
아르센은 꽤 많은 영지를 여행했지만, 바크란이 살던 시대에 관한 이야기 따위는 들어본 적 없었다.
즉, 바크란의 시대에 관한 정보를 얻을 방법은, 이 작은 구슬뿐일 가능성이 컸다.
[아······그러고 보니 넌 무슨 방랑 기사나 용병 같은 거지? 동료들이 널 죽이고 날 뺏을까 봐?]이상한 오해를 하는 것 같지만 굳이 정정해주지는 않았다.
아르센은 담담한 목소리로 물었다.
“그래서, 가능한지 알고 싶은데.”
[훈련하면 가능해. 영언을 듣는다는 건 말하는 것도 가능하다는 뜻이거든.]“일단 훈련법을 알려주면 해보지.”
[알았어. 어떻게 하냐면······.]훈련법을 몇 가지 알려준 뒤, 이번에는 아르센이 바크란에게 현대 사회에 관한 지식을 전파해 주었다.
간략하게만 설명했던 영지와 성채로 이루어지는 사회 형태, 사람들의 문명 수준과 생활 환경 등.
마수와 약탈자의 정체에 대해서는 바크란도 제대로 알지 못했다.
아마 마수는 생명공학 쪽 실험체가 탈출하여 문제가 된 것이 아닐까 짐작할 뿐이었고, 약탈자 역시 현 인류가 인형과의 혼혈이라는 가설에 입각해 생각해봤을 때 그 과정에서 뭔가 문제가 생긴 것이 아닐까 생각해볼 뿐.
[근데 진짜 이상하네, 인형이랑 인간이 혼혈이 된다니.]“그러고 보니 그렇게 말했었지, 인형에는 인간의 유전자가 안 들어간다고?”
[응. 윤리적으로 문제가 되니까. 인간의 유전자를 변형하는 건 생명공학계의 최대 금기야.]바크란은 그렇게 말한 뒤, 잠시 고민하듯 신음하다가 덧붙였다.
[어쩌면 대외적으로만 그렇게 말한 것일 수도 있겠다. 어차피 인형에 인간 유전자가 들어갔어도, 생식능력만 따로 막아두면 되니까······인형이 전투 인형만 있는 것도 아니고.]“전투 인형만 있는 게 아니라고?”
[응. 초기에는 전투용으로 만들어졌지만, 나중에는 여러 유형의 인형을 만들었거든. 노동, 가사, 접대, 예능······분야도 엄청 다양했어.]“인형의 지능은 사람과 동등했나?”
[전혀! 전문 분야는 인간과 같거나 더 잘하기도 하지만, 제대로 된 대화를 나누거나 자의식을 가질 수준의 지능은 없어. 온전한 지성체를 만드는 것도 윤리 규정 위반이니까. 그냥 자리에서 인사하고, 물건 나르고, 노래하거나 악기 연주하는 정도가 끝이지. 아, 싸우는 것도.]아르센이 생각하기에는 생명을 자기 멋대로 주물럭거리고 조작해 노예로 부리는 행위부터가 충분히 비윤리적이지만, 아무래도 이 고대인의 생각은 조금 다른 모양이었다.
하기야, 상대는 그와 다른 세계, 다른 시대에서 윤리관을 쌓아온 인간이었다.
얼핏 느끼기에 마치 아르센과 같은 현대인처럼 느껴질 때가 있었지만, 실제로 그 괴리는 컸다.
[그건 그렇고, 진짜 부럽더라.]“음?”
[그 검은 머리 아가씨, 약혼녀라면서?]“누가 그러지?”
[오는 길에 네 동료들이 그런 식으로 얘기하는 거 같던데, 아니야?]바크란이 바깥을 보고 싶다고 하여 구슬을 배낭 장식처럼 매달아 놓았을 때 보고 들은 모양이었다.
그 말대로, 엘로이즈의 외모가 특출나게 아름답기는 했다.
아마 마법사만 아니었다면, 벨루안에서 엘로이즈에게 열정을 품는 사람이 수백 명은 넘었으리라 장담할 수 있을 정도로.
“얼추 비슷하지.”
[마법사이면서 미인인 약혼녀라니, 무슨 소설에나 나올 법한 이상형이잖아. 우리 시대에 저런 아가씨가 있었으면 인기 끝내줬을 텐데. 인형 혈통이라서 그런가? 전투 인형도 대부분 미형으로 만들어졌으니······잠깐.]“왜?”
[뭔가 생각날 거 같아. 전투 인형의 혼혈? 아마 그때 들었던 게, 아······이제야 좀 알 거 같은데.]“무엇을?”
잠시 깊게 생각하는 듯 침묵하더니, 바크란이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이건 짐작이긴 한데, 고대에 전투 인형을 설계했을 때 최우선 목표는 상대 쪽 마법사였거든. 마법사가 인형을 통제하니까. 그래서 마법사를 식별하는 기능을 따로 넣었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 있어. 그게 남아서 인형은 인간과 마법사를 구별할 수 있고······그 유전자가 혼혈 과정에서 뭔가 잘못된 거 아닐까? 너는 인간 유전자가 섞이면서 그 유전자가 작동하지 않게 된 거고.]“······일리 있군.”
[확실하지는 않아. 내가 생명 공학 전공도 아니고. 그냥 그런 얘기도 있었다는 정도로만 생각해둬.]마법사에게 혐오감을 느낀다는 것은, 다르게 말하면 마법사를 알아볼 수 있다는 것.
어쩌면, 아르센이 마법사에게 혐오감을 느끼지 않는 것은 특정 유전자가 있어서가 아니라, 반대로 특정 유전자가 손상되어서 그런 것일 수도 있다는 의미였다.
확실한 정보는 아니라지만, 꽤 그럴싸하게 느껴졌다.
* * *
[센!] [······응? 왜?]귀걸이를 통해 들려오는 목소리에, 아르센은 자기도 모르게 깜짝 놀라며 답했다.
그를 보는 엘로이즈의 얼굴에는 걱정이 담겨 있었다.
[괜찮아? 아까부터 땅바닥만 보고 있었어.] [아, 미안. 좀 생각할 게 있어서.] [그 고대인 때문에?]대화가 끝난 뒤, 아르센은 귀걸이를 이용해 엘로이즈에게 고대인, 바크란 케도우의 존재를 알렸다.
그녀 역시 굉장히 놀라는 한편 바크란의 존재에 대해 큰 호기심을 가졌으나, 단체 행동을 하는 중인 만큼 아르센이 두 사람의 대화를 돕기는 힘들었다.
아르센이 아직 영언을 완전히 터득하지 못했던 탓이었다.
그나마 대화를 나눌 수 있는 것은 한밤중, 개인 천막을 이용하는 시간뿐이었다.
아르센이 바크란에게 육성으로 말하고, 바크란이 영언으로 답하고, 아르센은 유물을 이용해 그 내용을 엘로이즈에게 전달하고 답변을 받고, 이런 복잡한 방식으로만 대화할 수 있었다.
그리 많은 대화를 나누지 못했음에도, 엘로이즈는 바크란에게 배운 몇 가지 지식으로 놀라운 결과를 내기도 했다.
[그 고대인 덕분에 투창에 회수 기능도 넣었으니까.] [아, 그거. 덕분에 이제 편해질 거 같더라.]바크란에게 몇 가지 지식을 전달받은 뒤, 엘로이즈는 투창기와 전에 만든 폭발 투창을 가져가 몇 번 뚝딱이더니 투창이 다시 투창기로 돌아오는 기능을 추가했다.
그녀의 말에 따르면, 간단한 발상의 전환만으로 유물을 만드는 것이 훨씬 편해졌다고 했다.
조금만 더 연구하면, 고대 유물처럼 영구적으로 사용할 수 있는 마법 무구를 만들 수 있을 것 같다고 하던가.
[그런데 좀 아쉽긴 하더라, 그 사람, 지식이 뭔가 얕고 어설퍼. 고대인은 다들 마법의 달인일 줄 알았는데.] [어쩔 수 없어. 바크란은 마법사도 아니고, 애초에 역사학 전공자인걸.]전공자가 아닌 만큼, 바크란이 알고 있는 마법에 대한 개념은 당대 사람들이 알고 있는 피상적인 수준에 그쳤다.
마치 지구에서 현대인들이 증기기관에 대해 간단한 개념만 알고 있듯이.
결국 바크란은 선진적인 개념만을 전해줄 뿐, 이것을 현실에 구현할 방법은 엘로이즈가 알아내야 했다.
[일단 내가 그 영언이라는 걸 배우도록 노력할게. 그러면 평소에도 대화할 수 있을 테니.] [힘내. 나도 연구해볼 테니까!]양 주먹을 가볍게 흔들며 응원하는 그녀의 모습이 퍽 귀여워, 아르센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 선두에 있던 바즈칼이 손을 높이 들었다.
“뭐지?”
“강입니다, 형님! 엘다린 강이요!”
조금 더 진을 몰아 바즈칼이 있던 곳까지 가니, 바다로 착각할 만큼 넓게 펼쳐진 강이 보였다.
강 너머가 보이지 않는, 수평선마저 펼쳐진 거대한 강, 이것이 대륙을 남과 북으로 가른다는 엘다린 강이었다. 여러 영지를 지나는 만큼 그 이름도 여러 개라고 하던가.
그들은 산맥을 넘은 이래, 저 남쪽의 엘다린 강을 따라 계속해서 서쪽으로 전진했다.
즉, 지금 강을 마주친 것은 그들이 남쪽으로 움직여서가 아니었다.
강이 북쪽으로 꺾이며 그들을 가로막은 것이지.
그것은, 그들이 목적지로 삼고 있던 영지에 도착했다는 신호이기도 했다.
‘드디어 도착했군.’
강 위의 영지, 발타레스.
마지막 단서가 있을 유적이 있는 곳이며, 동시에 별부르미의 본진과 합류하기로 한 곳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