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 Story of a Knight In A Ruined Fantasy World RAW novel - Chapter (139)
엘다린 강 너머는 사실상 그들이 있던 강 저편과는 분리된 세계나 다름없음에도, 그 생태는 크게 다르지 않았다.
양뿔늑대와 같은, 세계 어디서나 볼 수 있는 흔한 마수들은 여기에도 있었다.
벼락 사슴 하나를 처치하여 과거 리노와 만났을 때의 추억을 되새길 수도 있었으며, 이전에 보았던 온몸이 썩은 고름으로 뒤덮인 여우 마수도 있었다.
다른 것은 환경이었다.
검푸른 은하수가 펼쳐진 땅, 그 위에 펼쳐진 사시사철 푸른 침엽수림.
잎 넓은 나무들이 대부분이던 강 너머와 달리, 이쪽의 나무들은 침엽수림이 대부분이었다.
그런 탓인지, 날씨 역시 훨씬 선선했다.
거기다 유난히 비가 많이 내렸다. 거의 하루의 절반은 비가 내리는 것 같았는데, 강우량 역시 어마어마해 보통 사람은 맨몸으로 비를 맞으면 아프겠다 싶을 정도였다.
“후, 더럽게 쏟아지네 진짜.”
“어쩌겠습니까. 이쪽이 원래 그렇다는데.”
그저 강 하나를 건넜을 뿐이건만, 기후가 달라진다는 것은 참으로 이해하기 힘든 일이었다.
이 세계에서야 원래 그런 일이려니 하게 되었지만.
그나마 그들 일행은 마법사가 많아 대처하기가 비교적 쉬운 편이었다.
마법사들은 자기들에게 방수 주문을 사용했고, 기사들은 강인한 육체로 견뎌내고, 일반 병사들이 꽤 고역이었지만 그들 역시 오랜 수행으로 단련된 만큼 그럭저럭 견뎌낼 수 있었다.
강을 건너 이틀을 나아간 뒤, 그들은 바위 그늘에서 비를 피했다.
그러는 동안. 발타레스에서 받아온 지도를 펼쳐 마룬이 가진 지도와 맞춰 보며 일정을 짰다.
“성채 쪽을 들러서 갈까요?”
“그럴 필요는 없을 것 같은데요, 오늘 좀 무리해서 가면 바로 유적에 도착할 것 같은데······.”
그들의 행군 속도는 그리 빠르지 않았다.
되려 제법 느긋했는데, 이는 강 너머라는 새로운 환경에 도착한 만큼 어떤 위험이 있을지 모르니 대비해야 한다는 아르센의 주장 때문이었다.
이미 발타레스에서 이 지역의 환경 정보를 얻었음에도 너무 신중한 것이 아닌가 여긴 이도 몇 명 있었으나, 따로 이의를 제기하지는 않았다.
그렇게 늦춰진 행군 시간 동안, 아르센은 잠시 다른 일에 몰두하고 있었다. 꽤 중요한 일에.
근 며칠을 남들 몰래 밤낮으로 몰두하고 있었는데, 마침내 지금 그 성과가 드러나기 시작하는 순간이었다.
이 역시 아무도 알 수는 없었지만.
[이봐.] [음······.] [일어나, 바크란. 들리나?] [으······어? 뭐야, 여기 어디야?]‘성공했군.’
기존에 배운 방법으로 열심히 노력한 끝에, 아르센은 마침내 영언(靈言)능력을 얻는 데 성공했다.
이를 확인한 뒤부터, 그는 바크란이 담긴 구슬에 끊임없이 말을 걸고 또 걸었다.
그리고 지금, 마침내 바크란을 다시 깨우는 데 성공했다.
[여기는 엘다린 강 건너편이다. 네가 안 일어난 사이에 이미 건너왔어.] [진짜?! 잠깐만, 부유섬 관광은?]태평한 소리에 아르센은 내심 한숨을 쉬었다.
[이 와중에 그런 헛소리를······그 안쪽은 그다지 볼만한 것도 없었고, 볼만한 상황도 아니었어. 기생충이 도느라 사람들이 죽어 나가는 마당에 관광할 게 뭐가 있을까.] [아······.]그때의 악몽 같은 모습이 떠올랐는지, 바크란의 말이 잠시 끊겼다.
잠시 후, 바크란이 우울한 목소리로 질문했다.
[······끔찍하더라. 너희는 맨날 저런 꼴을 보고 사는 거야? 이 시대에서는?] [우리라고 매일 그런 건 아니야. 마룬 경만 해도······아, 기절해서 못 봤나? 그거 보고 토하느라 안에 제대로 들어가지 못한 사람도 있었지. 다 똑같아. 참느냐 마느냐의 문제지.]위로가 될지는 알 수 없었다. 바크란의 얼굴을 직접 볼 수 없었기에.
다만 다시 들려오는 바크란의 목소리에 풀죽은 기색이 역력한 것이, 썩 위로가 되지는 않은 모양이었다.
[만약에 나중에 새로 몸을 만들어서 들어갈 수 있더라도 이 시대에서 잘 살 수 있을지 자신이 없네.] [그럴 기술력이 생길 정도면 환경도 지금보다는 훨씬 나아져 있겠지.] [그런가······역시 그렇겠지? 그럴 거야.]힘없이 웃는 소리가 나더니, 바크란이 재밌다는 듯 말했다.
[그래, 뭐. 사실 따지고 보면 우리 시대도 꼭 밝기만 한 것도 아니었고! 그때도 막 기업에서 불법 인체 실험 같은 거 하다가 적발되고 많이들 그랬는데, 사람 사는 게 다 똑같지 뭐. [불법 인체 실험?] [응. 보통 오래 살아보겠다면서 별짓을 다 했는데, 일단 사람 유전자를 가공하는 게 불법이라서 대부분 인체 실험은 불법이거든. 따지고 보면 내가 이 꼴이 된 것도 불법 실험 때문이었고.] [너희가 말하는 그 영생 시술인가 뭔가가 있지 않나?]아르센은 아직도 기억하고 있었다. 유적 안, 수백 수천 년의 세월이 지나 인간이 미라가 될 정도의 시간이 지났음에도 활발하게 움직이는 전투 인형들의 모습을.
피 대신 푸른 연기 같은 마력이 흐르는 것만 빼면, 그것들은 마치 생물과도 같지 않았던가.
[불사 시술은 지능을 크게 떨어트려. 극단적으로 말하면 거의 본능에만 따르는 곤충 수준이 되는데, 그런 걸 영생이라고 하고 영원히 살고 싶은 사람은 없을걸. 항상 고농도 마력이 필요하니까 특수한 시설이 아니면 나갈 수도 없고.] [아.] [뭐, 부자 중에는 소중한 사람이 죽게 되면 그런 짓까지 해가면서 억지로 살려뒀다는 얘기도 있긴 했는데, 진짜인지도 모르겠고 난 별로······.]일전 바크란에게 들은 재밌는 정보 중 하나는, 수많은 고대 유적을 유지하는 동력원의 정체였다.
이 세계의 땅 밑에는 마력이 흐르는 지맥(地脈)이 존재하여, 이에 직접 접속하기만 하면 무한에 가까운 마력을 끌어내어 사용할 수 있다던가.
아마 불사 시술이 적용된 실험체들 역시 유적을 통해 그 마력을 받아 생명을 유지한 모양이었다.
듣기로, 고대 유적의 시대는 지맥을 제한적으로 사용하던 시대이며, 바크란의 시대는 지맥의 마력을 저장하는 데 성공하여 마음대로 다룰 수 있게 된 시대라는 듯했다.
마치 지구에서 전기를 뽑아낸 뒤 배터리라는 이름으로 여기저기에 저장하여 마음대로 다루듯이.
아르센은 잠시 위곤 유적에 있던 강철 거인들이 마음대로 대지를 활보하는 모습을 상상했다. 그런 게 존재한다면 아마 세상에 다시 없을 막강한 군대가 되리라.
[어쨌든, 별짓을 다 했지. 영생 시술이랍시고 시간을 돌리는 마법으로 몸을 돌리기도 하고, 내가 당한 것처럼 영혼을 빼다 옮기는 짓도 하고, 심지어 무슨 전생(轉生) 같은 것도 연구했다가 난리가 났었는데.]그 순간, 아르센은 터져 나오려던 영언을 최대한 억눌렀다.
잠시 진정하고, 최대한 잔잔한 어조를 유지하려 노력하며 물었다. 아니, 조금은 흥미 있는 어조를 실어서.
그렇게 말한 뒤, 바크란이 재밌다는 듯이 덧붙였다.
[그래서 한때 말이 많았어. 사실 동물이나 식물에도 모두 영혼이 있는 거 아니냐고. 심지어 이 행성과 다른 환경을 본 이들도 있었다는데, 그게 사실 고향에 남은 선조의 기억을 엿본 거 아니냐는 이야기도 있었지.] [꽤 재미있는 이야기이긴 한데······그런 실험이면 보통 중요한 비밀 아닌가? 생각보다 깊게 잘 아는데?]그런 아르센의 물음에, 바크란이 태연히 답했다.
[그때 실험 담당자 중 한 명이 실험체인 아이들을 데리고 탈주하면서 온갖 신문사나 방송사에 다 제보했거든. 신문사나 방송사가 뭔지는 지난번에 말해 줬었지? 워낙 대형 사건이라서 행성 전체에 자세한 실험 내용까지 다 퍼졌어. 아마 나랑 동시대 사람이면 그런 일이 있었다는 걸 모를 수가 없을걸. 난 개인적으로 재밌어서 더 조사하긴 했지만.] [아이들은?] [그대로 행적이 묘연해졌다더라. 사실 순혈 인간의 유전자를 개조하는 건 불법이라, 전부 안락사 처리당했을 테니 당연한 일이겠지만······사회에 그냥 풀어놓았다가 그 전생 능력이 유전되어 버리면 곤란하니까.]그의 머릿속에서 재빨리 가설이 하나 생겨났다.
아마도, 꽤 신빙성이 높은 가설이.
이것이 범람하려는 것을 잠시 묻고, 아르센은 주제를 바꿨다. 일단, 당장 급한 문제가 코앞에 있었기에.
[그보다, 널 깨운 이유가 있다. 도움을 좀 줬으면 하는데.] [뭔데?] [곧 전투 인형······그러니까 말 그대로, 너희들이 말하는 제어기 같은 것으로 지배당하는 기사들과 싸워야 해. 조언해줄 만한 게 있나? 역사학도니까, 옛날 전투 인형의 결함 같은 건 잘 알 것 같은데.]* * *
“도착했습니다!”
마침내 그날 밤, 유적이 그들을 반겼다. 정확히는 유적 앞에 선 마룬이 두 팔을 번쩍 들며 그들을 반겼다.
송곳산.
그 이름대로, 마치 송곳처럼 가늘고 뾰족한, 기괴한 형상의 산이 있었다. 아니, 산이 여럿 있으니 산맥이라 해야 옳을까.
하늘을 겨눈 송곳은 족히 열 개가 넘어, 만약 키가 수 킬로미터에 달하는 거인이 그곳에 넘어진다면 얼마나 아플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송곳과 송곳 사이에 만들어진 작은 공간, 작은 철문이 유적의 입구였다.
다섯 번째 송곳과 여섯 번째 송곳 사이에 있다는 정보를 미리 알고 그곳을 집중적으로 뒤지지 않았다면 과연 찾는 데 얼마나 오래 걸렸을지 짐작조차 할 수 없었다.
유적이 있는 입구에 다가갔을 때, 촐싹대며 앞장서던 마룬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가까이 다가가서 보니 그 이유를 짐작할 수 있었다. 오랜 세월에도 전혀 녹슬지 않은, 고대의 기술로 만들어진 금속 문이 반쯤 뭉그러진 채 부서져 있었다.
덕분에, 문에는 어지간히 큰 마수도 들어갈 수 있을 정도로 구멍이 나 있었다.
“도대체 어떤 놈이 이런 짓을 했을까요?”
“짐작조차 안 가는데······그보다 유적 문이 부서지는 거였나?”
“재질에 따라 부서지는 것도 있긴 합니다. 어지간해서는 안 부서지긴 하지만.”
“진짜? 왜 난 못 들었지?”
뒤에서 유적에 대해 잘 아는 마법사 하나가 끼어들어 그렇게 해설했다.
하필 옆에서 마룬이 그런 게 있었냐고 되물어서 신빙성이 좀 깎였지만, 물어본 사람이 마룬이라서 다들 그러려니 하고 넘겼다. 어떤 의미로는 신뢰받고 있다고 해야 할까.
고개를 끄덕이는 한편, 아르센은 유적의 부서진 단면을 조심스럽게 쓸어보았다.
세월을 맞은 흔적이 묘하게 묻어났다.
“어제오늘 부서진 건 아니군. 안에 뭐가 살고 있을지 짐작도 안 가는데.”
[꼭 들어가야 돼? 이런 데 들어가면 꼭 죽던데.]“잠시 물러나서 정비할까요?”
괜히 재수 없는 소리를 지껄이는 바크란의 말과 겁에 질린 마룬의 목소리가 묘하게 겹쳐 들렸다.
고개를 저어 두 사람의 말을 모두 부정하며, 아르센은 단호한 어조로 말했다.
“들어가는 게 낫겠습니다. 상대가 무엇인지도 모르고 안에 있는 게 확실한지도 모르는데 정비한다고 달라질 건 없을 거 같으니까요. 어차피 천천히 오느라 그리 체력을 많이 소모하지는 않았으니까요.”
“음······맞는 말씀이긴 한데.”
마룬이 영 찜찜하다는 듯한 태도로 동의했다.
일행 전체에 당장 싸울 수 있도록 준비할 것을 지시한 뒤, 아르센은 가장 앞장서서 유적으로 입장했다.
모두가 그 뒤를 따랐다.
가뜩이나 늦은 밤, 유적 내부는 어두웠다. 흔히 존재하는 마력광마저 남아있지 않은 것일까. 아니면, 정체불명의 침입자가 그마저도 부숴 버린 것일까.
아르센의 두 눈이 밝게 빛나며 기사 특유의 야간 시야가 활성화되었다.
“어둡군······.”
“그러게 말입니다.”
마룬이 맞장구치며 언제든 쏠 수 있게 활에 시위를 걸기 시작했다.
어둠 속, 그들이 지나갈 복도는 꽤 넓었다.
아르센은 바로 이런 어둠 속에서 안전을 도모할 수 있는 진형을 취할 것을 지시했다.
“바즈칼이 왼쪽 전방, 아눈 경은 오른쪽 전방, 리노와 마룬 경은 각각 후방 좌, 우측 경계를.”
“알겠습니다!”
기사들이 사방으로 흩어져 충실히 눈 역할을 하는 것을 확인한 뒤, 아르센은 선두에 서서 전진했다.
유적의 어둠이 그들을 삼켰다.